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세드릭 A.요/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순돌이 아빠^.^ 2015. 3. 10. 16:43

로마의 국가와 정치, 권력투쟁과 전쟁 등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준 책 ^^





세드릭
A./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현대지성사, 2010

 


초기의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의 실권은 귀족 족장들의 위원회가 자기들 중에서 선출하고 지지하는 왕의 수중에 있었다
. 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군사령관이자 국가 종교의 대사제이자 자기 백성의 재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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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했어도 왕은 세습 군주도 절대 통치자도 아니었다. 기원전 6~5세기의 어느 시점에 귀족들은 왕에게서 정치·군사·사업의 권력을 박탈하고,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이 지배하고 로마에서처럼 일년 임기의 선출직 행정관들이 수장이 되는 공화정을 수립했다. - 39

 

초기 에트루리아 사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고도로 발달한 가정 생활과 다소 평등했던 여성의 지위이다. 에트루리아인들의 가정 생활은 고대 세계 여러 문화권의 가정 생활과 달랐던 것으로 보이며, 20세기 전의 유럽과도 거의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우수한 점이 있었다.

 

남녀 관계가 그리스인들보다 차별이 적고 동료의 성격이 강했고, 로마인들보다 덜 가부장적이고 덜 권위적이었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금기 사항이 많거나 금욕적이지 않았다. 그들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간의 법률적·사회적 평등과, 남편과 아내간의 동지로서의 상호 존중에 기초를 두었다.

에트루리아 여성은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야 하거나 남편의 사교 생활과 사횢거 지위에 끼어들 수 없는 가재도구나 가정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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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도 양친의 이름을 모두 반영했다. 아내의 무덤이 남편의 무덤보다 성대한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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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 여성은 종종 남편과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남편과 함께 종교 축제에 참석했다. 그리스 여성과는 달리 공식 연회 때 남편 곁에 비스듬히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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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에트루리아 여성들은 스포츠에도 관심이 컸다. 직접 참여하기도 좋아했고, 관람하기도 좋아했다. 때로 남자 선수들이 나체로 경주를 벌이는 대회를 여성들이 관람하던 에트루리아의 관행은 대개 여성들에게 그런 관람을 허용치 않던 그리스인들의 눈에 음란한 행위로 비쳤다. - 40, 41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 있는 상징은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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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종교는 왕권의 기초...왕은 국가 종교의 수장이므로 그의 인격을 훼손하거나 침해해서는 안 되었다. 왕의 의무는 국가의 신들과의 관계에서 인민을 대표하고, 몸소 국가의 제사를 집례하고, 점괘를 받아 신들의 뜻을 판별하고, 사제들을 임명하고 그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달력을 작성하여 신들이 각각 가납할 만한 축제일들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왕 선출, 민회 소집, 군대의 출정 등 국가의 중대사를 앞두고는 신들의 뜻을 문의해야 했다. - 68~70

 

왕정 시대에 정치에서 쿠리아 회의 역할은 소극적인 것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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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민회를 소집할 때는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비록 그 당시에도 궁극적인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고는 했으나...이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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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은 휴전과 전쟁, 그리고 그 밖의 국가 중대사들에 관한 왕의 포고문을 들었다. - 71, 72

 

에트루리아 왕들의 치하에서 과거의 단순한 왕제가 강력한 제도가 되었다. 공교한 국가 의식으로 위엄이 갖춰졌고, 이후에 영구히 로마의 공적 삶의 일부가 된, 두려움을 자아내는 와권의 상징들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파스케스(fasces. 막대기 다발에 양날 선 도끼)를 묶은 것, 독수리 머리를 새긴 상아 홀(), 금관, 수를 놓은 자색 토가(toga, 긴 관복), 고관 의자, 그리고 네 필의 말이 끄는 위풍당당한 전차가 그런 것들 74, 75

 

기원전 7세기 말 전에는 무장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한 조직적인 싸움이 없었다. <일리아서>의 용사들처럼, 씨족 족장들은 전차를 타고 전장으로 나가 적군과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무기는 창과 칼 혹은 전투용 도끼였고, 큰 타원형 방패로 목에서 무릎까지를 보호했다. 족장 뒤에는 도보로 가신들의 무리가 따랐지만, 이들은 싸움에 끼어들기보다 뒤에서 응원으로 힘을 북돋워 주었다. 전쟁은 국가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그러니까 에트루리아 왕들의 시대에 경제, 사회, 군사, 정체 분야에 변화의 조짐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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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재산과 개인 가족이 대두한 점, 씨족이 정치적·군사적 단위로서 지녀온 가치가 퇴색한 점, 그 모든 원시 조직들이 단일 도시 국가로 통합된 점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발전들이 군사 전략과 군대 구성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새로운 군대는 시민 군대였고, 그 힘은 신생 국가의 통일을 당당하게 표현하며 움직인 중무장 보병에게 있었다. - 75

 

로마 최초의 정식 군대는 세 개의 종족을 근간으로 삼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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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손실을 충당하고 더 큰 규모의 부대를 증원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입대 자격이 부여된 계층인 시민들이 더욱 많이 필요했다...그들에게 시민권의 자격을 주기 위해서는 시민권의 자격을 종족과 씨족이라는 혈연 집단에서 벗겨내 그것에 시민적 기반을 부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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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더 이상 고대 씨족에 근거하지 않고 공동체와 군대 모두의 구성원인 시민들에 근거한 도시 국가였다. - 76, 77

 

전승에 따르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군사 목적상 피해방인들을 지역에 의거한 새로운 트리부스들로 할당...새 트리부스들은 세금과 병력 차출에 목적을 둔 시민 등록과 그들의 재산 평가를 위한 센서스 구역들 역할을 했다. - 77

 

가정은 초기 국가의 근간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가족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직되고 가족들의 수장들인 파트레스(patres, 가부장들)dp 의해 통제되던 공동체였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가족들에 관련된 것이 국가, 즉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문자적으로 공동의 부 혹은 공동의 것)였다. 그것이 가족들의 파트레스와 밀접히 연관된 것이 국가에 해당하는 라틴어 파트리아로 확증된다(이 단어는 아버지에게 속한이란 뜻의 형용사 파트리우스<patrius>에서 파생했다). 로마의 종교와 법은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다스린 파트레스들과 가족들의 종교적·윤리적 관행의 연장(延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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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국가에 유익을 끼칠 의욕을 품은 것은 국가 자체를 위한 것이기보다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얻을 수 있는 입신 양명을 위한 것이었다. - 79

 

가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동시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양쪽을 다 지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국가의 이익을 희생하려는 강한 유혹이 언제나 대두되었다. 그러므로 국가는 국가를 지배하던 유력한 가문들 사이에서 이익을 놓고 전투를 벌이는 전장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었다. - 80

 

가족에 해당하는 영어(family)는 그것의 모체가 된 그리스어 파밀리아(familia)를 번역할 때 쓰이지만, 이 두 단어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 초기 로마의 가족은 일차적으로는 혈통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비록 후대의 저작들은 파밀리아라는 단어를 혈족 관계의 의미로 쓰긴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혈연이나 결혼의 유대에 의해서 연결된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혈족, 입양된 식구, 노예, 피해방인 등 동거인들의 집단이었다. 더욱이 가족에는 죽은 식구들의 혼령들도 포함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임재를 느끼고 살았고, 그들이 가족의 안녕과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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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의 가족은 사람들뿐 아니라 사물들로도 구성되었다. 파밀리아라는 단어의 기원이 그 점을 분명히 말해주는데, 이 단어는 처음에는 주거지 혹은 가독을 뜻하다가, 나중에는 가옥 공동체를 뜻하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법적인 의미에서 가산을 뜻하게 되었다. 사람들과 재산이 파테르 파밀리아스라 불린 가부장의 뜻에 따라 처리되었고, 그의 절대권 하에 종속되었다. - 80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꼭 혈육상의 아버지이만은 않았다. 파테르 파밀리아스라는 말은 단순히 한 가구의 장을 뜻할 뿐이다. 친자가 하나도 없어도, 심지어 독신이어도 괜찮았다. 유일한 자격 조건은 국가의 권위 외에 다른 어떤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다른 가족들과 국가에 대해서 법적으로 독립되고 자충족적이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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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내에서 그가 지닌 권한은 국가나 다른 어떤 사회 기관에 의해서 제한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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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안에서 그는 법의 원천이었으며, 사회도 그의 명령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했다. 그의 권위는 조상들의 관습에 근거했는데, 그 관습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그에게만 있었다. 그는 권속의 재판관이었고, 그의 지배권은 어떠한 외부의 권위도 제재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는 심지어 자기 아들들이나 동거인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추방하고 노예로 만들 수 있었고, 가족 재산을 나누거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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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파테르 파밀리아스를 사제(司祭)로 하여, 노예를 포함한 전 가족이 조상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렸다. 로마인의 조상 숭배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살아 있는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수호신의 숭배였는데, 가부장 곧 가족의 통일성과 영속성의 화신이었다. - 83

 

국가는 로마 가족의 가부장적·권위주의적 성격에서 혜택을 입었다. 가족의 생활은 권위에 대한 복종과 자신의 의무에 대한 수행 의지를 심어 주었다. 공공 생활의 차원에서, 왕과 훗날 공화정 정무관들은 지위에서는 파테르 파밀리아스와 비슷한 권위를 지녔다. 그들은 가족 안에서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수행했던 것과 똑같은 의무들을 서로 다른 가족들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행사 했다. 그들은 하급자들로부터 똑같은 복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전시에는 지휘관이었던 이들은 마치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자기 권위하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 그랬듯이,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들을 처형할 수 있었다. - 84

 

종교는 로마의 개인 생활과 정치 생활 모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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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근면한 노동과 기율과 의무와 용기와 충성의 덕을 심어 주었다. 가정의 종교가 국가의 종교가 되었을 때 그것은 단일 사회로써 사람들을 공고히 뭉치게 했고, 국가에 수 세기 동안 지속될 내적 힘과 응집력을 주었다. 계층 갈등, 정부의 변화, 대외 전쟁 등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종교는 부자와 빈민, 귀족과 평민, 농민과 도시 거주자를 하나로 묶는 띠를 제공 - 87

 

집과 들판의 원시 종교가 국가 종교로 조직되면서 위와 똑같이 중요한 변화들이 발생했다.

 

로마는 국가 자체가 본질상 종교적 기관이었다. 국가 종교는 가족, 씨족, 부족 같은 모든 유서깊고 규모가 작은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들을 포괄하고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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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와 베스타 숭배는 국가라는 하나의 큰 가족에 대한 소속감을 촉진했기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 진정한 종교 감정을 일으켰다. 로마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가장 강렬히 일으킨 제식들은 유피테르와 마르스의 제식이었다. - 98

 

사람들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도덕적 전제의 틀 안에서 행동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어떻게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고 싶으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윤리적 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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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투스라는 단어는 비르(vir(사람, 남성)>에서 유래했으며, 한 남자로서 진실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유익한 존재가 되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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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투스는 강하고 튼튼한 신체, 가족을 부양할 능력, 국가에 대한 관심과 헌신, 그리고 전장에서의 용맹을 뜻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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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이 덕이 되는 경우는 국가의 유익과 안전을 위해 발휘될 때뿐이었다. 로마의 이상적인 영웅은 용기와 지혜로 누란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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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는 과거의 영웅들이 그랬듯이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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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한 경건은 법에 대한 순종과 신실한 봉사, 정의와 법에 부합하는 애국심을 함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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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0년 쯤에는 가부장적 가족이 중심이 되고 한 사람의 귀족 엘리트가 지배하는, 여러 세기를 지속한 로마의 독특한 사회 구조가 고착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종교적 발전과 아울러 로마인들이 개인과 민족으로서 자신들에 대해 가졌던 견해를 규정한 가치 체계가 발전했다.

 

이런 발전들의 궁극적인 결과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로마의 가족 생활, 종교, 도덕은 보수적 형태의 인간을 장려했다.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과 피호 제도 안에 이어져온 의존적 태도가 국가를 통치하는 귀족들에게 대단히 유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낳았다. - 99~101

 

공화정(res publica)이라는 용어는 반드시 민주적이지만은 않되 본질상 왕이나 황제 치하에 존재하는 정체(政體)와는 다른 정치 형태를 뜻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에게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 공동의 재산, 공동의 것)라는 단어는 원래 사유 재산과 사적 문제와 반대되는 공동의 재산과 공적 문제를 가리킨다.

 

로마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지닌 황제에 의해 통치를 받고, 따라서 과거에는 공동의 것이고, 공적인 것이었던 것을 황제가 사실상 사적으로 지배하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레스 푸블리카는 본질상 기원전 5~4세기에 발달한 정치 형태, 즉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귀족 계층이 독단적 권력 전횡을 제한하는 법과 제도를 통해서 국사를 동등하게 참여하는 형태와 관련되었다. - 103

 

공화정은 강력한 과두정(oligarchy)에 의해 지배되었다. - 134

 

로마인들과 이탈리아의 다른 종족들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인 농민들이자 목축업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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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회에서는 재산과 지위가 토지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부유한 지도자들도 항상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려고 힘썼다. 어떤 공동체에서든 더 많이 소유하려면 남에게서 빼앗는 방법밖에 없었다.

 

약탈과 위세가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가난한 농민 병사는 남의 재산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게 썩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귀족 지도자들은 많은 전쟁 노획물을 기대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도자들은 군사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올 때 얻게 될 명성을 생각했다. 고대의 영웅적·귀족적 규례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업적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 139

 

베이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재관 카밀루스는 유피테르 신상처럼 얼굴과 손을 붉게 칠하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로마 거리를 누비며 개선 행진을 벌였다. - 143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치르는 것이 공화정 초기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 모든 계층의 시민들은 전쟁이 가져다 주는 이익들에 익숙해졌고, 귀족 지도자들은 군사적 영광을 동경하고, 원정에서 승리했을 때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이득을 얻었다. - 167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 무역의 독점권을 보호하고, 선박들의 입출항을 규제하고, 식민시들을 보호하고,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서 해군이 필요했다. - 173

 

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의 논리에 설득을 당했던 사실이 제1차 포에니 전쟁 발발에 네 번째 요인이 된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끊임없는 전쟁으로 보낸 상황에서 많은 로마 시민들은 패배한 적국에게서 취한 전리품으로 수입을 보충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부유하고 번성하던 시칠리아는 로마 군인들에게 군침이 도는 대상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운집한 인민 앞에서 연설을 할 때 그 점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했다고 한다. - 177, 178

 

기원전 262년에 로마 군대는...아그리겐툼을 포위 공격했다...카르타고의 증원군이 패배한 뒤 그 도시는 함락되었고, 그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 179

 

상당수의 로마인들과 이탈리아의 동맹국 사람들이 해외 무역과 제1,2차 포에니 전쟁 동안의 영토 확장에 힘입어 부자가 되었다. 그런 개인들은 지중해 동부에서 자신들의 경제 활동 기회를 확장해 주거나 경쟁을 줄여줄 수 있는 전쟁에 대해서 옹호하거나 찬성표를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밖에도 그리스 동부는 대단히 숙련되고 지적인 노예들의 보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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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에서 이기면 부유한 적국들에 대해서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 229, 230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좀더 건설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 개혁 프로그램은 동료 귀족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지지자들의 견고한 유대를 형성하는 한편, 로마의 정복 사업으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을 이지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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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간층, 로마시의 프롤레타리이 유권자들, 농민들의 체계적인 연대를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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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한 원로원의 비상결의로 무장한 오피미우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노예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직하고 크레타의 궁사들의 지원을 받아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피신해 있던 그라쿠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이곳에서 그라쿠스의 추종자들은 패배하여 그중 250명이 죽었다....가이우스도 도피하려고 시도했으나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깨닫고는 자신의 노예를 시켜 자신을 죽이게 했다. 사람들은 그의 잘린 머리에 녹인 납을 부어 굳힌 뒤 그것을 오피미우스에게 가져갔고. 오피미우스는 그 무게를 금값으로 매겨 주었다고 한다. 그뒤 의사擬似 재판이 벌어져 그라쿠스 추종자 3천 명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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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을 품은 다수의 인민에게 유익을 주는 중요한 개혁을 초래한 법은 그것을 제정한 사람에게 유권자들 사이에 지지자들의 수를 크게 늘려주었다. 동시에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정치적 이기심이 공직과 명성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기존의 혹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심지어 폭력을 불사하고, 대립이 치열해지면 결국 내전까지도 불사하면서까지 경쟁자의 개혁을 저지하도록 만들었다. - 328, 334, 336

 

공화정을 지배한 세력은 대지주들인 귀족 계층이었고, 이들의 주요 활동은 서로간의 경쟁을 통해 고위 관직과 군 지휘관 직을 얻어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해외 제국을 얻게 되고 그에 따라 귀족들이 경쟁을 벌일 상의 가치도 커짐에 따라 상호간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 364

 

술라는 기원전 82년 로마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켄투리아 회에 발레리우스 법으로 알려진 법이 정식으로 통과되도록 요구하여 뜻을 관철했다. 그것은 기존의 법률을 재작성하고 국가를 재구성하도록 자신을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이었다. 이미 군대의 힘으로 기정 사실이 된 것을 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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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살인, 재산 몰수, 만행들을 합법화했다...그는 생살여탈권을 지녔고, 그의 명령권은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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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을 술라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바치는 그의 피호인들과 내전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들로 채워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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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에서 재판을 행하던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재판을 상설 법정 체제에 위탁했으며, 배심원들은 원로원 의원들로 임명했다. - 376, 377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타라보의 후계자인 폼페이우스는 피케눔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였다...그는 원래 매력적인 인물로서 자기 자녀들과 저기의 여러 아내들에게 충성과 사랑을 받은 듯하지만, 아울러 야심도 무척 커서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여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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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술라가 정치적으로 더 유리한 배우자와 결혼할 것을 권하자, 그는 자신의 조강지처를 버렸다. 또한 과거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을 도와준 친구들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술라에게 공격을 당할 때 그들을 위해 변호해 주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술라의 정적들을 맹렬히 색출함으로써 아둘레센툴루스 카르니펙스(젊은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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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이 있다면 그것은 공화정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그런 영웅이 자연스럽게 누리는 정치적 신망을 누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 386, 387

 

카이사르...그는 자기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고, 기원전 58년에 콘술이 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곧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 420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 다 상당한 매력이 있었고, 순전히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교분을 나눌 때가 많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두 사람이 서로가 열망해온 로마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함께 차지할 수 없는 일이었다. - 450

 

그의 승승장구를 지켜보는 많은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들이 영원히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좌절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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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들이 그의 권력 신장과 식지 않는 인기에 분개하여 원로원 회의 때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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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자들 중 일부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같은 사면된 폼페이우스 파였지만, 대다수는 카이사르의 옛 친구들과 장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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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암살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다만 누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지를 판가름할 또 다른 파괴적인 내전의 무대를 열어놓았을 뿐이다. - 460, 463

 

사랑과 정책상의 이유로 옥타비아노스는 젊고 아름답고 버유하고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고, 자기 가문과 자녀들의 장래의 위상을 위해 고심하던 리비아 드루실라와 즉시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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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자신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다른 계열 출신으로서 페루시아 전쟁 때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싸웠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결혼했었다. 이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자기들의 가문들의 장래를 옥타비아누스에게 걸기로 결정했다. 리비아는 이미 그 남편에게서 첫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장래의 황제 티베리우스)를 낳았고, 상호 합의하에 남편과 이혼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약혼할 때 그의 둘째 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임신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와의 이 유리한 결합을 하루 속히 성사시키고 싶었던 나머지 스크리보니아가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훗날 그가 여러 번의 정략 결혼에 이용하게 되는)를 낳던 당일에 그녀와 이혼했다. - 480

 

여성 노예들은 주로 유모, 직공, 미용사, 하녀, 요리사, 가정부 같은 가내의 종들로 사용되었다. 대개 남자 주인들에게 성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그들이나 여주인들이 반대하지 못했다. 그런 경우에 아내들은 임신의 두려움을 덜었고, 잠자리를 강요하고 또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에게서 자유를 못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울러 고분고분한 여성 노예들은 주인이 훗날 그 대가로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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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예들 중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매춘부들이었다. 매춘이 널리 시행되었고, 매춘부들은 대개 어렸을 때 노예들과 가난한 자유 시민들의 원치 않은 자녀들로서 주인이나 부모에 의해 뚜쟁이에게 팔리고, 뚜쟁이에 의해 오로지 매춘의 목적으로만 양육된 여성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장래라는 게 없었다. 혹시 해방을 얻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따라서 최소한의 주거지, 음식, 신체적 안전을 제공해 줄 임자가 없으면 훨씬 더 열악한 상태에 떨어졌다. - 509, 510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때만큼 훈련된 행정가들의 필요가 절실한 때는 없었다. 로마에서는 곡물 공급, 곡물 배급, 물 공급, 경찰과 화재 예방, 홍수 예방, 거리와 시장 건설과 유지, 신전과 공공 건물 건축과 보수를 위해서 그들이 필요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법과 질서의 보존과 도로와 교량 건설 같은 공동 시설들의 건설과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속주들에서는 호아제의 사유지 관리, 세금 징수, 군대에 대한 식량과 장비 보급, 토목 사업, 제국의 우편 체계를 위해서 그들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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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들을 원로원 의원들보다 신뢰성이 크고 정치적으로는 덜 위험하고, 후원과 장래의 승진을 위해 자신에게 한층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 558, 559

 

새로운 법들은 간통을 민사적 범죄로뿐 아니라 형사적 범죄로 만들었다. 가장은 자신의 권한으로 간통을 범한 여성들을 그들의 정부들과 함께 죽일 수 있었고, 남편이 아내의 연인을 죽일 수 있었다. 간통을 저지른 아내와 이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나 상대방이 간통을 저지른 줄을 알고서도 결혼한 사람은 모두 그 법 앞에 유죄였다. 극악한 간통자들은 벌금과 재산 몰수에서부터 추방과 심지어는 사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벌을 받았다. - 570

 

도로 건설은 정복과 제국 방어와 속주 교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군사용 도로건설은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군사용 도로에 큰 관심을 쏟았고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속주들을 잇는 도로망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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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건설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또 다른 업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공식 서신들과 급송 공문서들을 전송하고 관리들과 원로원 의원들과 그밖의 특권층 인사들을 호송하기 위한 제국의 역참제도로서...- 585

 

제국 전역에 황제 숭배가 성장한 것도 로마와 황제에 대한 유대를 강화하는 데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 동방 속주들의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자기들의 군주들을 신으로 섬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헬레니즘 세계 제국들과 왕국들이 로마 공화국에 예속되면서, 동방 주민들은 속주 총독들을 신으로 존경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세계의 군주가 되었을 때 많은 동방 주민들은 그를 숭배하기 위한 의식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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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식들을 유지하는 것은 일년에 한 번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의 성소 앞에서 제사를 위해 모이는 속주 회의체의 책임이었다. 그 제사는 속주의 유력한 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된 대사제가 주관했다. 이런 식으로 속주의 엘리트가 로마와 황제 모두에게 일체감과 충성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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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숭배를 고무함으로써는 그는 또한 거대한 복합 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서로 다른 지역적 인종적 전통들에 다리를 놓아 줄, 제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 586, 587

 

아우구스투스의 화폐는 경제적 기능 말고도 선전 혹은 홍보라는 중요한 가치가 있었는데, 새로 태어난 정권에게 여론 조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 즉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통제가 쉽고 미묘하면서도 강제적인 방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화폐 모양의 변화 무쌍한 다양성은 대중에게 제국 정부의 이념과 늘 변화하는 정책과 목표를 주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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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태의 주화들은 대중의 눈 앞에 아우구스투스의 상을 때로는 여신 로마의 벗으로, 때로는 악티움 해전의 승자로, 때로는 시민들의 생명의 보호자로, 때로는 로마인의 자유의 보호자로, 때로는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인들에게 빼앗겼던 군기를 되찾을 자로 비치게 했다.

 

제국의 정책과 업적의 뉘앙스가 바뀜에 따라 함께 변했을 홍보와 대중 선전의 매체로서, 주화들은 미술보다 더 효과와 적응성이 뛰어났다. 건축과 조각품은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선전 매체로 쓰기에는 너무 경직되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7천만 내지 1억 명에 달했던 제국 인구 중에서 미술품을 늘 보고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반면에, 주화는 사람들이 매일 어디서나 만지고 사용했다. - 594

 

티베리우스의 손에는 강력한 무기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반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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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에스타스는 원래 적국과 내통하거나 정무관에게 신체적인 해를 입히는 등 국가 안전을 침해하는 모든 범죄를 대상에 넣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이 법은 국가의 존엄을 위해하는 모든 범죄를 포함하게 되었다. 원수정 때에는 대역죄뿐 아니라 오만, 신성모독, 중상에서부터 관직을 남용한 부당 재산취득, 간통, 불륜, 강간과 살인에 이르는 잡다한 범죄도 포함했다. - 625

 

 

티베리우스가 자기들과 동등한 시민이 되려고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따지고 보면 그가 프린켑스로서 지닌 권력이 자기들의 권력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원로원의원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아도 된다고 권장하는 것 자체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덫을 놓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만 더했다. - 627

 

황제에게 아첨하는 권한이 원로원에게 남은 전부였다. - 628

 

칼리굴라...티베리우스의 길고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통치가 끝나자 인민은 새 군주를 기쁨과 감사로 맞이했다. 그는 답례로 리비아와 티베리우스의 유산을 분배해 주고, 평소에 원성이 높던 판매세...를 폐지하고, 화려한 구경거리와 오락과 전차 경주와 야수 사냥으로 인민을 기쁘게 했다. - 632, 633

 

칼리굴라가 암살된 뒤...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친위대 병사들에게 일인 당 15천 세스테리티우스를 하사하겠다는 공약으로 그들의 충성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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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가 원로원에 대해서 자기들의 선택을 재가하도록 요구하자,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나서서 항의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친위대가 자신을 지지하므로 그들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말았다. - 638

 

정부의 중앙집권화에는 관료제의 확대와 카이사르의 친구들로 알려진 추밀원의 확대가 따랐다...행정부를 특별 국이나 부서들로 세분함으로써 훗날 제국 관료제가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걸을 내디뎠다...각 부서는 추밀원의 일원이기도 한 전문적이고 충직한 피해방인이 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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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행정부의 관료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나 동방 출신의 피해방인들이었다...그의 대신들은 그의 신실하고 고분고분한 노예들이었다. - 643, 644

 

베스파시아누스...그는 죽기 전에 후계자 문제를 해결해 놓았다. 자기의 이름과 똑같은 장남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에게 군통수권과 프로콘술의 명령권과 호민관의 권한을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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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권좌는 그의 것이 되었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교육이나 사전 군사 혹은 행정 경험을 통해서 된 게 아니라 태어나기를 우연히 그렇게 태어난 덕분이었다. - 675, 676

 

로마가 세계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증가한 행정상의 필요와 하드리아누스 개인의 효율성에 대한 의욕이 제국 관료제의 확대와 재편으로 이어졌다. 그가 공무원들에게 요구한 자질들은 대다수 현대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공직자들이 유능하고 제대로 훈련되고 역량을 갖추고 황제에게 충성하며 국가에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 - 697, 698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두 가지 발전이 아우렐리아누스의 재위 때 그 절정에 접근했다. 정부에서 절대 군주정으로 향해온 경향과 종교에서 유일신교로 향해온 경향이 이 무렵에 확고한 우위를 점했으며, 황제들이 종교계로부터 자신들의 권위를 추인받으려고 함에 따라 두 가지 경향이 일정한 상관 관계를 맺게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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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아우르는 사해동포적 국가의 등장과 함께 근동 문화의 영향력 확대와 서쪽으로 확산되어 간 동방의 종교들이 과거의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다신교의 쇠퇴와 한층 보편적이고 유일신교적인 종교의 등장을 촉진했다. 제국 종교마저 제국의 통일과 힘의 도덕적 기반으로서의 잠재력을 상실하고 독재 정부와 유일신교라는 쌍둥이가 대두하도록 길을 내주었다. - 812, 813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 개인의 안전을 도모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증진하기 위해서 자신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반역으로 보일 뿐 아니라 신성모독으로까지 보일 정도로 자신의 주위를 권력과 화려함과 종교적 신성함으로 둘렀다. 그는 요비우스라는 칭호를 취하여 로마 제국을 회복하도록 보냄을 받은 유피테르의 지상의 대리자로 자임했다. 자신의 동료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지상의 헤라클레스이자 요비우스의 조력자로 헤르쿨리우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두 사람은 신에 준하는 존경과 숭배를 요구했다. 그들의 궁전, 법정, 침실 등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이 신성하고 거룩했다. 그들의 초상화는 내면의 신성에서 발산되는 후광으로 빛났다. - 825, 826

 

백성들을 자신의 권력과 위엄으로 압도하고 그들에게 신비감과 경외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페르시아 황궁에 못지 않은 정교한 궁정 의식과 예법을 도입했다. 황제는 어지간해서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누구도 감히 그 앞에 쉽게 나갈 수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 대중 앞에 나갈 때면 왕관을 쓰고 홀을 쥐었다. 자색 겉옷에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들이 박힌 금으로 자신을 치장했다. 그 앞에 나가서 무엇을 아뢸 때는 무릎을 꿇고 그 옷술에 입 맞춰야 했다. - 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