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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베이커,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순돌이 아빠^.^ 2015. 3. 19. 12:04




사이먼 베이커, <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2008, 웅진 지식하우스


기원전 753년에서 기원전 510년 사이의 로마는 왕정 사회였는데, 마지막 세 왕이 에트루리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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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왕에게 부여된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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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왕이 집행권을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렀다. 평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 지시가 실행되기를 기대할 권리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임페리움의 힘으로 그들은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심지어는 처형할 수도 있었다. 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민들을 소집하여 로마 강역 밖의 종족들과 벌이는 전쟁에 끌고 나가는 힘도 그 권력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임페리움의 집행자가 들고 다니는 권력의 상징 역시 에트루리아에서 유래했다. 파스케스fasces는 약 1.5미터 길이의 느릅나무 또는 전나무 막대기를 여러 개 묶은 다발인데, 막대기 다발로 도끼를 감싸고 붉은색 가죽 끈으로 묶었다. 이 막대기 다발이 상징하는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라는 용어 속에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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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갈리아 병합이든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야 침공이든, 임페리움은 항상 정의의 실행이라는 명예로운 외관 뒤에 행사되었다. 로마의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는 호칭을 정규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는데, 우리가 쓰는 황제Emperor라는 단어는 여기서 나왔다. 즉 임페리움의 권력이 부여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임페리움의 현실은 훨씬 더 이기적으로 전개된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 국내에만 그치지 않고 지중해 전역에 걸쳐 피바다가 되는 것이다. - 35, 36

공직에 들어서기 위한 열쇠는 재산이었다. 공직에 확실하게 선출되고, 플레브스와 귀족계급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역대 집정관들은 로마의 성인 남자 가운데 가장 부유한 2퍼센트 중에서만 배출되었다. - 41

이런 업적을 이룬 로마의 정치 지도부는 귀족 가문들로 이루어진 그리 크지 않은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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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고작 26개 가문에서 기원전 509년에서 기원전 133년 사이에 공화국에서 매년 선출되는 최고 관직인 집행관에 뽑힌 사람들 전체의 4분의 3이 배출되었다. 그중 절반은 열 개 가문 출신이었다. - 54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그는 칸나이 전투가 있은 뒤 공화국이 취약해진 틈을 타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97년, 카르타고가 정복되자 로마는 필리포스 5세에게 본격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로마가 선택한 명분은 익히 보던 것이었다. 필리포스 5세의 독재 아래서 고생하는 그리스 동맹국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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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번의 짤막한 전쟁이 자유와 자율이 지중해 동부의 여러 그리스 도시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이제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에 대한 암묵적인 의무로 묶여 있게 되었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의 대가로 동부의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에 충성을 빚지고 있었다. - 65, 66

그것은 그들이 건설한 제국이 로마에 무엇을 해주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문제에 집중된 의문이었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정말로 방어적이고 정당한 전쟁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뭔가를 얻기 위한 욕망의 적나라한 표현일 뿐인가? 그로부터 얻은 소득의 혜택을 받은 것은 누구인가? 로마 공화국 전체인가, 아니면 관직에 있음으로써 혜택을 누린 소수의 귀족들인가? - 67, 68

얼마 지나지 않아 위대한 정복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요청을 가지고 로마에서 열 명의 위원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카르타고의 그 어떤 것도 남겨두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도시를 열흘 동안 불태우고 돌 조각, 벽돌 조각 하나까지 모든 것을 다 파괴한 뒤에야, 로마 군대는 한 도시와 문화의 박멸 행위를 완결했다. 이는 고대 역사 전체에서도 가장 전면적이고 가장 많은 노력이 투입된 파괴였다. 화재와 박멸 작업의 고고학적 증거는 지금도 발견된다. 인구가 거의 100만 명이나 되었던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살아남은 5만 명가량은 노예로 팔렸다. - 79

카르타고와 코린토스에서 가져온 전리품,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속주가 바치는 공물, 에스파냐 광산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로마시에는 엄청난 화폐가 쏟아져 들어왔고 로마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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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가 새로운 번영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민이 그 부를 나눠 갖지는 못했다.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서 발견한 이 도시에는 부자와 빈민 사이에서 점점 커지기만 하는 그 간극이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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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퀼리누스 같은 최빈곤 지역에서 흙과 싸리나무 가지로 지어진 집들은 너무나 불안정해서, 이웃집끼리 서로 기대 있지 않다면 금방이라고 무너질 것 같았다. 때문에 그런 집들은 걸핏하면 무너졌고, 불이라도 나면 순식간에 타 없어졌다. 부유한 귀족이 아름답게 복원한 신전 바로 곁에 검게 그을린 허름한 집이 서 있는 모습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 83

식량이 거의 동났는데...베르킨게토릭스는 말했다...그는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을 로마인에게 내주자고 제안했다. 카이사르가 포로들을 받아들이고 먹여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군의 식량이 줄어든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가 얼마나 무자비하며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수천 명의 갈리아인들이 성문 밖으로 쫓겨나가 로마인들에게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했을 때, 카이사르와 베르킨게토릭스는 팽팽하게 맞대결을 한 것이다. 둘 다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은 그들이 떠나 도시의 성벽과 로마의 포위 성벽 사이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 143

거대한 갈리아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마치 꿈이나 유령처럼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카이사르가 묘사한 전투의 결말은 그답게 간결했다. “대량의 살육이 이어졌다”. 로마군이 적을 쫓아가서 더 죽이지 못한 것은 오로지 그들도 너무 탈진했기 때문이었다. - 145

재개된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정치적 엘리트층에 속한 그들의 적에 대해 악명 높은 일망타진식 숙청을 주도한 바 있다. 약 300명가량의 보수파 의원들과 2000명의 기사 계급원의 이름이 살생부에 올랐고, 추적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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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2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마침내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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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승리를 거둔 동지가 적이 되고 로마 세계의 단일한 패권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기까지는 잠깐이었다. - 179

제국을 그 혼자서 다스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로마에서 일어나는 법정 소송을 주재하고 판결하며, 외국 속주를 다스리고, 세금 징수를 감독하기 위해서라도 원로원과 기사 계급의 경험과 인력을 필요로 했다. 전쟁을 치를 지휘관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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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리들의 권한 둘레에는 아주 섬세한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 그 선을 넘어서서 감히 아우구스투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한계를 잊어버린 데 대한 대가를 치렀다. 현실적으로는 공직에 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술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는 관리나 부관의 기술에 가까웠다. 겉치레뿐인 권력으로 그들의 야심은 충족되었겠지만 진짜 권력은 다른 곳에 있음을 엘리트들은 알고 있었다. - 189

내전이 가르친 첫 교훈이 로마 군대에서 야심적은 장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교훈은 첫 번째 교훈에서 도출된다. 황제가 국가의 새 직업 군대에게 봉급을 줄 능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세금 수입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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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이 속주에서 중앙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황실 금고로 원활하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 193

그 평화의 본질은 황제 이데올로기의 형성이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제국의 동방 속주는 오랫동안 로마 총독 개인들의 인격을 숭배하고 찬미하는 데 길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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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숭배의 대상이 아우구스투스의 인격으로 바뀌었다. 그는 신으로 대우받았다. 그에게 바쳐진 신전이 건설되었고, 기도와 축제와 제물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족을 위해 바쳐졌다. - 194

아우구스투스가 지닌 천재적인 선전 재능은 현대의 광고업자도 감동시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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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6년에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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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제국주의자들처럼 말을 잘 듣지 않는 ‘친구들’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작심했으며, 장군들이 7년 뒤에 그 과업을 완수하고 나자 그 승리를 ‘평정’이라고 일컬었다. - 194, 195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우구스투스 포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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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스러운 역사적 인물들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는 두 개의 긴 주랑이 포럼의 양 날개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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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상의 로마의 건설자인 아이네이아스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후손들이자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인 율루스가 건설한 알바롱가 왕국의 왕들로 이어지며, 그다음에는 또 그의 후손들인 율리우스 씨족의 사람들을 거쳐 아우구스투스의 양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자신의 신성한 조상 계보를 써먹을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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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포럼의 풍요롭고 복잡한 로마 역사의 파노라마는 결정적으로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포럼의 정중앙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조각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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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에서 업무를 보러 돌아다니는 로마인들은 어디에서나 아우구스투스 및 그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의 형상과 이름과 화신을 보게 된다. - 196, 197

기원전 18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보수적이며 가혹한 일련의 도덕적, 사회적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결혼과 자녀 출산과 성적인 성실성과 도덕성의 발전을 권장하기 위한 동기부여와 법적 처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예전에는 사적인 문제이던 간통을 다루는 새로운 공공 법안이었다. 성적인 불법행위를 처리하기 위해 형사 법정이 열렸으며, 재산 압수와 유배형 등의 무거운 처벌도 있었다. 법률 적용에서 더 불리한 쪽은 남자보다는 여자들이었다. 남자의 경우 노예나 매춘부 따위의 평판 나쁜 시민들과의 관계에서는 간통이 허용되었지만, 유녀(遊女)가 아닌 일반 여자 시민들과의 혼외저사는 일절 금지되었다.

그 법안은 심지어 혼외정사를 하는 현장에서 붙잡힌 딸과 연인을 아버지가 죽일 수도 있고, 또 아내가 바람둥이와 바람을 피운다면 그 남자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남편에게 허용했다. - 200, 201

전통은 다시 한 번 정치적으로 쓸모 있는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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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가 치러지는 사흘 동안, 지난번 ‘시대의 경기’에서 행사의 초점이던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은 없어졌고, 새 신들이 이제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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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연기자는 로마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사제도 아니고, 순수하게 종교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로마 국가의 우두머리, 바로 그였다.

첫날 밤, 아우구스투스는 양과 염소 아홉 마리씩을 운명의 여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것은 신성하고 마술적인 분위기에서 치러진 행사였다. 그는 그 여신들이 로마 시민의 힘과 존엄성, 그들 미래의 건강과 번영, 제국의 발전, 그리고 자기와 자기 가족에 대해 은총을 베풀어주도록 긴 기도문을 낭송했다. - 201, 202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만들어진 위대한 기념물인 평화의 제단은 황제만이 아니라 황제의 가족도 찬양했다. 제국의 방방곡곡에서 로마인들이 읊어대는 충성의 맹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평생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게, 그리고 그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충성을 바칠 것이다.” - 211, 212

안티스티우스 소시아누스라는 한 원로원 의원이 황제를 풍자하는 시를 몇 줄 써서 한 상류사회의 파티에서 낭송했다가,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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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법의 모호한 용어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황제에게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누구나 기소당할 수 있었다. - 230

자신의 지위를 굳힐 방법을 찾고 있던 티겔리누스가 그에게 경고한 바에 따르면, 잠재적 경쟁자는 두 명이었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어지는 고손자였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아우구스투스 누나의 증손자였다. 티겔리누스는 친구의 편집증을 다음과 같이 부추겼다. 네로가 결혼을 통해 클라우디우스 일족과 연결되는 선이 없어진다면 두 사람이 모두 그에게 도전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네로는 이 말에 넘어갔다. 암살자가 즉각 아시아와 갈리아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손에는 제물, 플라우투스와 펠릭스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황제가 전한 그들의 죄목은 이제 귀에 익었다. 반역죄라는 것이다. - 234, 235

황제가 거주할 새 궁전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네로의 통치의 영감과 독재 모두를 상징하게 될 건설 기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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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황금 궁전은 호수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여러 채의 사치스러운 저택과 건물로 구성되었다. 웅장하게 조성된 정원에는 잔디밭만이 아니라 ‘작물이 심어진 밭과 포도원과 목장과 수풀까지도 있었으며, 온갖 종류의 가축과 야수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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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그로토(장식된 동굴 – 옮긴이), 주랑, 파빌리온, 아케이드 등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도피처도 수없이 많이 있었다. 이 복합건물 군은 팔라티누스, 에스퀼리누스, 카일리우스 언덕 사이의 골짜기를 모두 차지했으며, 대략 50~120헥타르의 넓이였다고 짐작된다. - 240, 241

갈바의 군대는 서기 68년 4월2일에 그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위임자”로 선언했다. 반란이 드디어 지도자를 찾은 것이다.

드디어 네로는 행동을 개시 했다. 그는 자신이 단독 집정관으로서 원정을 지휘하여 반란을 정면으로 상대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명목상으로 충성을 유지하던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 265

황제 후보자를 내세우는 것은 이제 원로원 의원들이 아니라 속주의 군대들이었다. 다음 황제가 누가 될 것인지 결정하는 요인은 군대의 무력과 전투에서의 성공이었다. 군대로부터 가장 크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장군은 내전에서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는 경쟁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 269

오늘날 로마에 있는 포럼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열 번째 로마 황제인 티투스에게 헌정된 개선문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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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복판 통로의 벽면에는 부조가 새겨진 고대의 패널이 붙어 있는데, 그 부조는 제국이 행한 온갖 잔혹 행위의 역사에서도 가장 폭력적이고 잔혹하고 공격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로마가 서기 70년 여름에 예루살렘을 약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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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탈취한 행위가 티투스의 경력상 가장 큰 승리로 축하되고 있는 것이다. 티투스 개선문은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로마인의 위대한 승리의 기념물로 서 있었지만, 또한 그것은 제국주의의 잔혹한 행위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272, 273

유대인 반란군들에 대해 심리적 우위에 올라서기 위해 베스파시아노스와 티투스는 로마군의 기본 전술인 공포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핵심적인 원칙은 결코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들 만한 모든 사람을 죽이고, 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노예로 삼는다. 로마군의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약탈하고 도륙한다. 간단하게 말해, 그 계획은 예루살렘을 공포로 몰아넣어 항복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 294, 295

필사적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밤중에 몰래 성을 빠져 나와 달아나곤 했다. 그러다가 로마군에게 붙잡히면, 티투스는 그들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들은 고문당한 뒤, 성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전투로 단련되고 잔인해진 병사들은 잔인한 장난처럼 그들의 몸뚱이를 잔혹하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 311, 312

4년에 걸친 길고 힘든 원정을 치른 뒤, 로마 병사들은 적에 대한 거센 증오심이 폭발했다. 그들은 입구가 보이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들어갔으며, 이제는 유대인 병사와 민간인의 구별도 없었다. 모두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 317

탐욕과 쾌감을 채우느라 다들 정신이 나간 것이다. - 317

그 뒤 며칠 동안 의회 회당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남아 있던 보물들은 로마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로마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신전 안의 여자들의 궁전이라는 곳에 끌려왔다. 노약자는 살해되었고 수천 명의 봉기자들은 처형되었으며, 요세푸스에 따르면 포위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의 총 숫자는 110만 명에 달했다. 나머지인 9만 7000명 가량을 노예로 팔렸다. 젊은이는 이집트의 힘든 노역장에 보내지거나 제국 전역의 로마식 경기장에서 검투사나 야수의 제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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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서는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군중의 열광적인 환호 혹에서 티투스와 다시 합류했다. 군중들은 승리한 장군을 보기 위해 거리로 달려 나갔다. -  320

티투스가 귀환한 지 며칠 뒤에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의 보상도 받았다. 성대한 개선식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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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수 화관을 쓰고 전통적인 자줏빛 바탕에 은빛 별이 박힌 개선장군의 의상을 입은 그들은 성대한 행렬의 중아에서 전차를 타고 갔다. - 321

황실의 홍보 장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그들은 유대 전쟁에서 얻은 수익을 콜로세움의 건설에 쏟아 부었다. 유대인 노예의 판매 수익금으로 건설 비용의 일부를 충당하기도 한 그 시설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인 서기 80년에 티투스의 손으로 완공되었으며, 지금껏 가장 오래 남아 있는 로마 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 322

지금도 로마에 서 있는 트라야누스의 원기둥은 높이가 30미터다. 20개의 거대한 카라라 대리석 덩어리로 만들어진 그 원기둥에는 다키아 원정을 묘사하는 155개의 장면들이 길게 상향 나선을 그리며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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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서 트라야누스는 부대원에게 연설을 하며, 다른 곳에서는 병사들이 전투 전에 치르는 정화 의식에서 멧돼지와 숫양과 수소를 제물로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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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장면에서는 병사들이 투석기로 돌 탄알을 쏘아 적들을 때려 부수며 다키아인들의 몸뚱이에 칼을 깊이 꽂고 있다. 로마인들을 조직적이고 다키아인들은 오합지졸이다. - 329, 330

그 당시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공통의 화폐만이 아니라 공용 언어와 고전 그리스-로마 문명을 누리는 제국의 북쪽 끝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울타리 안에서 로마인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썼고, 그 밖에서는 야만인들barbarians의 ‘어버버bar-bar-bar’ 어쩌고 하는 웅얼거림이 있었다(그리스인들은 오래전에 자기들 문명권에 속하지 않는 종족들에게 이 이름을 붙였다. 그들이 내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도 이를 따라했다) - 345

번영을 누리며 평화롭던 하드리아누스의 제국은 무엇보다도 극심한 불평등의 제국이었다. 한 예로, 노예의 수가 시민의 수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이 간단한 사실이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노예들이 조직적으로 행동하면 위력적인 집단 무력이 될 수 있었다. - 347

로마의 육중한 국가 조직은 일차적으로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보다는 지주들의 이익에 봉사하고 그들을 옹호했다. 소수의 부유층이 예로부터 내려오던 지중해 교역로를 쥐어짜고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공작새 요리를 만찬에 올려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동안, 다수의 빈민은 자기 땅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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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사법제도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제도는 돈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했다. 배상 제도라는 것은 소송을 제기할 시간과 능력과 자금이 있는 기득권자들에게나 해당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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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책형이나 고문, 참수, 십자가형, 유배 등의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재산 없고 미천한 시민들뿐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더 ‘존중받는’ 퇴역병이나 마을 의회 의원, 기사 계급과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법의 날카로운 칼날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 - 347, 348


기독교의 처형은 그 50년 전, 로마에서 있었던 바울 성인의 재판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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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황제는 제국의 수도에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던 기독교도들의 공동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새 궁궐을 짓기 위해 자기가 로마에 일부러 방화했다는 비난의 독침을 피할 구실을 찾고 있던 네로가 그의 저택 정원에서 기독교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불태워 죽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 353


제국 전역을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악명을 날린 것으로는 기독교도 탄압 정책이 있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위협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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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이고 대안적인 종교적 공동체의 형성은 국가의 통제권을 위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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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기를 거부함으로써 기독교도는 로마 종족과 로마식 세계 질서를 거부했다. 또 기독교도는 이보다 더 큰 위협을 제기했다. 수십 년간 위기를 겪은 뒤였으니, ‘신들의 평화’, 즉 로마의 신들이 숭배에 대한 보답으로 제국을 자애롭게 주재한다는 불문 계약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가치였다. 전체 제국의 안정이 거기에 걸려 있었다. 안정을 재건하려면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기독교 신에게 바치는 충성은 그 안정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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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규율, 옛날 신들에 대한 존경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과 제국 쇄신의 정초석 그 자체였다. 반정부적 행위가 허용될 여지는 없었다. - 360, 361

오래지 않아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각자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경쟁자가 되고 새로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및 그가 포용한 급진적인 새 종교의 지지자들과, 로마의 전통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들 사이의 전쟁이었다. 적어도 두 진영이 내건 명분은 그랬다. 실제로는 성전(聖戰) 의상을 차려 입기는 했지만 이 갈등은 역사가 오랜 목표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패권을 목표로 했다. - 393

재산 증여, 주교들이 받는 좋은 대우, 빈민과 고아, 가난한 과부, 이혼자들에게 옷과 곡식을 주는 자선 행위를 통해,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서쪽 제국 전역의 각 지역 권력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321년경, 주교들의 사법권이 확대되었고, 교회에 대한 재산 증여가 합법화되었다. 속주 엘리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새 종교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제국전역의 상류계급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자신감이 넘쳤다.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이 무렵 그리스도의 표시인 카이-로 십자가가 부자들의 소지품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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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하고 나니 소득도 있었다. 제국이 새로이 장엄해지고, 애국주의가 새로워졌으며, 로마의 신들의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성한 보호가 콘스탄티누스에게 내리는 한 제국은 계속 번영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 397, 398

장엄한 의상을 갖춰 입고 이제 로마 세계 전체의 단독 지배자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도시 밖에 설치한 그의 진영의 연단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주교와 궁정 신하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 405

325년에 그는 전 세계 교회의 회의를 소집하여, 몸소 참석했다. 이는 니케아공의회라 불린다...사상 최초로 로마 세계의 전역에서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교리를 박멸하기 위해 3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모인 것이다. 첫날 오전, 선명한 자줏빛에 보석과 금박으로 장식된 눈부신 의상을 입은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궁전의 조용한 대회의장에 들어섰다...주교들의 대열 앞 중앙에 작은 황금 의자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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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인 로마의 황제가 권력을 휘둘러 기독교의 정통을 확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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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가 주교들에게 양보하는 제스처를 했지만 그들이 모인 것은 그의 권위 덕분이었으며,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보편적인 구속력을 가졌다. 사실 아리우스와 추종자들을 파문함으로써 이단에 대한 처리 문제는 주교들의 손을 벗어나서 황제가 선포하는 형법의 영역에 들어갔다. 종교와 황권이 하나가 되었다. - 408, 409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정해놓은 제국의 기본 주형 위에서 계속 번영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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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엽에는 로마에만도 70명의 사제와 25개소의 교회가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전상은 로마 엘리트 계층과 사제 계급, 황제 본인이 그곳을 특별히 후원했음을 의미한다. -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