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푸른역사, 2013
이 부분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다. 국가 체계의 형태를 갖추고 난 이후 로마라는 도시 공동체가 이탈리아 반도를, 이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게 주장될 수 없다. 흔히 로마 인에 의한 이탈리아 정복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로마 인들이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긴 했으나, 아무튼 그들도 이들 가운데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 7, 8
로마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부락들은, 희랍의 부락들은 분명히 그러했던바, 씨족 단위별로 씨족 숫자만큼 지역을 분할하여 정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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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으로 씨족 부락은 독립 단위가 아니라 공동체(civitas, populus)를 구성하는 하위 단위다. 이런 정치 공동체는 우선 종족, 언어, 관습을 공유하며 법적 상호 준수, 법적 상호 구제, 그리고 공격과 방어에서의 단결된 행동을 의무화하는 일정 수의 씨족 부락들을 아우르는 총괄 개념이다. 씨족 부락이 고정된 중심지를 갖고 있었던 것만큼 이렇게 형성된 부족 또한 그런 중심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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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지로 성채를 마련하고 씨족 부락들을 포섭한 부족은 원초적 국가 단위로서 이탈리아 역사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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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락 공동체들은 모두 아주 오래전부터 독립된 주권을 갖고 있었으며, 각 부락은 원로 회의와 수호자 회의의 협력을 받는 통치자가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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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 체제를 통해 연맹 전체가 방어나 공격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며, 이때 연맹 차원의 군 지휘관이 있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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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 부락들이 연맹 구심점을 두었으되 각자의 독립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 52~59
로마의 가장 오래된 지파들을 살펴보면 과거 독립적이던 세 부족이 서로 합쳐져 로마를 형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람네스 부족과 티티에스 부족과 루케레스 부족 등이 마치 아티카 지방의 아테네 정주 융합처럼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로마가 만들어졌다. - 62
과거에 독립적이었던 세 부족은 이제 세 개의 분구가 되었는데, 분구들은 하나로 합쳐진 이후에도 공동체 영토를 삼등분했으며 병역이나 원로원의 책임도 삼등분했다. - 62, 63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권한을 물려받은 자유민, 그리고...그와 혼인한 가모, 그리고 아들의 아들과 손자들, 그 합법적인 아내들, 또 가부장의 미혼 딸들과 아들들의 딸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모든 소유물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단일체다. 반면 딸의 자식은 가족에서 제외되었다. 딸이 혼인하여 출산한 경우라면 남편의 가족에 속하고, 혼인 외적으로 출산한 경우라면 어떤 가족에도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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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로마 가족은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윤리적 위계질서라는 고도의 문화를 근간으로 한다. 가부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남성뿐이었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재산과 부를 소유했고 유산 상속에서도 딸은 아들과 동등하고 가모는 자식들과 동등했지만 그럼에도 여성은 지역 공동체가 아니라 항상 반드시 가족에 귀속되어 딸은 아버지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아버지를 여읜 미혼 여성은 부계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복속해야만 했다. 필요한 경우 왕이 아니라 남성 친족이 미혼 여성을 법적으로 대리했다. 그러나 여성은 가족 내에서 하인이 아니라 주인이었다. 로마의 사고방식에 따라 가모는 하인에게 귀속되는 곡식 빻기와 요리 같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본질적으로 오로지 하녀들의 감독에 전념했으며, 그 밖에 쟁기질이 남자의 일이라면 여자의 일인 물레질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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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적으로 가족은 무조건적으로 가부장pater familias의 절대적 의지에 따라 통제되고 조정되었다. 가부장을 거역하고서는 어떤 것도 정당할 수 없으며, 가족에 속한 모든 것은 황소와 노예는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도 그러했다. 여인이 남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그의 부인이 되는 것처럼, 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키우느냐 마느냐는 가부장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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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은 가족 구성원을 엄격한 통솔하에 부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사법적 판단을 내릴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어 그들을 재량에 따라 처벌하거나 처형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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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상 가족의 취득 재산 일체는, 그것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이든 다른 사람의 증여로 얻은 것이든 가부장의 집에서 얻은 것이든 자기 집에서 얻은 것이든 가부장의 재산이었다. 가부장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 예속된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오로지 가부장의 명에 의해서만 재산이 상속되고 양도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는 부인과 자녀는 노예의 처지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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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은 아들을 노예처럼 제삼자에게 양도할 수도 있었다. 아들을 구입한 자가 외국인이며 아들은 그의 노예가 된다. 만일 그가 로마 인이면 로마 인은 로마 인의 노예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은 최소한 노예에 준하는 지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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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권은 본질적으로 무제약적이며 세상 누구도 이를 제한할 수 없는, 가부장이 살아 있는 동안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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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합법적 혼인을 통해 아버지의 손에서 남편의 손으로, 자기 집안과 자기 집안 신의 보호로부터 남편 집안과 남편 집안 신의 보호로 옮겨지면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제 남편에게 복종할 것이다. - 83~87
정기적인 직접세 징수는 정기적인 국가 재정지출만큼이나 드문 일이었다. 공공 지출을 위해 공동체는 세금을 징수할 필요가 없었는데, 국가는 군대와 부역 등 일반적인 공공 의무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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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왕에게 가져다 바치는 공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관세가 왕에게 지속적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국유지에서 나오는 수입, 즉 국유 농지에서 가축을 먹여 키운 자가 납부하는 방목세와 국가 농지에서 지대 대신 납부하는 농산물의 일부인 농지대로 지불해야 했다. - 103
티베리스 강 상류, 그리고 티베리스 강과 이니오 강 사이에 위치한 라티움 공동체들로 안테나이, 크루스투메리움, 피쿨네아, 메둘리아, 카이니나, 코르니쿨룸, 카메리아 등이 있다. 이들은 로마와 가장 가깝고 긴밀하게 접촉한 공동체들로, 이미 이른 시기에 로마의 무력으로 인해 독립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 138
앞선 최초 정주 융합의 세 부족과는 달리 이렇게 무력을 통해 병합된 공동체들은 공동체의 한 분구로서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완벽할 정도로 흔적 없이 나뉘어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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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속 공동체의 요새는 철거되었으며, 이들의 국경은 정복자의 국경에 병합되었으며, 복속 공동체의 수호신들과 백성들은 정복자의 주요 거점에서 새로운 고향을 마련했다. - 140, 141
작은 여러 공동체를 거대도시로 집중시키는 일은 물론 로마만의 독특한 생각은 아니었다. 라티움과 사비눔의 발전이 민족적 중앙 집중과 지역적 독립의 대립적 긴장 사이에서 진행된 것처럼, 희랍에서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라티움의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아티카의 아테에서도 여러 공동체가 하나의 국가로 융합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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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에서 아테네의 지배적 위치는 일찍이 이루어진 중앙 집중의 결과라고 할 때, 로마도 거대 제국을 이룩하는 데에서 중앙 집중 체제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덕을 보았다고 하겠다. - 142, 143
삼니움 부족은 일찍이 아마도 이주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연합을 결성했다. 이는 삼니움 부족이 나중에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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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에서는 어떤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압도한다거나 혹은 삼니움 부족을 하나로 연결할 거점 도시, 예를들어 라티움에서의 로마와 같은 중심 도시가 생겨나는 일은 없었다. 지역의 힘은 개별 농장에서, 지역의 권력은 개별 농장 대표들의 모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이들이 연합 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동맹의 정치는 로마의 것처럼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동맹의 국경을 방어하는 일에 국한되어 있었다.
오로지 통일국가 체제하에서만 강력한 국력과 진취적 야망이 생겨나며, 이로써 국토 확장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다. 로마와 삼니움의 전체 역사에서 극단적으로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식민지 정책이다. 로마 이이 획득한 것은 곧 국가가 획득한 것이다. 삼니움 사람들이 얻은 것은 일단의 자발적인 사람들이 정복한 것이었으며, 땅을 얻고자 떠난 이들이 이에 성공하건 실패하건 모두 그들의 몫이었다. - 162, 163
우리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로마 인들이나 사비눔 사람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전쟁에 뒤떨어지거나 비교적 덜 호전적임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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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 체제는 매우 느슨하게 짜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맹은 에트루리아 민족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북부의 에트루리아 사람들, 캄파니아의 에트루리아 사람들, 본래적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각각 독립 연맹체를 구성했다. 각 연맹의 12개의 공동체로 구성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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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공동체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이며, 부분적으로 강력했으되 그렇다고 패권이 형성된다거나 중앙집권이 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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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 공동체들에서 단체 행동은 라티움 동맹에서 개별 행동이 드물었던 만큼이나 매우 드물었다. 전쟁을 담당한 것은 개별 공동체였으며, 이해를 같이하는 이웃 공동체를 가능한 경우 끌어들였다. 예외적으로 동맹이 전쟁을 벌일 경우에도 흔히 몇몇 도시는 여기서 빠지기도 했다. 에트루리아 연맹에는 다른 이탈리아 민족 동맹들과는 달리, 지속적이며 강력한 지도 체제가 본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177,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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