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2>, 푸른숲, 1998
히틀러는 다시 독일 비행을 시작하였다. 괴벨스가 구상한 지점들은 라디오 방송국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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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방송국이 있는 모든 도시에서 연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송중계를 통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취자에게 우리 집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 조형적인 그림을 전달해야 한다. 지도자의 연설을 준비하는 도입 연설을 언제나 내가 맡아 하면서, 청취자에게 우리 대중집회의 마법과 분위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 723, 724
그는 당파들의 싸움과 작은 이해들을 멀리 초월하여 오직 국민의 법과 안녕을 위해서만 자신을 바치는 인물이었다. 괴벨스는 이제 온갖 국가적인 힘을 다해서 점점 소란해지는 선전에서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을 떠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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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덴부르크 대통령은 3월13일...‘국민계몽 및 선전부’ 장관직을 괴벨스에게 맡기는 임명장에 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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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앞에 두고 행한 최초의 정책연설에서 그는 “...새로운 부서는 국민에게 정부의 의도들을 알리고, 국민과 정부 사이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는 것입니다” - 738
괴벨스가 대중정치의 시대에 민중을 “비상사태와 9시 이후 외출금지령만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을 때 역시 같은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대중에게 그들의 상상력과 애착을 위한 대상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제 갈길로 가버릴 것이라고 했다. - 760
쿠어트 뤼데케는 이 시기에 대해서 이런 보고를 하고 있다. 권력과 지위에 굶주린 당 간부들 중 하나가 방금 넘겨받은 사무실 문턱을 넘어서면서 너무나도 행복해서 자기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안녕하시오, 뤼데케! 정말 근사하군! 난 통치한단 말이오!” 이런 사회적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는 헤르만 라우슈닝이 보고한 당원의 절망의 부르짖음이 있다. 이 당원은 이렇게 외쳤다. “또 낙오되지는 않겠어. 당신들은 기다릴 수도 있겠죠. 당신들은 총알을 받지는 않으니까 말이죠! 빌어먹을, 자리가 없다고! 그런 꼴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범죄자가 되고 말걸. 난 무슨 수를 쓰든지 위로 올라가야겠어. 우린 한 번도 위로 올라가보지 못했단 말예요!” - 764
히틀러...“대중을 무감각 상태에서 이끌어내어야만 그들을 이끌어갈 수 있다. 광신적으로 된 대중만이 유도가 가능하다. 무감각하고 둔감한 대중은 모든 공동체에는 최대의 적”이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대중을 일깨워서 ‘도구로 만들려는’ 이런 시도는 이제 표면으로 부상하였다. 의사당 화재사건과 관련해서 공산당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 것, 행진들, 공동체의 영접, 모금운동, 깨어나라는 구호와 고양시키는 구호들, 지도자 숭배, 한마디로 말해서 재치 있게 배합된 이 모든 기만과 테러의 혼합은 국민을 통합적인 사고도식과 감정도식으로 이끌어가는 시작이었다. - 765
이런 종교적인 외침과 통합의 호소, 의식적인 행사의 마법은 효과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집단 동료의식이라는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아주었다. 예배식과 민속축제의 혼합은 얼핏 보기에 정치적이지 않은 인상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더 큰 공통점을 이끌어내었다.
- 769
그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과도함이 아니라 운명에 사로잡혔다는 압도적인 느낌의 표현이었다. - 771
괴벨스가 공공연히 선언한 바에 따르면 새로운 국가는 그들 모두에게서 ‘위안 없는 공허의 느낌’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이 문화적 통제 및 정치 조직에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거기서 빠지면 그것은 직업활동 금지를 뜻했다. 경찰은 곧 수많은 밀고에 따라 조사를 벌였으며, 배척당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내거나 작업금지령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였다.
1933년 12월에 총 1천 종의 책들, 부분적으로 경쟁하는 곳들에서 21종의 전집류 등이 금지령을 받았고, 일년 뒤에는 4천 종 이상의 출판물이 금지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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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매일의 기자회견에서 발표되는 지시문들과 언어통제의 엄격한 원칙이 정치적 규제를 했고, 언론자유는 행간行間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렇지만 괴벨스는 형식적이고 문체적인 측면에서는 적극적으로 차이를 권장하였다. 국가의 의견 통제를 언론의 다양성으로 완화시키고 감추어보려는 속셈이었다. 언론이란 문화 일반과는 아주 달리 “의지는 단일해야 하지만 의지의 표현에서는 다양한 형태”라는 것이 그가 제시한 모토였다. - 772, 773
전체적으로 지식인, 교수, 예술가, 문필가, 대학과 각종 교육기관들의 압도적 다수는 아무런 수고도 없이 재빨리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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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에, 그리고 다시 5월에 수백 명의 온갖 분야의 대학교수들이 공개적으로 히틀러와 새 정부를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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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가인 에른스트 베르트람은 자기 친구 토마스 만의 작품들이 포함된 책을 불지른 사건을 위하여 <불꽃의 말>이라는 시를 썼다.
너희를 혼란케 하는 것은 내던져라
너희를 유혹하는 것을 추방하라!
순수한 의지를 키우지 않는 것은
너희를 위협하는 것과 함께 불꽃 속으로! - 774, 775
국가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적 활동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이러한 소속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고자 한다는 생각은 청년기의 사회적인 소외감에서 히틀러가 일찌감치 터득한 기본적인 인식들 중의 하나였다 – 778
모든 연령층, 기능층의 개인들을 여가 시간이나 오락까지도 사로잡아서 잠자는 것만 개인적인 일로 남겨두는 방법은 사회적인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 779
노동자를 위한 광범위한 행사들이 생겨났다. 휴가 여행, 스포츠 축제, 미술전시회, 포크 댄스, 교육과정 등을 통해서 사람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행사들은 ‘즐거움을 통한 힘’이나 ‘노동의 아름다움’ 같은 표어들 못지 않게 사람들을 통제하고 진정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 787
영국은 대륙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너무 커진 것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의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히틀러에게 항상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타임스>는 대륙에서 도이치 제국의 가장 막강한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질서는 ‘인위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영국 항공부의 고위관리 한 사람은 1935년 초에 도이치측 대화상대자에게 ‘영국에서는 어떤 반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독일은 베르사유의 결정을 어기고 공군을 정비해도 좋다고 알렸다. - 872
1936년의 올림픽 경기는, 제3제국이 개별적으로는 온갖 사나운 모습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민들에게는 엄격한 행복을 베푼다는 기만적인 이미지를 온 세상에 퍼뜨린 선전의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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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되기 몇 주 전에 모든 반유대주의적인 증오의 장광설이 중지되었다. 예를 들면, 국가사회당의 지역 선전지휘자들은 집 벽과 울타리에 남아 있는 반정권 구호의 흔적을 다 제거하고, 추한 풍자화들이 내걸리지 않도록 하고, 심지어는 “모든 집주인은 앞마당을 흠 없이 꾸며놓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8월1일 화려하게 올림픽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왕들, 왕자들, 장관들, 수많은 귀빈들 사이에서 히틀러는 경기 시작을 선언하였다. 지난번 마라톤 우승자인 그리스인 스피리돈 루이스가 ‘사랑과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그에게 넘겨주는 동안 합창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찬가를 불렀고, 평화의 비둘기떼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918
그가 연설의 도입부에서 ‘1차 세계전쟁의 이름 없는 병사’라거나, 섭리의 부름을 받은 ‘이름도, 돈도, 영향력도, 추종자도 없는 남자’, 혹은 ‘무(無)에서 나온 고독한 방랑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민중에서 나온 남자의 신화’를 되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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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붙어 있는 소박한 요구와 또한 엄격함과 음울함, 여자 없는 생활, 은둔상태 등은 대중의 의식 속에 그가 고독하고 위대한, 선택의 짐을 짊어진 남자라는 이미지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그것은 자기 희생의 비밀의식으로 보였다. - 926
무솔리니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식사가 끝난 다음 한 시간 반 이상을 쉬지 않고 손님을 향해 떠들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상대방에게 반격의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모든 방문객이나 동지들은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 이 쉬지 않는 사람의 언변이 끝도 없이 계속 되는 밤이면 총통 사령부의 장군들은 절망적으로 잠과 싸우면서 예술, 철학, 종족 기술, 역사 등에 대한 ‘성스러운 세계잡담’을 대책 없는 존경심으로 들어야 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청중이었다. 청중은 그의 생각을 완성시키기도 하고 자기 흥분에 빠지도록 만들기도 하는 일종의 엑스트라였다. - 929
분명히 흥분된 목소리로 히틀러는 시청 발코니에서 어둠 속에 몰려든 군중을 향해서 짧은 연설을 하였다. 연설을 하면서 그는 거듭 자신의 특별한 소명 의식을 끌어들였다. “섭리가 나를 그 옛날 이 도시에서 이끌어내 도이치 제국을 통치하라고 불러냈다면, 나에게 하나의 과제를 내준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분명 나의 소중한 고향을 도이치 제국과 합치라는 과제였습니다! 나는 이 과제를 믿었고, 그것을 위해 살고 싸웠습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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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저녁 늦게 린츠의 바인칭거 호텔에서 ‘오스트리아와 도이치 제국의 재통일에 관한 법’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 971
영국은 프랑스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서 어떤 보장도 거절하였다. 영국은 히틀러가 앞으로 멋대로 구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협약을 하자는 소련측의 제안도 거절하였다. 체임벌린과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히틀러를 반공을 위한 보루책임자로 보았다. - 974
히틀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어떤 반대 주장도 참으려 들지 않았다. 8월21일에 참모총장 할더 장군이, 도이치의 실제 병력은 그토록 힘을 소모시키는 두 개의 공격을 할 만한 힘이 없다고 말했을 때 분노한 말다툼이 일어났다. 참모총장은 히틀러의 야전사령관으로서의 결정은 가능성의 한계를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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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말다툼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소련 사람들이 한 달에 1,200대의 탱크를 생산한다는 점을 지적하자 히틀러는 극도로 흥분해서 “그런 멍청한 수다”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 1145
12월16일 그는 명령을 내려서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광신적인 저항’을 할 것과, ‘측면과 배후에서 파괴된 적을 가차없이 대할 것’을 요구하였다. 구데리안이 이런 명령이 가져올 무의미한 희생을 만류하자 히틀러는 장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척탄병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당신은 사태에 너무 가까이 있는 거요”라고 그는 말했다. “당신은 병사들에게 너무나 많은 동정심을 느끼고 있소. 약간 좀 거리를 두는 게 좋겠소.” - 1134
1월 말 정세는 전망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울루스 장군이 어차피 붕괴는 불가피한 것이라면서 추위와 전염병과 굶주림에 완전히 망가진 병사들을 위해서 항복 허가를 구했을 때 히틀러는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항복금지. 군은 마지막 병사, 마지막 탄약까지 제자리를 지킨다. 영웅적인 사수를 통해 방어선 구축과 서양의 구원을 위해 잊을 수 없는 공헌을 하라.” - 1152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히틀러는 때에 따라 전선 시찰도 나가고 싸움터, 사령부들이나 야전병원들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실패가 있은 다음에는 현실을 피하고, 지도가 놓인 탁자와 작전 회의의 추상적인 세계 속으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후로 그는 전쟁을 거의 오로지 종이로 된 풍경 위에 줄을 긋고 숫자놀음을 하는 것으로만 체험하였다. 대중 앞에 나서는 일도 점점 더 드물어졌고, 한때 그토록 좋아하던 대규모 해사에 등장하는 일도 꺼렸다. - 1157
전에는 별로 없던 감상의 발작도 나타났다. 보어만이 그에게 아내의 분만을 알리자 히틀러는 눈에 눈물을 흘리며 반응하였다. 그리고 전보다 더 자주, 사색과 독서와 박물관을 보살피는 문화적 목가 속으로 은퇴하는 이야기를 했다. - 1163
히틀러는 남자 하숙집 시절 환상 속에서 궁전에 살았듯이, 지금 전선마다 후퇴하는 전투사령관으로서 뒤로 물러나서 자기만의 가상 세계를 만들어냈다. 현실에 대한 거부 의식은 전쟁의 전환점이 나타난 시점과 더불어 점점 더 노이로제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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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개를 내린 특등 객차를 타고 가능하면 밤에, 도주하듯이 나라를 가로질러 가거나, 빛이 환한 날씨에도 총통사령부의 회의실 창문을 잠그거나 어둡게 만들곤 하던 습관도 그랬다. - 1170, 1171
동시에 그는 특히 히믈러와 보어만이 제시한 새로운 결혼법 발령을 위한 노력을 격려하였다. 이러한 발상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국민의 부족이 더욱 심각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3백만에서 4백만의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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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에게 아이를 가질 가능성을 주고, ‘단정하고 성격이 굳세고, 신체적·심리적으로 건강한 남자들에게’ 더욱 확고한 자손 번창의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특별한 신청 및 선별 과정을 거쳐서 ‘한 여자뿐 아니라 또 다른 여자하고도 확고한 결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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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가장 위대한 전사에게 어울린다...도이치 남자가 병사로서 조건 없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는 조건 없이 사랑할 자유 또한 누려야 한다. 전투와 사랑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속물들은 남는 것을 얻는 것만으로 기뻐해야 한다.” - 1187
독일에서 활동적인 반정부주의자들이 당면한 딜레마에서는 동기와 방해물, 약점들이 알아보기 힘들게 뒤섞여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문제가 많은 전통과 교육 원칙들이 한 역할을 하면서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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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군부 내 반정부 지도자들은 여러 해 동안 음모를 꾸미면서도, 자기들이 꾸미는 일이 국가 반역으로서 모든 전통적인 가치관에 다시 한 번 칼을 꽂고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최후의 감정적인 울타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 - 1205, 1206
그는 통제된 반응을 보인 순간에도, 자기에게 거절하거나 저항한 것에 대해서는 극히 과격한 방식으로 복수하려는 특이한 욕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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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가 1941년 초에 장교 쿠데타를 일으켜서 강요된 3국 동맹에서 빠져나갔을 때, 히틀러는 분노로 정신이 나가서 방어도 없는 이 나라의 수도를 ‘처벌 ’작전‘을 위해 사흘 동안 저공비행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포격하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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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 사건의 법적인 처리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재판은 번개처럼 바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놈들은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판결이 선포된 지 두 시간 안에 처형되어야 해! 어떤 사면도 없이 즉각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구, 가장 중요한 점은 놈들이 긴 연설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야. - 1224~1226
그는 민간재판장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와 책임 있는 사형집행관들을 총통사령부로 불러들였다. 죄수들에게 종교적인 위안이나 어떠한 형태의 마음의 평안도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그들이 교수형 당하기를, 가축처럼 대롱대롱 매달리기를 바라오”라는 것이 그의 지시였다. - 1226
보고서는 통상 처형 시간이 20초까지 걸렸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도 죽는 시간을 더 늘리라는 지시가 나왔다...이 광경을 필름에 담아서 전체 과정이 기록되었으며, 같은 날 저녁에 히틀러는 범죄자들의 마지막 경련까지 처형 장면을 상세히 바라보았다. - 1226, 1227
그의 생애의 수많은 이정표는 그가 얼마나 분명하게 구원자의 역할을 찾아다녔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소명이고 ‘외눈바이 거인의 눈’이었을 뿐 아니라, 연출적인 사색으로 가득 찬 이 삶에서, 그가 젊은날 좋아했던 오페라 <로엔그린>과 수많은 해방 영웅들, 백마의 기사들에 대한 신화ㅢ 기억들에서 얻어온 거대한 모범적인 역할이었다. - 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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