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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다시읽기)

순돌이 아빠^.^ 2015. 6. 8. 17:59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2006


인성의 표면층에서 평범한 인간은 수줍어하고, 예의바르며, 인정이 많고, 책임감이 있고, 양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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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하고, 가학적이며, 음란하고, 욕심과 시기심이 많은, 철두철미하게 충동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두 번째 층, 곧 중간 성격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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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핵심이라 명명된 세 번째 층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사회적 조건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이 가장 깊은 핵심에서 근본적으로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협동적이며, 사랑을 하고 있는 동물,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합리적으로 증오를 표출하는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지 못하고 위선적인 사회적 표면층을 우선적으로 제거하지 않은 채, 희망적인 심층에 현대인을 도달하게 하여 그 성격구조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교양의 가면을 벗기면, 자연스런 사회성이 아니라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층만이 우세를 점하여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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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조직의 원초적이고 노동민주주의적인 형태가 붕괴된 이래, 인간의 생물학적 핵심은 사회적으로 대표되지 못했다. 인간과 우주를 연결시켜주던 인간의 ‘자연스러움’과 ‘숭고함’은 위대한 예술작품, 특히 음악과 미술에서만 제대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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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혁명적인 모든 것, 진정한 예술과 과학은 모두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핵심에서 나온다. 따라서 진정한 혁명가나 예술가, 과학자 등은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편승하거나 대중들을 지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9~11

‘파시즘’이 단지 특정 인종이나 국가 또는 특정 정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평범한 인간의 성격구조가 조직화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점을 알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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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인간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파시스트당을 만든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잘못된 정치적 생각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파시즘은 독일인이나 일본인의 민족적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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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사실 국제적인 현상이며, 이간 사회의 모든 신체와 국가에 퍼져 있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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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는 자신의 성격구조 속에서 파시스트적 감정과 생각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성격분석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운동으로서 파시즘은 그것이 인민대중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되었기 때문에 다른 반동적 정당과는 다르다. - 12

순수한 형태의 파시즘은 평범한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반응이 모인 것이다. 비합리성이 인간의 역사에서 행한 절대적 역할을 인식하는 능력이 부족한 둔감한 사회학자에게 파시스트적인 인종이론은 단지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의 문제처럼 보이거나, 좀더 온건하게는 ‘편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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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종적 편견’의 신속하고 광범위한 전파는 바로 그 전파의 근원이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측면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종이론이 파시즘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즉 파시즘은 바로 인종적 증오의 산물이며, 그 인종증오가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표현된 것이다. - 13, 14

파시스트의 심리상태는 권위를 갈망하는 동시에 반역적인, 노예상태에 있는 ‘소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동일하다.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모두 소심한 인간의 반동적 분위기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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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심한 인간은 위대한 사람들의 행동을 배웠으며 그것을 왜곡되고 확대된 양식으로 재생산했다. - 14, 15

생동하는 것은 파시즘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파시즘은 삶의 충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파시즘은 사랑이 충만한 봄날, 생명체에 달라붙어 고삐 풀린 살인충동을 만끽하는 흡혈귀이다. - 17

대중심리학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맑스의 사회학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립시켰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오류다. 성격구조는 자본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모든 직업의 사람들에게서도 관철된다. 자유주의적 자본가도 있고 반동적 노동자도 있을 것이다. 성격의 측면에서 보면 계급의 구분은 없다. - 26

20세기의 파시즘은 4천년에서 6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인간의 성격, 신비와 권위를 향한 인간의 병적 갈망, 인간의 성격특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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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제학은 지난 3백 년에 걸친 자본주의적 시기의 파렴치한 난폭함(약탈적인 제국주의, 노동하는 인간의 권리상실, 인종억압 등)은 단지 이 모든 것을 참고 지나친, 권위를 병적으로 갈망하는, 자유로워질 능력이 없는 신비적 대중들의 성격구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29

맑스주의적 정치는 그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대중들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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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사회적 실체의 모순이 어디에서 간과되고 있는가를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고 실천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맑스의 혁명성은 그의 주장이나 그가 가리킨 혁명의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진보시키는 힘으로서 산업 생산력을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실제와 일치하게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실패는 사회 진보를 방해하는 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 즉 중요한 요인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의 많은 업적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역시 공허한 공식으로 변질되었으며, 맑스주의 정치가들의 손에 의해 과학적·혁명적 내용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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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속적 맑스주의는 1929년과 1933년 사이의 거대한 경제적 위기가 이 위기로 피해를 입은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틀림없이’ 좌파 쪽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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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상황에서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왼쪽으로 변화시킬 것이라 기대되었던 경제적 위기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극우의 방향으로 변하게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 36~39

통속적 맑스주의는 경제적 존재와 일반적인 사회적 존재를 도식적으로 완전히 분리하면서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은 그의 경제적 존재에 의해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 47

경제적 상황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곧바로 정치적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사회혁명은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 54

한 개인을 사회경제적 구조와 사회의 성적 구조에 연결시키는 것, 그리고 사회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각 개인의 생후 4~5년 동안 권위주의적 가족에서 일어난다는 것, 교회는 나중에서야 이러한 기능을 이어받는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국가는 권위주의적 가족 제도에 엄청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권위주의적 가족제도는 국가의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제조공장이 되었다. - 66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성에 대한 도덕적 억압(이 억압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린이의 성기적 성욕은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은 어린이를 불안하게 하고 수줍음 타게 만들며 권위를 두려워하고 복종하도록, 권위주의적인 의미에서 ‘말 잘 듣고’ ‘길들이기 쉽도록’ 만든다. 생동적이고 자유로운 모든 충동이 심한 두려움에 의해 점령되고, 성적인 것에 대한 생각의 금지가 일반적인 사고를 억압하고 비판까지도 무능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의 반항하는 능력은 마비되어 버린다.

간단히 말해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어린이는 나중에 일반적인 사회 테두리 안에서의 적응능력을 키우기 위한 전(前) 단계로 우선 권위적인 소규모 국가, 즉 가족을 통과해야 한다. 따라서 권위적 구조화는 근본적으로 성적인 억압의 고착화와 성적인 충동의 생동적인 본질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생기게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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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성욕적이고 도덕적인 억압은 보수적 여성이 자신의 사회적 상황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녀로 하여금 ‘성적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교회에 얽매이게 한다. - 67

경제주의자...그들은 반동적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제계획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해답은 다음과 같다. 즉 물질적 욕구충족에 대한 명백한 억압과 성적 욕구의 억압은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전자는 반역으로 나아가지만 후자는 성적 욕구를 억압하여 의식되지 못하게 만들고 도덕적 방어가 [그 상태에] 뿌리내리도록 만들기 때문에, 두 가지 형태의 억압 모두에 대항하는 반역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한다. 사실 반역의 억제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다. 평범한 비정치적 인간의 의식 속에서 반역의 억제는 흔적조차 반결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 자유에 대한 두려움, 한 마디로 말해서 반동적 성향이 이렇게 나타난다. - 68

성적 억압은 위에서 묘사한 대중들을 수동적이고 비정치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정치적 반동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조 속에 2차적인 힘, 즉 권위주의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공적인 관심을 창출해낸다. 성의 억압 과정을 통해 성욕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충족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대체만족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자연스러운 공격성은 잔인한 가학성으로 상승하는데, 이것은 소수의 선동에 의해 벌어진 제국주의적 전쟁의 대중심리적 토대에서 핵심적 부분을 이룬다.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보자. 대중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군국주의의 효과는 본질적으로 리비도적인 메커니즘에 의존한다. 제복의 성적 효과, 성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리드미컬한 군대식 걸음걸이의 효과, 군국주의적 의식의 전시효과적 특성 등은 학식 있는 정치가보다는 상점의 여성 종업원이나 평범한 회사원에 의해 더 실제적으로 이해되었다.

정치적 반동세력은 이런 성적 관심을 오히려 의식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남자들을 위하여 공작 깃털 같은 산뜻한 제복을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여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광신자들이 만든 모병 포스터를 생각해 보자. 그 포스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가 외국을 알고 싶다면 황제의 해군에 입대하라!” 포스터에서 외국은 이국적인 여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왜 이 포스터가 모병에 효과적이었는가? 우리의 젊은이들이 성의 제한으로 인해 성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 68, 69

민족사회주의 집회에서의 연설은 집회에 모인 대중들 개개인의 감정을 조작하면서 실제적인 논쟁은 가능한 한 회피하는 매우 능란한 조치들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갖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책 [나의 투쟁]의 곳곳에서 올바른 대중심리적 전술은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대중들을 ‘위대한 최종목표’로 인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72

히틀러가 대중심리에 끼친 영향력을 연구하려면 지도자 또는 어떤 이념의 주창자가 지닌 개인적 관점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강령은 광범위한 계층에 퍼져 있는 대중들의 평균적 성격구조에 조응해야만(비록 역사적 관점이 아닌 제한된 관점에서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사실들을 전제한다면,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대중들의 성격구조는 어떤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하는가? 이제 대중심리학의 문제설정은 ‘지도자 사상’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제의 사회적 생활로 옮아가게 된다. 지도자의 인격 구조가 광범위한 대중들 개개인의 구조와 조화를 이룰 때만 ‘지도자’는 역사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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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성공을 단지 대중들을 ‘몽롱하게’ 만들거나 ‘헷갈리게’ 한 민족사회주의의 선동정치로 설명하거나 나중에 공산주의자나 다른 정치가들이 한 것처럼 ‘나치의 정신이상’ 등과 같은 모호하고 공허한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려 하는 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성공은 바로 대중들이 왜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고 몽롱해지며 정신이상의 상황에 빠져들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중들 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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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백만 명의 대중들이 억압을 긍정하였는가라는 모순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대중심리학적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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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중들이 정치적 속임수에 넘어갔는가”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 72~75

그러한 대중조직화의 성공은 히틀러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의 선동 활동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 권위주의적이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성격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히틀러를 이해할 때 중요한 점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그가 대중들로부터 부여받은 의미인 것이다. - 79

대중들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노동하는 인민대중이 자신들의 이익에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완전히 반대되는 지도력을 발휘하는 정당을 추종하게 되었는가? - 80

관리들의 사회 의식을 특징짓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와 공유하는 운명이 아니라 국가 당국과 ‘민족’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이 태도는 국가권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로 이루어지며,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가 고용되어 있는 회사와의 동일시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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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은 ‘동일시’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됨을 느끼기 시작하여 이전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다른 사람의 특성과 태도를 받아들이고, 환상 속에서 자신을 그 사람의 위치에 놓게 되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이 동일시 과정에서 동일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특성을 “본보기로 삼기” 때문에, 동일시하는 사람의 근본은 실질적으로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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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에 복종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국의 대리인이 되기 때문에 특권적인 도덕적(물질적이 아닌)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심리적 유형의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군대의 하사관들에게서 발견한다.

고용주와의 동일시에서 나오는 힘의 모습은 특히 귀족 가문의 집사, 시종 혹은 그와 비슷한 고용인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들은 지배계급의 태도, 사고방식, 처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히 변화했고 자신이 미천한 [계급] 출신임을 감추기 위해 때때로 본받은 것을 과장하기도 한다.

“나는 국가이며 당국이며 회사이며 민족이다”라는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당국·회사·국가·민족 등과의 이러한 동일시는 심리적 현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물질적 힘이 된 이데올로기의 가장 좋은 예이다. 고용인이나 관리의 마음은 처음에는 단순히 그의 상사와 같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이지만, 점차 만성적인 물질적 의존에 빠지면서 그 존재를 지배계급의 의미에 맞추고 그 자신을 새로이 꾸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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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질적으로 보잘 것 없는 상황 속에 살고 있지만 외적으로는 때때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품위 있는 행동을 한다. 그는 형평없고 불충분한 식사를 하면서도 ‘단정한 의복’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다. - 88, 89

아버지의 정치적·경제적 지위는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 구성원과의 가부장적 관계에 반영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모든 가족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국가의 가장 가치있는 권력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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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에서 아버지는 생산과정 속에서 그의 상사가 그에 대해서 갖는 지위와 동일한 지위를 고수한다. 아버지는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아이들, 특히 아들에게서 새롭게 만들어낸다. 이런 관계로부터 지도자에 대해 수동적이고 복종하는 소시민적 인간들의 태도가 솟구쳐나와 형성된다. - 96

이것은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사회체계가 그 구성원의 성격구조 속에 재생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지위는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가장 엄격한 성적 억압을 요구한다. 소시민적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은 성적 반항 위에 체념하는 태도를 발전시키고, 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와 동시에 이후 모든 권위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도록 하는 아버지와의 강한 동일시를 발전시킨다. - 97

권위주의적 가족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을 형성하고, 소시민계층 사람들의 성격구조 형성에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성의 금지와 성적 쇠약은, 성적 죄의식으로 충만하고 감정적으로 깊게 고착화된 종교적 두려움의 도움을 받아 관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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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쇠약은 어떤 경우에는 잔인한 방식의 성생활을, 다른 경우에는 경직된 성격특징으로 보상되는 자의식의 저하를 초래한다. 성욕의 자제와 성의 억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강제는 명예, 의무, 용기, 자기 통제와 같은 발작적인, 특히 감정적인 것을 강조하는 관념을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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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적으로 만족을 얻은 사람은 야단법석을 떨지 않아도 존경받을 만하고, 책임감 있고, 용감하며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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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적으로 허약하고 성적 구조가 모순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은 자신의 성을 통제해야 하며, 성적 위엄을 유지해야 하고, 유혹에 직면했을 때 용감해야 한다는 등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한다. 자위의 유혹에 저항하려는 투쟁은 어른과 아이 모두가 예외 없이 경험하는 투쟁이다. 이렇나 투쟁에서 반동적인 인간이 지닌 성격구조의 요소가 예외없이 모두 발전된다. - 97, 98

대중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는 민족의 화신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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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도자는 엄격하지만 보호를 제공하는, (아이들이 보기에) 품위 있는 예전의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정서적 태도를 끌어낸다. 매우 모순적인 나치당 강령의 이행불가능성에 대하여 열성적인 민족사회주의자와 토론하다보면, 히틀러는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바라는 아이의 태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사회적 현실에서,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보호를 받으려는 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감이다. 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자주관리, 즉 합리적인 독립성과 협동을 방해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중들의 태도에 그 토대를 둘 수 없으며, 두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대중들 개개인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대중들 개개인이 무력해지도록 양육되면 지도자와의 동일시는 더 뚜렷이 나타나며,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이런 동일시 경향이 민족적 나르시시즘,, 즉 각 개인들이 ‘민족의 위대함’에서 빌려온 자존심의 심리적 토대이다. 반동적인 소시민계층은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동일시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이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한다. - 107, 108

대중들의 욕망을 이용한 나치당의 대중심리학적 정책

나치당은 부르주아지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려는 산업노동자들의 욕망, 즉 부르주아지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4년의 ‘자동차(폴크스바겐) 대중화’ 정책이었다. 독일 부강책의 일환으로 1933년 제정된 ‘독일제국 아우토반법’과 연계된 이 정책은 ‘오토바이 값으로 자동차를!’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독일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모두 자동차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 116

조직화된 노동자 운동이 노동시간의 단축, 선거권, 사회보장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 성과를 이루는 데 성공했을 때, 그것은 한편으로는 바로 노동계급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정반대의 과정 역시 시작되도록 만들었다. 즉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중산계층과의 구조적 동화, 사회적 지위의 발전으로 인한 “높은 지위를 향한 응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 119

사실에서 가치평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치평가에서 시작하여 사실의 왜곡으로 나아가고 있는 인종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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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취에 빠져 게르만 인종이 가장 우수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파시스트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파시스트는 논리적 주장이 아니라, 비합리적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흑인과 이탈리아인이 게르만인에 비해 ‘인종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파시스트에게 입증하려는 시도는 전혀 가망이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더 우수한 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전부인 것이다. - 127

파시스트들의 성격구조는 형이상학적 사유, 경건함, 추상적·윤리적인 이상을 이루기 위한 극기, ‘지도자’의 신적 사명에 대한 믿음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런 특징은 지도자 이상(理想) 또는 민족에 대한 강력한 권위적 유대라는 특징을 갖는 심층과 연결되어 있다. 민족사회주의적 대중들의 입장에서 ‘주인 인종’에 대한 믿음은 ‘지도자’에 대한 유대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들의 노예 같은 신하가 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토대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지도자와의 강렬한 동일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대중들이 실제로 별 의미 없는 구성원의 지위를 지녔을 뿐이라는 점이 지도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은폐되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사회주의자들은 그 종속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작은 히틀러’라고 느꼈다. - 130, 131

런던의 [타임(Time)]은 1933년 8월23일자에서 다음과 같은 보도를 싣고 있다.

“일요일인 1933년 8월13일 뉘른베르크에서 한 소녀가 거리로 끌려다니는 것...그 소녀는 머리를 빡빡 깎인 채로 ‘나는 유태인에게 몸을 주었습니다’라고 쓰여진 팻말을 어깨에 걸고 있었는데 그 팻말에는 그녀의 땋은 머리카락이 잘려 매달려 있었다.”
...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 중 하나가 묘사한 바에 의하면 조그맣고, 연약하고, 머리가 빡빡 깎였는데도 확실히 예쁘장해 보이는 그 소녀는 역 근처의 국제 호텔 주변, 군중들로 교통이 막힌 중심가, 그리고 여러 술집 등으로 끌려다녔던 것이다. 나치 돌격대가 그녀를 지켰으며 믿을 만한 관측자의 추산에 따르면 약 2천 명의 군중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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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녀를 높이 들어올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군중들은 그녀에게 조롱과 야유를 보내며 떠들어댔다. - 133


베를린 근처의 노이 루핀에서는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 1907~1930)의 노래’ [나치당의 주제가]가 연주되는 동안 기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소녀가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진 팻말을 등과 가슴에 걸고 시내로 끌려 다녔는데 그녀의 옆에도 돌격대원들이 있었따.

“저는 파렴치한 인간이라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불리는 동안 감히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희생자를 조롱하였습니다.” 그후 그 소녀는 다시 거리로 끌려나왔다. 수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도록 그 ‘광경’이 벌어질 시각은 지방 신문에 공고되었다. - 133

가모장제의 성적 조직은 그것이 [지금과는] 완전히 상이한 친족 조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생활의 자기조절력을 지녔기 때문에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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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장제 후기의 혁명적 과정(모계 씨족에서 족장 가족의 경제적 독립, 부족 사이의 물품 교환 증대, 생산수단 발전 등)의 결과로 나타난 가부장제적-권위주의적 성적 질서는 여성, 아이들, 청소년들에게서 성적 자유를 박탈하여, 성을 상품화하고, 성적 관심을 경제적 예속의 대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궁극적인 토대가 되었다. 이제 성은 억제되어야 하는 악마적인 것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왜곡되었다. 가부장적 요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모장제의 순수한 감각은 어두운 힘의 음란한 해방처럼 보인다. - 139, 141

정숙함이 도입되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지닌 여성은 정숙하지 못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오르가즘적인 감각의 자리를 남성의 성적 잔인성과 이에 조응하는 여성의 생각, 즉 성행위는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대신하게 된다. 혼외 성교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혼회 성교에 대한 평가가 바뀌고, 혼외 성교를 보호·허용했던 가모장제 사회의 제도가 소멸됨에 따라, 공식적인 도덕성과 갈등의 상황을 빚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비밀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사회에서의 지위에 따라 성의 내적 경험방식도 변한다. 이제 자연스러움과 ‘숭고한’ 도덕 사이에 만들어진 모순은 스스로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성적 죄의식은 자연스럽고 오르가즘적인 성적 합일의 과정을 단절시키며,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성울혈을 만든다. 즉 노이로제, 성적 이상, 반사회적 성 등이 영속적인 사회적 현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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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와 같이 왜곡되고, 방해받고, 야만적이 되고, 저하된 성은 자신을 만들어낸 바로 그 이데올로기를 옹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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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러운 성이 자연스러운 성이 아니며 단지 가부장제적 성이라는 점은 가볍게 잊어버린다. - 141, 142

어떻게든 자연스런 성의 분출은 ‘문화적 몰락’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몰락’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강제적이고 도덕적인 생활방식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정작 몰락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결혼과 권위주의적 가족에 대한 관심 속에서 개인 속에 강제적인 도덕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체제, 즉 성적 독재체제일 뿐이다. - 144

성적 억압과 계급사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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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적 억압은 원래 상속법과 결혼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지배계급 자체 내에서 시작된다. 순결이라는 도덕성은 처음에는 지배계급의 여성들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된다. 이것으로 하층계급을 착취하여 획득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보증되어야 한다.

2. 초기 자본주의와 봉건적 성격을 지닌 거대한 아시아 문명의 지배계급은 아직 피지배계급의 성적 억압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조직된 노동운동, 사회정치적 성과의 쟁취, 이와 동시에 시작된 폭넓은 국민대중들의 문화적 고양이 일어나자 성적 억압은 시작되었다. 바로 이때 사회의 지배계급은 억압받는 계급의 ‘도덕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직화도니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반대 과정, 즉 지배계급과의 이데올로기적 동화가 시작되엇던 것이다. - 148

모성의 이상화와 신성시는 여성들이 성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그들에게 부과된 성적 억압이 파괴되지 않도록, 그리고 성적 불안과 성적 죄책감이 위력을 잃지 않도록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성적 존재로서 인정되고 존중받는 여성은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할 수 있다. - 162

쾌락을 위한 성행위는 여성과 어머니를 타락시키는 것이고, ‘창녀’는 그 쾌락을 긍정하고 추구하며 사는 여성이다. 반동적 성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을 생식의 목적에 봉사할 때만 도덕적이라고 보는 것이며, 따라서 생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성은 비도덕적이라는 관점ㅇ르 가진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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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국주의는 여성은 단지 아이를 낳는 기계이며, 따라서 그러한 기능에 반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한다. 말하자면 성적 만족이 여성의 생식기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163, 165

권위 속에서 키워지고 그 권위에 의해 구속받는 사람은 자기조절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알지 못한다. 즉 그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그는 자신의 행위와 의사결정에 책임지기를 완전히 거부하고 지시와 지침을 요구하게 된다. - 172

1932년 봄 브뤼닝을 축출한 후 파펜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가장 먼저 취했던 조치 중 하나가 ‘국가에 대한 좀더 엄격한 도덕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의미의 천명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이 계획은 굳건하게 계승했다.

청년 교육에 대한 포고문은 다음과 같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민족과 국가의 사상에 의해 지배받을 때 ,즉 전체에 대해 책임지고 전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어려운 운명과 미래의 고귀한 요구에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겪을 많은 어려움을 준비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관대하거나, 그들 개개인의 성향을 과도하게 고려해 주는 것은 잘못된 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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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된 복종하는 자세로 교육공동체의 질서에 순응하고 교육 공동체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는 것에 익숙해질 때 비로소 민족과 국가를 위해 봉사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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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국가와 민족 공동체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한 강력한 내적 힘은 기독교 정신의 진리에서 나온다.

민족과 고국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은 기독교적 믿음에 가장 깊게 닻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 및 모든 교육의 기독교적 토대가 정당하고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보호하는 것은 항상 특별한 의무이다. - 178, 179

파시즘이 대중들의 신비주의적 생각과 감정에 성공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 신비주의를 이행하고 대중의 신비주의적 오염을 교육이나 의료를 통해 극복할 때에만 파시즘에 대한 투쟁은 전망을 가질 수 있다. 과학적 세계관이 우세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과학적 세계관은 너무나 느린 속도로 확장되어서 신비주의적 오염의 빠른 확산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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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계몽이 대중들에 대해 갖는 관심은 주로 교회의 고위 성직자와 교회 관리들의 부패한 행동을 폭로하는 쪽으로 쏠려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절대 다수는 그런 폭로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과학적 계몽은 대중들의 감정이 아니라 지성에만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주의적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자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아무리 솜씨 있게 폭로한다 하더라도 무의미하다) - 186

여기에서 신비주의의 기능은 일상의 곤경에서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주의를 돌리게 하는 것, 즉 비참함의 진정한 원인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192

1928년경까지 소련에서는 형식적이고 합법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짝짓기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공산주의는 강제적 결혼과 강제된 가족을 느슨하게 만들었으며 도덕주의를 파기했다. - 198

권위주의적-가족적 유대는 성적 육욕의 억제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육욕의 억제에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이 예외 없이 노출되어 있다. 겉으로는 아무리 화려하고 ‘자유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성적활동에도 이 뿌리깊은 억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문가는 알아볼 수 있다. 사실상 나중의 성생활에서 발생하는 많은 병리적 표현, 예를 등러 무차별적으로 성적 파트너를 선택하는 것, 성적 방탕, 병리적인 방종 성향 등은 바로 오르가즘적 경험능력의 억제로부터 유래한다. 모든 권위주의적 양육에서 행해지는 무의식적인 죄의식과 성불안이라는 특징을 갖는 억제의 필연적 결과(오르가즘적 성불능)는 지울 수 없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오르가즘에 대한 열망이며 이 열망은 태양신경총[명치] 부위의 긴장감각으로 나타난다.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친다’는 일반적인 문장은 생리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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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금지 때문에 충족되지 못하고, 자연스러운 충족을 향한 정해진 길을 방해받은 생장적인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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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렬한 열망은 한편으로는 강한 가학성의 방출을 쉽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존재하는 죄의식에 조응하여) 신비주의적인 종교 경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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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적인 질병이 불안으로 인한 무력감에서 나오는 변덕스러운 흥분을 해소시키지 못하거나, 강박신경증이 무의미하고 기괴한 강박적 증상에서 나오는 흥분을 해소시키지 못할 경우, 가부장적-권위주의적인 강제적 질서는 그 흥분이 가학적-신비주의적으로 방출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행동의 사회적 합리화는 그 행동의 병리적 성격을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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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적, 감상적, 가학적 정서의 정도와 자연스러운 오르가즘 경험의 일반적인 장애 정도 사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 206~209

아주 단순한 경건한 신앙심에서 완전한 종교적 황홀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종교적 흥분은 어떤 특정한 점에서 오르가즘적 흥분현상과 조우한다. 종교적 흥분이라는 개념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할 때 방생하는 정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정신적·신체적 흥분상황에 의하여 공통으로 특징지어지는 모든 흥분을 여기에 포함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종적인 대중이 사랑받는 지도자의 연설을 들을 때 발생하는 흥분과 인상적인 자연 현상에 압도될 때 경험하는 흥분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 216

정신분석학은 신에 대한 표상이 아버지에 대한 표상과 동일하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표상이 종교를 믿는 모든 개인의 어머니에 대한 표상과 동일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아버지·어머니·어린이라는 삼자 관계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속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의 심리적 내용은 유년기의 가족관계에서 끌려나온 것이다. - 217

모든 계급사회에서 가부장적 종교들은 항상 권력을 가진 계층의 이해에 봉사하며, 대중들의 비참함을 신의 의지로 돌리고 내세에 관한 멋진 말로 행복에 대한 요구를 연기시킴으로써 대중들의 비참함을 제거하는 것을 실제로 방해하고 있다. - 218

이제 성경제학적 연구는 종교에 관한 기존의 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추가한다.

1.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가족에서 재생산되는 신의 개념, 원죄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심판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이 어떻게 개인들의 내면에 깊이 고착되는가? 다시 말해서,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종교의 기본개념들을 수용하게 하고, 그것들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열렬하게 확언하게끔, 또한 실제로 자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그것들을 옹호하고 간직하게끔 만드는가?
2. 이러한 종교의 개념들이 언제 인간의 내면에 깊이 고착되는가?
3. 어떤 에너지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는가? - 218

모든 가부장적 종교의 근본이념은 성적 욕망의 부정이다. 종교적인 것과 성적인 것을 하나의 통일체로 지니고 있었던 성적인 것에 긍정적인 원시 종교를 제외한다면 이 사실에는 예외가 없다. 자연법칙에 기반한 가모장제의 사회적 조직에서 가부장제로, 다시 가부장적 계급 사회로 이행하면서 종교예식과 성적 예식의 통일성이 깨졌다. 종교예식은 성적 예식의 대립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적 예식은 매음굴, 포르노그라피, 은밀한 성 등과 같은 야만상태에 자리를 내주었고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성적 경험이 종교예식과 통일체를 구성하지 못하게 되고, 사실상 그것의 대립물이 되었을 때, 종교적 흥분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린 쾌락의 대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종교적 흥분이 반(反)성적인 동시에 성을 대체한다는 모순을 통해서만 종교의 힘과 지속력이 파악될 수 있다.

진정한 종교적 인간의 흥분구조는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설명될 수 있다. 즉 생물학적으로 볼 때, 그는 다른 인간이나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성적 긴장상태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성-부정적인 종교적 상상을 수용한 데다가 처벌의 두려움까지도 습득했기 때문에 자연스런 성적 긴장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계속해서 억제해야만 하는 만성적으로 지나치게 긴장된 육체적 흥분상태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

세속적인 행복은 그에게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내세에서 은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감정에 굴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 역시 생물학적 생명체이며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행복, 긴장완화 그리고 만족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종교적인 이전-쾌락[완전한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이전의 쾌락] 긴장, 즉 우리에게는 신체에서의 생장적인 흐름과 흥분으로 더 익숙한 환상 속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동료 신자를 모임에서 만나고, 육체적 흥분을 줄이거나 그 흥분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할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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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인간은 실제로는 완전한 무력감에 빠져든다. 성적 에너지가 억압되기 때문에 그는 생활의 어려움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공격성뿐만 아니라 행복을 위한 능력도 상실했다. 그는 무력해질수록 자신을 보호해 주고 도와주는 초자연적 힘의 존재를 더욱 더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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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실 성적 이전-쾌락의 흥분에서 유래하여 발현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는 열망이다. 구원은 단지 신과의 환상적인 합일, 즉 충족과 긴장완화의 환상적인 합일 속으로 육체적 긴장이 사라져버릴 때만 쾌락적일 수 있는 육체적 긴장으로부터의 구원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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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이 있는 성직자를 치료할 때 종교적으로 황홀한 상태가 최고조에 달하면 무의식적인 사정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즉 정상적인 오르가즘적 충족은 성기가 배제된 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발적으로 부분적 긴장완화가 일어나는 일반적인 육체적 흥분상태로 대체되는 것이다.

원래 그리고 자연적으로 성적 쾌락은 인간을 일반적인 자연과 결합시켜 주는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이 분리되었고, 성적인 것은 나쁜 것, 지옥 같은 것, 악마적인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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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적 흥분은 매우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성을 악마적 힘으로 보거나, 사람을 파멸시켜 최후의 심판으로 이끄는 것으로 보는 종교적 상상은 실질적인 육체의 과정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즉 ‘선’과 ‘악’,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성스러움’과 ‘악마적인 것’ 등의 전형적인 종교적·도덕주의적 가치부여는 한편으로는 성적 충족의 상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 충족에 대한 처벌의 상징인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죄악’의, 무의식적으로는 성적 긴장의 발현과 구원에 대한 깊은 열망이 동시에 방어된다. 종교적 황홀상태는 결코 방출될 수 없는 자율신경체계의 성적 흥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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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적인 교회 집단만큼 히스테리와 도착이 많이 발생하는 사회적 계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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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공적으로는 성을 죄악시하지만, 사적으로는 대체만족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 219~223

위의 설명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요점을 정리할 수 있다.

1. 종교적 흥분은 자율신경적이고 성적인 은폐된 흥분이다.
2. 이 흥분의 신비화를 통하여 종교적 인간은 성적인 것을 부정한다
3. 종교적 황홀은 오르가즘적인 자율신경 흥분상태의 대체물이다.
4. 종교적 황홀은 성적으로 긴장을 완화시키지 못하여, 기껏해야 근육과 정신의 피로를 낳을 뿐이다. - 224

성적으로 성숙하고 성경제적으로 조직화된 젊은이에게 여성과의 오르가즘적 경험은 만족스러운 결속, 상대방에 대한 존중, 그리고 경험을 공유하는 여성에게 굴욕을 주는 모든 형태의 경향을 근절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 249

성적 쾌락에 대한 인식과 오르가즘을 봉쇄하기 위해, 신비적 흥분은 생물적-심리적 기관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실제 성생활은 가치를 떨어뜨리는 어떤 것으로 경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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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즘에 대한 욕구의 방어는 자아에게 ‘순수성’과 ‘완전성’이라는 강제적 관념을 형성한다. 건강한 욕구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은 자연스러운 자존심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신비주의적 인간은 방어를 형성함으로써 발작적이고 내적으로 도덕적인 자존감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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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적 인간의 자존심은 겉으로 보기에도 자연스러운 성기적 만족에서 도출되는 자존심과 다르다. 신비주의적 인간은 과장되고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보이며, 성적 열등감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이 점이 신비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도덕’ 교육을 받은 인간들이 왜 ‘명예’, ‘순수성’ 등과 같은 정치적 반동의 표어에 쉽게 감동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명예롭고 순수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부단히 일깨워야 한다. 성기적 성격은 자발적으로 순수하며 명예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일깨울 필요가 없다. - 250, 251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 하던 원시인들은 무어보다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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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을 찾고 자연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원시인의 욕망은 그를 (물론 객관적으로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신비주의, 미신, 내적·정신적 과정을 포함하는 자연과정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점으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남근상을 세움으로써 땅을 기름지게 할 수 있고 소변을 보는 것으로 가뭄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 255

독일 파시즘은 금욕적이고 성을 부정하는 교육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인 권위에 대한 예속을 불러일으키고 습관하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던 수단도 가지지 못했다. 유아기부터 시작되어 계속해서 만족되기를 바라는 이성에 대한 자연스런 성적 갈망은 왜곡되고 오도된 본질을 가진 동성애적이고 가학적인 감정으로 대체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금욕주의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대체는 소위 ‘단련과 복종의 정신’을 이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봉사캠프에서 이식되었던 이른바 ‘동지정신’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런 구호들은 야만성을 풀어주고 자극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유용하게 사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가학성은 충족되지 않은 오르가즘적 열망에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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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곤란한 상황이 노동봉사캠프의 징집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전의 사랑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여자 친구와 함께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금욕이나 자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적인 삶의 야만화와 방탕, 무성한 음담패설...의지와 에너지를 마비시키는 환상(강간, 음탕한 탐욕, 구타에 대한 환상) 등이 만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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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민, 화를 잘 냄, 육체적 불만, 다양한 심리적 혼란의 증가 - 280, 282

평화와 인간 협동의 기본요소는 실제로 파악가능하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노동관계에 주어져 있다. 이 관계는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의사는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유기체에 ‘새로운 건강’을 ‘도입하지’ 않는다. 그는 질병을 앓고 있는 유기체 속에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건강의 요소를 찾아낸다. 그리고 찾아낸 그 요소와 질병의 진행 사이에 싸움을 붙인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회 유기체에 정치적 계획이나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로 이런 방식이다. 현재 존재하는 자유의 실제 조건을 유기적으로 발전시키고, 이 발전을 위축시키는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회 유기체에 법률로써 자유를 보장할 수는 없다. - 299, 300

어떤 사실을 확립한 사람은 그것이 환영을 받을지의 여부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이 적용될 가능성에만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사실 확립은 항상 정치와 날카로운 갈등상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는 사실이 적용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들이 대중들을 이끌어야 하는 각각의 상황에 그 사실이 방해가 되는지의 여부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과학적 사회학자는 매우 힘겹다. 그는 한편으로는 실제 과정을 발견하고 설명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력 있는 사회운동과 접촉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 304

나는 여기에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질서를 ‘고안해내거나’ ‘생각해내거나’ 혹은 ‘계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겪는 삶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사실과 밀업한 연관을 맺으면서 유기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대중들에게 정치적으로 다가서려는’ 또는 그들에게 ‘혁명적 사상’을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단지 시끄럽고 해로운 정치만이 만들어 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305~306

영화는 보는 것, 연극을 보는 것, 책을 읽는 것, 스포츠를 즐기는 것, 이를 닦는 것, 학교에 가는 것 등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이 독재국가와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회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둘 모두에서 ‘문화는 향유’된다. 주택 건설, 도시전철 건설, 학교 건설 등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범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주택, 도시전철, 학교 등은 한 사회의 기술적 발전과 관계될 뿐이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억압받는 백성들인지 자유롭게 노동하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 309

새로운 사회 질서로 ‘어떻게’ 이행하는가에 관한 질문은 ‘광점위한’ 대중들, 즉 비정치적이고 비합리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노동하는 인민들의 성격구조에 관한 질문과 완전히 일치한다. - 311, 312

아직 파시스트 국가가 아닌 곳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은 대중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다는 환상 속에서, 그리고 만약 히틀러 같은 사악한 존재들만 주위에 없다면 지상에서 천국이 보장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개인적 진술이나 공공 토론에서의 여러 발언들에서 볼 수 있듯이, 수세기에 걸친 억압으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자유를 누릴 능력이 없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민주주의적 정치가들, 특히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정치가들이었다. - 313

수천 년 동안 생동하는 삶이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과업이다. - 316

범죄학을 공부하는 한 학생이 연구를 하면서, 인간의 반사회적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 질병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그 인간은 처벌이 아니라 치료와 예방의 조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 358

소련에서는 거대항공기인 ‘고리키’의 건조가 ‘혁명적인 업적’으로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항공기의 건조가 독일이나 미국의 거대 항공기 건조와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모든 것을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은 파멸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경제주의를 극복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노동하는 인민대중들이 언제나 파시즘으로 결말을 맺는 환상적 충족에 더 이상 흡족해 하지 않고, 삶의 욕망을 실제로 충족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배우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된 빈의 노동자들은 빈의 사회민주주의 단체에 의한 도시철도의 도입을 사회민주주의의 특별한 업적으로 간주했다. 빈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원칙적으로 그리고 당파적으로 적대적이었으며 공산주의적으로 지도되고 있던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시의 공산주의 행정당국이 건설한 지하철을 공산주의의 특별한 업적으로 가눚했다. 또한 독일 노동자들은 바그다드 철도의 계획을 게르만인의 특별한 업적으로 간주했다. 이런 예들은 정치적 비합리주의에 의해 조장된 환상적 충족의 전염병적인 성격을 입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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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자는 자신들의 철도가 러시아의 철도와는 다른,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하자면 보탄[게르만]적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철도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마음은 결코 생겨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민족주의적 환상의 충족에 혼이 빠져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철도를 도둑질하려는 전염병에 걸린 장군을 추종하게 된다. 이렇게 정치적인 정서적 전염병은 이런 방식으로 동일한 계급 내에 분열과 극심한 적대감을 발생하게 하며, 시기심, 허풍, 줏대 없는 행동, 무책임 역시 불러 일으킨다. 환상적인 충족을 제거하고 노동에 대한 관심과 국제적인 노동 협력으로 환상적 충족을 대체하는 것이 노동자들이 성격구조에서 전체주의적 국가에 대한 갈망을 뿌리채 뽑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 373, 374

비합리적인 제도가 그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존속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은 채, 비합리적인 사회제도와 싸우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 375

파시즘의 신속하고 강력한 성장은, 사회가 국가라는 이상을 통하여 결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독일 대중들에게 다른 정당들의 강령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상과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내적 균열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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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강조한 것이 파시스트들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민주당 정부,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보다 단지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국가를 강조했을 뿐이다. - 378

만약 우리가 임의의 국가 기능을 평가할 때, 그 기능의 어떤 부분이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는 원래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후천적인 기능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일관성 있게 묻는다면, 우리는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뉴욕, 베를린 등 모든 도시의 보안경찰은 원래 공동체를 살인과 절도로부터 보호해야 할 과업을 가지고 있다. 경찰이 계속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한, 경찰은 유용하고 독립적인 사회적 기능이다. 그러나 보안 경찰이 가정에서의 무해한 놀이를 금지하거나, 아파트에서 이성을 만나는 것을 규제하거나, 사람들이 언제 일어나고 자야 하는가 등을 주제넘게 결정한다면, 우리는 전제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국가권력, 즉 사회 위에 군림하고, 사회에 반하는 국가권력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

사회에 반하거나 사회 위에 군림하면서 기능하는 사회적 행정의 기능을 없애는 것이 노동민주주의의 내재적 목적 중 하나이다. 자연스런 노동민주주의적 과정은 결속과 사회적 삶의 기능을 용이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 이외의 행정적 기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계적이고 경직된 방식으로 ‘국가’에 ‘반대’ 혹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과 억압적 기능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기가구가 자신의 자연스런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운영될 때, 국가기구는 다시 사회의 집행기관이 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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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회에 반하여 사회 위에 군림하게 만들고, 따라서 사회 속에 권위주의적 독재제도의 씨앗을 뿌리도록 했던 특성들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진정한 소멸이다. 오직 국가의 비합리적 기능만의 소멸을 의미한다. 합리적 기능은 삶에 필수적이며, 따라서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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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봉사하는 한, 그 행정적 기능 역시 사회의 한 부분이다. 또한 그 기능은 환영받는 것, 필요한 것이 되며, 삶에 필수적인 일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기구가 사회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압제자로서 스스로를 내세운다면, 또한 자신을 위하여 독립된 권력을 주장한다면, 국가기구는 사회의 가장 큰 적이 되며, 따라서 그런 취급을 받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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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적 국가가 일단 전복된다면, 지속되어야 할 과제는 행정적 기능이 다시 독립된 권력이 되지 않도록 막는 일이다. - 384, 385

이러한 과정을 독일에서는 매우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1929년부터 1939년 사이의 첨예한 위기 동안, 결속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사상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사상이] 사회를 결속시켰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회적 위기를 조건짓던 상황은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다...국가 이데올로기는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사실적이고 실제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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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 내부에서 상황을 실제로 질서 있게 만들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물론 경찰의 곤봉과 권총을 통한 쥐죽은 듯한 정적을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라고 부를 수 없다. ‘민족의 통일’은 환상 속에서 달성되었다. 우리는 엄격한 현실에 토대를 둔 과정만큼은 아니지만 환상에 기반한 과정 역시 효과적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위계적 교회가 보여준 효능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사회적 공동생활의 실제적 어려움 중 단 한가지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고 환상적인 국가의 통일은 어떤 성과를 거둔 듯한 인상을 주었다. - 388, 389

러시아에서는 노동하는 인민대중들이 차르 치하의 국가기구를 전복하고, 그것을 자신들과 같은 계층 출신의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 기구로 대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주관리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스스로 책임을 맡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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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미국에서의 사회적 생산과 소비에 대한 국가통제는 각각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근본적으로 상이했지만 인민대중들에게 사회를 자주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공통분모는 여전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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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의 성격구조가 하는 역할을 명백하게 제시·강조하는 것과, 사랑, 노동, 그리고 지식의 과정으로 인간의 책임감이 옮겨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주관리를 위한 투쟁에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아무리 사실이 고통스럽고 부담이 되더라도, 우리가 수천 년 동안의 기계적 문명에 의해 발전되어 왔으며 또한 사회적 무기력과 지도자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표현되는 인간의 구조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독일과 러시아의 국가기구는 과거의 전제정치에서 성장해 왔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과 러시아아에서 인민대중들의 성격적인 복종심은 특별히 강했다. - 390, 391

나는 중요한 것은 범죄적이거나 사악한 의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존재했던 특정한 상황에 토대를 둔 발전을 묘사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하려 한다.

대중들의 구조와 국가형태 사이의 관계를 간략히 요약해 보자.

수동적으로 표현되든 능동적으로 표현되든 간에, 인민대중들의 성격 구조는 국가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제국주의를 용납하는 것은 대중들의 구조이다. 제국주의를 능동적으로 저지하는 것 역시 이 구조이다. 새로운 전제정치의 생성을 저지할 능력은 없지만, 전제정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대중들의 구조이다. 국가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민주주의의 노력을 촉진하고 지지하는 것도 이 구조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했을 때 가족, 인민, 민족 그리고 국가라는 환상적 통일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것도 바로 이 구조이다. 하지만 사랑, 노동 그리고 지식의 과정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것 역시 바로 이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이 구조만이 ‘자신들 위에서 군림하는’ 행정적 기능을 조금씩 인수하고 자신들의 노동 조직을 통하여 그 기능을 실행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국가행정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노력이 자신들에게 뿌리 내리게 할 수 있다. - 392~393

노동을 대중심리학적으로 올바르게 고찰하는 것은 노동자와 그의 작업으로 생산된 생산물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이 관계는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지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서 만들어내는 쾌락과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인 생활과 마찬가지로, 노동은 유쾌한 박동에 근거를 둔 생물학적 기본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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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노동은 ‘의무의 법칙’과 ‘생계의 불가피성’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 전세계의 수십억 노동하는 사람들의 노동은 그들에게 쾌락이나 생물학적 만족을 조금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노동은 강제적 작업형태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그 노동은 노동자의 생물학적 쾌락욕구와는 반대되는 특징을 지닌다. 노동은 몰락하지 않기 위한 의무와 양심의 결과로 대부분 다른 모르는 사람을 위해 행해진다. 노동자는 자신이 행하는 노동의 생산물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노동은 즐거움이 결여된 귀찮은 것이다. 즐거움에 기반하는 대신 특정한 강제에 기반하는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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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노동행위 자체에 주어진 ‘자연스러운’ 노동의 즐거움, 노동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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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민주주의의 가장 우선적인 과업중의 하나가 노동의 조건과 형태를 노동에 대한 욕구와 즐거움에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삶의 즐거움과 노동 사이의 적대를 지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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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서 얻는 삶의 즐거움은 인간이 노동의 노예에서 생산의 주인으로 재구조화되는 데 본질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 생산물과 직접적인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다면, 인간은 오늘날 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리고 거부하고 있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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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자연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신비주의는 전ㅂ다 더 강해졌다. 이 대답은 옳다. 그러나 인민대중의 합리성이라는 추구하던 목표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목표가 성취될 가능성이 없다고 논증할 수 없다. 즐거운 노동이라는 목표가 현실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아직 남아 있다. 만약 이러한 목표가 현실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면,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 이 목표의 달성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 398, 399

신문들은 인민대중들이 겪고 있는 노동과정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정치적 논쟁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점은 이해할 만도 하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은 노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민주주의의 공동체가 신문으로부터 모든 비합리주의를 몰아내고 즐거운 일에 대한 토론으로 신문을 가득 채운다고 생각해 보자. 노동하는 인민대중들은 즉시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인 것도 영원히 불가능하도록 만들 제안과 조언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작업반장, 기술자, 전문직 노동자들이 즐겁게 모든 노동과정의 방식을 설명하고, 개선을 위한 제안과 충고와 발명들을 제시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라. - 399, 400

이 정치가들은 노동자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추상적인 고도의 국가정치를 외부로부터 주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노동민주주의의 세부적인 사항은 전문적인 노동에서 유기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우리가 작업을 관리해야만 할 때, 우리의 작업장을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가? 더 쉽게 일하기 위해서, 어떻게 작업장을 합리화할 것인가? 작업장을 더 잘 운영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지식을 더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주거지, 식량, 아이 양육 등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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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 스스로가 경영을 공부하고 실천적인 생동감을 유지하면서 작업장을 전문적으로 지배할 때 노동하는 대중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 - 403

파시즘 아래의 독일에서 노동자는 노동과정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작업장 관리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즉 ‘지도를 받는’, 책임이 있는 신하였다. 또한 파시즘 아래의 독일 노동자는 스스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사용가치의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독일인’으로서 작업장을 대표하고 있다는 민족주의적 환상을 지니고 있다. 이런 환상적·민족주의적 태도가 독일의 민족사회주의 경영 세포 조직 전체의 노동을 특징지었는데, 그 노동은 ‘국가’와의 환상적인 동일시를 이용하여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실제적인 무관심을 감추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 405

자연스러운 노동민주주의는 노동에 대한 무관심을 지양한다. 노동민주주의는 ‘국가’와의 환상적인 동일시나 머리 색깔 또는 코의 모양 등을 이용해서 무관심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노동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을 느끼게 하고, ‘작업장은 우리들의 것’이라는 감정을 갖게 함으로써 무관심을 제거한다. 이것은 형식적인 ‘계급의식’을 갖거나 어떤 특정한 계급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관심, 민족주의와 계급의식의 자리를 대체하는 노동과의 실제적인 결합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하는 노동과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결합될 때에 비로소, 독재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노동형태가 노동 자체뿐만 아니라 노동의 즐거움에도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노동이 한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 때, 우리는 그 인간과 노동과의 관계를 ‘리비도적’이라고 부른다. 노동과 성은 (엄밀하고 넓은 의미에서)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인간과 노동과의 관계는 동시에 인민대중의 성경제적 문제이기도 한데, 이는 인민대중들이 생물학적 에너지를 사용하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 노동과정의 위생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동과 성은 동일한 성 에너지에서 나온다. - 405, 406

어떤 사회에서든 노동이 생활의 기쁨을 말살하는 데 공헌하는 정도, 즉 노동이 ‘조국’에 대한 의무이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의무이든, ‘민족’에 대한 의무이든,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의무로서 설정되는 정도가 그 사회 지배계급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을 판단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이 된다. ‘의무’, ‘국가’, ‘규율과 질서’, ‘희생’ 등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생활의 기쁨’, ‘노동민주주의’, ‘자주관리’, ‘노동의 즐거움’, ‘자연스러운 성’ 역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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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욕구는 유기체의 생물학적 자극원천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형태는 생물학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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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활동 욕구가 충족되고 그 욕구가 발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이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능은 모든 종류의 도덕적-권위적 의무노동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 기능은 어떤 명령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 408~409

환상은 항상 대중들을 속여서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만들 뿐, 그 환상의 대상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을 방해한다. - 413

소비에트 문헌에 나타난 이런 예들은 거대한 5개년 계획의 관철이 전쟁분위기에서 차용된 동시에 전쟁분위기를 창출하는 이데올로기의 도움을 받아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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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6천만의 인민이 수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의 상태 속에 놓이게 되고 군사 이데올로기에 고취된다면, 군사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그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성격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지도부의 군사적 구조가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삶의 이상으로 교육된 ‘사욕이 없는 헌신’은 독재적인 숙청, 처형, 다양한 종류의 강압적 조치를 가능케 하는 대중심리적인 토대를 점진적으로 형성했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어느 누가 자유로운 사회를 향한 발전에서 생체심리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 414, 415

공명심을 촉진하기 위해 ‘노동의 밤’이 도입되었다. ‘노동의 밤’에는 누가 가장 빨리 식자(植字)를 하는가, 누가 빨리 사탕과자를 포장하는가 등에 대한 경쟁적 시합이 벌어졌다. 작업장에 검은 게시판과 붉은 게시판이 설치되었다. ‘게으른’ 노동자의 이름은 검은 게시판에 게재되었으며, ‘성실하고 쓸모 있는’ 노동자의 이름은 붉은 게시판에 게재되었다.

어떤 이를 도덕적으로 고양하고 다른 이들을 비하하는 것이 성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경험은 없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방법이 인간의 성격구조 형성에 끔찍한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은 확실하다.

검은 게시판에 이름이 적힌 노동자는 부끄러움, 질투, 열등감, 심각한 증오의 감정을 발전신킬 수밖에 없으며, 반면에 붉은 게시판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경쟁자를 제압했다는 승리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승자라고 느끼면서, 야만성을 발산하고, 공명심에 의기양양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꼭 ‘더 열등한’ 것은 아니다. ‘검은 게시판에 이름이 오른 노동자’ 중의 어떤 이들이 더 신경증적이긴 하지만 구조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그들이 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경쟁에서 승리한 노동자가 꼭 자유로운 인간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 내부에서 격려되고 있는 자질이 과도하게 야망을 지닌 인간, 야심가, 자랑꾼, 한 마디로 말해서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417, 418

노동민주주의에는 새로운 것이 있다 즉 노동민주주주의의 대표자들은 노동민주주의 조직을 강제하기 위하여 정당을 설립하지 않으며, 낡은 요구, 이상, 정강 등을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그치지도 않았다. 노동민주주의자들은 도대체 왜 지금까지 모든 민주주의적 요구, 이상, 정강이 실패를 거듭해 왔으며, 유럽과 아시아가 반동적 독재자에게 굴복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하여 순수하게 과학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데, 바로 이것이 새로운 점이다. 사회과학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 사회의 가능한 미래 질서가, 이데올로기나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했고 계속 발전해 온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도출된다는 것이 새로운 점이다.

이런 노동민주주의적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어떤 정치와 선동도 거부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대중들이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도 새로운 점이다. 노동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지도자가 되고 싶은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런 야망을 발전시키는 것이 허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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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민주주의는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스스로의 법칙에 복종하는 실천적 삶의 기능을 통하여 신비주의, 그리고 전체주의적 국가사상과 싸운다. 이것이 노동민주주의의 새로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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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그 자체로 비과학적이며 또한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다는, 다시 말해서 정치는 인간의 무력함, 빈곤 그리고 억압의 표현이라는 주장이 새로운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노동민주주의는 새롭게 발견된 생체사회학적이고 자연스러운 사회의 기본기능일 뿐, 정치적 강령이 아니다. - 432, 433

진실의 추진자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면, 그 진실이 항상 소멸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권력’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복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실한 사실들은 언제나 복종이 아니라, 확신에 의해서만 관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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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당대에 대단한 진실을 주창했다. 그러나 예수가 교황으로 대체되었을 때, 그 진실은 기독교 세계에서 소멸했다. 인간 고통에 대한 2천년 전의 깊은 통찰은 종교 형식에 자리를 양보했으며, 소박한 수도사의 옷은 금으로 수놓은 장식품으로 바뀌었고, 억압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반항은 내세에서의 행복을 통한 위안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진실은 프랑스 공화국에서 소멸했으며, 정치주의, 무지한 페탱, 그리고 이익만을 추구한 라발에게서 종말을 고했다. 맑스주의 경제의 진실은 러시아혁명에서 ‘사회’라는 단어가 ‘국가’로 대체되고, ‘국제주의적 인류’의 이상이 민족주의적 애국심과 히틀러와의 동맹에 의해 대체되었을 때 소멸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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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진실은 함께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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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백만의 대중들에게 환상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 이것 역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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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대중들이 더 정직할수록, 권력추구행동은 감소할 것이다. 즉 인민대중들이 비합리적 환상에 고취되면 될수록, 개개인의 권력추구행동은 더욱 더 광범위하고 야만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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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거부한다고 해서 인간 존재의 합리적 규제를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활동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긴 안목을 가진, 심오하고 혁명적이며 진실한 활동, 즉 삶을 보장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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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민의 보호자가 되거나, 인민을 동정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 449~451, 454

인간은 자신의 성기능을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형을 경직시켰다.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에 대항하여 무장했으며, 그로 인해 생물학적 자기조절기능과의 접촉을 상실했고 이제는 생명력 있고 자유로운 것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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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문화적 인간은 무뚝뚝하고 기계적이 자발성이 없다. 말하자면, 문화적 인간은 자동인간으로 그리고 ‘두뇌기계’로 발전되었다. 그는 자신이 기계처럼 기능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자동적으로, 역학적-기계적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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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인간은 생물학적 경직화와 자연이 부여한 자기조절기능의 상실로 인해 독재적 전염병의 발발에서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성격적인 태도를 모두 갖게 되었다. 이런 성격적 태도는 위계적인 국가관, 사회의 기계적 관리, 책임에 대한 두려움,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 권위 중독, 명령에 대한 기대, 자연과학에서의 기계론적 사유, 전쟁에서의 기계적인 살인 등으로 나타난다. - 468, 469

기계론적 철학과 기계만으로는 살인을 저지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억압된 본성의 산물인 이차적 충동이자 인간을 동물과 구조적으로 구별짓는 단 하나의 중요한 특성인 사디즘을 이용하게 된다. - 470

방해물이 없으면 식물은 태양을 향해 똑바로 위로 자라기 마련이다. 이때 그 식물은 ‘건강’하며, 식물의 발육은 ‘자유롭다’. 그러나 만약 전나무 묘목이 잡초가 우거진 곳에 놓인다면, 그 묘목은 잡초에 둘러싸여 잎도 없는 구부러진 줄기로 자라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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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잡초가 없는 땅에 떨어진 새로운 씨앗들은 모두 처음부터 자유롭고 풍성하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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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시점에서는 사회 안이나 밖에서의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상황의 영향력으로 인한 왜곡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자기조절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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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물리학적으로 파악할 때, 히틀러주의는 인민대중 속에 있는 기계적 기계주의와 신비적 비합리주의가 합쳐져 가장 발전한 형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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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의 생물학적 경직성은 더 이상 제거될 수 없으나, 그들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생명력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공간을 획득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매일매일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그들이 30년 동안 생물학적으로 갱신될 것이며, 파시즘적 왜곡의 흔적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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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탄생한 미래의 세대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이전 세대의 생물학적 경직화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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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으로 경직되고 기계화된 인간이 사회적인 자유와 자치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자유의 병기고 속에 있는 주된 무기는 새로운 세대 각각이 지닌 자유로워지려는 거대한 생명력이며, 본질적으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다. - 476~478

자유가 조직될 수 없는 것처럼, 노동민주주의도 조직될 수 없다. 나무, 동물, 인간의 성장은 조직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물학적 기능 때문에, 유기체의 성장은 자유라는 단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이 점은 사회의 자유스러운 성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성장은 그 자신에 의해 조절되며 따라서 어떠한 입법이나 규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482

그에게는 권력이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는 자동차를 만들 수도, 치료혈청을 만들 수도, 성층권을 비행할 수도, 아이를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노동하는 과학적 인간은 무기가 없이도 살아가고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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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일반적으로 ‘무엇에 반대하는 존재’라는 특징을 갖는다. 실천적으로 생산적인 것은 정치가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든, 아니면 그것에 대항하든 간에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지 정치가들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 495, 500

노동하는 인간이 ‘사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살고 있는 곳에서 정치가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한다. 노동하는 평범한 인간이 ‘노동의 즐거움’ ‘작업규칙’ ‘작업배치’ 그리고 ‘협동’을 느끼는 곳에서 정치가는 ‘규율’이나 ‘훈육과 질서’를 생각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발적인 예절’과 ‘자연스러운 생활 감정’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고 활동하고 싶어하는 곳에서, 정치가는 ‘도덕’과 ‘의무’를 생각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남편, 부인 그리고 아이들 사이의 사랑’을 즐기고 있고 즐기고 싶어하는 곳에서 정치가는 ‘가족의 이상’을 이야기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욕구의 충족’과 식량 공급을 소박하게 바라는 곳에서 정치가는 ‘경제와 국가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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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비합리주의에 의해 심하게 방해받지 않는 노동하는 인간이 합리적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바로 그 생활영역을 정치가는 비합리적으로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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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국가의 권위주의적 규율은 항상 자연스러운 사회성과 노동의 즐거움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에서 이것을 잘 볼 수 있다. 즉 권위적 국가규율은 사회를, 가정의 강제적 신성시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 간의 사랑을, 강제적 도덕성은 생활의 기쁨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예절을, 그리고 정치가는 일하는 사람들을 파괴해 왔던 것이다. - 507~508

만약 다양한 형태의 정서적 전염병만이 존재했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 전에 몰락해 버렸을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신비주의적 의식, 군사적 권력기구, 외교적 논쟁 중 어떤 것으로도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도, 생활중심지 사이의 교통을 유지할 수도, 거주지를 제공할 수도, 질병을 치료할 수도, 어린이의 양육을 보호할 수도, 자연의 비밀을 해명할 수도 없다.

노동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정치적 이데올로기, 신비주의적 의식, 외교적 책략은 사회적 비합리주의의 영역에서만 필요하다. 사랑, 노동, 지식에 의해 지배되는 실제 생활의 영역에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삶에 필요한 기능은 스스로 만들어낸 법칙에 복종하며, 어떤 비합리적 이데올로기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이념’, ‘문화적 가치’, ‘정치적 강령;’, ‘정신적 태도’, ‘신앙맹세’가 아니다. 사랑, 노동, 지식은 이것들 없이는 인간 사회가 하루도 존재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다. - 509

성생활의 억압은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 및 계급 전체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피지배계급보다 지배계급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난다. 성경제학은 지배계급이 다른 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디즘의 대부분이 주로 억압된 성에서 생긴 사디즘에서 옮겨왔다는 사실까지도 증명할 수 있었다. - 518

노동민주주의는 ‘노동자’ 개념을 산업노동자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노동민주주의는 삶에 필수적인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522

만약 정치의 본질을 더 쉽게 파악하고 싶다면, 수년 동안 전 세계를 숨죽이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히틀러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정치의 천재로서의 히틀러는 다른 어떤 사실보다도 정치의 본질에 대한 거대한 폭로이다. 히틀러에 이르러 정치는 최고의 발전단계에 도달했다. - 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