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2003, 개마고원
일상사에 접근할수록 연구자의 이론적, 방법론적 확실성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개별자의 경험과 행위를 이해하고 복원하는 과정 속에서 도덕적 가치기준마저도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악한 파쇼와 선한 반(反)파쇼라는 판에 박힌 도식이 해체되고, 연구자가 당대인들의 운명에 가슴 아파하면서 그들이 처했던 불가피한 조건들에 대한 이해가 커지고, 비겁하게 행동했거나 게으르게 타협하고 말았던 이유가 납득된다. 흑백이 회색으로 바뀌고, “단순한 사람들”의 일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지는 것이다. - 10
그렇게 독일사는 근대사회의 정상적인 발전 과정에 위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1914년까지의 독일사가, 다른 한편으로는 1945년 이후의 독일사가 “정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나치즘의 잔혹함과 야만성과 대량 범죄가 도대체 어떤 뿌리에서 나왔는가 하는 핵심적인 물음을 풀리지 않는다.
근대성과 야만성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인식 전략의 딜레마를 해소하려면, 그 두 가지 해석에 함축되어 있는 근대성과 진보, 기술적·경제적·사회적 발전과 인간성의 완성 및 해방의 결함 관계를 해체시키거나 아니면 적어도 비판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 12
“작은 사람들”의 모순되고 불투명한 경험에 집중하는 역사학에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첫째, 아우슈비츠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파쇼의 테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어찌하여 그것이 감내되었으며 부분적으로 지지를 받기도 했는지,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나치에 대한 저항이 어디에서 가능했으며, 1944년 7월20일의 군부 반역자들과 달리 권력 핵심부에 있지 못하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는지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다.
셋째, 체제에 대한 지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떤 종류의 일상적 태도와 기대가 “총통”의 그럴싸한 성공에 대한 환호로 이어졌는가를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넷째, 체제를 비판하거나 체제의 대표자들과 갈등을 벌이고 체제가 표방하던 정책의 특정 측면을 거부하는 태도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포괄적인 저항운동 나아가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나치가 그토록 주장해 마지않던 민족공동체에 함몰되어버리지도 않았던 사정 역시 도출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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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료를 접하면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보다도, 시민 자신의 독자적인 삶의 방식이 나치의 동원에 직면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제3제국의 경험은 독서와 스포츠 같은 여가활동, 학업과 직업활동, 의사소통의 방식에서 무엇을 의미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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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는 나치 체제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제3제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당한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은 나치의 도전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그리고 그 경험으로부터 그들은 어떠한 태도를 발전시켰고, 그 테두리 속에서는 어떠한 행동방식이 가능했으며, 어떤 방식이 채택되었는가? - 22~25
나치 집권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는 나치판 분서갱유의 끔찍한 사진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도서관이 유태인, 인문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외국인의 저술로부터 “정화”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그 “정화” 작업이 추후 12년 동안 독서라는 여가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1937년에 열린 에센 시립도서관의 전시회 포스터 한 장은 그것, 즉 일상의 문화적 야만행위를 설명해줄 수 있다. 그 포스터는 4년간 도서대출이 1/3 가량 감소한 것을 “치료-다독(多讀) 병의 감소”로 찬양하고 있다...나치가 추진했던 “직업활동으로의 복귀, 인민과 국가를 위한 정치 활동, 노동봉사단 참여, 군 입대” 등이 독서의 시간과 공간을 제약했던 것이다. - 26
나치의 노동정책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적인 양보를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불만에서 야기되는 위험성을 감소시키려던 겁먹은 시도였다. 나치의 테러 체제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사회적인 ‘뇌물 공여’에 입각하고 있었다. 이 현상은 경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메이슨은 나치의 내부 발언에 의거해 이에 대한 해석 틀을 제공했다...그에 따르면 노동계급에 대한 나치즘의 모호한 태도(정치적 반발에 대해서는 테러로 대응하지만 군수 잠재력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려는 자세)는 무엇보다도 1918년의 11월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럽의 패권을 둘러싼 미래의 투쟁이 국내의 불안과 혁명적 궐기의 가능성 때문에 위태롭게 되는 일이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노동정책은 일차적으로 국내 전선에 대한 예방적 안정화 정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채찍 이외에 당근도 필요한 노릇이었다. - 38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왜 파시즘에 대한 일차원적인 해석에 그토록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일까? 한 가지 원인은 분명히 파시즘의 독점자본주의적 “본질”에서 기타의 모든 변수를 도출하고 또 그에 종속시키는 데 그 어떤 의심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
그러나 나치즘의 “사회적 토대”의 특정 현상들이 1930년대와 1940년대 독일 사회가 재편되는 데 더욱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독점자본에 고착된 이론은 그러나 그러한 가능ㅅ어을 허락하지 않는다. - 39
나치당을 지지했던 기업가들은 소수였다...나치는 1933년 이후 노동운동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황기에 도달된 낮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뿐, 좌파의 예측과는 달리 노동자 임금에 대한 총공격은 감행하지 않았다. 기업가들의 소망에 상응했던 정부도 공화국 말기의 파펜Papen 내각이었다. - 41, 42
나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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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치 중에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대단히 위태로웠거나 혹은 아예 좌절해버린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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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삶의 계획이 전후(戰後)의 위기와 대공황으로 인해 그늘져 버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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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나 실패한 자영업자 혹은 보다 나은 교육과 사회적 상승의 기대를 접어야 했던 청년들이 위기의 일상에서 잃어버린 전망과 의미를 나치 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객관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참여는 삶을 보다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투쟁’과 운동을 통해 공허한 시간들을 채울 수 있었고, 스스로를 거대한 기계의 필수적인 부품으로 인식할 수 있었으며, 당의 사무를 보조한다거나 행진 대열에 서는 것에 고귀한 의미를 부여해 그것이 ‘지도자’를 위한 희생이며 ‘운동’의 최후 승리를 위한 기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순간에 그 모든 노고는 공적인 인정과 고소득의 직책으로 보상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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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은 또한 직업 활동에서 뒤처진 사람들과 실업자들에게 부족하게 마련인 사회적 접촉의 기회를 제공했다. 운동을 위해 화급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거의 자연적으로 인간관계의 망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나치당의 매력은 정책의 내용(당원들은 대부분 몇 가지의 구호밖에 몰랐다...)보다 운동의 형식에 있었다. 따라서 나치당 입당이 잘 성찰되고 충분히 논의된 정치적 결정이라기보다, 나치당을 사회적 접촉의 장이나 흥분을 자아내는 ‘운동’ 혹은 선동적으로 연출되는 의미체로 경험한 데서 비롯되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 44~46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입장하고 행진하는 돌격대원들과 당원들은 대중적 규율에의 참여를 고귀한 참여로, “운동”의 “의미”에 대한 증거로, 그 자신이 거대 행렬의 한 부분이 되는 체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행사의 절정인 동시에 그 행사에 대한 기억의 절정은 ‘지도자’를 대면한 ‘체험’이었다. 이 체험은 순간에 불과하거나 혹은 대부분 멀리 떨어져서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강렬한 체험이요 대단히 개인적인 체험이었다고 묘사된다. 이는 우리가 히틀러 개인의 카리스마에만 초점을 맞추면 지도자 숭배 현상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급박하게 진행되는 선전활동과 준(準)종교적인 의식으로 치러지는 당 행사에서, 나치 당 지지자들이 ‘전망과 기회가 결핍된 세대의 생활세계와 대조’되는 ‘격상된’ 의미 내용을 강렬하게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1933년이전에 나치당 지지자들은 가투를 통해 자신의 개인사적인 상처와 분노를 공격적으로 터뜨릴 수 있었다. ‘붉은 전선’과의 가투에 대한 사후적인 서술 방식조차 공격성을 타인에게 전가시키고 분출시키는 매커니즘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 48
새로운 형식의 성적 자유와 새로운 춤과 새로운 패션이 등장하면서 보수적인 문명 비평가들을 경악시키고 지방으로부터는 불신과 찬탄을 동시에 받았던 “타락한” 대도시적인 삶,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통탄의 대상이 된 “가치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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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변동과 위기의 그 복잡한 연관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것들을 몇 개의 구호로 축소시켜버렸다. 악의 근원은 바로 바이마르 ‘체제’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체제라는 개념 속에 근대성의 혼란과 위기로 인한 왜곡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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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구체적인 개인들 탓으로 돌려지거나, 아니면 신비화되었다. ‘음모’가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 음모’의 주역으로 전통적인 적(敵)들이 채택되었다. ‘유태인’ ‘볼셰비키’ ‘자본가’가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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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이 그러했으니 결론도 단순했다. 절망적인 현재는 오로지 ‘단발의 과격한 타격’으로만 해결될 수 있으며, 희생적이고 전투적인 ‘운동’이 바로 그것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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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최종목표’는 모호했고,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고 있는 삶의 “정상성”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정상성은 유토피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모두가 안전하고 존중받는 자기 자리를 갖는 정의로운 계층사회, 한마디로 ‘진정한 민족공동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혼란을 주거나, ‘음모’를 연상시키거나, ‘비정상적’이거나 종말론적인 ‘선한 질서’에 흠집을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한 상태였다. 그 외에도 ‘운동’은 맹목적인 활동 욕구와 비일상적인 모험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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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의 카리스마적인 운동에는 위기의 경험과 안전한 미래에 대한 선망과 공격성이 융합되어 숨 막힐 정도의 역동성을 창출했다. - 54~56
수백만 명이 나치즘에 의해 희생된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설명은 사소하고 진부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학살을 조직한 자들도 진부한 인물이 아니던가? 아이히만, 회쉬, 히믈러, 올렌도르프 같은 인물들은 ‘악마’라기보다는 회계원이나 기술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나치즘의 폭력은 유럽 내부의 ‘정상적인’ 전쟁과 특히 식민지 전쟁에서 나타났던 행위와 태도들이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출현한 것일 뿐이다. - 61, 62
나치의 경찰국가적 억압 때문에 비판은 작은 형태(소문, 유머, 귀 소문, 외국 언론 보도 내용의 비밀스러운 전달)로 이루어졌고, 다양한 비공식적인 일상적 소통 수단들(휴식 시간의 일터, 시장, 술집에서의 잡단이나 이웃 및 친지와 친척 간의 대화)을 통해 전달되었다. - 73
쾰른의 게슈타포는 1934년 10월에 이미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주민들에게는 공공연한 집회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용기가 없다. 그들은 밀고와 정보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판할 엄두를 내지 않는 것이다. - 73
친위대 공안국은 1942년 1월22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수많은 보도와 개별 보고를 종합해보면 현재 공식적인 선전수단의 효과가 근본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매커니즘이다. 부정적인 사건이 터지면 인민들은 공공 매체란 ‘공식적인 얼굴’만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언론을 최선의 정보 매체로 간주하지 않고, ‘정치적 연줄’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군인들의 설명과 소문 혹은 전선에서 온 편지 등을 가지고 ‘자기만의 정보’를 조합 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받아들여진다. - 74, 75
유대인 박해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는 단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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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 대부분은 유대인 박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유태인 박해를 원칙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았다. 조롱받고 억압받던 유태인들에 대해 연대감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몇몇 역사가나 언론인의 주장과는 달리 반유태주의는 결코 주민들을 나치즘으로 견인하고 통합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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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들에게 공공장소에서 노란색 다윗의 별을 부착하도록 한 것과 동유럽으로 추방하고 가스실에서 학살시킨 행위들은 여론 보고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학살에 대한 정보가 대단히 조심스럽게(따라서 친위대 공안국과 게슈타포의 정보원에게도 쉽게 포착되지 않을 만큼)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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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정의 밤과 달리 유태인 학살에 대한 독일인들의 충격이 크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선 학살이 독일인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근접 거리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명명백백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그러한 가공할 만한 범죄가 자행되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특히 독일인들은 연합군의 폭격에 따른 일상적 궁핍과 전선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 대무에 이미 오래 전부터 독일인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던 유태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해져버린 상태였다. - 80, 83~84
나치 정권이 오랫동안 여론으로부터 각별히 호평을 받았던 분야는 대외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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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군에 대한 반응을 놓고 1938년 브레슬라우의 사민당원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도로는 돌격대, 친위대, 히틀러 청소년단, 독일소녀단으로 가득했다.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그들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일 히틀러. 오스트리아는 이제 독일이다. 하일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이여’ - 84, 85
인민의 분위기는 독일군이 소위 전격전에서 승리를 거둘 때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 절정은 파리를 점령하고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찾아왔다. 평화에 대한 염원과 1차대전에서 4년 동안 제압하지 못했던 “구적(仇敵)”에 대한 승리가 맞물렸던 것이다. - 86, 87
그런 와중에서도 사람들은 수동적인 거부적 태도로 일관했을 뿐, 단호한 저항은 물론 봉기를 감행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으리라. 첫째,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동하던 나치 테러기구는 개인별 혹은 집단적 저항의 싹을 애초부터 질식 시켰다.
둘째, 전쟁의 부담. 특히 10시간 내지 12시가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와중에 끝없는 폭격을 견뎌야 했던 것은 사람들을 피로와 체념으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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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제3제국의 삶은 사회적 관계의 격심한 원자화를 초래함으로써 저항 행위에 필수적인 유대관계의 형성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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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불만’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다. 그것은 저항 행위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 88, 89
1938년 2월의 독일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전체 인민의 태도를 공식화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히틀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민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그는 일자리를 창출했고,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2) 현재의 상태에 대한 불만족은 광범하다. 그러나 불만족은 오직 일상적인 문제와 관련되고 있을 뿐이고, 현재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적대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
3) 체제가 이대로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널리 퍼져 있지만, 대안에 대한 무력감이 역시 그만큼 널리 퍼져 있다. - 90
독일인들이 1938/39년에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전쟁에 대한 공포 역시, 그토록 세련되었던 괴벨스의 선전조차 인민의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과 욕구(평화로운 삶에 대한 선망과 1차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기억)와 배치될 때는 불쾌감을 유발했다는 점을 나타낸다. - 95
여론이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대외정책의 내용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여론은 그 방법도 지지했다. 인민은 조심스럽고 타협적이며 모순적이었던 과거 10여 년간의 외교와 달리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효과적인 히틀러의 외교정책, 그 비타협성과 과격성, 그리고 그의 흔들리지 않는 합목적성이 외교적 성공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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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간다는 것이었다. 대외정책에 대한 인민의 지지는 성공, 힘, 웅비, 안전과 같은 주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요컨대 개개인의 소망이 민족적 성공에서 집단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로써 명예와 위대함에 대한 백일몽이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망명 사민당의 독일보고서 역시 1936년 라인란트 진군과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에 대해 보고하면서 인민이 그에 지지한 세 가지 측면에 주목했다. 독일이 세계의 무대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만족감, ‘과격한’ 성공을 위해서는 폭력적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 외교적 성공을 개인화하여 총통 신화가 구축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모든 사회계층, 특히 노동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신뢰와 위신을 얻었다...결정적인 것은 어떻게 오스트리아가 병합되었느냐가 아니라 병합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힘으로 병합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시되고 있다. - 96~98
나치 경제는 1936/37년부터 모두에게 ‘일과 빵’을 제공했고, 보다 고급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독일의 국민총생산은 1932년의 5백80억 마르크로부터 1937년의 9백30억 마르크로 증가함으로써, 그해에 ‘황금의 20년대’의 최고치인 1929년의 8백90억 마르크를 앞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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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성과가 비록 군수를 인플레이션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얻어진 것이고, 또한 그 때문에 미래에 대한 독일인들의 기대에 위태로운 음조가 깔리고 있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소득을 갖게 되었으며 증가하는 소비재 공급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 98, 99
나치의 국내 정치도 ‘질서’ 회복을 약속했을 때는 인민의 동의를 얻었다. 정부가 ‘강력한 수단’으로 질서를 수립하고 ‘철의 규칙을 동원하여 숙정(肅正)’을 하는 것이라고 약속하는 한, 테러, 수용소 감금, 공산당 당원 관리와 유태인 관리의 축출, 심지어 1934년 7월30일 이른바 룀 쿠데타에서의 학살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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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에 대한 외침은 위로부터의 테러에 대한 동의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서의 버팀목’으로서의 히틀러에 대한 광범한 지지가 총통에 의한 불법적 행위, 심지어 살인 행위마저 감수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1934년 7월30일 이후의 독일보고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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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1차 보고서 : 자신의 ‘최고 친구들’을 죽여버린 히틀러의 위신은 인민 대중에게서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졌다. 바이에른 각지의 보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히틀러가 그렇게 단호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행동은 그가 최선만을 원한다는 것, 그가 주변을 깨끗이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 100~102
나치의 선전은 위기에 찌든 바이마르 공화국이 만족시킬 수 없었던, 안전과 의미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일상의 욕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집권 이후에도 나치의 선전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실망으로 인해 일상 속에서 소멸될 수도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열광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과제로 했다.
이처럼 상승과 안전과 미래에의 전망에 대한 욕구와 제3제국의 냉엄한 일상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던 것이 총통 신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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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총통이 알았더라면’ 그가 정치적 반대파를 정리한 것처럼 그 모든 부정과 부패도 ‘강철같이 엄격하게’ 처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치 정권이 엄청난 개별적 비판에 직면해 있던 순간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인기는 변치 않았다. 우리는 이 현상을, 인민 다수가 체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합의하고 있었음을 표현해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103
1934년 4월과 5월, 독일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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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투덜대고 탄식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돌프 히틀러를 믿는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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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체계적인 총통-선전의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히 그가 발휘하는 개인적인 흡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힘은 단순한 사람들에게 잘 먹혀든다.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 중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견된다. - 105
카리스마적인 총통 신화는 새로운 실제 혹은 가상의 성공을 끝없이 추구함으로써 독일인들이 일상의 경험을 통해 망상에서 깨어나는 일을 막아야 했다.
체제의 부정적인 현실적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덮어버리기 위한 또다른 매커니즘이 바로 적의 생산이다. ‘민족공동체’를 ‘담금질’...하자면 ‘공동체의 적들’을 배제시키는 첨예한 구분선이 필요했다. 그 적들 가운데는 유태인뿐만 아니라 집시와 소위 반사회적인 인간형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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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체제에 대한 합의는 종종 언급되는 대로 나치의 테러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테러가 ‘공동체의 적들’을 겨냥하는 한 그로써 소위 ‘질서’의 재건에 기여하는 한 테러에 정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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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 신화의 본질적인 의미는, 위기에 찌들고 사회적 지향 모델을 상실해버린 인민의 정상성에 대한 희구가 그 속에서 표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 108, 109
인민 사이에 광범하게 퍼져 있었던 수동적 합의(즉 체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상의 ‘의무’를 수행하려는 자세)는, 나치 체제가 공격하는 동시에 촉진했던 과정, 즉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에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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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가 나치의 순응 압력에 직면하여 이루어진 도피 때문만은 아니었다...이 시기에 독일 산업사회는 미국식의 근대적 대중소비사회로 이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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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는 물론 텔레비전은 인간을 더욱더 개별화시키고 사적으로 만드는 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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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전쟁의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는 교조적인 나치 이데올로기와 항전 구호보다는 라디오를 통해 ‘비정치적인’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 인민의 충성을 얻어내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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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인 저항을 억제하고 체제의 요구에 둔감하게 만들던 것은 바로 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였다. 그리고 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는 자기중심성과 자기만족, ‘무감각과 쾌락 추구’의 혼합으로 이어졌다. 이는 어떤 사람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세계? 사람들은 세계로부터 눈과 귀를 닫고, 갈수록 꼬여가고 풀리지 않는 그 모든 끔찍한 일들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않으려 한다. 그 누구도 이 모든 것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예 묻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사올지 고민하는 힘든 일상에 열중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공허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 110~114
노동운동 기관들이 나치에 의해 신속하게 장악된 경찰 및 나치 돌격대로부터 거듭 공격당하고, 신문이 금지되고, 건물이 압류되고,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 사건과 그 직후 반포된 ‘민족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긴급명령’을 계기로 체포조들이 맹위를 떨치고, 1933년 3월 노동자 구역에 대한 돌격대의 공격과 노동운동 요원에 대한 자의적인 체포와 고문이 전국의 모든 도시를 휩쓸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1933년 1월30일에 발생한 사건이 단순한 정부 교체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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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1933년 3월에 공산당을(당직자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발동함으로써) 사실상 금지시킨 뒤, 같은 해 5월2일에는 노조를 파괴했고 6월22일에는 사민당마저 금지시켰다...집권한 지 반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치는 세계 최고의 노동운동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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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그들은 사회주의와 휴머니즘 문헌, 노동자 스포츠협회의 축구공, 음악협회의 악기, 정당의 당원명부, 불법 문건, 프롤레타리아트 자위대의 무기를 압수했다. 그러한 수색 작업이 협박, 모욕, 구타, 자의적인 체포 등으로 얼룩지는데다가, 개별적인 지역 돌격대가 즉흥적인 보복과 테러 공격을 가하고 심지어 ‘독자적인’ 수용소까지 설치하자, 그 직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안전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아성조차 불안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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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전단을 받아 쥘 것이냐 불법자를 집에 재워줄 것이냐 하는 것이 개인적인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라도 집을 수색당하고 나머지 가족마저 나치의 테러에 노출시키고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 되었다. - 148~152
외국 방송을 청취한다거나, 체제 비판적인 농담을 한다거나 혹은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계속 견지하는 등 금지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나치는 그러한 비순응의 태도를 처벌했다. 그리고 나치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장악하고 ‘민족의 동지’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주장함으로써, 나치의 규범에서 이탈하는 개별적인 비정치적 행위마저 객관적으로 체제 전체에 대립되는 것으로 몰아갔다. - 176, 177
나치는 청소년들에게 대단히 집착했다. 나치는 청소년들을 나치즘의 이상으로 맞게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있을 전쟁의 총알받이로도 필요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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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청소년들을 가급적 빠짐없이 히틀러 청소년단, 제국노동봉사단, 군대에 연이어 동원하고 그들에게 철두철미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교육하는 동시에 군대식 명령체계에 편입 및 예속시킴으로써 군인적인 행동양식을 주입하려했다. 또한 적극적인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에게 대대적인 특권을 부여하여 미래의 핵심적인 나치로 성장시키고자 했다. - 212
최근 몇 년 동안 발간된 제3제국 시대의 청소년기와 학창 시절에 대한 회고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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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학교 학생인 페터 브뤼크너는 1937/38년경까지는 나치즘의 요구를 피할수 있었다. 그러나 1938년에 교과와 기숙사 생활에 대한 나치의 간섭이 강화되자 그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혼자가 되고 말았다.
나치즘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던 나는 뜻하지 않은 길목에서 그것과 마주쳤다. 그것은 바로 나치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요구가 자연스럽게 침투해 들어간 체조와 체육 과목이었다. 히틀러는 ‘남성적인 힘을 강고하게 구현하는 것’을 새로운 이상적 인간형으로 선언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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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움직이고 그렇게 성욕을 억제하려는 젊은이들의 욕구, 기꺼이 신체적 경쟁에 뛰어드는 그들의 성향이 나치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제3제국’의 운동장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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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39년 겨울에 벌써 나의 기량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체육시간 뒤의 육체적인 나른함을 즐겼고, 눈 속을 달리는 데 기쁨을 가졌으며, 심지어 체조에서도 어느 정도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마조히즘적인 절정은, 내가 하필이며 ‘육체 단련’ 분야에서 질서와 명령에 열광ㅇ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체육관은 제 각각의 운동기구를 가지고 달리고 소리 지리는 학생들로 뒤죽박죽인 장소였다. 그러다가 선생의 호각소리 하나에 우리는 갑자기 제자리에 선다.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가운데 열을 지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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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할 회고를 보면, 자신의 사회적 환경이나 경험으로는 결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치즘에 경도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나치즘이 중요시하는 특징적인 개념과 행위 준칙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잘 드러난다.
우리 학급에서 [나의 투쟁]을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인용에서나 이용하는 정도였다. 우리는 나치 이데올로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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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정치적으로 기획되었다. ‘조국’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떨어지거나 독일의 명예와 위대성이 운위되기만 하면, 생각을 포기하고 반듯한 자세로 ‘예’라고 말하며 명령과 복종 외엔 아무것도 없는 인간으로 기획되었다. - 215~218
특히 모든 교사들이 수업에서 1차대전에 관한 이야기로 끊임없이 ‘양념을 쳤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전쟁은 영원히 현존하는 당연지사가 되었다. ‘마치 역사상 평화로운 시기는 없었던 긋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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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정상’이고 폭력도 ‘정당’하다. 성공하면 특히 그렇다. 1936년부터 1939년에 이르는 시기에 히틀러가 거둔 외교적 성공으로 말미암아 독일인들은 ‘베르사유의 치욕’을 씻는다는 ‘정당한 관점’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면서 한 판에 모든 것을 거는 모험적 행위야말로 성공에 이르는 확실한 비법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갔다. - 218, 219
나치 청소년 정책의 중심은 히틀러 청소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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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말에 이미 히틀러 청소년단은 10세에서 14세에 이르는 청소년의 47%(소위 독일 소년단)를 가입시켰고, 14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청소년의 38%(좁은 의미에서의 히틀러 청소년단)를 포괄했다. 그에 비해 10세에서 14세에 이르는 소녀의 15%(연소 소녀단)와 15세에서 21세에 이르는 소녀의 8%(“독일 소녀단”)가 조직되었다. - 222
1930년대 말에 서부 독일에서 최초의 “에델바이스 해적”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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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변의 휴양지로 주말여행을 떠나, 인근에서 모여든 다른 그룹과 만나 야영하고 노래 부르고 토론하고 히틀러 청소년단의 순찰대를 ‘물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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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해적은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들이 저녁 시간이 주말에 모여 히틀러 청소년단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시간을 즐기면서 자생적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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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은 17,8세면 제국봉사단에 가입해야 했고, 그 뒤에는 군대에 입대해야 했으며, 거꾸로 14세에는 학교를 떠남으로써 히틀러 청소년단의 매일 같은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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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과 현실의 자율적 공간이 커진 그들로서는 18세까지 히틀러 청소년단에 참여해보아야 얻는 것이 별로 없었다...청소년들은 여가활동 대신 반복적인 군사훈련과 멍청한 복종 연습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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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청소년단 스스로가 잘못이다” 뒤셀도르프 에델바이스 해적이 내뱉은 말이다. 그 모임의 구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게 영원한 투쟁을!“이었다. ”청소년단으로부터 내가 받은 모든 명령은 협박이었다“ - 229~231
인원은 보통 청소년 십수 명과 처녀 몇 명이었다. 소녀들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성적으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던 히틀러 청소년단 및 독일소녀단과 달랐다. 저녁 모임이나 주말 하이킹에 소녀들이 있었기에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성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거의 강압적으로 성을 배척하고 있던 나치 대표자들이나 부모 세대보다 훨씬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 문화는 당시의 공식 보고들이 믿거나 혹은 믿게 만들고 싶어 했던 것처럼 방종을 흐르지는 않았다. 공식 기관들은 청소년들에게 성적 방종을 덧씌움으로써, 청소년들이 (성적·범죄적) 황폐화, (조직과 권위에 적대적인) 반항, (정치적) 적대의 감각 구도에 빠져 들었다고 주장했다. - 232, 233
자기 자신과 주거 및 노동의 일상 사이에 그렇게 가급적 자주 가능한 한 많은 공간을 두고자 했던 중요한 동기는, 어른들의 ‘교육적’ 간섭으로부터 그리고 일상적 경험 속에서 그것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던 나치 기관들에 의한 밀고와 첩보와 명령과 처벌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였다. 성인 세계의 강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청소년 운동의 오랜 동기가 나치에 들어와서 더욱 강화되고, 또 정치적인 함축을 갖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234
에델바이스 해적의 노래 몇 개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리라.
히틀러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답니까
우리는 히틀러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
히틀러의 권력은 우리를 오그라들게 만들고
우리는 아직 사실에 묶여 있어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는 다시 자유롭게 되리
사슬을 부수게 되리
...
라인과 루르에서 우리는 전진한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투쟁한다
순찰대를, 그것을 박살내리
에델바이스가 전진한다, 길을 비켜라
...
옛날에 그랬듯이 몽둥이를 휘둘러
히틀러 청소년단과 돌격대의 골통을 박살내자 – 236, 237
그들이 히틀러 청소년단, 특히 그 순찰대를 두들겨 패고, 제복 입은 자를 덮치고, 나치 당직자에게 창피를 주고 모욕을 가한 일은 굉장히 많았다. 사실 그런 일들이야말로 해적단의 주된 업무였던 것 같다. 동기는 대단히 복잡했다. 우선은 ‘한방 갈김으로써’ 무료함을 없애는 동시에 긴장을 조성하려는 마음이 컸고, 그 다음으로는 일상에서 혼자 그 많은 나치 기간과 공직자와 명령권자와 부딪칠 때 만나게 되는 그 모든 권위를 없애버리고픈 욕구가 중요했다. - 239
게슈타포와 히틀러 청소년단은 개인별 경고, 일제 단속, 일시적 구금(공개적인 표식으로 머리를 빡빡 밀어서 방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주말 구금, 훈육 기관과 노동 수용소 혹은 청소년 수용소 수감, 형사재판 등으로 억압했다. 그들에게 걸려든 청소년은 수천 명에 달했고,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이 억압 속에 죽어갔다. 예컨대 1944년 11월에 쾰른의 에델바이스 해적의 소위 수괴들이 처형되었는데, 그들 중에서 16세 소년 바르텔 슁크는 에렌펠더 휘텐스트라세에서 공개적으로 교수되었다. - 241
에델바이스 해적의 행동이나 태도 뒤에 있는 경험의 지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그들 대부분이 이미 직업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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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해적들의 아버지의 직업을 살펴보면, 해적들이 ‘타고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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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마도 아버지의 권위가 탈각된 청소년들이 주말여행을 떠나거나, 상급자에게 얼굴을 붉히고, 청소년 보호령을 위반한 채 밤에 동료들과 밖을 배회하기가 용이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 같다. - 243, 245
나치가 1933년 초 몇 달 동안 좌파를 가혹하게 억압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폭력과 모든 힘을 동원하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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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두 테러를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한 비상사태의 수단으로서, ‘민족공동체’의 이방인들, 혹은 이방인으로 규정된 자들을 배제시키는 수단으로 동의하고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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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 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長髮)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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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 맞지 않았다는 판에 박힌 좋은 기억이, ‘절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302~304
나치는 소위 직업 범죄자들과 반사회적은 집시들과 ‘상습적인’ 동성연애자들을 수용소에 장기 수용함으로써 인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나치가 정적들을 고문하고 구금하는 것을 비판 했던 사람들도 그것을 지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305
젊은 날의 히믈러는 ‘무절제한’ 성 혹은 ‘의무를 잊은’ 행동을 볼 때마다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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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의 문학은 그를 잡아당기면서도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종래에는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는 그의 결심을 강화했다. 춤도 마찬가지였다. 춤을 배웠지만 그는 사회적 의무와 사교의 확실한 테두리 내에 꼿꼿하게 머무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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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히믈러가 ‘삶’에 대비해 갖게 된 지침은 바로 그 아버지의 성공 비결이었다. 성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성취욕을 전통적인 사회적 계서의 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비판적인 권력 수용, 성실히, 과도할 정도로 성실히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권력자의 총애를 받는 것,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상류사회에 출입할 때 자동적으로 행동거지를 바로 잡아줄 엄격한 행동 규범의 내면화, 이러한 것들이 히믈러가 부모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받았던 행동 지침이다.
히믈러의 아버지는 교사로서의 그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자식의 일기를 읽고 교정했다. 어머니는 충족되지 못한 부부애와 남는 에너지를 자식에게 쏟았고, 그 끈질긴 배려는 자식의 하루를 세세히 규범화된 일상 속에 묶어 그 테두리 내에서만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하인리히에게 청결로부터 예의에 이르는 수많은 규칙을 주입했다.
그런 부모와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유약함을 숨겨줄 권위와 복종이라는 외적인 무기와 탱크와 같은 육체를 필요로 하는 인격이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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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즐기는 것에 재능도 없었고, 즐기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그런 일은 하더라도 가족에게 비밀로 했다. - 312~314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수용소에 수감된 청소년들이 겪은 일은 괴팅겐 인근에 위치한 모링겐 청소년 수용소의 상황으로 예시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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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청소년, 성격적으로 변종인 청소년, 정서 결핍에 시달리는 청소년, 행동 과잉인 청소년, 쉽게 흥분하는 청소년, 형질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청소년,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 치유 불가능한 트러블메이커 청소년, 가차 없는 사기꾼 청소년이 이곳에 수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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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적으로 약해빠지고, 변덕스럽고, 행동 충동이 결여되어 그 어떤 적성검사도 통과하지 못하고 기질적으로 반드시 탈선하는 청소년들도 이곳에 수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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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불안정하고, 의존적이고, 경박한 청소년들도 이곳에 수감된다. - 316~317
나치의 폭력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선언된 타민족이나 배신자로 낙인찍힌 정치적 반대파에게만 향했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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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쇼의 인종주의가 새로운 사회질서, 사회의 내부적 재편을 위한 모델이었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사회란 반항적인 청소년, 작업장에서 빈둥거리는 노동자, 반사회적인 인간, 창녀, 동성애자, 직업적으로 무능하여 업적을 내지 못하는 사람, 장애자 등 규범에 어긋나는 모든 사람을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도려낸 사회이다. - 319
모든 악의 뒤에 숨어 있는 ‘유태인 원흉’이라는 이미지는 상호모순적인 개별적인 인종주의적견해들과 모호한 문명적 공포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모두를 집중시키는 정치적 목표가 되었다. 근대 유태인들이 통일적이지 않다는 현실적 경험에 직면한 그들은 오히려 극히 다양한 표면적인 현상들 뒤에 혐오스러운 본질적인 유태인이 자리잡고 있다는 신화적 주장을 펼쳤다.
문화적으로 동화된 지적인 유태인들은 근대성이라는 적을 구현하는 존재였고, 종교적인 정통 유태인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반유태주의의 이미지에 잘 맞아떨어지는 존재였으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유태인들은 ‘착취 자본’과 자유주의 모델이었고, 유태인 사회주의자는 혐오스러운 ‘볼셰비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며, 동유럽 게토의 이질적인 문화로부터 독일로 건너온 유태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문명적, 식민주의적 우월감을 표출시키기에 적절한 공격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종교적·민족주의적 입장 때문에 유태인의 특정 측면을 공격했던 전통적 반유태주의와 달리, 나치당의 반유태주의는 ‘유태인 그 자체’라는 추상적인 목표, 즉 인종주의의 가공 형상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나치 반유태주의의 그러한 총체화 면모는 유태인 문제의 총체적인 ‘최종적 해결’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목표로 삼은 ‘유태인 그 자체’는 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해석의 명백한 현실성 부족을 신화적으로 극복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321, 322
노동교육소의 주된 목적은 수감자에 대한 ‘교육’에 있지 않았다. 그 목적은 노동 대중 일반에 대한 계고였다. 노동 대중은 상급자에게 도전하거나 작업 속도를 늦추거나 병가를 자주 얻을 경우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 것인가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 329
노동교육수용소의 잔인한 일상을 보면 일탈적인 습성을 가진 ‘민족의 동지’를 ‘교육’한다는 것의 초점이 전적으로, 난폭성을 통해 인간의 의지를 깨부수고 처벌의 강도를 통해 나머지 사람들을 경고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음이 드러난다. - 330
나치가 내세우던 유전학적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에 인종적 특징을 규정하던 핵심적 요소는 오히려 인간의 사회적 태도였다. 이는 제국건강청 산하 인종유전학 연구소가 1944년7월10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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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유럽의 집들의 특징은 가족 군을 이루어서 지속적으로 이주하고 방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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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몸짓, 정서, 태도 일반은 그들이 이종(異種), 특히 집시임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도시적인 태도로 위장하는 것, 본질적으로 밋밋한 감정적 움직임을 그때그때의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 사실적인 고려와 추론 작업에서 판단력과 통찰력이 취약한 것, 내적인 불안정성과 내적인 기반의 결여 등의 사항들은 그 모든 교활함과 노회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핵에 존재하는 고도의 순진성과 원시성을 입증해준다. 그러한 특징은 노동 의미를 훈련받은 정치적인 유럽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가족 X의 언어 표현에서 나타나는 특징, 협상하는 방식, 분위기를 바꿔가며 구애하고 호소하는 방식은 우리와 종이 다른 집시의 원시성을 드러낸다.
인종적 유전형질이 혼합된다는 나치의 이론은 인간을 ‘교육 가능한 자’ ‘교육이 어려운 자’ ‘교육이 불가능한 자’로 단계적으로 범주화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분류가 현실적으로 일상적인 태도의 관찰에 의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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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인종주의의 양대 요소는 생물학적인 심증을 일탈적 사회적 태도의 징후를 통해 확인하는 것과, 특정 소집단의 행동 방식을 규범으로 확대시켜 거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경향이었다. - 332, 333
제국내무장관 프릭은 강제 불임을 가능하게 했던 1933년의 ‘유전병을 가진 후세의 출산을 막기 위한 법’을 공포하면서, 출산을 ‘등급화’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우리는 용기를 발휘하여 우리 국민들을 유전적 가치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
그런데 불임의 기준은 결국 일반적인 ‘사회적 유용성’이었고, 그것은 다시금 근면, 순응, 질서, 성취동기 등의 지배적 규범을 따르느냐의 여부였다. - 334
뒤셀도르프 게슈타포에 남아 있는 문서에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추적당하던 인물들을 분석해 보면, 게슈타포가 수사한 사람의 최소 1/4이 주민들로부터 밀고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게슈타포와 특별법정은 실제로 이웃과 동료 광부 혹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남 사람과 친지에 대한 밀고로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밀고에는 게슈타포를 개입시킴으로써 개인적인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점 또한 어렵지 않게 식별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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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실내악 취향을 의심한다'.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자에 대한 감시. 게슈타포 문서철에 묶여 있던 보고서 한 장.
나치당 라인란트 지구당 서부 에센 분소에 접수된 이 보고서에는 발터 G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생년월일, 직업, 소속 기업, 공산당 활동 전력, 나치 조직에 대한 미온적이었던 면모, 나치 월동 구호단에 대한 기부 여부, 나치 사회복지회 전단 소장 여부, 가족 구성원의 나치 조직 가입 상황 등이 기록된 뒤 마지막 13번째 항목에 '그의 실내악 취향이 의심스럽다. 우리는 아직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고, 시간 부족으로 인해 그 방향으로 조사를 하지 못했는데, 게슈타포가 그가 찾는 클럽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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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이라고 하는 최후의 공간에서조차 자기 규율과 주변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아첨 섞인 충성과 솔직한 거부감 사이에서의 계산적인 저울질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율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브레멘의 어떤 노동자는 그러한 경험을 요약하여, ‘나는 나 자신의 등조차 더 이상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 372, 373
나치를 그저 따라나선 사람이나 나치에 유보적인 사람 모두에게, 일상생활이 원자화되고 사회적 관계가 해체되고 인지방식이 고립화되고 인식 지평이 위축될, 그리하여 사회적 행위 능력이 망실될 위험이 닥쳐왔다. 이러한 경향은 방공호에서 맞이하던 전쟁 일상의 문드러지는 듯한 경험 속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결국 판에 박힌 일상의 일들을 겨우 해내는 가운데 지쳐버리고 행위 능력을 빼앗겨버린 나머지 마지막에는 그러 오로지 하나,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끝나기만을 기대하는 무감각한 전시의 독일인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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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사민당의 독일보고서는 이미 1935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치 대중조직들의 목표는 모두 동일하다. 노동전선이든 기쁨에 의한 힘 혹은 히틀러 청소년단이나 노동감사든 그 모든 조직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쫓고 있다. ‘민족의 동지들’을 ‘포섭하라’ 혹은 ‘돌보라’ 그들을 방치하지 말 것이며, 도대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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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활동을 벌이면서 나치가 공언한 목표는, 그 어떤 진정한 공통성도, 그 어떤 자발적인 결사도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전선 총재 라이는 최근에, ‘민족의 동지들’은 사생활이 없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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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점 조직의 목표는 인민 하나하나를 완전히 비독립적으로 만드는 것, 자발적인 결사라면 극히 원초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싹부터 질식시키는 것, 인민 하나하나를 동일한 의식 혹은 동일한 기분을 갖거나 느끼는 사람들로부터 멀리하는 것, 그들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국가 조직에 묶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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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쇼적 대중 지배의 본질은 강제로 조직화하는 동시에 원자화시키는 것이다.
전쟁의 와중이던 1942년 11월에 작성된 공산당의 저항 전단도 독일인들에게 저항 의지가 부족한 원인을 사회적 관계와 인지 방식과 행위 형식의 파편화에서 찾았다.
우리 인민은 왜 전쟁과 그에 책임 있는 히틀러 도당들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보다 강력하게 표현하지 못하는가? 오늘날의 인민 다수가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히틀러는 왜 여전히 인민의 이름을 오용하면서 인민의 이름으로 비열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 간단하다. 인민이 인민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연대하여 적에 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우리 인민을 개인들 더미로 변화시켜, 서로 싸우고 서로 공포를 가지며, 모두가 특별한 제복을 입고 팔뚝에 계급장을 달고 설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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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민은 셀 수 없이 많은 카스트 계급과 혈족들로 분열되었고, 히틀러 정권은 한 인민 동지를 다른 인민 동지와, 한 인민 계층을 다른 인민 계층과 대립하도록 조종했다. - 374~376
제3제국과 그것에 의해 연출된 세계대전의 끝에 남게 된 것은 염원하던 ‘민족공동체’가 아니었다. 사회는 파편만 남았다. 폭파된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적 결속 역시 폭파되었다. - 376, 377
나치즘이 결과한 것들 중의 하나는 정치사회적으로 복속된 주민들을 상호 대립하는 다양한 특권적·의사 특권적 집단과 개인으로 파편화시키고, 그들을 관료제적 자기 논리 속에서 경직되어버린 대중 조직과 공허한 대중 의식(儀式) 속에 총괄했다는 것이다. - 380
우리는 파쇼의 역사를 경험함으로써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 자신과 다른 의견 및 다양성에 대한 기쁨, 낯선 것에 대한 존중, 혼란스러운 것에 대한 관용, 종말론적인 총체적 신질서의 실현 가능성과 소망스러움에 대한 회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자신의 규범에 문제를 제기하는 타인에 대한 개방성과 학습 능력 등이 그것이다. - 381, 382
‘민족공동체’라고 하는 공허한 이념이 지속적인 긍정적 통합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회피 전략을 채택했다. 처음에는 대중 의식(儀式)을 통해 공동체를 상징하는 전략이, 그 뒤에는 사회적인 양보와 비정치적인 오락이, 마지막으로 내외의 적들을 끝도 없이 새로이 적시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한계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전략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 384, 384
나치의 민족공동체 유토피아는 ‘좋은 형질’을 양육하고 ‘타락한 형질’은 제거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으로 균질적이고 사회적으로 순응적이며 업적 지향적인 계서화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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