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라면, 안토니 비버의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2차 세계대전 가운데서도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졌던 독일과 소련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전투에 참여했던 소련과 독일 군인들이 겪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흔히 전쟁이라고 하면 단순히 누가 이기고 졌냐를 따지기 쉬우나, 이 책을 읽다보면 군인들의 두려움, 고통, 외로움, 슬픔, 그리움, 간절함 같은 것들이 느껴집니다.
군인들의 고통만 봐도 전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삶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는 이 짓을 왜 하냐는 겁니다.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무서운 전쟁인지...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소련에서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천6백만명 가량이 죽었다고 합니다. 4년 사이에 한국 인구의 절반가량이 죽은 셈이지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의 슬픔, 외로움, 아픔 등은 얼마나 클까 싶습니다.
아침해가 세상을 밝히기 시작하는 시각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전쟁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인간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대하는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다시 한 번 꿈꿔봅니다.
안토니 비버,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서해문집, 2004
일반적인 검토 방법으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대규모의 전투를 단순히 군사적인 맥락으로만 연구할 경우 그 뿌리에 깃든 현실을 충분히 알 수 없는데, 이는 히틀러가 라스텐부르크의 ‘볼프산체(늑대굴)’에 걸려 있던 전황 지도에 집착하며 환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탓에 그의 군대가 어떠한 고난을 겪는지 알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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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군대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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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전투의 본질과, 그것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전투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 5
히틀러의 연설에는 200명이 넘는 고급장교들이 참석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개전(開戰)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번 전쟁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관의 충돌”이자 “볼셰비키 인민위원과 공산주의 인텔리켄치아를 멸종시키기 위한 전쟁”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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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사학자들은 나치의 선전이 워낙 효과적이어서 독일군 병사들의 눈에는 소련군이 개전 초기부터 도덕적으로 극심한 타락상을 보이는 등 인간성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세뇌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유대인 대량 학살을 빨치산에 대한 후방 보안 조치와 같은 차원으로 격하시켜 독일군 내부에서 그에 대한 반대 의사가 거의 표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독일 국방군이 ‘동부전선’에 대한 국제법을 무시하는 처사에 대해서는 많은 장교들이 반기를 들었지만, 대량 학살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종 멸절 정책의 일환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뒤에도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렸다. - 33
스틀린과 공산당의 각급 기구는 더 이상 구태의연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구호를 되풀이해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얼른 간파했다. 독일의 침략 이후 처음으로 간행된 [프라우다]의 기사 제목에 ‘위대한 애국전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가 하면, 스탈린 자신도 나폴레옹에 대항한 ‘애국 전쟁’의 후계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해의 10월 혁명 기념식에서는 알렉산더 네브스키...등 프롤레타리아와는 별 관계가 없는 러시아 역사의 영웅들이 거론되기까지 했다. - 50
스탈린의 개인적인 명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인구의 대다수가 정치에 무지했다는 사실이 큰 작용을 했다. 일부 특권층이나 지식인 계급을 제외하면 스탈린이 독일의 침략 징후를 외면한 탓에 6월의 참극이 빚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 50
스탈린 본인이 7월3일자의 방송을 통해 자신에게 비난이 돌아올 가능성을 모두 차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국민을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소련 땅 깊숙이 진격해 오는 독일군 때문에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 50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논쟁은 부차적인 문제일뿐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자극은 바로 본능적인 애국심이었던 것이다. ‘모국(母國)의 부름!’이라는 제목을 단 징병포스터에는 총검을 배경으로 군인 선서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 51
핵심 전력을 구성하는 보병 사단은 대개 하루에 20마일 남짓 전진하였는데, 저녁 무렵이 되면 병사들의 군화는 한여름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잘 구운 쇠고기처럼 말랑말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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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모와 소총, 탄약과 참호를 파는 데 필요한 도구 등을 포함하여 55파운드(약 25킬로그램)에 달하는 장비를 지고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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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완전 군장을 갖춘 보병들은 너무나 지친 나머지 졸면서 행군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 56
볼프산체의 히틀러는 곧잘 자기 부하들이 점령한 지역을 표시한 작전 지도를 들여다보곤 했다. 세계에서 가장 훈련이 잘 된 군대의 통수권을 한 손에 장악한 그 몽상가의 눈에는 패배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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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 사령관 폰 보크는 휘하에 150만의 병력을 거느렸지만 그의 기갑 사단들은 부품 공급이 원활치 않아 전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공격 전날 참모 회의를 소집한 그는 러시아 혁명 기념일인 11월7일까지 소련의 수도를 함락시켜야 한다고 시한을 정했다. 야심만만한 보크의 가슴속에는 모스크바를 점령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58
한겨울이 되어 눈과 세찬 바람이 몰아닥치자, 수은주는 영하 20도 밑으로까지 뚝 떨어졌다. 독일군의 탱크는 엔진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일선의 보병들은 기진맥진한 가운데서도 적군의 포탄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추위를 막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다. 땅이 단단히 얼어붙은 탓에, 참호를 파기 전에 먼저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언 땅을 녹였다. 지휘 본부의 참모들과 후방 부대는 농민들을 눈밭으로 쫓아내고 그들의 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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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징이 박히고 발에 딱맞는 군화는 동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포로나 민간인의 옷과 장화를 훔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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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무렵에는 동상에 걸린 병사만 10만 명을 넘어섰다. - 67
히틀러는 일련의 지침을 통해 모든 퇴각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어떻게든 겨울만 넘기면 소련을 공격한 자들에게 드리운 역사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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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장군들 앞에서 자신의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함으로써 동부 전선을 지킬 수 있었다고 믿는 히틀러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 71
독일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쟁 스트레스와 극심한 공포가 겹치면서 자살률이 치솟기 시작했다. ‘자살은 곧 탈영으로 간주한다’는 지침이 하달되었을 정도였다. “군인의 목숨은 조국의 소유이다” 이것이 그러한 지침의 명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살자는 혼자 보초를 서는 기회를 노렸다가 자신의 몸에 총을 쏘는 방법을 썼다. - 75
노골적인 적개심이 드러나는 사건들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제6군 총사령관 폰 라이헤나우는 성탄절 무렵 자신의 지휘 본부로 사용하는 건물에서 다음과 같은 낙서를 발견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는 독일로 돌아가고 싶다”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는 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럽고 이가 우글거리는 이곳을 떠나 집으로 가고 싶다”
라이헤나우는 이러한 생각이 ‘극심한 긴장과 박탈감’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장교들에게 ‘부하들의 정치적, 도덕적 자세’를 단속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 - 77
제6군 지휘 본부는 1941년 7월10일, 머리를 짧게 자른 민간인 복장의 남자는 붉은 군대의 병사임에 틀림없으니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숲 속에 숨어 있는 붉은 군대 병사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등 적대적인 행동을 한 민간인 역시 사살 대상이었다. - 87
1941년 10월10일자로 발령된 폰 라이헤나우의 악명 높은 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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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전선의 병사들은 전쟁 규칙에 따라 전투를 수행함은 물론, 조국의 이념을 지키고 독일 국민에 대한 모든 야만적인 행위를 철저하게 보복하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병사들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 대해 가혹한, 그러나 정당한 징벌을 가할 필요성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임무는 ‘유대계-아시아계 인종의 위협으로부터 영구히 독일 국민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 90
나치는 병사들의 공포심과 증오심을 동시에 유발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적군을 사살하라고 지시했으며, ‘제군은 용감한 독일의 군인’이아는 점을 끊임없이 주입했다. 인간은 두려움이 외부로 표출될 때 가장 잔혹한 방응을 보이게 마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선동은 걷잡을 수 없는 파괴 욕구로 이어졌음을 알게 된다. - 93
1941년 9월3일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소련군 전쟁 포로 600명이 가스실로 끌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지클론 B’(나치가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한 독가스-편집자 주)를 사용한 최초의 실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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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570만 명의 희생자 가운데 붉은 군대 병사들이 3백만을 넘는다. - 94
자신의 판단은 결코 잘못될 리 없다는 맹신에 사로잡힌 채 언제든지 지휘 본부에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위치를 점한 히틀러는, 이제 마치 신이라도 된 양 모든 작전을 일일이 통제하려 들 것이었다. - 106
적지에서는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보안 의식을 발휘하는 히틀러는 이곳에도 콘크리트 벙커를 마련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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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이 아무 곤란 없이, 또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관심은 실로 엄청났다. 그가 도착하기 전, 게슈타포 요원들은 건물의 벽을 샅샅이 뒤지며 도청 장치나 폭발물을 검색했다. ‘자이덴스피너’라는 독일의 원예 회사가 큼직한 채소밭을 설계했고, ‘토트 오르가니자치온’이 시공을 맡았다.
채소는 히틀러의 개인 요리사가 직접 골랐다. 총통의 식탁에 오를 채소들은 전담 감독관의 감시 아래 채취되었고, 그가 손수 주방에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모든 음식은 조리 전에 화학 분석을 거쳐야 했고, 감식가의 시식을 거친 다음에야 총통의 식탁에 올랐다. 식수 역시 하루에 몇 차례씩 꼼꼼하게 점검되었다. 생수를 병에 담을 때는 반드시 감독관이 입회해야 했다. 세탁물조차 폭발물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X선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 121
이질과 발진 티푸스 등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났다. 한 의사는 야전 병원이나 취사장, 특히 고기를 손질하는 곳에서는 ‘파리 떼가 들끓어 환장할 지경’이라고 보고했다. 화상을 입은 탱크 운전병처럼 상처가 겉으로 드러난 부상자에게 파리는 지극히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 133
소련의 방공포대는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사르키스얀 대위는 “여자아이들은 좀처럼 벙커로 몸을 숨기지 않으려 했다”고 증언했다. 그들 가운데 마샤라는 이름의 여학생은 무려 나흘 동안 단 한 차례도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 160
독일의 폭격기들은 도시 전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태세였다. 많은 시민들이 가진 것을 모두 잃었지만, 그나마 남은 것을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들 역시 다음 날이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중에서 쏟아져 내리는 재앙은 그들의 사유 재산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163
병사들은 틈만 나면 집으로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독일 제국의 새로운 동쪽 변경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부대원 가운데 하나님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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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때까지도 돈 강을 건너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제6군 소속의 병사들은 전위 부대에게 빼앗긴 영광을 무척 아쉬워했다. - 165
한 번은 독일 전투기 한 대가 초저공 비행으로 후베의 지휘 본부를 날아오더니 적군의 폭격기를 공격하기 위해 푸른 하늘로 치고 올라간 적이 있었다. 지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독일 병사들은 마치 빛나는 갑옷을 입은 게르만의 기사가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한 병사의 일기에는 그 장면을 목격한 감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은빛 화살은 새벽을 알리는 전조가 되어 강 건너 적진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8월28일, 소련 전투기들은 갈라치 부근에 새로 설치된 공군 기지를 공격하려 했지만, 메서슈미트 109 전투기 편대가 이들을 쫓아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린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교전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고조되어 – 169
그 사이에도 마마이 고지를 둘러싼 교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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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날 아침 일찍부터 고지의 정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몇 주 전만 해도 연인들이 다정하게 산책을 하던 공원이었지만, 이제는 공원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온통 포탄과 수류탄 파편으로 뒤덮이다시피 한 땅바닥에는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았다. - 195
마마이 고지에서의 ‘죽음의 전투’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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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이 지역을 정리하다가 독일군과 소련군 병사의 시신이 한 자리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치열한 백병전 끝에 목숨을 잃었고, 그 뒤 포탄이 떨어져 함께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6
무엇보다도 괴로운 소리는 부상병들의 비명 소리였다. 한 독일군 병사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힌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도 그 정도로 처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204
소련군이 가로챈 한 독일군 병사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신은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긴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독일군 병사들은 밤만 되면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될 때마다 총을 발사하곤 했고, 누구 한 사람이 발포를 시작하면 주변의 다른 병사들까지도 맹목적인 일제 사격을 불사하는 바람에 9월 한 달 동안에만 2천 5백만 발의 탄약이 소모되었다. - 215
전투로 인한 스트레스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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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은 비겁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졌으며, 오히려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양측의 규율 위반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나 긴장에서 비롯된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단지 전투의 양상이 각기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며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싸움을 중단하지 않는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한 9월경부터 그러한 정신적인 요인으로 인한 사상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 216
며칠씩이나 고립되면 보급품이 떨어져 커다란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들은 또 극심한 먼지와 연기, 기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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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소련 병사들은 깨끗한 몇 방울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하여 빗물받이 홈통을 총으로 쏘아 보기도 했다. - 220
독일군 사병들은 소련군과 다를 바 없는 열악한 조건 속에 처해 있었다. ‘좋은 밤’을 보내라는 말 대신 ‘조용한 밤’을 보내라는 것이 야음을 틈탄 적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밤 인사였다. - 221
붉은 군대의 지휘관들은 미처 의료 문제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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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러한 태도도 주로 여학생 혹은 고등학교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간호병들의 용감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위축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응급 처치밖에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가장 용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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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이다 지오르제브나 가브리에로바는 18세의 의대생이었는데...집중 포화를 뚫고 부상병이 쓰러진 곳까지 달려가는 겁 없는 행동으로 동료들을 감동시키곤 했다. 부상병을 안전한 곳까지 끌고 나온 다음 등에 업고 진지로 돌아오는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 224
소련 언론이 아무리 많은 영웅담을 만들어 낸다 해도 개인에 대한 배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소련 당국의 태도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선전 전술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문에는 추이코프가 군사위원회 회의에서 한 발언에서 비롯된 “우리는 모두 이 도시의 돌멩이가 되어야 한다”는 구호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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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행정 정책만 봐도 병사들을 일개 소모품으로 간주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242
스탈린그라드에 남아 있던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은 잿더미 아래의 지하실이나 하수구, 혹은 가파른 강둑에 동굴을 파고 몸을 의지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을 때는 마마이 고지의 폭탄 구덩이에 몸을 숨긴 민간인도 있었다. 물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살아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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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입구에는 불에 탄 널빤지와 넝마 조각으로 가려져 있었다. 여자들은 쓸 만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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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들은 은신처를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지만, 식량이나 식수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잠시 폭격이 뜸할 때면 어디선가 여자와 아이들이 기어 나와 죽은 말의 살점을 잘라 가곤 했다. 동작이 빠르지 못하면 그나마 집 잃은 개와 쥐들에게 빼앗길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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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둠을 틈타 독일군이 장악한 차리차 남쪽의 곡물 창고로 접근하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불에 탄 곡물을 자루에 퍼 담아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독일군 보초의 눈에 뜨이는 날이면 사정없이 총알 세례가 날아들곤 했다. 독일군의 보급품을 훔치려다 현장에서 사살된 아이들도 많았다. - 247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 이 전쟁을 빨리 끝내 주실 것이다” 발로흐 상병의 일기는 계속 이어진다.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포탄이 날아든다” 한 주 뒤, 그의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쓰여 있다. “아, 하느님, 이 끔찍한 전쟁을 중단시켜 주십시오. 앞으로도 한동안 이 전쟁이 계속된다면, 아마 우리는 모두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고향의 그 따스한 일요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집 대문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볼 수 있을까? 고향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헝가리 당국은 부다페스트의 민심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병사들에게 집으로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했다. - 254
“소련군에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저격수가 많다.” 9월15일자 발로흐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하느님, 제발 내가 그들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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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여,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그 다음날 일기 역시 하느님에 대한 호소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일기가 되고 말았다. 돈 강 부근에 쓰러져 있던 시신에서 발견된 그의 일기... - 255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포로수용소에서 선별한 소련군의 전쟁 포로들이었고, 처음에는 주로 노역에 동원되다가 나중에는 전투에 투입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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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증언을 한 사람은 1941년 11월 말, 노보알렉산드로브스크 수용소에서 차출되어 독일군에 복무했던 11명의 소련 포로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들 가운데 8명은 행군 중에 기아로 쓰러져 사살되었다. - 258
시베리아 인들은 폭탄 파편에 노출되는 각도를 줄이기 위해 참호를 아주 좁게 팠지만, 폭탄이 한 번씩 터질 때마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려 속이 거북해질 정도였다. 귀가 먹먹해져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강력한 충격파가 연속으로 이어졌다. - 263
제389보병 사단의 한 병사는 공격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글을 남겼다.
“비행기들이 하늘을 온통 뒤덮다시피 했다. 모든 고사포가 불을 뿜었고, 쉴 새 없이 폭탄이 떨어졌으며, 비행기에서 나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우리는 참호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았다”
독일군의 야포와 박격포가 소련군의 진지를 강타했고, 인광탄 때문에 사방이 화염에 휩싸였다. - 269
한 병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매일같이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죽어간다.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스탈린그라드가 항복해 버렸으면 좋겠다.” - 279
세 번째 병사는 자기 주변의 폐허를 이렇게 묘사했다. “자꾸만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정말이지 딱 들어맞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 289
제371보병 사단의 한 하사관에 의하면 ‘우편물의 양에 따라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오르내리는’ 현상이 빚어졌다. 거의 모든 병사들은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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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이 도착하면 모두들 자신의 ‘작은 집’에서 뛰쳐나온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나는 한동안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 292
전체적인 환자의 수는 그 전해와 대략 비슷했지만, 베를린의 전문가들은 다섯 배나 많은 병사들이 이러한 전염성 질병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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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의사들은 누적되는 스트레스와 보급품의 부족이 병사들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따름이었다. - 294
소련군의 소총 연대 하나가 간신히 적군의 주력을 차단하는 데 성공...그들은 다른 대대가 도착할 때까지 볼가강으로 이어지는 70야드의 저지선을 죽기 살기로 사수했다.
연대 지휘 초소를 지키던 보병 중에서는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오른손이 완전히 짓뭉개져 더 이상 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벙커로 내려가 모자에 수류탄을 가득 담았다. 왼손으로도 수류탄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부근에서 싸우던 다른 연대 소속의 한 소대는 소대원이 네 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탄약마저 동이난 상태였다. 그들은 부상병 한 사람을 후방으로 보내어 다음과 같이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다.
“우리 진지에 포격을 개시하라. 우리 앞에 대규모의 파시스트 병사들이 몰려 있다. 우리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잘 있거라, 동지들이여.” - 302
이 시기에 드러나는 가장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파울루스와 슈미트가 자기네 관할권이 아니라는 이유로 위험 지역으로 우려되는 곳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동성은 명령을 기다리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행동이야말로 지휘관으로서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처사라는 프로이센의 전통과 정반대되는 태도였다.
장군들에게 독자적인 판단 능력을 몰수한 것은 물론 히틀러였고, 선천적으로 야전 사령관이라기보다는 참모 장교에 가까운 기질을 타고난 파울루스 역시 굳이 그런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 316
파울루스는 붉은 군대의 공격이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제6군의 후미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이유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한편 B 집단군은 총통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상황을 혼자 힘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집착이 최대한 신속성이 요구되는 시기에 실로 한심한 무기력증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 339
어느 소련군 포로는 이렇게 증언했다. “독일군의 퇴각이 시작된 11월20일, 우리는 말 대신 탄약과 식량이 실린 수레를 끌어야 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빠른 속도로 수레를 끌지 못하는 사람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거의 쉬지도 못하고 꼬박 나흘 동안 수레를 끌어야 했다...” - 351
병사들이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머지않아 자기네를 구출해 줄 강력한 반격이 계획되어 있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11월27일 파울루스가 내린 명령은 대단히 큰 효과를 발휘했다. “기다려라! 총통이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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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망 속의 독일 병사들은 이 기다리라는 명령을 굳을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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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절대 이 상황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한 중위가 말했다. “소련 놈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있겠어?”
그의 동료가 대답했다. “자넨 너무 비관적이군. 나는 히틀러를 믿어. 그는 한번 하겠다고 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사람이야.” - 376
사병들, 특히 눈 덮인 평원에 배치된 사병들은 ‘지붕 없는 요새’라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교육을 받은 나이 어린 병사들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같은 곤경을 겪고 있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굳이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총통의 장담은 절대 파기될 수 없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 379
소련의 한 정찰대 소대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처음으로 칼을 이용해 독일군을 죽였을 때, 3주 동안이나 그가 꿈 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 390
병사들은 보급품이 크게 줄어들어도 곧 구출될 거라는 확신으로 불만을 달랬다. 스트레커 장군이 일선을 방문했을 때 한 병사가 손을 귀에 대고 멀리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각하, 들어 보십시오. 우리의 지원군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스트레커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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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나치에 반대하는 장교들조차도 히틀러가 제6군을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 394
알트만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보기에도 애처로운 젊은 병사들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은 한결같이 “언제쯤 배불리 먹을 수 있겠습니까?”였다. - 395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병사들에게 멀리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는 총통이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주는 증거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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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히틀러 본인은 제6군의 돌파 작전을 허락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 41
12월 둘째 주부터 의사들은 아주 곤혹스러운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지도 않은 병사들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보급품이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아에 의한 사망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었다.
병리학자들은 이들의 죽음이 ‘극심한 피로(포위망 안쪽에서 근무하던 600명의 의사들 가운데 감히 기아라는 표현을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와 정체불명의 질병’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 409
기르겐손은 그달 말까지 그럭저럭 50건의 부검을 끝냈다. 50구의 시신 가운데 정확하게 절반 가량은 기아에 의한 사망이라는 뚜렷한 징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심장과 간이 수축되고, 지방 조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근육이 심하게 수축된 현상을 다릴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411
탈진과 스트레스, 추위 등이 겹치면 인체의 신진대사에 심각한 혼란이 초래된다. 다시 말해서 설령 하루 500칼로리의 영양분을 섭취한다 해도 그 같은 상황에서는 극히 일부분밖에 흡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전술과 기후 조건, 그리고 식량 부족 등이 모두 결합되어 기아로 인한 건가의 악화를 더욱 가속시켰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심각한 영양 부족은 간염이나 이질 등과 같은 전염성 질환에 대한 면역력도 크게 떨어뜨린다. - 414
전통적으로 그날 밤에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고, 병사들은 벙커 속의 희미한 촛불 아래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불렀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소리 죽여 흐느끼는 병사들도 많았다. - 423
죽음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고향과 관련된 악몽에 시달리거나, 두 번 다시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나는 생각으로 소리죽여 흐느끼는 병사들도 많았다. - 455
배고픔에서 비롯되는 괴상한 환상에 시달리는 병사들도 많았다.
자살이나 전쟁 스트레스로 인한 사상자의 숫자를 정확하게 집계하기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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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에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거나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병사들이 많았다.
정신착란적인 발작을 일으키면 주변의 동료들이 힘으로 제압하거나 완전히 때려 눕혀야 간신히 진정되기도 했다. 더러는 동료들의 정신 분열 증세나 광기를 마치 무슨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 455
끔찍한 비극이 초래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시아 볼셰비키들의 흉계로부터 유럽을 지켜 낸 전사로 후손에게 기억될 것이라며 자위하는 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세계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독일의 영웅들이 독일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 470
탈진해 눈발에 고꾸라진 병사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옷이 절실히 필요했던 병사들은 누군가가 쓰러져 죽으면 얼른 달려가 그의 옷을 벗겨 입었다. 시체가 얼어 버린 다음에는 옷을 벗기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486
제9고사포 사단 소속의 한 공군 부사관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집으로 보냈다.
“나는 나 자신이 스탈린그라드를 지키는 병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나 자신이 죽는 순간이 와도 나는 조국을 위해 전쟁터의 동쪽 끝인 볼가 강에서 위대한 방어 전투에 참전하였고, 우리의 총통 히틀러와 내 조국의 자유를 위해 내 생명을 바쳤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 - 490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붉은 군대는 11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가운데 485,751명이 목숨을 잃었다. - 528
괴벨스는 라디오 방송을 총동원하여 이 같은 슬픔에 맞서 온 나라가 일치단결할 것을 강조했다. 이이서 그는 각 신문사를 통해 이 비극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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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항상 ‘러시아 인’이 아니라 ‘볼셰비키’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했다. 독일의 선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스탈린그라드의 영웅들을 신화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하고, 이것이 독일 역사의 가장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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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식 발표는 스트레커가 항복한 지 24시간 후, 특별 성명의 형식으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1943년 2월3일, 총통 각하의 지휘 본부에서, 국방부의 최고 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의 전투가 막을 내렸음을 발표한다. 파울루스 원수의 뛰어난 지도 아래 충성 서약을 지킨 제6군은 적군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로 인해 전멸하였다...제6군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에서의 임무의 마지막 보루로서 제6군은 소련 6개 군의 무차별 공격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독일을 살리고자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 534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 모스크바에 전해진 1945년 5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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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측으로서는 거의 4년을 끌며 9백만에 달하는 전사자와 1천8백만에 이르는 부상병을 낳은 악몽이 끝났다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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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무려 2천6백만명에 달해... -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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