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동서문화사
아아, 조물주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이 몸은 요염하니 새침하게 거니는 님프 앞을 활보할 만한 위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아름다운 신체의 균형을 갖고 있기는커녕 사기꾼 같은 자연에 속아서, 불구에 땅딸보 같은 작은 키에 꼴불견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단 말이다. 이렇게 불구에 멋없이 생겨서 내가 곁을 지나갈 때면 개까지도 짖는단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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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말로만 근사한 이 허식의 세대를 멋지게 지낼 애인이 될만한 자격도 없으니, 기필코 악당이 되어 세상의 부질없는 쾌락에 저주나 퍼부어주자꾸나. 주정꾼의 예언이니, 중상이니, 해몽 따위로 클래런스와 왕의 사이를 서로 원수같이 증오하도록 만들어 놓는 거다. - 430
글로스터...이 가슴속의 음모가 실패하지 않는 날엔 클래런스는 내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이 끝나면 하느님, 제발 은총을 베푸시어 에드워드 왕을 데려가시고 천하를 이 사람의 독무대로 놔둬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나는 워리크의 막내딸과 결혼하는 거다. 그녀의 남편과 아비는 내 손에 죽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434
앤...이 피를 흘리게 한 놈의 피는 저주를 받아라! 옥체를 살해하고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은 그 지긋지긋한 악당놈에게 무서운 화가 떨어져라! 득대보다도 – 아니, 거미나 두꺼비나, 이 땅을 기어다니는 어떤 독충보다도 더 욕을 봐라 – 그놈의 자식을 낳거들랑 그 자식은 괴물같이 징글맞고, 미처 달도 못 차 튀어나와 그 흉악망측한 꼴에 자식을 고대하고 있던 어미조차 한 눈에 질겁하여라! - 435
글로스터...대체 이러한 때에 구혼을 받아들인 여자가 있을까? 저 여잔 이젠 내것이다. 허나 곁에 오래 잡아둘 생각은 없어...나의 증오에 피를 쏟고 있는 시체를 눈앞에 두고도 내 손아귀에 들어오고 말다니! - 441
마거레트...(방백) 없어져라, 악마같으니! 네 공로는 잊혀지기는커녕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따. 너는 내 남편 헨리 왕을 런던 탑에서 살해했다. 그리고 불쌍한 내 아들 에드워드를 류크스버리에서 죽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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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레트...(방백) 이 몰염치한 악당같으니! 어서 지옥으로 줄달음치려무나. 이 세상을 하직하고. 그곳이 네 왕국이니까. - 446
마거레트...너희네 임금도 급살을 당해라. 그놈이 왕위에 앉혀지기 위하여 내 임금은 살해당한 거다! 태자가 된 네 자식 에드워드도 태자였던 내 아들 에드워처럼, 느닷없이 마수에 걸려 명도 다 못한 때에 죽어버려라! 왕비인 너도 왕비였던 나처럼 비참하게 영락하여 오래도록 살아 남아라! 오래 살아 남아서 자식들의 죽음을 비탄하고, 내 왕관을 빼앗아 쓴 너를 내가 눈앞에 보듯 네 권리를 빼앗아 장식하는 새 왕비를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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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얻은 것은 피로 잃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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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저놈의 증오에 희생이 되고, 저놈은 너희들의 증오에 희생이 되겠지 - 448, 450
마거레트...이 세계의 평화를 휘저은 교란자에게! 그날까지 자나깨나 양심의 이빨한테 영혼을 갉아먹혀라! 친구를 평생 반역자로 의심하고, 지독한 반역자를 친한 친구로 생각하라! - 448
클래런스...아, 브래컨버리, 이렇게 내 영혼에 뚜렷하게 상처를 남겨놓은 죄악도 모두 국왕 에드워드를 위해서 저지른 것이었소. 그런데 좀 보시오. 그 답례로 이 꼴이구려! 아 하느님!...죄없는 아내와 불쌍한 자식들은 용서해 주옵소서! 브래컨버리, 제발 내 곁에 잠깐 있어 주오. 마음이 무겁구먼. 좀 자야겠어.
브래컨버리...예, 대령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왕후 귀족은 영예를 누리며 빛나지만, 겉치레의 영예도 마음속 괴로움을 치러야 하는군. 그리고 상상도 못할 쾌락을 바라다가 도리어 근심 걱정의 세계를 짊어지게 마련이지. 그렇다면 고관대작과 평민 사이의 차이란 겉치레만의 명성의 차이밖에 무엇이겠는가. - 454
자객2...양심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거든. 도둑질을 하려고 들면 가책이 들게 하고, 욕을 하려고 들면 비난을 하고, 이웃집 여편네와 자려고 하면 냄새를 맡아내거든. 글쎄 양심은 당장 홍당무가 되는 수줍쟁이로 가슴속에선 늘 반항을 하고 있단 말야. 그것 참 장애 덩어리지. 언젠가 우연히 금화가 든 돈지갑을 주운 일이 있었으나, 양심 덕분에 돌려주고 말았지.
양심을 기르고 있다간 누구나 다 거지가 된다니까. 그러기에 읍에서나 도시에서나 양심은 위험물로 취급받아 쫓겨나고 있지 않는가 말야. 누구나 잘 살아보고 싶은 사람은 양심엔 구애받지 말고 제 자신만을 믿고 살아가도록 힘을 써야 하는 거야. - 456
자객2...공작님이 알아주길 차라리 바랄 정도일세. 그분의 형을 내가 살려 주려고 한 사실을. 보수는 자네나 받게나. 그리고 내가 한 말을 전해 주게나. 난 클래런스 공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으니까. (자객2 퇴장) - 460
미망인...내 남편은 왕관을 얻으려다 목숨을 잃었고, 자식들은 운명의 조수에 떴다 가라앉았다 했었지. 그때마다 나는 울고 웃고 했었지. 그런데 안정이 돼 나라 안의 싸움이 말끔히 진압되고 승리자쪽이 되더니, 골육상쟁과 형제간의 피로 피를 씻는 소동이 아닌가! 패륜의 광란 사태여, 그 지독한 악의를 멈춰 주든가, 나를 잡아가 주든가 해다오. - 473
마거레트...그때 내가 널보고 내 행운의 허망한 장식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나중에 내던져지려고 높이 모셔 높아진 것뿐이지. 예쁜 두 아기를 가진 것도 쓸데없는 일이 되는 어미, 꿈의 왕비, 찬란한 깃발, 사방에서 사격받기 알맞은 위험한 목표, 겉치장만의 위엄...그대의 남편은 지금 어디 있는가? 형제는? 두 자식은 어디 있고? 너는 무얼 낙으로 삼고 있는가? - 511
리처드...그대도 배반하여 그 녀석과 합세할 눈치로구먼
스탠리...천만 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신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리처드...그대의 수하와 부대들은? 지금쯤 서해안에서 역적들의 상륙을 돕고 있는 중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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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음, 음, 그대는 리치먼드와 합세할 모양이군. 아무튼 나는 그대를 신용할 순 없어. - 522
리처드...아, 겁많은 양심 같으니, 왜 이렇게 날 고문한담!...나는 나 자신을 증오하고 있어. 가증할 죄악들을 범한 나 자신을! 나는 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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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심은 천 개의 혓바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하나하나가 제각기 얘기를 들고 나와 나를 보고 악당이라고 비난하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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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금까지 범한 갖가지 죄악들이 떼를 지어 법정에서 몰려들어 와서 “유죄다! 유죄!”하고 절규하고 있잖은가. - 533
리처드...아, 래트클리프, 난 무서운 꿈을 꾸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병사들이 설마 배반을 하지는 않을 테지? -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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