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교양인, 2011
요제프 괴벨스는 마비된 발을 똑바로 유지하도록 받쳐주는 볼품없는 정형기구를 부착하고 다리를절며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 묀헨글라트바흐 마리아힐프 병원의 외과의들이 이제 10살이 된 그를 수술했다. 그러나 수술은 실패로 돌아갔고, 만곡족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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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어른들의 모욕적이고 동정 어린 시선과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괴벨스는 신체적 장애가 모든 것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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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 때 괴벨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그때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고 썼다. 친구들이 그를 창피해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처럼 달리고 뛰어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외로움은 괴로움이 되었다...다른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 놀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고독은 그를 자포자기 상태에 빠뜨렸다. 다른 아이들이 달리고 마구 설치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하느님에게 불평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병신을 여전히 좋아하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 - 23
괴벨스가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불손한 태도를 보이곤 했기에 교사들은 이따금 체벌을 가했다. 이것도 그가 초등학교 시절과 그 교사들에 대해 대부분 나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였다. 괴벨스는 교사 중 한 사람을 ‘아이들을 학대한 비루한 자식’리가 불렀고, 또 다른 교사에 대해서는 ‘별의별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던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 24
괴벨스는 신체 장애를 지식 분야에서 만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언제나 열등감을 과잉 보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그 자신의 분야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지적인 분야에서도 그를 따돌릴 정도로 악독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 때문에 더욱 부지런하게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 하나가 되었다. - 24
‘이제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던 동료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상급학교 진학을 무척 기뻐했다. 괴벨스는 새 학우들에게 신체 장애 때문에 자신을 업신여긴다면, 극들이 자신을 ‘자신을 두려워 하도록’ 만들겠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입했다. 학업 성적으로 모두를 누르겠다고 결심한 그는 수업을 시작한 첫 날부터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친구들은 곧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괴벨스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느끼도록 했고,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내심 기뻐했다.’ - 26
요제프는 아마추어 연극 무대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연기를 했다. 공상과 자만심에 빠져 있던 그는 때때로 그 자신이 아닌 듯했다. 모든 행동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노리고 했기 때문이다. - 27
그는 모든 희망을 신에게 걸었다. 오직 신만이 그가 언젠가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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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고위 성직자’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거나 화려한 예복을 입고 라이트 시의 싱체 축제 행렬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 부모는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그의 생각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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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수업 시간에 들었던, 그 시대의 전형적인 군국주의적 사고방식도 소년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후에 괴벨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을 자세히 다루었던 역사 교사 바르텔스를 찬양조로 회고하면서 ‘우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반짝이는 눈으로 선생님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위대한 시대를 만들었던 위인들의 영웅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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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괴벨스는 힘센 인간형이 숭배받는 세계에서 장애인으로 살게 된 것은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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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속에서 그는 종종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영웅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설치고 다닐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는 그렇게 쓰라림을 느끼지 않았으며, 자신과 같은 장애인에게도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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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봄을 묘사한 시가 하나 있다. 이제 그는 때때로 시를 짓는 자신이 신이 부여한 비범한 성품을 지닌 예외적 인간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그의 몸에 이를 표시한 것이다.’ - 27~29
16살 먹은 그에게 전쟁이란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했던 괴벨스는 8월 초 총동원령이 떨어진 후 군중 속에 서서, 발 맞추어 행진하는 군인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마침내 안온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그의 장애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는 미사 때와도 비슷했지만, 그는 성당에서 무릎 꿇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로변에 서 있었고, ‘주님을 찬양하라’ 대신 ‘독일, 모든 것 위의 독일’이라고 연호하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 32
괴벨스도 한스 형이나 급우 프리츠 프랑이나 얼마 전 사귄 리하르트 플리스게스처럼, 조국을 위해 곧바로 출정하려 했다. 그는 어느 작문에 쓴 것처럼, ‘처와 자식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고향과 조국을 위하여, 싱싱한 젊은 목숨을 내놓으려 출정하는 병사는 조국에 가장 고귀하고 명예로운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 33
민족공동체...독일 인종에 속하며 정치적 반대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그 안에서 신분, 재산, 교육 정도 등의 모든 차이는 사라진다는 나치즘을 비롯한 민족주의의 이상. 나치 이데올로기와 선전의 핵심을 이루었다. - 35
전장에서 무명의 죽음은 고향에 있는 자들에게는 ‘아름답고 명예롭게’ 보였다. 그 죽음은 성스러운 행위, ‘조국의 제단’에 바친 희생으로 미화되었다. 그러한 희생은 일찍이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에서 인류를 위해 희생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제 요제프 괴벨스의 세계관에서 종교와 애국심은 하나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 36
동급생들을 대표하여 졸업사를 낭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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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의 마지막은 종교적으로 고양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그대 독일, 막강한 조국, 우리 아버지들의 신성한 나라, 굳게 서 있으라, 곤경과 죽은 안에서도 굳게. 그대는 영웅적 힘을 보여주었고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우리는 그대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가 승리하게 하고 미래를 열어 나가는 영원한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신이여, 조국을 돌보소서’ - 40, 41
얼마 지나지 않아 괴벨스는 자신이 우둔해 보이는 이 소녀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되었고, ‘이 사랑은 천진해 보이지만 무언가 불순한 것이 묻어 있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괴벨스는 오로지 충동에 기반을 둔 자신의 ‘어두운 욕망, 나아가 성(性) 그 자체를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에게는 악마의 유혹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과 투쟁하였고‘ 마침내 이 싸움에서 패배가 다가오면서 미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 40
대학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학생들의 각종 협회와 동맹들이었다. 서클에 속하는 학생들은 서로 차이가 있을망정, 황제를 깊이 숭배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 44
괴벨스는 이방인의 위치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면 언제나 ‘정의로운 하느님’을 골똘히 생각했다. - 69
그는 신체적·사회적 결손을 보상받으려면 박사 칭호가 주는 위신이 필요했다. 전 생애에 걸쳐서, 베를린 관구장일 때에나 제국 선전장관일 때에나, 그는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박사’라는 호칭에 특별한 가치를 두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박사님’이라고 부르도록 했고, 서명을 할 때면 ‘Dr. G’라고 적었다. - 82
임시 박사학위 증서를 받은 그는, 나중에 자랑스럽게 메모한 것처럼 발트베르크가 자신을 ‘박사’라고 부르자 행복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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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받은 환영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모두 기차역에 나와 있었다. 집은 온통 치장되어 있었고 많은 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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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도 성공적인 대학 졸업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많은 것들을 몰아 낼 수 있었다. 친척들이 갓 박사가 된 그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올 때, 달렌 거리의 이웃들이 인사를 하면서 괴벨스의 이름에 박사 칭호를 분명히 붙여 존경심을 표할 때, 고등학생 때부터 들락거리던 렘게스 카페에서 사람들에게 한턱 낼 때, 사람들이 그 전보다 확실히 더 주의 깊게 그의 말을 경청할 때, 괴벨스는 자신의 성공을 즐길 수 있었다. - 87
그는 믿음이 강해질수록, 그 우상을 광신적으로 숭배할수록, 자신은 더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되고 더 힘차게 된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렸다. 괴벨스의 분신 미하엘의 다음의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신을 크고 강하게 만들수록, 나 자신이 크고 강해진다‘ - 106
괴벨스는 믿음, 이러한 믿음의 육화(肉化)에 대한 갈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생을 통한 자기 구원 등의 요소를 통해 사이비 종교적이고 병리학적인 나치즘 제식의 빈 껍데기 말들을 미리 발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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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믿음의 체현으로 생각한 지 이미 오래이던 1933년에 정말로 불가능이 현실이 된 기적을 선포할 수 있었다(나치 집권을 뜻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즉 스탈린그라드의 참상을 민족적 희생으로, 다가올 승리를 위한 대가로 미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이 다가왔을 때, 그때에도 괴벨스는 ‘불가능성의 기적’을 다시 선전했다. -107
글을 쓸 때 그는 언제나 자신을 구구하게 변명하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언제나 책임을 ‘타락한 세상’에 돌렸다. 그는 자신이 고유한 견해, 시민적 용기, 인격, 개성이라고 부리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질주의적 세계로 접근할 길이 막혀 버렸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예외적 현상이라는 환상 속으로 도피했다.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덕목을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116
괴벨스는 1923년 10월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달렌 거리의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는 사람들을 피하고, 민족의 운명과 동격으로 놓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그리고 ‘정의로운 세계’와 그 선구자들이 곧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 속으로 더 깊이 도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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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자신의 작품 <미하엘>에서도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1924년 초, 괴벨스는 그 역할을 한 남자에게 부여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그 인물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 124
괴벨스는 자신이 갈망하는 구원의 이념과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히틀러에게 투영하기 시작했다. - 127
바이마르에서는 ‘히틀러의 근위대’ 외에 점령 지역에서 온 참석자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 ‘그들은 우리 라인란트 참석자들을 영웅처럼 환영했다. 서부 국경 지역에서 온 전방의 군인이라는 것이다’라고 쓴 괴벨스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특히 돋보이는 듯이 느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던 때인 1914년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데, 이 모임에서는 그도 더는 괴짜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다. 여기 바이마르에서 그는 루덴도르프도 동의한 자신의 세계관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괴벨스를 곧 ‘정직하고 성실한 엘리트들’에 포함시켰는데, 그는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아이들이 많은 대가족과 같았다..그 느낌은 참 좋았고 깊은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었다. 마치 모두 의형제가 된 듯했다. 민족의 정신 아래서...하나의 전선에서 함께 싸우는 전사들. 하켄크로이츠의 상징 아래서.’ - 130
그는 독일적 사상을 둘러싸고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커다란 업적 중 하나는 이러한 ‘영웅적 지도자의 이상’을 뚜렷하게 내세운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 안에 미래의 사상을 품은 것은 대중이 아니다. 그는 생명과 희생의 용기와 의지를 지닌 강력한 개인이다. 대중은 죽었다. 죽은 대중이 어떻게 새로운 삶을 낳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강력한 남자는 살아 있다. 그는 생명을 지니고 있고 생명을 만들어낸다. 그는 죽은 자를 일으킬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힘의 존재를 믿고 그 힘을 신뢰하며 자발적이고 이타적으로 이에 봉사해야 한다.
1924년 9월20일 <민족의 자유>에 실린 이 글에서 비록 괴벨스가 히틀러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영웅적 지도자 이상’의 체현으로 생각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136
5년형을 받은 히틀러가 9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24년 12월20일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석방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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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여전히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히틀러를 ‘우리의 신앙와 이념의 체현’이라고 열렬하게 환영했다. ‘독일의 젊은이들은 다시 지도자를 얻었다. 우리는 그의 구호를 기다린다.’ - 138
괴벨스는 그때까지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나의 투쟁>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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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괴벨스가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읽고 나서도 ‘이 남자는 누구인가? 반은 평민이고 반은 신이다! 진정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단지 사도 요한인가?’라고 물었다는 데서 다시 잘 나타난다. - 148, 150
괴벨스는 히틀러의 외모, 그의 태도, 말하는 방식만 관찰했고 이를 ‘기지, 아이러니, 유머, 신랄함이 있는, 진지함이 있는, 타오르는 격정과 정열이 있는’이라고 표현했다. 그날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남자는 왕이 되는데 필요한 덕목을 남김없이 갖추었다. 타고난 호민관이며, 떠오르는 독재관이다’ - 150
괴벨스가 밤베르크에서 입을 다문 것은 히틀러와 그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믿음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사상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미하엘>에서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쓰지 않았던가. 그에게 믿음은 ‘인간 협잡꾼’들로 더럽혀진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열쇠였고 히틀러는 이러한 믿음의 화신이 되었기 때문에, 괴벨스는 비록 자신의 정치적 신조는 양보하더라도 ‘총통 각하’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159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신을 찬양하고 포옹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가슴에 받아들였다고 추측했다. - 163
괴벨스는 ‘물고기가 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베를린은 센세이션(흥분·사건)을 필요로 한다’고 재빨리 알아차렸다. ‘이 도시는 센세이션을 먹고 산다. 그리고 이를 소홀히 하는 정치 선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눈에 띄는 일이 중요했다. 그리고 눈에 띄기를 원한다면 길거리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했다. 괴벨스의 견해에 따르면, 대중의 시대에 거리는 ‘현대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훗날 그는 ‘거리를 정복할 수 있다면 대중을 정복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을 정복하는 자는 국가를 정복한다’라고 회고했다. - 180
돌격조는 돌격대대로 개칭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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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대부분 실업자인 싸움꾼 무리를 규율 잡히고 ‘정치 의식을 지닌 군인들’로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그들은 그저 싸우려고만 하였고 심지어 자기들끼리도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 184
이제까지의 선전 활동 결과가 불만족스럽고 점차 인내심이 바닥난 괴벨스는 최초의 대규모 집회를 ‘사자 굴’, 즉 ‘붉은 베딩’에서 열기로 결심했다. 그 집회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어마어마한 싸움, 그리고 오랫동안 기대해 온 여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에서 애초부터 하나의 도발로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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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광고탑들에 영화나 상품 선전과 함께 붙어 있던 나치당 포스터는 싸구려인 데다가 너무 작아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거대한 크기의 피처럼 붉은 포스터들이 파루스 연회장에서 열릴 집회를 알렸다. - 185
이미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착해 있던 연회장 안에서는 그가 말도 꺼내기 전에 거친 싸움이 벌어졌고 두 진영은 격투용 쇠반지와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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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완벽한 스펙터클이었다. 괴벨스가 ‘유대 언론’이라고 비방했던 부르주아 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나치주의자들과 베를린 관구장은 처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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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파루스 전투’를 두고 ‘시작이 좋다’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숱한 입당자들이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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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자신이 용기 있는 자이며,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물러 서지 않음을 그자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 186
그는 거기 모인 청중 앞에서 신문 보도를 낭독했다. 괴벨스는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기사를 쓴 기자를 ‘야비한 유대인 돼지’라고 비난하고 참석자들이 폭소를 터뜨리자 자신은 그를 이렇게 모욕한 데 대하여 고소당하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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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지들에게 그 기사 작성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어 그를 ‘방문하여 행동으로 감사를 표현하자’라고 선동했다. - 191
같은 맥락에서 괴벨스는 ‘거부할 수 없는’ 선전 효과를 이야기 했다. 여기서 글과 그림의 목표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박차를 가하고 불을 지르고 몰아가는 것이다.’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모호하지 않고 오해가 없어야 하며 목표가 뚜렷하고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독자의 모든 사고와 정서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격>이 독자의 지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며, 독자를 확신시키기보다는 그저 설득하려 했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공격>의 모든 것은, ‘심지어 하나의 뉴스조차’ 경향성을 띠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괴벨스가 바라는 점이기도 하였다. - 201
나치의 도착된 이데올로기적 관점, 그리고 ‘대중에게 결코 둘 이상의 적을’ 보이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전투력이 완전히 분산될 것이다’라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나타난 기준에 따라서 투쟁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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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에 대해서 괴벨스는 첫 번째 사설에서 곧바로 독자에게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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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독일이 예속 상태에 놓이게 했고 여기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유대인은 수많은 민중의 사회적 곤경을 악용하여 우리 민족 내부에서 불행한 좌우 분열을 가져왔다. 유대인은 독일을 둘로 쪼개놓았고 이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 패전과 혁명의 타락을 가져온 화근이었다’ 괴벨스에게 ’유대인은 기생적 생명체‘이고 ’인텔리의 원형‘이며 창조성 없는 ’타락한 악령‘이고 ’우리 인종의 의도적인 파괴자‘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우리의 도덕을 썩게 하고, 윤리를 무너뜨리고, 힘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 302
그들은 1928년 6월25일 <공격>에 처음 공개된 ‘인종 전투’를 준비하는 ‘돌격 부대’라는 베를린 돌격대의 노래를 줄곧 합창하였다. ‘유대인들이 피를 흘려야만 우리가 해방된다’라는 내용의 그 노래는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 - 225
사실 그는 되풀이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국민청원 참여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후로도 그는 당의 노선 결정에 크게 간여하지 못했다. 그는 히틀러에게 굴복했으며 때대로 조금씩 회의를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히틀러를 무조건 추종했다. 히틀러가 성공을 거두어서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면 그러한 회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 236
일주일에 두 차례 발행되는 <공격>은 노동자 지역을 ‘붉은 지옥’, 공산주의자를 ‘모스크바 놈들’이나 ‘으르렁거리고 발광하는 저급 인간들’이라고 묘사했다.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가장 살벌하게 묘사했는데, ‘그 여자들은 고함치고 빽빽 소리를 지르고 우리 앞에서 수치심도 없이 옷을 벗어버린다’ 그들은 ‘박멸’하고 ‘제거’해야 하는 ‘독을 뱉는 짐승들’이다. - 241
히틀러는 1시간에 걸친 연설에서 바로 그날 <민족의 파수꾼>에 실린 ‘독일 민족에게 보내는 선언’에 썼던 내용을 선포했다.
9월14일을 위한 구호는 한 가지밖에 없다. 케케묵은 정당들에 웅크린 정치적 파산자들을 때려잡자! 우리의 민족적 통일을 방해하는 분열자들을 섬멸하자! 우리의 몰락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자! 민족 동지들이여, 깨어나는 독일에서 행진하고 있는 갈색 전선에 합류하라! 현 체제를 거부하려한다면 다음과 같이 하라. 기호9번 9월14일 민족을 속이는 사기꾼들을 빼려잡자! - 272
잠시 괴벨스는 자신의 노력이 대가를 받은 것처럼 느꼈다. 히틀러는 괴링도 참가한 가운데 베를린 관구장과 면담하면서, ‘프로이센의 권력’을 제공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고향 라이트에서 미래가 없는 실업자로 살면서 멸시를 당하던 괴벨스는 이제 ‘총통 각하’에 의하여 프로이센 최강자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이때 괴벨스가 한 첫 번째 생각은 자신이 증오하는 유대인, 자본가, 볼셰비키들을 정리하겠다는 것, 그리고 ‘바이마르 체제’ 전체를 ‘청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 세계로부터 당한 그 일들에 대한 개인적 복수이기도 했다. - 274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많은 오류’는 자신이 한 번도 슈테네스와 히틀러의 중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치게 남을 잘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너무 깊이’ 신뢰했다는 것이다. 이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사악하다는 생각에 푹 빠진 괴벨스는 숨김없이 경멸을 내보이며 그들을 ‘얼어붙은 똥 덩어리’라고 불렀다. 그는 청소년 시기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사회에 책임을 떠넘겨 자신의 부족함을 얼버무리려 하였던 것이다. - 305
그녀는 괴벨스를 가장 순수한 이상주의자이자, 제3제국이 가져올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싸우는 지칠 줄 모르는 선구자로 생각하였다. 괴벨스가 온갖 부당한 짓을 저지르고 있으며, 그의 광신적 의지는 바로 인간에 대한 한없는 멸시와 증오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하였다. - 307
이른바 운명에 따라 결정된 일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은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희생하는 예외적 이간의 사명을 거듭 부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멸시에를 보여준다.
“나는 고독해야 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도 고독할 것이다...그리고 더는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 이 비참한 삶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인간이라고 불리는 이 쓰레기 더미들!” - 309
1931년 9월12일 그는 녹색 오펠 자동차를 타고 쿠어퓌르스텐담 거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평범한 행인으로 위장한 남자들이 ‘겉으로 보아 유대 민족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모욕하고 구타하도록 지휘하였다‘ 그들의 유대인 박해는 2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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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이런 식의 행동으로 뮌헨 지도부와 운동의 혁명적 기층부 사이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간격을 메우고 돌격대의 공격성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려 했다. - 319
괴벨스의 수많은 연설 외에도 포스터가 선거전의 주요 선전도구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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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다른 선전 도구들도 활용했는데, 기술적으로 그 시대의 수준에 걸맞은 것이었다. 그는 축음기용 음반을 하나 제작해 총 5만장을 찌었는데, 음반 하나가 일반 편지 봉투에 넣어 발송할 수 있늘 만큼 크기가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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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와 그 부하들은 독일 대도시의 광장이나 영화관에서 저녁에 상영할 수 있도록 10분 분량의 유성 영화를 준비했는데, 이 영화로 유권자들에게 나치 지도자들, 특히 ‘총통 각하’가 어디에서나 활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 334
히틀러는 나중에 진행할 부서 배분을 생각하여 괴벨스에게 정권 획득시 슈트라서와 괴링, 다른 나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제국교육 부서 외에도 프로이센 문화부를 맡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 356
괴벨스는 독일국가인민당과 철모단이 1930년 8월 설치하였고 1932년 3월 이후 나치가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문화, 직업, 민족성을 위한 독일방송인 제국협회’와 그 협회가 이미 잘 구축해놓은 인프라를 모두 넘겨 받았다. 이미 1930년 말부터 당 조직과 유사하게 관구 방송담당국, 군 방송담당국, 지구 방송담당국이 설치되었고, 이들은 ‘유대적·마르크스주의적 방송’에 적대하는 선전 선동을 유포하였다. - 365
히틀러는 12월8일 괴벨스에게 제국조직국의 권력 기구들을 분배해주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자신이 넘겨받기로 한 제국조직국 중에서 ‘국민교육’ 부서를 분리하여 괴벨스에게 주기로 한 것이다. - 376
괴벨스는 당 밖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던 호탕한 니더바이에른인 슈트라서를 종종 부러워하였고, 히틀러의 총애와 베를린 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괴벨스는 슈트라서가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느꼈기에 그를 증오했다. - 382
괴벨스는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등장해 간절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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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한 민족공동체에서 우리는 그가 유산계급인지 무산계급인지, 가톨릭 신자인지 개신교 신자인지 더 묻지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당신의 나라를 시봉하는가 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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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독일에서 나치 운동뿐 아니라 전 민족이 봉기하는 그날, 전 민족이 다시 그 근원적 가치들을 추구하고, 전 민족이 새로운 미래를 향한 행진을 시작할 그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노동과 빵을 위하여, 자유와 명예를 위하여 우리는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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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독일 민족이 축복과 행복으로 충만할 것을 믿는다...우리는 충분히 이렇게 할 수 있다. 독일은 깨어나고 있다. - 391
독일인들은 오로지 나치 운동과 그 ‘총통 각하’만이 ‘유대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의 적’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그 적은 그대로 두면 민족의 뿌리를 심각하게 뒤흔들고 결국 몰락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 394
제국의사당의 ‘우뚝 솟은 돔’은 화염과 검은 연기를 차가운 밤하늘에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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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링은 그들에게 제국의사당 본회의장에서 공산주의자 방화범 한 명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체포된 남자는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시각장애인 데다가 정신이 온전치 않고 넋이 나간 눈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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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직후 그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결심했으며 단독으로 결행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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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링이 사후에 수정한, 프로이센 공보실의 첫 번째 발표들은 공산주의의 거대한 음모라는 그림을 그려냈는데, 이는 브란덴부르크 문 옆의 경찰서에서 경찰정치국장 딜스가 배석한 가운데 조서를 작성할 때 반 데어 루베가 진술한 내용과는 무관했다.
공보실의 발표에 따르면, 그 방화는 ‘독일에서 볼셰비즘이 저지른 이제까지 가장 극악한 테러 행위’라는 것이었다. 경찰관 한 명이 어두운 건물 안에서 타오르는 횃불을 든 여러 사람을 목격했다. 그는 곧 총을 발사했고 범인 중 한 명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경찰이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 수색 중 찾아낸 ‘수백 킬로그램의 폭발물’에는 이러한 테러 공격의 지령문도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 청사들, 박물관들, 성채들, 생필품 공장들에 불을 지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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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사건을 당국의 최초 발표에서 공산 폭동의 출발로 묘사한 후, 그 사건과 관련해 그날 밤 괴벨스가 설정한 선전 활동의 목표는 괴링이 시작한 보복 조치를 여론 앞에 정당화하고, 나아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을 공산 혁명에서 독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거듭 묘사하는 일이었다. - 402~404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개인적인 기반이자 척도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에게도 척도이자 기반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 괴벨스는 사이비 종교 방식으로 히틀러를 희망의 상징이며, 시대의 난관과 결핍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으로 미화했다. - 408
1933년 3월14일, 볼프통신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파울 요제프 괴벨스 박사의 ‘제국국민계몽선전장관’ 취임 선서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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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계몽선전부의 설치 법령에 따르면, 이 부처는 ‘제국정부와 조국 독일의 민족적 재건에 대해 국민을 계몽하고 선전하는 일’이 설치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중의 ‘정신적 동원’을 시작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빠져들 때까지 개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1933년 3월16일 35살에 불과한 장관은 처음으로 가진 제국정부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목표를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앞으로 국민들은 ‘일치단결하여 사고하고, 일치단결하여 반응하며, 정부에 적극 동조하고 복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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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3월6일에 이미 히틀러와 선전부의 구조를 협의했다. 그에 따르면 나치당의 제국선전국과 비슷하게, 언론·방송·영화·연극·선전의 5개 분과를 ‘단일한 대규모 조직 내에 통합해’ 민‘민족에 대한 정신적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대부분의 분야에서 권한을 가지도록 했다. - 410, 411
괴벨스는 장관 취임 첫날부터, 과거 독일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자들뿐 아니라 앞으로 민족의 존속에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한 자들을 제거하는 것, 즉 유대인에 적대하기 위해 선전부를 이용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생각했다. - 424
그는 뒤이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사명’을 신봉할 것을 호소하였는데, 이 호소는 바로 그날 현실화되었다. 제국 곳곳에서 유대인 시민들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그들의 상점 앞에는 돌격대 초소가 세워졌다. 상품 진열대에 낙서가 휘갈겨지거나 유리가 깨졌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유대인 교회당과 유대인 회관들이 수색을 당했다. - 426
나치당이 지배하는 그의 고향 라이트 시의회는 괴벨스의 어릴 적 친구이자 그를 나치당으로 이끈 프리츠 프랑의 제안에 따라 괴벨스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20세기 초, 그 지적인 괴짜를 신체 장애를 이유로 낙인찍고 동정하고 조롱하던 그들, 그 도시를 떠났다가 나치당 연설자로 돌아온 그를 비웃던 사람들이 지금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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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23일 오후 특별기 편으로 쾰른에 도착, 승용차를 타고 라이트로 빠르게 지나쳐 가는 ‘제국장관님’을 향해 도로에 늘어선 군중이 손을 흘들어대던 그때, 그리고 소도시 라이트가 깨끗이 단장을 마치고, 시의회게 괴벨스가 자란 달렌 거리를 경의의 표시로 요제프 괴벨스 거리로 개명하기로 하였을 때, 괴벨스는 이 모든 것을 소외당한 지난 시절의 보상으로 받아들였다. - 428
4월2일과 9일 독일 대학생 협의회에서 파견한 대표가 5월 초로 계획된 ‘파괴적’ 저술들의 ‘상징적’ 분서 행사를 선전부의 대표자와 논의했고, 10일에는 선전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 ‘파괴적 저술’이란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자, 그밖의 ‘비독일적’ 저자들의 저술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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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자정 가까운 시간(이 시간에 독일의 여러 대학 도시에서 화형용 장작더미가 불타고 있었다) 무개차를 타고 베를린의 유서 깊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건너편 오퍼른 광장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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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권의 책이 불타는 가운데 그는 ‘11월 공화국의 정신적 기초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 434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선전장관의 배우자는 나치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매우 적절했다. ‘독일의 현대 여성’이라는 상투적 선전에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괴벨스가 일목요연하게 표현한 바에 따르면, 독일의 현대 여성은 ‘남성적 특징을 가진 나치 국가에서’ 오로지 ‘아름다워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과제만을 지닌다. - 436
1933년7월 마그다는 신설된 독일의 패션 센터 책임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괴벨스는 여자들은 오직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사회에서 활동적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한마디로 딱 잘라 금지했다. - 442
여전히 선거 결과에 도취된 제국문화원장 괴벨스는 독일 예술의 미래를 말하여 열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그 미래는 ‘우리 시대 위대한 독일의 깨어남’이 정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괴벨스가 이에 대해 제시한 기준들은 ‘건전한 민족의 감성’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이미 그해 상반기에 수많은 저술가, 배우, 연출가, 감독들이 쓰디쓴 경험을 해야만 했다. - 458
배우들과 감독들이 선전장관 주위에 모여든 것은 그의 보호 없이는 출세 길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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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야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던 일이지만, 선전장관의 성적 욕구에 순종하는 신인 여배우들은 먼저 일을 얻을 수 있었다. - 468
빈으로 가는 길이 이제 완전히 열렸다고 본 히틀러는 1937년 제국전당대회 중 괴벨스에게 오스트리아 문제는 ‘무력으로 해결될 것’이며, (실러의 표현에 따라) 그곳에서 ‘세계 역사는 곧 세계 심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괴벨스는 언제 히틀러가 그곳을 ‘말끔히 처리’할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건다는’ 히틀러의 근본적인 결의는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 562
괴벨스는 그보다 며칠 전에는 일기에서 자신이 히틀러에게 ‘마치 아버지에게 그런 것처럼’ 매달려 있다고 쓰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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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 괴벨스에게는 ‘굳건하게 내면 깊이 총통과 함께 느낀다’라는 고백이 필요했다. 그는 이와 함께 히틀러는 ‘아주 깊이 굳게 내 마음에 서 있다. 그가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몇 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다. 나 역시 거기 속하려 한다’라는 서약을 하였던 것이다. - 565
실제로 독일인 대다수가 ‘총통’을 숭배하게 되었다. 초인(超人)의 모든 속성들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는 ‘누구와도,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합이 되어 있지 않은, 신처럼 고독하게 살아가는 생의 공간, 오직 그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 외에는 아무도, 특히 여자는 들어갈 수 없어 보이는 무인지경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직접보면 도취에 빠지고, 심지어 집 한쪽에 있는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총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사진과 꽃으로 장식한 것은 바로 여자들이었다. 그러한 ‘총통’ 숭배는 매일 수천 통씩 히틀러의 관저에 도착하는 흠모의 편지와 꽃들로 잘 나타났다. - 578
이 무렵 괴벨스는 자신과 리다 바로바의 관계를 마그다가 묵인하도록 다그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더 숨길 것도 없다는 태도였으며, 공적인 행사에도 그 여배우와 함께 베를린의 여론 앞에 거리낌 없이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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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도덕과 윤리적인 가치들 때문에 고민거리가 생길 때면, 더욱 단호하게 무절제한 반유대주의로 도피해 들어갔다. - 581
그 위기의 몇 달 동안 자주 그랬던 것처럼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자신의 무의식을 지배할수록, 괴벨스는 점점 더 자주 그러한 광신주의로 도피하곤 했다. - 596
그야말로 광적인 유대인 증오에 사로잡힌 괴벨스는 더 나아가 유대인들을 ‘독일의’ 온천 및 휴양지, 유흥업소, 학교, 심지어 ‘독일의 숲’으로부터 사라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어슬렁거리고 도발하는 베를린의 그루네발트 숲을 ‘끔찍한 예’로 들었다. - 607
신들린 듯한 괴벨스는 ‘알유다’가 추구하는 ‘서구의 몰락’을 피해야 한다는 자신의 망상에 한 발짝 다가섰다.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권리 박탈과 차별이 시작되었다. - 609
괴벨스가 ‘스스로 확고하게 활동하는, 신의 도구’라고 믿었던 히틀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임이 입증되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괴벨스는 곧 자기 기만적인 믿음을 통해 이로부터 도피해야 했다. 이어지는 전쟁 기간 중에 ‘총통’과 제국의 처지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괴벨스는 ‘전 세계에서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의 위협에서 서양을 사수한다는 히틀러의 사명에 대한 망상적 ‘신념’의 세계 속으로 더욱 빠져들어 갔다. - 647
‘숙적’에게 신속한 승리를 거둔다는 상상은 히틀러를 크게 도취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괴벨스는 그의 ‘굉장한 승리의 확신’에 감명받아, 모든 불안과 의구심을 누르고 열광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총통과 함께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그는 자신 안에 위대한 군인의 모든 덕목을 가지고 있다...’ - 653
괴벨스는 스스로 모든 회의를 누르고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우스꽝스러운 논리를 들이댔다. ‘우리는 이겨야 하기 때문에 이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기회는 매우 좋다. 스스로 이를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거듭 확언했다. - 654
명백하게 선전적인 영화들이 전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비록 늘어나기는 하였지만 전쟁 중에도 여전히 낮은 수준이었다. 괴벨스는 바로 지금 영화계의 과제는 ‘긴장을 풀어주는 오락 영화들’에 있다고 보았다. 이 정도 규모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낙관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유쾌함’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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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는 1939년부터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된 전쟁을 다양한 장르와 결합해 단조로움을 피함으로써 관객을 교화하려는 목적을 은폐하고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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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뷰와 군사 행진이 혼합된 <우리는 전 세계에서 춤춘다>라는 영화는 수백만 명이 관람했다. 그 영화의 주요 모티브는 ‘춤추는 젊음, 승리하는 젊음, 웃음을 터뜨리는 젊음, 그것이 우리이며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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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과 같은 로맨스 영화들은 나치의 의도에 특히 적절히 맞아 떨어졌는데...‘나는 알지, 언젠가 기적이 일어날 것을’ 같은 노래들과 레안더가 공군 조종사인 연인과 이별한 후 전선으로 날아가는 공군 부대를 향해 깊은 감사의 눈길을 보내는 멜로드라마 같은 분위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러한 ‘모범’을 더욱 받아들이기 쉬웠다. - 711
임박한 섬멸전을 ‘정당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허구에 괴벨스가 얼마나 깊이 빠져들어 있었는지는 그가 총리청을 떠나는 장면을 묘사한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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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정원을 가로지르고 정문을 지나 사람들이 천진난만하게 빗속을 걷고 있는 시내를 지나왔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걱정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위해 일하고 싸우고 있으며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살아가는 것이다! - 724
괴벨스는 7월6일 <제국>에 공개된 논설 ‘베일이 벗겨졌다’에서 반 볼셰비즘 캠페인의 본격적 출발을 알렸다. 이 글에서 괴벨스는 독일이 볼셰비즘에 대항해 전개하는 전쟁은 ‘영혼의 부패, 도덕의 몰락,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피의 테러, 산더미 같은 시체들 위에 앉아 또 다른 희생자를 찾으려고 둘러보고 있는 범죄자와 그가 저지른 범죄적 정치에 반대해 계몽된 인류가 벌이는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그 범죄자들이 유럽의 심장부로 침입해 들어오기 직전이라는 것이다...‘총통’을 따르는 군인들은 ‘사실상 정치적 지하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유럽 문화와 문명을 지켜내는 구원자이다’ - 729
게슈타포 출동 부대 :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동부 점령지의 유대인 말살과 정적 탄압을 위해 투입한 친위대 소속 특수부대 – 735
최종 해결책 : 1941~1945년까지 나치가 유대인 멸종을 위해 조직적으로 추진한 추방과 살해 정책. 모든 유대인을 모아 동부로 이송한 뒤 가혹한 강제노동을 시켜 자연적인 유대인 감소 효과(사망)를 노렸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상황에 따라’ 처리하기로 했다. - 740
괴벨스는 극도로 맹목적인 증오로 가득한 논설에서 여론을 상대로 이 격리 수용을 ‘정당화’했다. 괴벨스는 그 글에서 ‘총통이 1939년 1월30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국제적인 유대인 금융 자본들이 여러 민족들을 또 다시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볼셰비즘화와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내 유대인 종족의 멸망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 진실로 판명되었다고 적었다. ‘우리는 지금 이 예언의 성취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고,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자초한 험난한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 동정이나 유감 따위는 전혀 온당하지 않다’ - 742
학살수용소 :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단순 수용을 위한 수용소와 학살을 위한 수용소(집단 학살수용소)로 나뉘었다. 집단학살수용소의 경우, 희생자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지만 집시, 슬라브 인종의 일부, 또는 정신질환자로 몰린 사람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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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는 집단학살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10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 755
‘당신도 도와야 한다!’ 여성들의 자원 노동을 권유하는 포스터. 1941년이 되자 700만 명에 이르는 독일 남성이 전선에 동원되었다. 동시에 후방에서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수의 여성들을 노동 전선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 772
이때 선전장관의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군사적 승리가 요원해질수록 그는 점점 더 유대인 ‘절멸’이 서양의 구원을 위한 나치즘의 위대한 역사적 과제 중 그나마 실행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바 서양이 처해 있는 위험은 선전장관의 망상 속에서 부녀자, 아이, 노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정당화했는데, 그는 이를 ‘의무’라고 생각했다. - 792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 : 나치당의 청소년 조직. 1926년7월 나치당 2차 전당대회에서 창설되었다. 1936년 이후 강제 가입 조항에 의해 10~18살 청소년이 대부분 가입 했다. 보통 13살에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하여 18살 때 이 조직에서 탈퇴한다. 이 기간 동안 소년은 헌신과 협력 및 나치에 순종할 의무를 배우며 스파르타식 생활을 했고, 부모의 가르침은 최소한으로 한정되었다. 18살부터는 나치 당원이 되어 적어도 21살이 될 때까지 노동으로 국가에 봉사하거나 군대에서 복무했다. 히틀러유겐트의 자매 조직인 ‘독일 소녀 동맹’은 소녀들에게 우정, 가정에서의 의무 및 모성을 가르쳤다. -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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