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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1>

순돌이 아빠^.^ 2015. 4. 27. 16:11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1>, 푸른숲, 1998

 


1933년 이후로 점점 더 길다란 줄을 이루어서 베를린으로, 혹은 윗소금산(히틀러의 집)으로 그를 만나러 온 행렬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 중 상당수는 저항감을 가지고, 혹은 비꼬는 심정을 가지고 왔다가 큰 감명을 받고 했다. 사이먼과 이든, 로이드 조지, 프랑수아 퐁세, 토인비 같은 이 모든 사람들의 행렬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런던에 있는 영화관의 관객들이, 독일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다음에 히틀러가 스크린에 비치자 환호성을 터뜨렸던 일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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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히틀러는 자기 뒤쪽에서 불어오는, 동경(憧憬)이라는 강력한 바람을 자기편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 바람은 독일을 넘어 시대를 통해 불어가면서 정치적 이성, 현실감각, 계산 가능성 등 오래 전부터 타당한 원칙들을 쓰러뜨렸다.

 

그러한 흐름에는 유토피아와 출발을 향한 욕구, 카리스마적인 의지의 인간을 향한 욕구 등이 포함된다. 카리스마적인 의지의 인간들은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는 대신 집단적 안전의 느낌을 보상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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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시민세계의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헌신과 초개인적인 희생의 행동을 통해 지금은 잃어버린 원천적인 형제애라는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결합되었다. - 16, 17

 

새롭고 낯설게 다가오는 시대에 직면해서, 놀라서 커진 눈길로 바라보면 모든 위기감이 소비에트 러시아 쪽으로 모아졌다는 사실, 특히 시민 대중과 소시민 대중은 그러한 위기감으로 히스테리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는 사실이 당시의 수많은 자료들에서 드러났다. 나아가 히틀러가 이러한 공포의 느낌들을 자기 것으로 삼았고, 대단한 연설 능력과 연극적인 능력으로 그것을 공격으로 바꾸었다는 사실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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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구원자라고 자랑하였던 히틀러의 약속들 18

 

다수의 사람들은 히틀러의 출발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내적인 통합운동을 향한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것을 붙잡아서 미래의 비전으로 바꾸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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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의 패배, 혁명, 베르사유의 굴욕, 인플레이션, 중산층의 계급추락, 세계경제의 위기 등과 같은 역사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모든 특성들을 훨씬 넘어서서 필연적인 시대 변화가 다가온다는 느낌들이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대중의 추종을 확보해주었다. 절반은 종교적인, 강림제 같은 분위기가 국가사회주의를 둘러 쌌고 히틀러의 주변에 일종의 메시아적인 기대감을 확대시켰다. - 19

 

사회적인 구조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다른 모든 조건들보다 정말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각각의 사건은 답답한 결정론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히틀러를 히틀러로 만든 생애의 상황들, 그의 콤플렉스, 공포, 선입견, 그가 만들어낸 파괴 에너지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이 잘 생각해보아야 할 사태진전에 대한 책임을 거의 사라지게 만들거나 아니면 그저 운명에 종속된 무력감 정도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 25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또한 미화시키는 것은 그의 생애의 근본적인 노력들 중의 하나였다..극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한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기념동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생 동안 그는 그 이미지 뒤에 숨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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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을 위해 애쓰던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당수 시절에 그는 이미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을 모욕이라고 느꼈다. 수상이 되었을 때는 자기 사생활에 대한 모든 출판을 금지시켰다. 학교 친구부터 가장 친근한 저녁의 술자리 모임을 통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세심하게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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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은폐 노력은 단순히 오래된 예언자 방식이나, 혹은 카리스마의 마법적인 요소를 자기 생으로 도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압도된 은폐된 인간의 염려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흔적을 지우고 동일성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들고, 꿰뚫어보기 어려운 출생 기원과 가족적 배경을 더욱 흐리게 만들기 위해서 세심한 노력을 하였다. - 51,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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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그의 집안 배경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밝혀지자 히틀러는 지나치게 불안한 태도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문 출신인지 알아서는 안 된다.” - 51~53

 

분명하게 그는 사회적 의미에서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을 하려고 했다. 성장기에 보이는 그의 모든 집착과 결심 뒤에서 어떤 높은 존재가 되려는 매우 강한 욕구를 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지나친 정열도, 예술이 더 나은 사회의 특권이라는 생각과 적잖이 결부되어 있다. - 65

 

특히 시민 계층과 소시민 계층은 사방에서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진보에 의해서, 무서울 정도로 커지는 도시들에 의해서, 기술·대량 생산·경제력 집중 등을 통해서 위협당한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신뢰할 만한 개인 혹은 사회적 유토피아를 뜻했던 미래라는 개념은 이 시기부터 점점 더 광범위한 계층에게 불안이라는 범주로 바뀌었다. 빈에서만 1859년 이후 30년 만에 거의 4만 개의 수공업체가 파산하였다.

이러한 불안은 점점 커지는 현실도피 욕구를 담은 수많은 저항운동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위협받고 있는 세계의 구원론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종족적인 방어이데올로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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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콤플렉스는 특별히 유대인 배척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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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70년대 초에 발생한 경제위기 동안에 반유대인 감정이 폭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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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습관대로 전통의상을 입었다. 길다란 검은 카프탄을 입고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쓴 그들의 낯선 모습은 신비스러운 세계의 두려움을 일으키면서 거리의 모양을 이상하게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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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 의해서 위협받는다는 의식은 특별히 다음과 같은 비난의 형태로 나타났다. 즉 유대인은 뿌리가 없고 파괴적이고 혁명적이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란 없다, 그들의 차가운지성은 도이치 사람의 내면성과 심성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등이었다. - 74~76

 

그는 거의 병적으로 공상에 빠져들었다. 깊은 밤까지 계획을 세우느라 열을 올리곤 했는데, 이 계획에는 능력의 결핍, 아는 체하기, 참을성 없음 등이 서로 다투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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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건물 성들, 전시회장 등을 구상했고, 알코올 없는 국민음료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담배 대용물을 찾으려 애쓰고, 학교 운영 개혁계획도 세워보고 집주인, 관리 등에 대한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 원한, 잘난 척하는 비전 등을 담은 도이치 사람의 이상국가를 구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도 이룩하지도 못했으면서 어떤 충고도 거부하고 가르침을 미워하였다. 작곡 기법의 지식도 없이 리하르트 바그너가 중도에서 그만둔 피비린내라는 근친상간을 다룬 오페라 <대장장이 빌란트>의 구상을 계속할 궁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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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천재임을 입증해 보이겠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혀서 쉬지 않고 말하고 계획하고 몽상하였다. 그러면서도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는 말만큼은 방친구에게 하지 않았다. 낮 동안에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빈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다” - 81

 

쿠비책은 불안이 섞인 태도로 히틀러의 갑작스런 분노와 절망적인 발작을 적어 놓고 있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한한 증오감, 쿠비체크는 자기 친구가 빈에서 완전히 균형을 잃고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극히 격앙된 흥분상태가 급작스럽게 깊은 좌절의 기분과 교차하고 하였다. 그럴 때 그는 부당함, 미움, 적대감만을 보이고,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전인류에 고독하게 맞섰다. 그는 인류 전체에 의해 쫓기고 기만당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디에나 오직 그의 상승을 방해할 목적으로 덫이 쳐져 있다고 느꼈다. - 81, 82

 

19089월에 히틀러는 한 번 더 아카데미 회화반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였다. 지원번호 24번에는, 그가 미리 제출한 작품이 시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아서 응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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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더 결정적이 이 거절은 한 해 전의 모욕적인 경험을 상기시키고 다시 한 번 확인해준 것이었다. 학교와 아카데미에 대해서 그는 일생 동안 줄지 않는 미움을 가졌다...‘바보 같은 자식들이나 학교를 다니고 천재를 죽이기 위한곳이라고 했다. 35년이나 지난 뒤에 사령부에서 총통이며 사령관인 그가 전에 마을 학교선생을 지낸 가난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의 더러운 외양’, ‘지저분한 칼라와 깎지 않은 수염 등을 향해서 이런 장광성을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그가 어느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자기 정당화의 욕구로 진정시키기 위해서 거듭 애쓰곤 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30년대 초에 당의 위기를 맞이하여 쓰게 된 공개편지에서 자신에게 부당한 운명을 원망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돈 많은 부모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인생이라는 가장 혹독한 학교에서 곤궁과 비참을 통해 교육받았다. 표피적인 것을 중히 여기는 세상은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지 않고 언제나 어떤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는다. 수많은 우리 지식인들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은 한 번도 관심을 끌지 못했고 언제나 내가 학위증이 없다는 것만 관심을 끌었다.” - 82, 83

 

그는 솔직히 존경심을 가지고서 그 영광과 부유함에 압도된 채 시민세계로 접근하였다. 린츠 출신의 몽상적인 관리 아들은, 시민세계에 경탄을 하였지 그것을 뒤집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부보다는 참여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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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시민세계로부터 거부당하고 깊은 모욕감을 느끼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시민사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졌다는 것 84

 

린츠 시절의 평범한 반유대주의가 광적으로 변해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혀 문자 그대로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유대인 증오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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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린츠나 빈 어디서도 어떤 아가씨와 실제로 만난적이 없다는 확인도 상당히 믿을 만하다. 어쨌든 연극적인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 정도의 정열적 사건이 없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러한 결핍에 맞서 특이한 꿈들이 나타난다. 그 자신이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것은 역겹고 다리가 구부러진 유대인 놈들이 수백수천 명의 아가씨들을 유혹하는 악몽이었다. 란츠도 아름다운 금발의 귀족여인들이 검은 털투성이 유혹자들의 팔에 안겨 있는 끔찍한 모습에 고통을 받았다. 그의 종족이론은 성적인 질투심과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반여성주의 감정으로 물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오는 존재이고, 짐승 같은 하급인간들의 쾌락적인 기술에 쉽게 넘어가는 그들의 특성이 북방 혈통을 오염시키는 주요원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도 비슷한 형태로 뒤늦고 억압된 남성의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의 유대 청년이 얼굴에 악마적인 기쁨을 드러낸 채 몇 시간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따. 그는 그 아가씨를 자기 피로 더럽히고, 그럼으로써 아가씨의 종족에서 그녀를 훔쳐내려는 것이다”...국가사회주의 세계관의 전망에서 광범위하게 피어 놀라오는 역겨운 냄새는 시민세계 내부에 나타난 억압된 성이라는 현상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 94, 95

 

 

젊은날의 친구 쿠비체크와 빈의 어두컴컴한 지하세계 친구들은 히틀러가 일찍부터 온세상과 사이가 나빴고 어느 쪽을 바라보든 증오를 느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반유대주의는 그때까지 목적 없이 헤매고 있던 그의 증오가 고정된 형태로 자리를 잡고, 마침내 확고한 증오의 대상으로 유대인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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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분열되지 않는 강도로 단 하나의 현상에만 집중시키곤 했다. 그 하나의 현상에 세계의 모든 재앙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 95

 

히틀러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추종자이며 숭배자로 빈에 등장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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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학 외국세력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듯 그는 어디서나 도이치 민족과 정신이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만 보았다. 유대인·로마 카톨릭·슬라브 사람·사회주의자·합스부르크 왕조,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국제화도 도이치 민족과 정신을 위협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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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너러는 절망에 빠진 인간이었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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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을 세계의 모든 재앙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보는 편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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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도이치 소수민족이 압도되고 학살되는날이 다가온다고 느꼈다. 그는 반유대 특별법을 요구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목매단 유대인을 나타내는 반유대 표지를 시계줄에 매달고 다녔다. 그들은 빈 의회에서 유대인을 살해하면 돈이나 아니면 살해된 사람의 재산으로 현상금을 주자는 주장도 하였다. - 96, 98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점점 커지던 산업지대의 도이치 노동자들은 1904년에 트라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DAP)을 결성했다. 시골에서 공장지대로 흘러들어와서 파업 대체노동자로 일을 하는 싸구려 체코인 노동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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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민족간의 대립을 절대로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인류 전체의 구호에 합당한 형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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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당의 참가자들은 이전의 사회민주당원들에서 상당수를 충원하였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연대정책이 이 지역의 체코 다수인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근심에서 자신들의 이전의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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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의 강령은 방어와 자기주장 요구를 하나로 합쳤다. 그것은 확고한 반자본주의, 혁명적·자유주의적·민주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 처음부터, 주로 체고·유대인 등 이른바 이방민족들에 대한 공격과 결합된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형식을 지닌 것이었다.

 

초기의 당원들은 소규모 광산 노동자와 방직공장 노동자·철도 노동자·수공업자·노동조합원들이었다. 그들은 못 배운 체코 노동자들보다는 도이치 시민들·약사·기업가·고위 공무원이나 상인들에게 더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 99, 100

 

하니쉬는 어느 날 히틀러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었냐고 물어서 화가라는 대답을 들었다. 페인트공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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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욕감을 느끼고 자신은 그런 종류의 화가가 아니라 공부한 사람이고 예술가라고 대답했다.” - 103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시기에 음악에서만 우상이었던 것 아니다. 초기에 삶에 실망하고 좌절도 겪었지만 완강한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가 마지막엔 세계적 명성을 얻어낸 그의 삶을 히틀러는 자신의 삶의 모범으로 여겼다. - 106

 

히틀러가 사회민주당의 선전을 보고-사회민주당의 신문·데모·연설 등-이끌어낸 결론을 읽어보면 더욱 확실한 근거를 보게 된다. 이 결론들은 독특한 실천법을 규정하고 있다.

 

광범위한 대중심리는 어중간하거나 약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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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간청하는 사람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독불장군처럼 자지주장만 펴는 이론에 대해 내심 더욱 만족한다. 대중은 자유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며 심지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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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오직 목적의식이 확고한 표현들의 가차없는 힘과 잔인성만을 보며, 그러한 잔인성 앞에 마침내 스스로 몸을 굽힌다. - 112, 113

 

히틀러의 생각에 들어 있는 사회적 다윈주의...스펜서와 다윈이 전개한 생명체의 발전과 도태의 법칙들은 수많은 사이비 과학 출판물의 상위 심급기준처럼 되었다. 그것은 생존을 둔 싸움을 기본법칙으로 삼고, 인간과 민족들이 함께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강자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널리 유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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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사냥터처럼 민족들의 운명과 사회적 대립들도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도태와 육종양성을 포함하는 엄격한 선별과정을 통해서 결함이 발전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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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한 생명 없애기, 민족정책의 목표 만들기, 쓸모없는 인간들을 강제 수용해서 불임으로 만들기, 머리 크기·귀의 모양 또는 코의 길이 따위로 생존경쟁을 위한 유전적 특성을 가려내기 등이 거론되었다. 약자를 두둔하고 선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드물지 않게 기독교 도덕, 관용, 문명 진보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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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그 시대의 반민주적 경향들과 결합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자유주의, 의회주의, 평등이념, 국제주의 등은 자연법칙에 반하는 것이고 종족혼합을 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114, 115

 

전쟁은 지나간 여러 해의 상처 많은 체험과는 달리 아돌프 히틀러의 긍정적인 교양체험이었다.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굉장한 인상이었고, ‘압도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행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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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자신도 전쟁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감상적인 젊은 남자에게 힘과 자기 가치 의식을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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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격전지 한가운데를 뛰어다니면서 보여준 용기와 냉혹함은 동료들 사이에서 그에게 일종의 후광을 마련해주었다. - 139

 

뒷날에도 그가 이용하는 언어표현들은 그의 격분의 정도를 보여준다. ‘수다쟁이들’ ‘해충’ ‘혁명에 대한 거짓증언자들은 없애버려야 마땅하다고 했다. “모든 군사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 나쁜 질병들을 쓸어버려야 할 것이다.” - 142

 

선전이란 민중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받은 계층을 지향해서는 안 되고 영원히 대중을지향해야 하며 그런 대중들 중에서도 정신적 수용력이 가장 제한된 사람에 맞추어 수준을 잡아야 한다. 표어처럼 주입하기 쉬운 형태로 극소수의 설득력 있는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언제나 감정을 지향하고 절대로 이성을 향해서는 안 되고 모든 객관성을 명백하게 포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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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이냐 미움이냐, 옳으냐 그르냐,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 있을 뿐 절대로 반은 옳고 반은 그르다는 것은 없다는 등등이다. - 144, 145

 

종전은 상병 히틀러에게 전쟁터에서 얻은 역할을 빼앗아갔다. 가는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 152

 

베르사유 평화협정...이 조약에서, 우익이나 좌익 가리지 않고 모든 진영과 당파들에 이르기까지 잊을 수 없는 치욕감을 느끼도록 만든 악몽은 물질적인 부담보다 오히려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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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수치감은 머지 않아 우익의 선동에서 가장 공격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적인 체면문제였다. 무엇보다 일일이 지명된 도이치 장교들이 연합군 군사재판의 판결을 받도록 인수하라는 제228조항과 독일이 전쟁발발에 대해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는 그 유명한 제231조항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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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국은 세계 심판자 같은 몸짓으로 자신들의 합법적인 요구에 대해서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 156, 157

 

국가사회주의는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비웃은 것처럼 지루하고 고루한 모임들이었다. 그들은 뮌헨의 선술집에서 보잘것없는 모임을 가지면서 국가와 가족의 곤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작은 집회들이, 강력하고 고도로 조직화된 대중을 이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에 도전하고 능가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몇 년 동안 이 촌스런 연설가들의 모임에 제대 군인들과 프롤레타리아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엄청난 역동성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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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고, 개념상으로나 현실적으로 한데 모은 힘은 다름 아니라 압도적인 공포감이었다.

 

우선 아주 직접적인 것으로 혁명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19세기 내내 유럽 시민계급을 꿈속에서 괴롭힌 저 거대한 공포가 그것이었다. 혁명이란 자연의 폭력과 같다는 인상, 참가자들의 의지를 고려하지 안고 원초적인 자연의 힘으로 독특한 결과를 초래하고, 강제로 공포정치, 파괴, 살인, 혼란 속으로 이끌어들인다는 인상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얻게 된 체험은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개선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공포심이었다. 이 공포심은 특히 독일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모든 실질적인 혁명의지를 변조시키고 저 평화의 광신주의를 만들어냈다. 1918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는 평화와 질서의지를 호소하는 것만으로 거의 모든 혁명봉기가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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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10월 혁명과 그 결과 드러난 위협들을 보면서 이 공포는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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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민중지 하나는 191910월에 그 시대의 공포심과 망상을 잘 보여주는 이런 기고문을 싣고 있다.

 

기독교도를 미워하는, 할례받은 아시아 사람들이 어디서나 피를 뚝뚝 흘리는 손을 쳐들고 우리를 집단으로 목조르려고 하는 슬픈 시대다! 이사샤르 체더블룸, 본명 레닌이라ssm 유대인이 행한 기독교도 학살은 칭기즈 칸을 무색케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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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명의 살해된 성직자는 자기가 봉직하던 교회문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뮌헨도 이제....이와 똑같은 잔혹장면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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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위협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유럽 전체에 퍼져 있는 몇 명의 배신자들이 아니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러시아, 히틀러가 표현한 대로 잔인한 권력 덩어리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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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밀정들의 보이지 않는 활동, 계속되는 불안,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혁명, 1920년 루르 지방의 소요, 그 이듬해 중부 독일의 궐기, 함부르크의 반란, 뒤에는 다시 작센과 튀링겐 지방의 반란 등, 소비에트 정권의 항구적인 혁명위협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 되고 국민적인 거부감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위협은 특히 초기 히틀러의 연설에서 지배적인 것이었다. 그는 붉은 학살사령부의 활동, ‘살인집단’ ‘볼셰비즘의 피의 늪등을 날카로운 색채로 묘사하였다. 그의 말로는 3천만 명 이상이 러시아에서 고문을 받아 천천히 죽어가고, 일부는 단두대에서, 일부는 기관총이나 그 비슷한 방법으로, 일부는 진짜 도살장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두 이 굶주림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있음을 안다...그리고 이 재앙이 가까이 다가와 독일 위로 넘쳐들어오는 것을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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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언제나 국가사회당의 목표는 극히 간단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의 절멸과 근절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도 비할 바 없는, 천재적으로 만들어진 선전기관과 계몽기관의 힘으로, 그리고 모든 마르크스주의 테러에 대해서 그보다 10배나 큰 테러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가차없는 힘과 가장 잔혹한 결단력의 운동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무솔리니가 전사(戰士)동맹(Fasci di Combattimento)’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운동은 그로부터 파시스트(Faschisten)’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 169~172

 

공포심은 단순한 정치적 전복이념을 넘어서서 시대의 지배적인 기본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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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지배형식과 아울러 삶의 친근한 형태들도 다 망가졌다. 불안, 정치화된 대중의 과격주의, 혁명의 혼란 등은 전쟁의 후유증이었을 뿐 아니라, 낯설고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시대의 전조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낯선 시대에는 전에 유럽을 위대하고 친근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더는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발밑에서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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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빨아들여서 소비하고 내버리는 익명의 경쟁사회에 대한 공포가 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수많은 당시의 상황분석에 보면, 이러한 공포가 확대되어 개인의 존재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는 공포가 되었다. 개인은 해체되어 기능이 되고, 인간은 의식 없는 기계가 되어 조망할 수 없는 과정 속의 일부로 편입된다. - 173, 174

 

<공산주의의 성윤리>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나쁜 소산일 뿐이다. 혁명은 결혼제도를 없애고, 낙태·동성애·이중결혼·근친 상간 등에 대한 형벌규정도 없앨 것이라고 했다. - 175

 

라가르드가 쓰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독일을 보고 싶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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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현대세계에 마주세운 가치관은 자연성, 예술, 과거, 귀족주의, 죽음에 대한 사랑, 강한 개성의 권리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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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 속에서 공포는 공격으로 바뀌고, 절망은 위대한 것에서 위로를 구하려고 하였다. - 178

 

이미 초년의 체험들이 그에게 강력한 공포의 체험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그의 사고와 감정의 전 체계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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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뒤에 공포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고, 공포는 일상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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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이 건드리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일이나, 사람을 극단적으로 불신하는 것이나, 뒷날 점점 강해지는 결벽증 등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성적인 오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떤 형태든 전염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이다. “미생물들이 나를 공격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도이치 운동이 표방했던 외세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유대인이 메뚜기 떼처럼 덮쳐오는 것, ‘도이치 사람들이 깜둥이로 변화되는 것’, 도이치 사람들이 독일에서 쫓겨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근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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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둘러보나 그는 천천히 썩어가는 세계의 부패현상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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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패과정을 막아보려는 확고한 의지에서 히틀러는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연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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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껏 느낀 공포의 모든 요소들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돌렸다. 거대하게 쌓아올린 공포체계 한복판에 검은 털복숭이 유대인의 영원히 오염시키는 모습이 서 있다. 나쁜 냄새가 나고, 입맛다시며 금발 소녀들을 탐욕스럽게 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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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압당한다는 고정관념이 깊이 사로잡힌 채 그는 독일이 음모의 대상이라고 여겼다. 볼셰비키 당원들, 프리 메이슨, 자본주의자, 예수회 등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전략적으로 피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폭군들의 명령을 받으며 독일 멸망작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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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독을 보았고, 유대인들이 구더기’ ‘회충’ ‘민족의 몸을 파먹는 독사라고 여겼다. - 184, 185

 

파시스트 운동은 사회적인 배경으로 보아 세 가지 요소에 기반하였다...셋째 독특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라는 요소였다. 지도자란 혼란시에 명령을 내리는 질서의 확고한 목소리이고,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할 줄 알며, 절망도 알지만 구원의 방책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상 불행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그렇듯이 도이치 민중설화도 수백년 동안 잠에 빠진 채 산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돌아와서 민족을 구하고 죄 많은 세계를 벌줄 것이다. - 186, 187

 

그들은 아득하게 빛바랜 선조들의 꿈을 한 번 더 꾸고, 과거를 찬양하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이었던, 에스파냐 카톨릭의 지배였든, 대 벨기에, 대 헝가리, 대 핀란드가 되었든 간에 과거의 몽롱한 윤곽 속에서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미래의 약속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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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요구는 세계의 치유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좋던 옛 시절을 단순히 불러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며...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문명화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의 자기소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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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였다. 파시즘이 공감을 얻는 것은, 인간정신의 자연적인 움직임에 따라 모든 잃어버린 낙원이 있는 곳, 즉 그 옛날 신화적인 원초상태에서 유토피아를 찾았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지배적이던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든 신성한 것을 과거에 두려는 성향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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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정당들은 산업화와 해방과정을 긍정하였다. 오직 파시즘만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를 함께 느꼈다. - 188~190

 

시민계층에 이 새로운 자의식을 불어넣어주려고 애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중간급 장교들, 즉 행동을 열망하는 대위와 소령들이었다. 에른스트 융거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포도주를 즐기듯 전쟁을 즐기는 사람들이었고 아직도 여전히 전쟁에 도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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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부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자 그들은 저항하는 반군과 소비에트 군사위원회를 평정하고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기도를 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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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무질서한 군대생활과 무기 다루는 기술, 남자들간의 동지애 따위를 버릴 수가 없었다. 전쟁에서 얻은 체험과 폭력을 사용하는 기술 등을 이용해서 그들은 혁명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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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갈구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기피하는 정치군사 조직체들이 활동하였다. - 202, 203

 

전쟁이 끝나고 보니 자신의 청춘에 위대함과 무게를 주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느끼는 귀향자들의 깊고도 공격적인 실망감 207

 

상세한 서술에서 히틀러는 우연하고도 개인적인 인상들에 근거하는, 널리 퍼진 감정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하였다. 정치운동으로 만들어야 할 반유대주의란 사실의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모든 것은 종교,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이라고 말하지만, 유대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돈과 권력욕을 만족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유대인의 활동은 다른 민족들에게 종족 폐결핵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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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특권에 대해서 계획적이고 법적인 투쟁을 벌여서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그 최종적인 목적은 유대인 자체를 확실히 제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민족의 힘을 지닌 정권만이 이 두가지 목적을 달성할 능력이 있으며 민족적 무능의 정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 208

 

위대하다는 인상과 단호한 타격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국가사회당은 툭하면 거리행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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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커지는 자의식을 가지고서 정당은 질서인자라고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좌익집회를 해산시키고, 토론연사는 고함을 질러대고, ‘팸플릿을 나누어주고, 이른바 국민정서에 안 맞는 조각품 하나를 공공전시장에서 치우도록 했다. 19211월 초에 히틀러는 킨들 맥주집에 모여든 청중들에게 이렇게 장담하였다. “뮌헨의 국가사회주의 운동은 앞으로 가차 없이 모든 행사와 강연들을 방해할 것입니다. - 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말이죠 이미 병든 민족정서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행사와 강연들 말입니다.

 

당이 그 사이에 뮌헨 방위군 사령부의 비호를 받을 뿐 아니라 바이에른 주정부의 버릇없는 응석받이 귀염둥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독자적 행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 231, 237~238

 

사회적으로 무시당할까 하는 두려움이 분명히 그를 괴롭혔다...어쨌든 그는 편안하게 활동하려는 소망보다는 자신의 출현을 인상 깊게 만들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245

 

여러 가지 점에서 에서는...외설적이고 지저분한 반유대주의의 대표자 노릇을 하였고 인신제물, 유대인의 욕정, 세계모반, 근친상간 등에 관한 온갖 난잡스런 상상에 사로잡힌 듯이 보였다. 순결한 아리안 여자들의 살을 탐하는, 검은 털로 뒤덮인 호색적인 악마들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 249

 

히틀러는 오래전부터 어차피 자기 힘으로 만들어진 당의 당수가 될 기회를 기다려 왔다. 그 시대가 강한 남자유형에 끌리던 시대였으므로 히틀러에게 유리하였고 그의 의도에도 잘 맞았다. - 252

 

짧은 시간 안에 히틀러 개인을 둘러싼 숭배의 과도함이 어느 정도까지 과장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대략 일년 뒤에 루돌프 헤스가 쓴 찬양문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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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생활과 역사의 모든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능력, 자신의 일이 순수하며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 무제한의 의지력이 그에게 대중의 환호성을 지르는 감동적인 연설의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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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곤궁이 그런 이를 강요하기 때문에 그는 피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위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강철로 결정되는 법이기 때문이다...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일념뿐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 257

 

당을 장악한 직후인 192183일에 돌격대(Sturmabteilung=SA)도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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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대 이념은 방어적인 목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공격과 정복의 도구였다. 히틀러는 이 시기에 권력장악을 오로지 혁명적인 폭력행위의 범주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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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부대를 창설하기 위한 외적인 조건은 19216월 민방위 부대의 해체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고지 슐레지엔 지방에서 귀향하는 고지 의용군의 해체였다. 이 부대에 속했던 수많은 병사들이 갑자기 친밀감, 병사의 낭만, 그와 더불어 삶의 의미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렸다고 믿고서 낙오된 용병 무리와 모험에 굶주린 젊은 건달 패거리에 합류했다. 그들은 모두 국가 사회당에 받아들여졌다. 전쟁 체험을 간직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은 군대식으로 조직된 돌격대에서 계급과 사령부 제복 등을 보고, 무질서하게 보이는 공화국 사회에서 그리워하던 저 친숙한 생활방식을 다시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소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은 독일에서 오랫동안 사회적 신분상승에 제약을 받다가 전쟁에서 장교계급의 인명손상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지휘자 계급으로 올라갔다. 거칠고 지치지도 않고 행동을 열망하는 그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새로운 경력을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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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강단, 가게의 계산대, 관청의 창구, 이런 생활방식은 너무 협소하고 비참하고 낯선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히틀러를 정계로 몰아넣은 것과 똑같은 규범으로부터의 도피가 그들을 히틀러에게로 데려온 것이다. - 259

 

그들은 집과 공장 담벼락에 구호들을 붙이고 적대자를 만나면 붙어싸우고...그들의 노래와 구호들은 피비린내나는 과도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 양조장에서 열린 어떤 모임에서는 참석자들에게 유대인 학살을 위해서 기부금을 냅시다라는 구호가 붙은 모금상자를 내밀었다.

 

이른바 조정자들이 여러 가지 행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회를 방해하였다. - 263

 

돌격대의 초기 핵심을 이루었던 전쟁참가자 세대에 뒤이어서 곧 젊은 세대가 들어왔다. 그러면서 이 운동은 실제로 불만스러운 젊은이들의 반란이 되었다. 폭력에 대한 애착, 엘리트 남자들의 공동체, 이데올로기로 감싼 모반 등의 요소가 뒤섞여서 새로이 강하고 낭만적인 매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 263

 

돌격부대’...가장 일반적인 민족적 투쟁 및 돌격 프로그램을 넘어선 어떤 특징적인 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를 행진할 때에도 새로운 사회질서를 향한 행진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돌격대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갖지 못한 채 다만 거대한 불안이었을 뿐이며 어떤 목적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통제도 못하는 역동적인 에너지였을 뿐이다.

 

엄격하게 보자면 이 집단으로 들어간 사람들 대부분이 단 한 번도 정치적 병사들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허무주의, 불안, 복종의 욕구 등을 그럴싸하게 들리는 정치적 용어들 뒤에 감추어보려는 건달들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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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동성애에 가까운 남자들만의 특성을 가지고서 지도자들이외에는 별다른 강령도 없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평균적인 돌격대 사나이의 헌신의 욕구를 일깨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공식적인 호소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 필요할 경우에는 죽음 속으로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오시오!” - 264

 

전체적으로 보아서 초기에 국가사회주의의 말이 먹혀들고 추종자를 얻게 된 것은 계급이 아니라 마음상태였다. 비정치적인, 그러나 실제로는 권위를 좋아하고 지도를 필요로 하는 의식상태는 모든 계층과 계급에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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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가치의 일부를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얻어온 사람들이었다...그들이 혼란스런 시대를 지나면서도 암담한 저항의 심정으로 보존해 왔던, 질서와 존경이라는 엄격한 개념은 공화국 치하에서 민주주의, 언론자유, 논쟁, 정당교섭 등을 통해서 헌법 자체에 의해서 이미 문제시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형태에서 세계를 더 이상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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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상승하던 선동가 히틀러는 바로 민족의 특징이 되는 질서와 기율에 대한 본능에 하소연해서 점점 더 많은 동조를 얻었던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세계는 질서가 잡혀 있거나 아니면 아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 266, 267

 

지속적인 위기는 사람들이 다시 믿을 수 있는 음성, 따를 수 있는 의지를 찾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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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선동가 히틀러...그가 이렇게 분노한 보통사람들의 기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고, 그들의 소원을 어느 정도 그려 보일 수 있는 감수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 자신 바로 그러한 현상에 위대한 연설가의 비밀을 두고 있었다. “그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필요한 말들이 바로 청중들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도록 언제나 광범위한 대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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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개인의 상황과 사회병리적 상황의 이런 일치를 모르면 일반인의 감정에 대해서 그토록 마법적으로 작용한 히틀러의 부상(浮上)을 이해하기 힘들다. 민족이 이 순간 비로소 체험한 일, 즉 마법에서 깨어나는 체험, 몰락과 계급추락,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대상을 대상을 찾는 감정 등을 그는 이미 오래전에 겪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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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로잡은 것은 그의 논거가 반박할 수 없는 것이거나, 그의 구호들이 대단히 예리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한 시민 아돌프 히틀러가 어찌할 바 모르고 똑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불러일으켰던 똑같은 체험, 똑같은 고통과 희망의 감정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광증과 신들린 상태, 특별하게 달라붙은 비속성의 혼합 속에 드러나는 그의 특별한 카리스마는 대부분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 268, 269

 

그는 일찍부터 무대에 등장할 때의 특별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특수한 양식은 심리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으며, 특히 그의 연극적인 특성을 통해서 전통적인 정치집회의 과정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선전 트럭들과 거대한 공식적 광고를 위한 벽보로 요란스럽게 선전하면서 그는 서커스와 대형 오페라의 구경거리 요소를 교화적인 교회의식과 교묘하게 혼합하였다. 높이 매단 깃발들, 행진곡, 환영의 구호, 노래들, 언제나 되풀이되는 하일하는 외침 등은 지도자의 연설을 위해서 점점 긴장이 넘치는 준비과정이 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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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때때로 뮌헨의 모든 중요한 집회장소들의 음향을 손수 조사하였다. 하커 양조장이 호프 양종이나 킨들 지하술집보다 더 큰 음량을 요구하는지 알아내려고 했으며, 집회장소의 분위기, 통풍, 전략적 위치 등을 세밀하게 검사하였다. - 270

 

이제 그가 위대한 선동가의 몸짓으로 자기가 권력을 잡으면 평화조약을 넝마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거나, 자기가 프랑스와 새로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확언해도 아무도 그의 말을 고치지 않았다. 한 번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슈트라스부르크에 이르고, 함부르크에서 빈에 이르는강력한 제국의 전망을 제시한 적도 있었다. 사람이 점점 더 몰리는 것은 이 대담하고 불합리한 도전의 어조야말로 사람들이 당시의 체념의 분위기 속에서 듣고 싶어하던 목소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체념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 273

 

자신의 선동술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반유대주의자 행패꾼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풍을 일으키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잠만 자지 말고 뇌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독일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일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조하요! 그러나 우리가 독일을 구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성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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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톨릭 교회가 그런 결합을 통해 보여준 심리적인 지식과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것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적인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망설임도 없이 나의 구세주를 뻔뻔스럽게 불러댔다. “나는 기독교도로서 무한한 사랑에 가득 차서, 주님께서 마침내 몸을 일으켜서 채찍을 움켜쥐고 고리대금업자, 뱀과 도사의 무리를 성당에서 쫓아내셨다는 성경 구절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독에 대항하는 주님의 무서운 싸움을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는 봅니다. 그분이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깊이 감동되어서 말입니다.” - 274


이 시절 그의 지나치게 손질된 원고들을 읽어보면 그가 자기를 사로잡았던 수백 가지 원한들을 똑같은 고발, 비난, 복수의 맹세로 바꾸는 숨가쁜 장면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오직 저항과 증오, 증오, 그리고 다시 증오가 있을 뿐!”이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의기 소침하고 불안한 국민의 한가운데서 소리 높여 적에 대한 미움을 외치면서 대담한 뒤집기 원칙을 자기 적으로 삼았다. 자신은 적에 대한 증오를 동경한다고 고백하였다. - 274

 

웅크렸던 인간의 소박하고도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히틀러는 이 열광과 중심의식을 누렸다.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10개의 홀을 돌면서 어디서든 사람들이 열광하여 소리치는 것을 경험하면 정말 격앙된 느낌이 든다” - 275

 

그들은 마치 구세주처럼그를 향하여 몰려갔다고 어떤 주석에 표현되어 있다. 수많은 자료들은 이 전체주의 운동이 준종교적이고 구원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각성 체험들과 개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276

 

사람들, 이해관계, , 이념 등을 한눈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 목적이란 권력의 상승이었다. - 285

 

당의 재정적 근거는 의심할 바 없이 회원의 당비, 자발적인 헌금, 히틀러 연설이나 그밖에 당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서 걷은 입장료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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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소유자들은 할인권으로 도움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장신구나 예술품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 혼자 사는 여성 당원들은 밤 집회에서 히틀러의 모습에 도취해서 꿈도 못 꾸던 감정의 격앙상태에 이르른 다음에 국가사회당에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베히슈타인, 브르크만, 에른스트 푸치한프슈텡글 같은 재산이 있는 히틀러의 친구들은 상당한 기부금을 내서 당을 도와주었다. - 296

 

여기서 처음으로 널리 퍼져서 종교적 형식이 된 지도자 숭배는 히틀러의 생일이 들어 있는 4월 하반기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민족관찰지>에다 히틀러라는 이름의 신화적 울림을 찬양하는 찬사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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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헤르만 에서는 히틀러를 보고 밤도 그 앞에서 길을 비키기 시작한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맞아들였다. - 300

 

이 권력의지는 언제나 오직 자신만을 원하며, 모든 성과를 오직 거칠고 야심만만한 새로운 모험을 위한 기회와 단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의미도, 구체적인 목적도, 만족도 모른 채 말이다. - 361

 

그가 당 목적에 맞는 관점들에 따른 생각이라고 부른 것은 모든 이념, 경향들, 심지어는 맹목적 신앙에도 권력에 걸맞는, 그러니까 원래 의미에서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는 그의 능력이었다. - 363

 

이런 세계상에 들어 있는 대재앙의 모습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소명의식을 이끌어냈다. 역사 앞에서 사명감을 가진, 치유하는 특성이었다. 전쟁중 마지막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군사적 필요성에 거역하면서까지도 그가 유대인 근절작업을 계속해 나간, 여러 모로 이해하기 힘든 일관성은 병적인 고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상의 이해관계를 훨씬 넘어선 거인들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 우주를 구하기 위해 선택되어서 악을 다시 악마에게 돌려보내는’ ‘다른 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뿌리를 박은 것이었다. - 364

 

역사란 다름아닌 생존공간을 둔 민족들 간의 생존싸움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생존싸움에 모든 가능한 수단이 다 허용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득, 간계, 영리함, 인내, 선의, 교활함, 그리고 잔인성까지도말이다.

 

전쟁과 정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이야말로 정치의 최종목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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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체적인 전투철학의 표지에서 보면 복종이 사상보다 더 중요하고, 헌신의지가 통찰력보다, 광신적 맹목성이 최고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였다. 그의 말로는 원숭이들은 모든 아웃사이더를 적으로 간주하고 덤벼들어 죽인다. 원숭이에게 타당한 것은 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에게도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366

 

고양이가 쥐를 먹는다는 것이 누구 잘못일까?”라고 그는 비웃었다. 이른바 인간의 휴매니티란 인간의 허약함에 봉사할 뿐이며, 사실은 자기 존재를 가장 잔혹하게 절멸시키는 짓이다. 싸움, 굴복, 파괴 등은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 존재는 다른 존재의 피를 마신다. 하나가 죽어야 다른 것이 양분을 얻는다. 휴매니티 같은 헛소리는 집어치워야 한다.“ - 367

 

적을 여럿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가능한 모든 죄악과 공포의 원흉으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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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의 독점지배, 볼셰비즘, 휴매니티 이데올로기, 소련에서 3천만명이 희생된 일 등 모든 것이 다 유대인 책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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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그의 감정의 고정점이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모습으로 보면 악마적인 선전관宣傳觀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병리적인 망상증이었다. 그가 미워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투사한 것이었다. - 370, 371

 

이미 19235월에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었다. “유대인은 종족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유대인은 영원하신 신과 똑같은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악마와 똑같은 형상입니다. 유대인은 모든 민족에 대한 결핵종족입니다.” - 371

 

19422월 말에 이른바 최후의 해결을 결의하였던 반Wann 호수 회의가 있는 직후에 그는 원탁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유대인이라는 바이러스의 발견은 이 세상에서 일찍이 감행하였던 가장 위대한 혁명의 하나이다. 내가 이끄는 이 싸움은 지난 세기에 파스퇴르와 코흐(세균학자)가 했던 것과 같은 싸움이다. 얼마나 많은 병들이 유대 바이러스의 탓으로 생겨난 것인가!...우리는 유대인을 말살해야만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 372

 

지정학의 창시자가 약속한 바에 따르면 땅덩어리가 거대한 탓으로 어떤 공격에서도 보호되고 상처를 입지 않은 동유럽과 유럽 쪽 러시아는 세계 지배의 보루였다. “심장땅을 정복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이런 엉터리 학문 형식들에 있는 마적인 합리주의야말로 히틀러적 지성의 특수한 구조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 379

 

숫자 정보가 맞는다면 약 20만 추종자의 30개가 넘는 특수 행렬이 독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쪽으로 몰려왔다. 그들의 유니폼, 깃발, 악대 등이 여러 날 동안이나 뉘른베르크 시를 지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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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폐막식에서 약 6만 명의 돌격대 대원들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완전무장한 채로 세 시간 반 동안이나 행진음악에 맞추어 히틀러 앞을 통과하는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 450

 

이 위기가 독일에 가져온 변화는 객관적인 경제적 조건들만으로는 충분히 파악되지 않는다. 위기는 오히려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곤궁에 지치고, 전쟁, 패배, 인플레이션 등으로 영적인 저항력을 약해지고, 이성과 명료함을 계속 호소하는 민주주의의 멋진 말솜씨에 완전히 넌더리가 난 상태에서 사람들은 이제 감정에 자신을 내맡겼다. - 456

 

19309월의 실업자의 수는 3백만...19329월에는 5백만 명이 넘었다.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실업을 당한 꼴이었다. 1,500만에서 2천만 명의 사람들이 지원금에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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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적 분위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전체적인 세계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비합리적 동경이 깨어났다. - 457, 458

 

옛날부터 존재기반에 문제가 많아지면 복잡하지 않고 냉정한 질서의 안정감 속으로 도망치려는 성향...굶주림과 두려움을 통해서 목적없이 흔들리던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의당을 찾게 되었다.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그들은 엄청난 선동가의 힘에 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운명 같은 것에 압도되었다. - 461

 

히틀러도 계급 추락의 두려움에 압도된 시민이었고, 수많은 시민적인 야심에서 패배한 사람이었다. 그후 그는 정치에 들어왔고, 그것이 그를 해방 시키고 출세시켰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정치가 그와 같은 마법으로 자기들에게도 작용하기를 갈망하였다. 그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신격화한 것이었다. - 461

 

서열적인 관계 이외에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히틀러의 무능...그는 지적인 반성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모든 생각, 모든 반대에 대해서 권력문제를 마주세웠다. 누가 배치권을 가지는가, 누가 명령하는 사람이며 누가 명령을 받는 사람인가? 모든 것은 지배자와 하인의 대립으로 축소되었다. - 473

 

이론적인 개념 논쟁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대중은 당의 강령이 아니라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희망과 치유의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 477

 

며칠 뒤에 벌써 히틀러는 모든 돌격대 지휘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 맹세를 의무화하였고, 이어서 모든 돌격대 대원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과하였다. 그밖에도 신규가입할 때에 새로운 의무조항이 붙게 되었다. “모든 명령을 지체없이 확실하게 실천한다. 나의 지도자들은 불법적인 일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항목이었다. - 479

 

6월에 이미 그는 새로 지은 갈색집의 고문관실에서 몇 명의 선발된 당기자들을 놓고 카톨릭 교회의 서열과 조직을 날카롭게 강조하면서 총체적인 당 지휘 방침을 발표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모범에 따라 당은 민중 속에 서 있는...정치적 사제들이라는 광범위한 토대위에 피라미드적 지휘체계를 쌓아올린다. 그것은 단계별로 지역 지도자와 관구 지도자를 거쳐서 고문단,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 지도자-교황에 이르게 된다.” - 479, 480

 

당 운동은 늙은 전사들의 출신과 경험을 토대로 하였다. 그들은 거의 모두 1차 세계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엄격한 명령체계 속에서 형성된 체험을 가졌고,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 이미 엄격한 사관학교의 윤리관을 가진 교육방침에 따라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권위적인 교육체계에서 이익을 얻었다. 63명의 관구 지도자 중 20명 이상이 교사 출신이라는 점은 우연 이상의 일이었다. - 480

 

새로운 지휘부의 비상한 조직능력 덕분에 1932년 말까지 대원이 거의 50만명으로 불어났다. 돌격대의 집과 돌격대의 음식에 이끌려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갈색 부대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반사회적인 증오심은 부대 안에 있는 모험가들의 원한과 합쳐져서 비상한 공격성으로 발전하였다. - 495

 

돌격대...앞모습은 행진하는 종대의 엄격한 절제, 단체복과 명령하는 지도부 등이었고, 그것은 국민에게는 질서의 상징으로 보였다. 히틀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이 혼란의 시절에 질서를 갈망하였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되찾고자 하였다고 497

 

히틀러는 자신을 둘러싼 환호성을 보면서 어느 정도 자아도취 상태에서 자기는 신의 도구이며, 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라고 말했다. - 535

 

그는 정신을 되찾자 곧바로 함부르크로 가서 수천 명이 환호하는 가운데 자극적인 연설을 했다. 이런 연설이 진행될 때면 청중은 집단적인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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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곤궁에 지쳐서 몇 가지 기본 욕구들만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대중은 이제 그의 연설을 듣고 충동적인반응을 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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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부분의 숨이 멎을 듯한 정적, 그러다가 대중의 짤막하고 날카로운 외침들, 흥분의 고조, 최초의 해방의 외침, 그러다가 마침내 어지러운 소란, 새로운 흥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연설의 오르가슴을 느끼며 내지르는 황홀경의 신음소리. - 540, 541

 

괴벨스에 따르면 선거전을 계획하면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항목을 가장 세부적인 데 이르기까지 조직하고 아무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았다. 노선, 투입되는 행진, 집회의 크기, 청중의 정확한 혼합 상태,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깃발 펼치기, 행진곡 리듬, 열광적으로 외치는 하일 외침소리 등을 연출하면서 연사의 등장을 언제나 일부러 늦추다가 갑자기 타오르는 조명을 받은 연사가 목말라 애태우며 현기증을 느낄 준비가 된 대중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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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차단’ ‘최면상태’ ‘광신적 헌신에 의한 수용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공간, 시간, 행진곡, 조명, 대중집회 등이 심리기술적인 투쟁의 수단이다. 히틀러는 해설하듯이 이렇게 설명하였다. 한 개인이 스스로 작은 존재라고 느끼던 일터나 대기업에서 빠져나와서 처음으로 대규모 행사장에 들어서 자기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면, 무엇인가를 갈구하면서 이 최면상태, 열광상태의 강력한 효과 속으로 다른 3, 4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성공, 수천 명의 공감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주면, 그리고 처음으로 이제까지 믿어온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는 벌써 우리가 대중최면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의 마법과 같은 영향에 굴복한 것이다. 의지력과 동경, 그리고 다른 수천 명의 힘이 각각의 개인 속에 누적효과를 만들어낸다. 의심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런 집회장에 들어온 사람은 내면의 확신을 가진 상태로 집회장을 떠나게 된다. 그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 544

 

그의 연설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것이고, 언제나 앞에 놓여 있는 메모를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지만 근본적으로 대중과의 긴밀한 의사소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시적으로 그의 추종자 노릇을 했던 어떤 사람의 눈에는 마치 그가 청중의 감각을 호흡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비상한 민감성은 그의 주변에 확실한 여성적 후광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민감성은 청중과의 밀교密敎적인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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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회주의적인 대중적 말재주꾼이 아니라 제압, 공포, 증오라는 수많은 감정들을 위한 입이었다. 그는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정치적 동력으로 바꾸었다.

 

미국인 기자 니커보커는 뮌헨의 대중집회가 끝난 다음 이렇게 표현하였다. “히틀러는 혼란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는 거대한 집회에서 설교하는 전도사였다. 도이치 정계의 빌리 선데이(미국의 야구선수, 복음설교가:역주).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은 그와 함께 가고 그와 함께 웃고 그와 함께 느꼈다. 그들은 그와 함께 프랑스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와 함께 공화국에 야유를 보냈다.” - 547, 548

 

연설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박수갈채가 필요하였다. 홀 안에 한 줄기 반대의 분위기만 있어서도 방해받았다....히틀러는 불친절한 청중을 만나면 곧바로 연설의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연설을 중단하고 즉석에서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는 보고가 여러 개가 된다.

 

그는 극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중의 환호성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환호성은 그를 일깨우고, 그를 긴장상태로 잡아두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소란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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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둘러싼 대중의 시끌벅적한 혼돈이야말로 그에게 저 영원한 의지의 행동을 위한 충동력을 부여하였다. 의지력은 그에게 행동의 기쁨, 지속성, 확고한 공격성을 마련해주고, 비상하게 긴장된 선거전과 독일 비행 기간에도 심리적인 일관성을 주었다. 그런 시끌벅적한 혼란상태는 그가 쉬지 않고 필요로 하는 마약이었다. - 548, 549

 

괴벨스는 이런 집회를 우리의 정치적 작업의 예배의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떤 함부르크의 여교사는 19324월에 12만 명이 모인 선거유세장을 찾은 다음에 히틀러가 도움을 주는 사람, 구원자의 모습으로, 지나치게 커진 곤궁에서 해방시키는 사람으로 등장했을 때의, ‘사람을 사로잡는 경건성을 서술하고 있다. - 549

 

히틀러의 대중적인 성공은 무엇보다도 종교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적 상태로 보였다. - 550

 

히틀러의 증오의 구호에 공명한 것은 무시무시한 도이치의 반유대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눈에 보이는 적이라는 공격대상을 다시 붙잡은 것뿐이다. 그가 모아들인 것은 아주 독특한 도이치 사람들의 전투정신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자기 존경, 민족적 자존의 감정이었다. 대중은 그가 제약 없는 제국주의적 욕구를 우크라이나 평원의 모습들로 유혹하였기 때문에 그를 따른 것이 아니었다. 역사에 다시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그를 따랐다. - 550

 

그에게 환호성을 올린 사람들 다수는 그의 연단 앞에서 자기들의 피로와 자기들의 공포를 잊으려고 했다. 민스크나 키에브를 생각하지 않았고, 분명히 아우슈비츠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무엇보다도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랐다. - 551

 

그의 선동가적인 전략은 중상과 전망, 현실에 대한 증오스런 트집잡기, 그리고 강력한 미래의 약속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강한 국가 찬양, 국민 추켜올리기, 민족의 재탄생 요구, 정치적인 행동의 자유 등이었다. - 552

 

1932년 초에 베를린을 방문하고 나서 해럴드 니콜슨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절망해서 대안처럼 보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정도라고 일기에 적었다. - 553

 

지방연합 지도자들과 국경지방의 귀족 지도자들 앞에서 히틀러가 두 시간 동안 위기, 이익, 사회적 갈등 등을 다룬 연설을 하고 났을 때 어떤 지주는 모두의 이름으로토론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였다. “방금 들은 것을 머리 속에서 신성하게 만들어야 할 시간에 다른 것으로 방해받아서는 안되기때문이라고 했다. - 554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을 구성하는 과격성은 감정을 동원하는 것이나, 책임 없는 충동 만족의 약속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범죄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도착된 도덕적 에너지의 문제였다.

 

국가사회주의는 방향성이 없기는 하지만 강력한 도덕적 동경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였다. 특히 친위대(SS)를 통해서 이러한 유형을 끌어들이고 엘리트 방식으로 조직하려고 하였다. 이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요청되고, 밤의 제전의 횃불 아래서 낭만적으로 강조되었던 내적인 가치의 요구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생각에 따르면 다음의 덕목들을 포함하였다. 충성, 정직, 복종, 강건, 단정, 빈곤, 용감 등이었다. 물론 모든 불필요한 관계체계에서 벗어나 오로지 정권의 목적만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도덕적 명령 아래서 그들 중 한 명이 썼던 것처럼 차갑고 돌같은 태도를 지니고, ‘인간적인 가정 갖기를 중단하였던 무감정의 하수인 유형이 양성되었다. 이 유형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하게 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말 그대로 시체를 넘어가는 능력을 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죽였다. 이것은 제3자가 보기에는 범죄적 감정보다 더 과격하게 보이는, 확고하고 기계적인 일관성이었다. 이러한 일관성의 즐거운 잔혹성에는 아무리 약한 것이라도 여전히 압도적인 사회적, 지적, 혹은 인간적 원한이 드러나 있다. - 679

 

도덕적 요구는 특별한 사명의식으로 보충되고 확대되었다. 묵시록적인 대립 상황 속에 있다는 느낌, ‘더 높은 법칙을 따른다는 느낌, 이념의 사도라는 느낌, 그밖에도 무엇이 되었든 형이상학적인 확신의 그림과 구호들이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확신이야말로 무자비함에 특별한 성스러움을 부여하였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사명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민족의 적이라고 칭했다. - 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