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아래의 독일에서 노동자는 노동과정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작업장 관리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즉 ‘지도를 받는’, 책임이 있는 신하였다. 또한 파시즘 아래의 독일 노동자는 스스로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사용가치의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독일인’으로서 작업장을 대표하고 있다는 민족주의적 환상을 지니고 있다. 이런
환상적·민족주의적 태도가 독일의 민족사회주의 경영 세포 조직 전체의 노동을 특징지었는데, 그 노동은 ‘국가’와의 환상적인 동일시를
이용하여 노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실제적인 무관심을 감추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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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노동민주주의는 노동에 대한 무관심을 지양한다. 노동민주주의는 ‘국가’와의 환상적인 동일시나 머리 색깔 또는 코의 모양
등을 이용해서 무관심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노동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을 느끼게 하고,
‘작업장은 우리들의 것’이라는 감정을 갖게 함으로써 무관심을 제거한다. 이것은 형식적인 ‘계급의식’을 갖거나 어떤 특정한 계급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관심, 민족주의와 계급의식의 자리를 대체하는 노동과의 실제적인 결합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하는 노동과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결합될 때에 비로소, 독재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노동형태가 노동 자체뿐만
아니라 노동의 즐거움에도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노동이 한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 때, 우리는 그 인간과 노동과의 관계를 ‘리비도적’이라고 부른다. 노동과 성은 (엄밀하고 넓은
의미에서)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인간과 노동과의 관계는 동시에 인민대중의 성경제적 문제이기도 한데, 이는 인민대중들이
생물학적 에너지를 사용하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 노동과정의 위생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동과 성은 동일한 성 에너지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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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서든 노동이 생활의 기쁨을 말살하는 데 공헌하는 정도, 즉 노동이 ‘조국’에 대한 의무이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의무이든, ‘민족’에 대한 의무이든,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의무로서 설정되는 정도가 그 사회 지배계급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을 판단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이 된다. ‘의무’, ‘국가’, ‘규율과 질서’, ‘희생’ 등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생활의 기쁨’, ‘노동민주주의’, ‘자주관리’, ‘노동의 즐거움’, ‘자연스러운 성’ 역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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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욕구는 유기체의 생물학적 자극원천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형태는 생물학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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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활동 욕구가 충족되고 그 욕구가 발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이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능은 모든 종류의 도덕적-권위적 의무노동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 기능은 어떤 명령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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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민주주의는 ‘노동자’ 개념을 산업노동자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노동민주주의는 삶에 필수적인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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