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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순돌이 아빠^.^ 2017. 3. 27. 11:29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왜 맨날 전쟁이니 폭력이니 지배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읽고 생각하며 사는 건지...


레마르크가 말합니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유혈 사태, 수십만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러한 감옥을 수천 년의 문화로도 막지 못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거짓되고 무의미한 것인가. 



모두들 각자 나름의 이유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겠지요. 저의 경우는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참 마음이 아프고 무겁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그 전쟁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받은 사람에 비하면야 뭐라 말할 수 없겠지만...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2011



 

그러고 보니 잠만 푹 잘 수 있으면 전쟁도 그리 나쁠 게 없다는 카친스키의 말도 가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방에서는 이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니 매번 장장 2주일씩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 10

 

처음 군에 들어와 막 병영 생활을 시작했을 때 대형 공중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낯뜨거운 일이었던가. 그곳에는 문이라는 게 없다. 기차 칸에서처럼 20명이 나란히 앉아 엉덩이를 까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펼쳐진다. 사실 군인이란 끊임없이 감시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 14

 

 

누군가가 <어이, 어이...> 또는 <잘못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한순간 말없이 생각에 잠긴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강하게 억눌린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누구나 이를 느끼고 있다. 이에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까딱 잘못했으면 우리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모든 게 새삼스럽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붉은 양귀비꽃과 훌륭한 식사, 담배와 여름바람, 이런 것들이 말이다. - 15

 

칸토레크는 우리 담임선생이었다...칸토레크는 체육시간에 우리에게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더니 급기야는 우리 반 친구들을 모조리 이끌고 지역 사령부에 가서 자원입대하게 만들었다.

...

[제군, 여러분은 함께 갈거지?]

...

아무도 혼자 열외가 되어서는 좋을 일이 없었다. 심지어 부모들도 이 무렵 걸핏하면 <겁쟁이>라는 단어를 쓰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

그들이 아직도 글을 쓰고 떠벌리는 동안 우리는 야전 병원과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았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최고라고 지껄이는 동안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역자가 되거나, 탈영병이 되거나, 겁쟁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어른들은 걸핏하면 이런 표현들을 쓰곤 했다. 우리들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향을 사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격이 시작되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제 우린 다른 사람이 되었고, 대번에 눈을 뜨게 되었다. - 16

 

케머리히에게는 이제 발이 없다고 위생병이 밖에서 이미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행여 그가 케머리히에게 말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다리는 절단되었다.

...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말고리를 구워 먹었고, 포탄 구덩이 속에 함께 쭈그리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예전의 그이지만, 이제 더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마치 두 장의 사진을 겹쳐서 찍은 사진 원판처럼 그의 얼굴은 빛이 바래지고 흐리멍덩해졌다. - 19

 

당시 우리가 집을 떠나던 정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음씨 좋게 생긴 뚱뚱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얼굴은 그로 인해 퉁퉁 부어올랐다. 이 때문에 도리어 케머리히가 난처해 했다. 그의 어머니가 모두들 중에서 제일 안절부절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채 하염없이 울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몇 번이고 나의 팔을 잡고 전장에서 프란츠를 잘 돌봐 주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

하지만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누가 누구를 돌봐 줄 수 있겠는가! - 20

 

뮐러가 크로프에게 묻는다. <그 칸토레크 선생은 데체 뭐라고 썼냐?>

크로프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강철 같은 청춘이래>

 

우리 셋은 모두 화가 나 웃는다. 크로프는 욕을 퍼붓는다.

...

그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 수없이 많은 칸토레크 같은 사람들은! - 22

 

내가 쓰기 시작한 드라마 <사울 왕> 대본과 한 묶음의 시 원고가 집의 책상 서랍에 들어 있따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이상야릇한 기분이 든다. 몇 날 밤을 이 원고를 쓰면서 보내지 않았던가!

...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변해 있어서 나에게 과연 그런 일이 있긴 했던가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우리가 전쟁터에 온 이후로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전 생활과 완전 단절되어 버렸다. - 23

 

우리는 전쟁에 사로잡혀 언제 풀려날지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상야릇하고 우울한 방식으로 거칠게 변했다는 사실뿐이다. - 24

 

지역 사령부에 갔을 때 우리는 20명의 젊은이로 이루어진 한 반 학생이었다.

...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없었고, 입신출세나 직업에 대한 생각이 삶의 형식을 의미한다고 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 막연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삶에 그리고 우리의 눈에 비친 전쟁에도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되었다. - 24

 

우리는 10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10년 동안의 학창 시절보다도 더 단호하게 변했다.

...

우리의 젊고 깬 눈으로 우리는 우리 선생님이 말하는 고전적인 조국애 개념이 여기에서는 인격을 포기함으로서 잠정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알았다.

...

경례, 부동자세, 분열 행진, 받들어 총, 우향우, 좌향좌, 뒤꿈치를 맞붙이며 차렷하기, 욕지거리 및 온갖 부당한 횡포. 우리는 애당초 우리의 임무를 이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서커스의 말처럼 용감무쌍하게 조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 25

 

조금씩 해골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두 눈은 이미 쑥 들어가 버렸따. 한두 시간이 지나면 그는 영영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죽음의 징후를 본 사람이 케머리히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가 아닌가. - 30

 

프란츠 케머리히는 목욕할 때 보니 작고 야위어서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지금 누워 있따. 왜 누워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온 세상 사람들을 이 침대 옆으로 데리고 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이 사람이 프란츠 케머리히입니다. 열아홉 살하고 육 개월 되었지요. 그는 죽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제발 그를 살려 주십시오.> - 31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의 얼굴을 그의 얼굴에 갖다 댄다.

 

<그런데 프란츠야. 이제 잠 좀 잘 거니?>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린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그럴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열아홉 살 된 자신의 조그만 생명과 홀로 대면하면서, 그 생명이 자신을 떠나려 하기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 32

 

크로프는 사색가이다 그는 선전 포고를 할 때는 투우 경기를 할 때처럼 입장권을 구해서 음악을 울리며 일종의 축제처럼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런 다음 원형 경기장에서 양국의 장관과 장군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손에 몽둥이를 들고 서로 달려들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자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뚱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그게 더 간단하고 낫다는 것이다 39

 

<히멜슈토스는 우편배달 일을 할 때는 분명 착한 녀석이었을 거야> 알베르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잦아지자 내가 말했다. <그런데 하사관이 되자 왜 그렇게 악질이 되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렇게 묻자 크로프는 금방 활기를 띤다. <히멜슈토스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래. 제복에 금실을 붙이거나 군도를 차기만 하면 마치 콘크리트를 먹기라도 한 듯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거든.>

...

카친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일장연설이라도 할 듯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자 새악해 봐. 개에게 감자를 먹는 훈련을 시키다가 고기 한 점을 던져 줘봐. 그럼 그것을 덥석 물려고 달려들 거야. 그건 개의 본성 때문이지. 그리고 사람에게 조그만 권력을 줄 때도 그와 마찬가지 일이 생기지. 즉 고기를 문 개처럼 권력을 덥석 물고 늘어지는 거야.

...

인간이란 원래 속성이 짐승과 다름없기 때문이야. 거기에 어쩌면 버터기름을 바른 빵처럼 예의라는 게 발라져 있을 따름이야.

 

군대의 본질적 속성은 늘 누가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이야. 하사관은 졸병을, 소위는 하사관을, 대위는 소위를 미칠정도로 못살게 쪼아 대는 거야.

...

그럼 너희들에게 질문을 하겠어. 그자가 민간인 신분이라고 생각해 봐. 어떤 직업인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다가 귀싸대가나 얻어맞기 딱 알맞겠지. 군대에서나 그럴 수 있는 거야

...

민간인의 신분으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일수록 더욱 우쭐 대며 뻐기게 되지> - 41

 

독가스탄의 둔중한 폭발음은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

마스크를 착용하고 몇 분간이 생과 사를 판가름한다. 가스가 새지는 않는가? 나는 야전 병원에서 본 첨참한 모습들이 생각난다. 그건 독가스를 마신 병사가 며칠 동안이나 목이 졸리는 듯한 상태에서 다 타버린 폐를 조금씩 토해 내는 장면이었다. - 60

 

 

차가 하도 덜컹거려 우리는 하마터면 차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자칫하다간 사고가 날 수도 있지만 팔이 부러지는 것이 복부에 총알을 맞는 것보단 낫다. 일부 군인은 바로 그런 절호의 기회를 잡아 고향에 돌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 47

 

포좌(砲座)는 비행 정찰로 들키지 않게 잡목으로 위장해 놓았다...만약 속에 들어 있는 게 대포가 아니라면 이 나뭇잎 그늘은 흥겹고 평화롭게 보일 텐데. - 48

 

상의, 바지 및 군화가 우유 연못에서 나타나듯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행렬은 종대를 이루고 있다. 종대는 앞으로 똑바로 행진해 간다.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세모꼴을 하고 있어, 한 명 한 명의 얼굴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다. 시커먼 세모만 줄곧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 안개의 연못에서 헤엄쳐 다가오는 머리와 소총으로 이상야릇한 광경이 연출된다. 이는 하나의 행렬에 불과할 뿐 사람의 모습은 아니다. - 51

 

우리는 옷을 벗기고 허리 부분을 살펴본다. 뼈가 온통 부서지고 살이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관절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이 소년은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다.

...

이제 보니 그의 오른팔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

...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 소년 병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 들것을 가지고 올게>

 

그러자 그는 입을 열고 속삭이듯 말한다. <여기에 있어 줘>

 

<곧 다시 돌아올게. 너를 위해 들것을 가지러 가는 거야> 카친스키가 대답한다.

 

그락 우리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우리 뒤에서 어린 아이처럼 흐느끼며 말한다. <가지 말라니까> - 63

 

<알베르트, 지금 갑자가 평화가 찾아온다면 넌 뭐할 거니?>

...

카친스키가 이 문제에 흥미를 보인다...<물론 술을 실컷 마실 수도 있겠지만 우선 가까운 역으로 가서는...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거지. , 평화란 말이야. 알베르트>

...

그는 기름종이로 된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사진을 한 장 꺼내서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내 어머니야!> 그런 다음 그 사진을 낚아채서는 지갑에 집어넣고 욕설을 퍼붓는다. <에이 지긋지긋한 전쟁이야> - 67

 

 

데터링은 말수가 적은 친구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대답을 한다. 그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딱 한 마디만 한다. <난 수확 철에 딱 맞춰 돌아가고 싶어> 이 말을 하고 그는 일어서서는 가버린다.

 

그에게는 걱정거리가 있다. 그의 아내는 혼자 힘으로 농장 일을 해야 한다. 게다가 전쟁 통에 두 마리의 말까지 징발당했다. 매일 그는 신문이 오기만 하면 자신의 고향 마을 올덴부르크에도 비가 오지 않는지 살펴본다. 왜냐하면 비가 오면 건초가 젖어 버리기 때문이다. - 70

 

어쨌든 이는 우리 모두에게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사실 고향에 돌아가면 모두 여러 가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지 않을지? 2년 동안 한 일이라곤 총 쏘고 수류탄 던진 것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양말 벗듯이 이런 습관을 간단히 벗어 던질 수도 없을 테니까. - 75

 

전엔 나물에 우리를 묶어 두었는데 이젠 그런 게 금지되어 있다. 때때로 우리도 사람 취급을 받을 때가 있다. - 78

 

우리가 곧 적을 공격할 거라는 소문이 영내에 떠돈다. 학교의 세로면을 따라 아주 새롭고, 밝고 광택이 나지 않는 관들이 두 줄의 높은 담장처럼 쌓여 있따. 관에서는 아직 송진과 솔, 숲 냄새가 난다. 적어도 100개는 족히 되어 보인다.

 

<공격 준비가 잘 되어 있는데> 뮐러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한다.

 

<우리가 들어갈 관이야> 데터링이 툴툴거리며 말한다. - 84

 

신병 한 명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쉼 없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그의 모습을 이미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이런 핏발이 서고 튀어나온 눈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겉으로는 한결 진정된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썩은 나무 등걸처럼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

곧바로 그는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날 놓아 줘, 날 내보내 줘, 밖으로 나갈 거야>

 

그는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마구 발버둥을 친다. 그의 입엔 침이 축축하게 고여 있다. 그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뜻 모를 말을 마구 내뱉는다. 참호 병이 도진 것이다. 여기서는 질실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한 가지 충동밖에 알지 못한다. - 92

 

 

우리들은 사나운 맹수로 변했다.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니라 초토화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우리들은 인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우리 뒤에서 철모를 쓴 채 두 손을 들고 쫓아오는데 그 순간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적에게 보복하기 위해 파괴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

이러한 물결은 우리를 잔인하게 만들어 우리가 노상강도며 살인자며 악마가 되게 한다. 이러한 물결은 불안이며 분노며 생존 욕이란 형태로 우리의 힘을 배가시켜 준다.

...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저편에서 적들과 함께 돌격해 온다 해도 당신은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의 가슴을 향해 수류탄을 던질 것이다! - 95

 

아무 생각은 없지만 미친 듯이 사납게 격분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저쪽에는 우리의 불구대천지 원수가 있으며, 그들의 총포와 수류탄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섬멸하지 않으면 우리가 설명당하고 만다! - 97

 

어떤 어린 프랑스군이 뒤처져 있다. 우리에게 들키자 그는 두 손을 든다. 한 손에는 아직 권총이 들려져 있다. 그가 총을 쏘려는지 항복을 하려는지 알 수 없다. 누가 삽으로 내려치자 그의 얼굴이 두 동강 난다. - 97

 

우리는 서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죄다 잃어버렸다. 쫓기는 우리의 시선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가 누군지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없는 죽음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속임수와 위험한 마술을 써서 달리고 또 달리며 그저 살인을 저지를 뿐이다. - 97

 

우리가 빼앗아 온 콘드비프는 온 전선에 걸쳐 명성이 자자하다. 심지어 가끔씩은 그게 아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식량 사정이 대체로 좋지 않아 우리는 시종 배를 쫄쫄 곯고 있기 때문이다.

...

하이에는 얇은 프랑스 흰 빵을 집어서 검대(劍帶) 뒤에 삽처럼 쑤셔 넣고 왔다. 빵 한쪽에는 피가 묻어 있지만 그 부분만 떼어내 버리면 상관없다.

 

이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배불리 먹는 것은 훌륭한 엄폐부처럼 대단히 중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음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99

 

우리가 살던 도시의 뒤쪽 초원 사이에 흐르는 냇가에는 오래된 포플러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

벌써 어릴 때부터 우리는 그것을 유달리 좋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나무들이 우리의 마음을 끌었다. 우리들은 며칠 동안이나 꼬박 그 근처에서 보내며 나무들이 나지막하게 사랑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우리는 냇가 포플러 그늘에 앉아 투명한 급류에 발을 담갔다. 상큼한 물 내음과 포플러 사이에서 나는 멜로디가 우리의 환상을 지배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너무 너무 사랑했다. 이 시절의 영상을 떠올리면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 100

 

하지만 여기 참호 속에서는 추억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는 우리 마음에 추억이라는 게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다. - 101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낼 수 없는데도, 끔찍할 정도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과연 살고 있는 걸까? - 102

 

참호들 사이의 포탄구덩이에는 하나둘 시체들이 쌓여 간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부상자는 대개 데려올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부상자들은 길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 103

 

공격, 역습, 돌격, 반격 말은 이처럼 간단하지만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던가! - 107

 

우리의 전우들은 저 세상으로 갔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줄 수 없다. 그들은 영원한 안식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곧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쓰러져서 잠이나 자든가 마구 먹어 대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뱃속에 있는 대로 집어넣고 마셔 대며 피워 댄다. 순간순간이 황량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어차피 언제 갈지 모르는 덧없는 인생이 아닌가.

 

우리가 공포에 등을 돌리면 전선의 공포는 가라앉는다. 우리는 심하고 노골적인 농담을 하면서 공포에 대처한다. 누가 죽면 우리는 그가 엉덩이를 오므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만사를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래야 우리는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 114

 

얼마 전에 이 근방에 전선 극단이 있었다. 판자벽에는 다채로운 공연 광고물이 아직 붙어 있다.

...

거기에는 밝은 여름옷을 입은 한 소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이런 아가씨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깜빡 잊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하고 있다. 어쨌든 몇 년 전부터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명랑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란 것이다. - 116

 

집에 돌아와서는 군복을 구석에 내던져 버린다. 그러고 나서 장롱에서 신사복을 꺼내 입는다.

...

내가 신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기뻐한다. 양복을 입으니 어머니에게 더욱 친숙해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군복 입은 모습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마 군복을 입은 나를 데리고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싶을 것이다.

...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다...아버지는 내가 전투 경험을 들려주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눈물 나는 이야기이지만 해봤자 부질없는 이야기이다.

...

그런 이야기는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마 모르는 모양이다...그런데 아버지는 나도 육박전을 벌였는지 물어본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

...

교장이라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전방에서 왔다고? 그곳 형편은 어떤가? 아주 좋겠지. 아주 좋겠지. 그렇지?>

 

나는 모두들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먼저 프랑스 놈들을 작살을 내야지...>

...

그러는 도중에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자네들은 언제까지나 진지전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젠 좀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해. 녀석들을 쳐부수란 말이야. 그래야 평화도 오는 거야> - 33

 

휴가란 무엇인가?...어머니는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본다. 어머니는 내가 떠날 날짜를 헤아리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침마다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날이 새면 벌써 다시 하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의 배낭을 어머니는 치워 놓았다. 왜냐하면 배낭을 보면 내가 떠날 날짜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 144

 

나는 그의 어머니와 만나 나눈 대화를 여기에 차마 다 적을 수 없다. 부들부들 떨고 흐느끼면서 그의 어머니는 내 몸을 잡고 흔들며 소리친다.

 

<너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째서 내 아들은 죽었단 말이야!>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에게 외친다.

 

<너희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째서 우리 아들은...> - 145

 

이윽고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왔다...내가 다시 살아돌아와 이런 털 이불 속에 누울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다가 조용한 소리로 묻는다.

 

<너무 두렵지?>

<아니에요, 어머니>

...

<아무튼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맡도록 해라>

<, 어머니. 어쩌면 취사반으로 갈지 몰라요. 그러면 안전할 거에요>

...

<이제 가서 주무시도록 하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다. 나는 일어나서 어머니 어깨에 내 이불을 걸친다. 어머니는 내 팔에 몸을 기대고 있다. 어머니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 146

 

우리가 있는 막사 옆에는 러시아군의 널따란 포로수용소가 있다...우리의 적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은 이상야릇한 일이다. 이들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얼굴들, 선량한 농부의 얼굴들을 하고 있다...이들은 프리슬란트의 우리 농부들보다 훨씬 더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든다. 이들은 다들 힘이 없고 쇠약해 보인다 151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걷어차 넘어지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그냥 이들 옆을 지나친다.

...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막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만 얼룩 같은 이들의 두 눈에 어떤 슬픔과 한이 깃들어 있는 걸까. - 152

 

하나의 명령으로 이 조용한 사람들이 우리의 적이 되었다. 하나의 명령으로 이들이 우리의 친구로 변할 수도 있으리라...누가 이곳에 와서 어린이 같은 얼굴과 사도 같은 수염을 지닌 이 조용한 사람들을 직접 본다면 누가 이들을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 155

 

밤에는 다시 이들은 철조망 가에 서 있고, 자작나무 숲에서 바람이 그들에게 불어온다.

...

그중에 음악가가 한 명 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베를린에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고 한다. 내가 피아노를 좀 칠 줄 안다고 하자 그는 바이올린을 가져오더니 연주를 시작한다...그는 선 채로 연주하면서 가끔 바이올린 연주자 특유의 넋 나간 표정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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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소리는 언덕 위의 날씬한 소녀처럼 밝고 외로운 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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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바깥에서는 소리가 그토록 외롭게 돌아다니면 듣는 사람의 마음이 슬퍼진다. - 156

 

<이봐> 그가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난 황제도 우리처럼 화장실에 간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 162

 

차덴이 나타난다....그는 전쟁이란 대체 왜 일어나느냐고 묻는다.

 

<대체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심하게 모욕할 때 일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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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그게 무슨 말이지. 독일의 산이 플아스의 산을 어떻게 모욕할 수 있단 말이야. 혹은 강이나 숲이나 밀밭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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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모욕한다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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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욕 받은 느낌이 들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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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그건 전체로서의 민족이니까 국가를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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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이니 경찰이니 세금, 이런 게 너희들이 말하는 국가야. 국가가 그런 거라면 난 사양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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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덴, 넌 처음으로 바른 말을 했구나. 국가와 고향은 정말 다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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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거의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 직공이나 하급 공무원이야. 그럼 무엇 때문에 프랑스의 열쇠공이나 구두 수선공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거니? 아니야. 모두 정부가 하는 일일 뿐이야. 난 군에 오기 전까지 프랑스인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었어...> - 163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전쟁이란 게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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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분명 득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거지>

<, 나는 그렇지 않은데>

<물론 너는 아니지. 여기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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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위대한 황제라면 다 적어도 한 번은 전쟁을 하는 거야. 그래야 유명해지니까. 교과서를 한번 살펴봐라>

 

<장군들도 전쟁 덕으로 유명해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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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개중에는 전쟁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도 끼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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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는 전쟁이란 오히려 일종의 열병인 것 같아> - 164

 

내 옆으로 조그만 포탄 하나가 쉿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나는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못 들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한다. 나는 이곳에 혼자 있으며 어둠 속에서 거의 속수무책이다. 어쩌면 적의 두 눈이 포탄 구덩이에서 진작부터 나를 살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류탄을 옆에 두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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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리를 돌리려 하자 총도 숨어 있다가 소리 없이 따라 움직인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진땀이 배어 나온다.

 

나는 움푹 파인 곳에 여전히 누워 있다. 시계를 보니 2, 3분이 지나갔을 뿐이다. 내 이마는 땀으로 흥건하고, 눈구멍은 축축하며, 손을 덜덜 떨고 있따. 나는 나지막한 소리롤 숨을 헐떡인다. 이는 섬뜩한 공포의 발작과 다름없다. 머리를 내밀고 앞으로 기어가려고 하면 턱없는 공포가 밀려오는 것이다.

 

나의 긴장감은 죽처럼 부풀어 올라 그대로 누워 있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나의 손과 발은 지면에 딱 달라 붙어 있어, 움직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손과 발이 도무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 167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포탄 소리에도 불구하고 수상쩍은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쫑긋 귀 기울여 들어 보니 그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 참호를 통과해 가는 아군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인 모양이다. 이젠 소리를 낮춘 음성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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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온몸에 알 수 없는 온기가 넘쳐 흐른다. 이 목소리, 이 몇 마디의 나지막한 말들, 등 뒤의 참호 속을 지나가는 발국 소리가 하마터면 내가 빠질 뻔한 죽음의 공포로 인한 끔찍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단숨에 끌어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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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소리이고 더 안전하게 나를 보호해 준다...나는 내 얼굴을 이들 속에, 이 목소리에 파묻고 싶어진다. - 168

 

 

내가 막 몸을 좀 돌리려고 하는데, 이때 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몸뚱이 하나가 내가 있는 구덩이 속으로 털썩 떨어진다. 그는 미끄러지면서 내 몸 위로 굴러 떨어진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며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 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 171

 

그와의 사이의 3미터의 거리는 소름끼치는 길이고, 멀고 끔찍한 길이다.. 드디어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간다.

 

그때 그 사나이가 눈을 번쩍 뜬다. 그는 내가 다가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몸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지만, 눈 속에는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 173

 

눈은 소리치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 눈 속에는 온 생명이 도망치려는 엄청난 노력과 죽음 앞에서. 내 앞에서 끔찍한 공포로 응집되어 있다. - 174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게 된 것은 이 사나이가 처음이다. 이 사람의 죽음은 나의 소행이다. - 175

 

자네는 전에 나에게 하나의 관념이자 내 머리 속에 살아 있다가 결단을 하게 만든 하나의 연상에 불과했어. 내가 찔러 죽인 것은 이러한 적이라는 연상이야. 지금에야 자네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알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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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에게 일러 주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자네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개란 사실을. 자네들 어머니들도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근심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똑같이 두려워하며 똑같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부디 용서해다오. 전우여, 어째서 자네가 나의 적이 되었던가. 우리가 이런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면 카친스키나 알베르트처럼 자네도 나의 벗이 될 수 있을텐데. 전우여, 나의 목숨에서 20년을 떼어 가서 일어나다오. 아니 더 많은 햇수라도 가져가다오. 내가 살아 있다 한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야.- 177

 

그의 군복은 아직 반쯤 열려 있다. 지갑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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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에는 어떤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들이 들어 있다...사진 옆에 편지가 꽂혀 있어서 그것을 꺼내 읽어보려고 한다...그런데 나는 프랑스어를 조금밖에 할 줄 모른다. 내가 번역해 읽은 단어 하나하나가 마치 총알처럼, 찔린 상처처럼 가슴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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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한번 사진들을 바라본다.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돈을 좀 벌면 익명으로 이들에게 돈을 보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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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 남자는 내 생명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약속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오로지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맹목적으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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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인 수첩을 펴고 천천히 읽어본다. <제라드 뒤발, 인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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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쇄공 제라드 뒤발을 죽였던 것이다. 나는 인쇄공이 되어야 한다. 나의 머리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인쇄공이 되어야 한다. 인쇄공이. - 178

 

나는 시체를 향해 침착하게 말한다.

 

<이봐, 전우여. 오늘은 자네가 당했지만, 내일은 내가 당할 거야. 하지만 내가 용케 살아남게 되면 우리 둘을 망가뜨린 이것과 맞서 싸우겠네. 자네의 생명을 앗아가고, 나의? 나의 생명도 앗아가는 이것에 맞서서 말이네. 전우여, 자네에게 약속하겠네. 다시는 일언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이네> - 179

 

두 사람이 창상성創傷性 파상풍으로 숨을 거둔다. 피부는 창백해지고, 사지는 굳어 버리지만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두 눈만은 아직 살아있다. 일부 부상병의 경우에는 총상을 입은 수족이 한쪽 횡목에 달린 채 공중에서 건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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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에 총상을 입은 환자들은 창자에 늘 똥이 가득 찬 게 보인다. 군의관의 사무원은 완전히 박살이 난 허리뼈, 무릎 그리고 어깨를 찍은 뢴트겐 사진을 나에게 보여준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신체 위에 아직 얼굴이 붙어 있고, 그 얼굴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게 정말 신통하다.

 

그런데 이것은 단 하나의 야전 병원, 단 하나의 병동일 뿐이다.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에는 각기 수십만 개의 야전 병원이 있따.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쓰이고, 행해지고, 생각된 모든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이와 같은 대대적인 유혈 사태, 수십만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러한 감옥을 수천 년의 문화로도 막지 못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거짓되고 무의미한 것인가.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바로 야전 병원이 보여주는 것이다. - 207

 

전쟁이란 암이나 결핵, 유행성 감기나 이질처럼 죽음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전쟁의 경우에는 훨씬 더 자주, 더 다양한 모습으로, 더욱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212

 

참호, 야전 병원, 공동묘지, 결국 우리가 갈 데라곤 이것밖에 없다. -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