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를 경험한 작가의 이야기가 참 재미 있었습니다.
첫 장부터 '오~' 했다니까요.
일본 사회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과 한국 사회가 닮은 점이 많고
제가 한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이겠지요
웃으며 즐겁게 읽기도 했고
답답함과 짜증을 느끼며 책장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심각하지 않게,
수시로 유쾌하게 말을 하는데도
핵심을 콕콕찌르는 것이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재밌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아멜리 노통브, <두려움과 떨림>, 열린책들, 2014
미스터 하네다는 미스터 오모치의 상사였고, 미스터 오모치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터 사이토는 미스 모리의, 미스 모리는 나의 상사였따. 그런데 나는, 나는 누구의 상사도 아니었다.
이걸 다르게 얘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스 모리의 지시를 받았고, 미스 모리는 미스터 사이토의, 미스 사이토는 또...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정확성을 위해 덧붙이자면, 밑으로는 위계 서열을 뛰어 넘어 지시가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유미모토사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지시 아래 있었다. - 5
그다음 그는 한쪽 문을 가리키면서 이 문 뒤에 사장님인 미스터 하네다가 있다고 엄숙하게 말했다. 사장님을 만날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했다. - 7
사이토 씨는 결과물을 읽어 보더니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나직하게 뱉고는 찢어 버렸다.
“다시 해요”
...
나는 그 뒤 몇 시간 동안 이 골퍼에게 보내는 비즈니스 서신을 작성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이토 씨는 후렴 같은 그 소리를 내뱉는 것 외에는 전혀 편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편지를 완성하는 족족 찢어 버렸다. 나는 매번 새로운 편지 양식을 고안해 내야 했다. - 9
유미모토사에서 돈이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제로가 몇 개 이상 계속해서 나오고 나면 금액이 숫자의 영역을 벗어나 추상 예술의 범주로 들어갔다.
...
유미모토의 직원들은 제로와 마찬가지로 다른 숫자들 뒤에서만 가치가 생겼다. 제로의 힘에도 미치지 못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 15
일본 회사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오차쿠미-차(茶) 나르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일이 내게 부여된 유일한 역할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더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17
그는 머리를 숙이고 더러더러 어깨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굴종과 수치심이 배어 났다.
<당신은 회사를 물먹이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은 가져 본 적도 없는 사람이오!>
...
<부장님은 회사를 물먹이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업무를 맡겨 달라고 애원한 사람은 바로 저예요. 책임이 있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어요>
...
오모치 씨는 잠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더니 나에게로 다가와 길길이 날뛰며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감히 변명을 하다니!>
...
<당신이 감히 이 사악한 인간을 두둔해>
<부장님 편을 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부사장님이 부장님에 대해 하는 비난은 말도 안 돼요>
...
<지금 감히 내 말이 틀렸다고 우기고 있는 거요? 당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례하군요!> - 44
아니, 일본 여성에게 찬사를 보내야-그래야 한다-하는 이유는 그녀가 자살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유년 시절부터 그녀의 꿈과 이상을 가로막는 음모가 시작된다. 그녀의 뇌 속에 석고 반죽이 부어진다.
<스물다섯 살에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거야> <웃으면 너는 품위를 잃게 돼>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면 저속한 거야> <몸에 털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하면 천박한 거야> <남자애가 사람들 앞에서 네 뺨에 뽀뽀를 하면 너는 창녀야> <음식을 먹는 게 즐겁다면 넌 돼지야> <잠자는 게 좋으면 넌 굼벵이야>,
...
결국 이런 어처구니없는 믿음을 통해 일본 여성들의 머릿속에 박히는 것은, 좋은 일은 절대로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쾌락을 바라지마, 기쁨이 너를 파멸시킬 테니까.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꾸지 마, 너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의 환상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지 절대 저의 진실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닐 거야. 삶이 너에게 무엇이든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 해가 지날수록 네게서 무언가 없어지게 될 테니.
...
내가 결코 너의 의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열거할 수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넌 인생에서 단 한순간도 이런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없을 테니까. 예를 들어, 방광의 압박을 덜어 줘야 하는 보잘것없는 필요 때문에 화장실에 혼자 있을 때조차 네 시냇물에서 졸졸졸 나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러니 넌 쉴 새 없이 물을 내려야 할 거야.
...
배가 고프다고? 먹는 둥 마는 둥 해. 길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네 몸매를 쳐다보는...모습을 보고 흐뭇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집이 있는 게 수치스러우니까 날씬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야.
너는 아름다워야 할 의무가 있어...네가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해서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하지만 아름답지 않으면 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
너는 결혼할 의무가 있어...너는 아이를 낳을 의무가 있는데, 아이를 낳아서 세 살까지는 신주 단지 모시듯이 받들지.
...
너의 의무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거야. 하지만 네가 희생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행복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냥 그들이 너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따름이니까. - 94~100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살하지 않은 모든 일본 여성들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 않는다. 그녀에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욕(無慾)의, 숭고한 용기를 보여주는 저항 행위이다. - 104
도쿄 사람들은 특히 욕을 할 때, 초음속으로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
이런 상황에서, 비록 일본어가 낯설게 들리긴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한 사람이 너무도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었다.
...
내 상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내가 분명히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그녀가 아무 자책할 일도 하지 않은 경우였다. 오모치 씨는 우두머리였다. 원하기만 하면 그는, 대수롭지 않은 구실이라도 들먹여 모델처럼 생긴 이 처녀를 상대로 자신의 사디스트적인 욕구를 채울 권리가 있었다. - 121
후부키는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수모를 당한 터였다. 그녀가 우리들에게 감출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녀가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남은 명예는 바로 그녀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우리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힘이 있었다. - 129
나는 이렇게 어설프게 흉내 낸 답변으로 그녀에게 장단을 맞췄다.
<유미모토사는 제게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안타깝지만, 제게 과분하게 해주셨는데도 저는 걸맞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
그녀가 나한테 왜 회사 화장실에 걸맞지 못했냐고 물어봐도 되는 걸까? 나를 모욕하고 싶은 마음이 그 정도로 한이 없었다는 말인가?
...
<제가 그걸 할 말한 지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죠>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당신 생각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아요?>
...
자신의 욕망을 내가 유순하게 채워 주는 데 신이 난 후부키가 이에 버금가는 답변으로 응수했다.
...
<당신의 장애를 당신이 알고 있나요?>
...
마침내 그녀가 한없는 만족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게 되어 기뻤다. - 171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儀典)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
그래서 나는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 처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이 볼 때 사람들이 쓰레기 수거하는 일에는 나를 받아 줄까요?>
<물론이죠!!> 그녀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 말을 했다. - 176
<나...우리...내가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일이 이런 식으로 되길 바란 것은 아닙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본인, 이건 정말 1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일이다. 사이토 씨가 나를 위해 그런 모욕을 감수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 178
불쌍한 사이토 씨. 도리어 내가 그에게 힘을 북돋아 주어야 했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승진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수많은 일본 남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건 분명하지만, 유약하고 상상력이 없어서 절대 폄훼하지 못할 한 제도의 노예이면서, 동시에 그 제도의 부륾을 받는 서투른 사형 집행인. - 179
<이것 홋카이도의 특삼품으로, 멜론이 들어간 화이트 초콜릿이오. 맛이 기가 막히지. 완벽하게 일본 멜론 맛을 살려 냈어요. 자, 들어 봐요>
<아니요, 됐습니다>
...
무슨 불가사의한 이유에선지, 내가 거절한 것이 부사장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점잖은 표현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지시를 반복해서 말했다.
....
나는 거절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처먹어!>
나는 거절했다.
그는 기가 넘어갈 듯이 화를 냈다.
<이런 참 나, 계약이 만료되지 않은 한, 당신은 나한테 복종해야 하오!>
<제가 먹든 안 먹든 그게 부사장님한테 무슨 상관입니까?>
<이렇게 불손하다니! 당신은 나한테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내 지시만 그냥 따르면 되지>
...
<기가 막히게 맛있어요!> 나는 마지못해 말을 했다.
<하! 하! 맛있지요. 화성 초콜릿이, 엉?>
그는 득의양양해하고 있었다. - 182
식인귀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웃느라고 나온 눈물을 닦고 나더니, 정말 내가 질겁할 정도로 코를 풀었는데, 이건 일본에서는 무례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였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코를 풀 정도로 내가 그렇게 밑바닥으로 떨어졌단 말인가?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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