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하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하더라구요.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작품입니다. 밤에 자는 데도 계속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더라구요. 희곡을 쓰신 분, 연기를 하신 분, 연출을 하고 무대를 꾸미신 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고유한 존재로서, 분리된 존재로서, 하지만 함께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며, 그것을 필사적으로 원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짓 자기(false self)’를 개발해서라도 채우려고 한다. 확인받는 경험은 누구나 필요로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에 의해서만 전해지는 선물이다. - 김정규, <게슈탈트 심리치료>
더 크고, 더 높고, 더 위대한 것을 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것들을 쫓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구요. 때로는 자기 목숨도 버려가면서까지 그 무언가를 쫓습니다. 권력일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겠지요.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아껴주고 바라봐주고 쓰다듬어주기를 바랄 겁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나를 믿어주고 아껴주고 바라봐주고 쓰다듬어주지 않았다는 거지요.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고, 피곤한 사람이 누울 자리를 찾듯이 말입니다.
권력을 놓고 벌이는 투쟁 속에 들어가면 이래저래 괴롭습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도록 쇠사슬로 주변을 감싸 놓은 싸움장에 들어가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과 비슷하지 싶습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자는 권력을 가진 자를 질투하며 마음이 흥분되고, 권력자를 제거할 방법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지요.
권력을 쥔 자는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 자신이 원치 않는 모습까지 꾸며 보여야 합니다.
의심과 불안에 흔들리는 지위와 마음을 가지려고 그토록 피터지게 싸웠던 걸까요?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가 그런 명예와 더 높은 것을 찾던 사람들이었지요. 입센 <왕위주장자들>의 스쿨레 백작은 왕위를 쫓으며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구요.
안드레이도 스쿨레 백작도 죽음을 오가는 온갖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결국 더 높은 것, 더 강한 것을 쫓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스쿨레 백작의 동생이 스쿨레 백작이 시민들 앞에서 죽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기쁜 마음을 표현합니다. 드디어 오빠가 영혼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자유와 사랑이 있을 것 같은 권력에는 정작 의심과 불안이 넘쳐나고, 허무와 나약함만이 있을 것 같은 그곳에 자유와 사랑이 있었던 거지요.
까닭도 모르고 쫓던 것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을 사랑하는, 예전부터 자신을 사랑해 왔던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던 그 사람을 이제야 진심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거지요.
내 마음이 바뀌고, 나의 삶이 바뀌니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들을 얻게 됩니다.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있고, 내 곁에 머물고 있던 것들.
'지배.착취.폭력 > 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만도 이아누치, <스탈린이 죽었다>를 보고 (0) | 2020.01.01 |
---|---|
아멜리 노통브, <두려움과 떨림>을 읽고 (0) | 2017.12.08 |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0) | 2017.03.27 |
뮤지컬 <금강 1894>를 보고 (0) | 2016.12.07 |
베르디 오페라 - <맥베드>를 보고 (0) | 2016.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