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4시가 다 되어 세 번째 공연이 끝나고 6시까지 2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습니다. 일단 뭘 좀 먹든지 쉬든지 해야겠습니다. 금요일에는 평소보다 한참 늦게 잔데다 토욜 새벽에 멍멍이 순돌이가 일찍부터 깨워서 푹 못 잤고, 토요일에는 여관의 온갖 소음과 건조함 때문에 자꾸 잠을 깼거든요.
그나저나 저는 듣기만 하는데도 피곤하고 에너지가 필요한데, 연주하시는 분은 도대체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70이 넘은 나이에.
짬뽕을 먹으며 기운을 회복하고 싶었지만...그래도 네 번째 연주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살짝 걱정스러운 몸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편의점에 가서 초코칩 쿠키 큰 통이랑 커피를 샀습니다. 이걸 먹으면 연주에 집중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여관 냉장고에서 가져 나온 음료수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었습니다.
그런데 연주가 시작되고 채 1, 2분이 지나지 않아 피곤함이 사라지더라구요. 초코칩 쿠키와 커피 때문이라기보다는 음악 때문이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피곤함은 사라지고 정신도 맑아지더라구요.
소나타 10번과 2번을 연주하고 나서 쉬는 시간입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22번과 23번(열정)을 연주합니다. 템페스트와 열정을 하루에 다 듣고도 제 심장이 정상일수 있을까 싶습니다.
22번이 지나고 23번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주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집니다.
“메세지 왔어요”
아이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곡과 곡 사이도 아니고, 악장과 악장 사이도 아니고 한창 연주가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메세지 왔어요~’라니요. ㅠㅠ
예전 같았으면 제 마음에 불쑥 화가 치밀었을 거에요.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음악회에 온 거야. 핸드폰 잠깐 꺼둔다고 세상이 뭐 어찌 돼! 게다가 남들에게 이렇게 피해를 주고 말이야!
오늘도 문득 욱하고 치밀어 오를 뻔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크게 화가 나지도 않고 곧바로 정신이 들더라구요.
아니야. 내가 핸드폰 소리에 마음을 쓰는 지금도 음악은 흘러가고 있어. 내가 저 소리에 신경을 쓰는 만큼 나만 손해야.
제가 좀 더 착해져서인지, 아님 좋은 음악이 제 마음의 중심을 잡아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큰 무리 없이 ‘메시지 왔어요’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연주가 계속됩니다. 숨이 조금 막힙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음악이 가능한가 싶습니다. 새끼손가락으로 건반의 높은 음을 치는데도 어쩜 저렇게 우렁차게 소리가 나나 싶습니다. 놀랍고 놀랍습니다.
그리고...당~하면서 연주가 끝이 나고...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립니다. 건물도 사람도 나도,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백건우와 베토벤의 음악만이 빛을 받으며 하늘을 향해 천천히 올라갑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사인회가 진행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싸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습니다. 저는 백건우 선생님 피곤하실 건데 괜히 손 한 번 더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싸인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만 했습니다.
한참 구경을 하는데 어떤 분이 백건우 앞에 그림을 내밀며 그림에 싸인을 해 달라고 합니다. 다른 분들은 대부분 프로그램북이나 CD에 싸인을 받는데 저 분은 그림에 싸인을 해 달라고 하니 이상하다 싶어 그림 들여다봤습니다. 1초 뒤에 알겠더라구요. 그 그림이 백건우가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이 백건우더라구요.
그림에 싸인을 받는 아저씨가 아주 들떠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몇 년 전에 백건우의 연주를 보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보여드리려고 몇 년을 기다려서 이렇게 오게 되었다고.
연주회 안내 포스터를 얻어서 집에 붙여 두고 싶더라구요. 안내 하시는 분에게 물으니 자신의 일이 아니라 저기 매표소 5번에 있는 기획사 분께 물어보라더라구요. 매표소 5번으로 걸어가니 어떤 분이 매표소 테이블 바닥에서 뭔가를 잡아 올리시더라구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기획사 분께 말을 걸었습니다.
저기...연주회 포스터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손으로 앞 사람을 가리키며) 어머...어쩌죠? 지금 이게 마지막인데...
그러면서 제 눈 앞에서 그 분이 아주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 포스터를 손으로 감아 쥐고 돌아서시더라구요.
화장실 가지 말고 조금만 일찍 왔더라도... 이 망할 놈이 괜히 커피랑 음료수를 많이 먹어가지고 ㅠㅠ
제가 안타까워하니까 기획사 분께서 마지막날에 혹시 여분이 있을지 모르니 그때 와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마지막날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화 수 목 금 맨날 맨날 물어보든지 졸라보든지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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