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이거나 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근데...
뭔가 끈적끈적하고
가슴에 스미는 무언가...
아...맞아...
그래 그렇지...
그랬구나...
나도 그럴까...
나도 그렇겠지 싶은...
박완서, <마른꽃>
이렇게 조카며느리의 눈꼴사나운 선심을 주거니 받거니 입술 끝으로 짓씹고 같이 흥분할 만한 나잇살이나 먹은 얼굴을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 15
대전을 지나고부터 버스는 본격적으로 밀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그동안 계속 잘도 잤고, 우리 두 사람은 계속 깨어서, 계속 젊은 애들처럼 굴었다. 육이오 때 몇 살이었고, 얼마나 고생했고, 어디로 피난갔었나 따위 진부한 얘기는 하나도 안하고, 흘러간 영화,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 맛 좋고 분위기 좋은 음식점, 세상 돌아가는 얘기 따위를 두서없이 주고받으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수다스럽고, 명랑하고, 박식하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인가를 처음 알았고 만족감을 느꼈다. - 28
서울 근교에 그렇게 좋은 곳이 많다는 걸 처음 안 것처럼 느꼈다. 강아지를 핑계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만큼 간사스러워진 후였다. 곳곳이 새로워 함부로 탄성을 지르지를 않나, 열여섯살 먹은 계집애처럼 깡총거리지를 않나, 요즈음 신세대 탤런트의 연기를 톡톡 튄다고들 하는데 내 안에서도 뭔가가 핑퐁알처럼 경박하고 예민한 탄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걸 느꼈다. - 33
비록 선산은 아니었지만 공원묘지의 남편 묘는 나하고 합장하도록 곁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었고, 묘비명에도 내 이름이 남편과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미 묘와 묘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태어난 연월일 밑에 들어갈 죽은 날짜만이 아직 새겨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성묘하기를 좋아했다. 그하고 사귀는 동안도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나의 일상적인 행동 중 거기 가고 싶다는 것처럼 완전에 가까운 자유의사는 없었다. 거기서 느끼는 깊은 평화에다 대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큰 기쁨이나 슬픔도 그 위를 스치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죽은 평화가 아니었다. 거기 가면 풀도 예쁘고 풀 사이에 서식하는 개미, 메뚜기, 굼벵이도 예뻤다. 그의 육신이 저것들을 키우고 있구나, 나 또한 어느날부터인가 그와 함께 저것들을 키우게 되겠지, 생각하면 영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죽음이 겁나지 않았고, 미물까지도 유정했다. 진이 빠지기 풀들과 곤충들을 키우고 난 찌꺼기는 화장하여 훨훨 산하를 주유하도록 해주기를 자식들에게 부탁할 작정이다. 그 보장된 평화와 자유로부터 일탈할 어떤 유혹도 있을 수가 없었다.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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