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엄마를 두들겨 패는 것도
엄마가 나를 몽둥이로 때리는 것도
내가 동생을 발로 차는 것도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벌어졌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누구 하나 그것이
범죄이며 폭력이라고 제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지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슬프게도...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라는 노래가 자랑스럽게 울려 퍼지던 때가 있었지요
그리고 요즘은 '미안해요 베트남'이라고 하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범죄를 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라크니 팔레스타인이니 해도 그게 어디 있는지 알지조차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저 또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더라구요
제 안에도 악한 면이 있고 선한 면이 있겠지요
악한 면이 드러날 때는 누군가를 때리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었지요
선한 면이 드러날 때는 어려운 사람을 돕기도 하고 함께 웃으며 지내려고 노력하기도 했구요.
아마도...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에요.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도 그럴 거구요.
이 책은 인간 세상에서 폭력이 줄어 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더라구요
전쟁 살인 폭행 강도 강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폭력이 줄어왔다니 말이에요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아...그렇구나' 싶습니다.
폭력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거지요
저절로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폭력을 줄이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거구요
폭력을 일으키는 인간에 대해서
폭력을 줄이는 인간에 대해서,
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 지를 우리가 알게 되면
앞으로 좀 더 폭력을 줄이고 평화를 키워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책값이 6만원이어서 처음에는 좀 망설였어요
4만원짜리 헌책을 구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구요.
음...
책값이 얼마고 책이 얼마나 두껍고 관계 없이
정말 정말 많이 배우고 느낀 책입니다.
인간 세상의 폭력을 줄이고
좀 더 평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해 온 분들께 감사 드리고
좋은 책을 써 주신 글쓴이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사이언스 북스, 2014
이스라엘인이 실제로 집단 살해를 자행했든 아니든, 그들이 그것을 좋은 생각으로 여긴 것만은 확실하다. 누구의 머리에도 여자는 당연히 강간을 원하지 않고 성적 소유물로 거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성경 작가들은 눈을 멀게 하고 돌로 치고 가리가리 찢어 죽이는 잔인한 처벌이나 노예제를 그릇된 일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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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지만,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 신자의 압도적 다수는 뼛속까지 점잖은 사람들이다. 집단 살해, 강간, 노예제, 하물며 하찮은 위반 때문에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일 따위는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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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대중의 감수성이 워낙 크게 변했기 때문에...신자들은 말로는 성경을 도덕률의 상징으로 인정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더 현대적인 다른 원칙들로부터 도덕률을 얻는다. - 47
결투에 응했던 신사들은 돈, 땅, 여자 때문이 아니라 명예 때문에 싸웠는데, 사실 명예란 참 이상한 것이다. 명예는 모두가 남들이 그 존재를 믿는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위신을 추구하는 충동이나 규범에 대한 집착과 같은 인간 본성의 몇몇 부분이 그 거품을 부풀리지만, 유머 감각과 같은 인간 본성의 다른 부분은 그 거품을 뻥 터뜨린다.
공식적인 결투 제도는 영어권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는 그 몇 십 년 뒤부터 사라졌다. 역사학자들은 법적 금지나 도덕적 반대보다는 조롱의 말이 제도의 쇠락에 더 기여했다고 본다.
“신사가 엄숙하게 결투장으로 나서서 기껏 젊은 세대의 비웃음을 사는 형편이니, 아무리 전통으로 굳은 관습이라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열 걸음 걸어가서, 뒤로 돌아, 쏘세요“라는 표현은 요즘에는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신사‘보다는 벅스 버니나 요세미티 샘 같은 만화 주인공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 67
요즘 서구 국가들이 공공장소에 승리한 전투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전쟁 기념비는 당당한 지휘관의 기마상이 아니라 흐느끼는 어머니들과 지친 병사들을 조각한 모습이다. 혹은, 모든 전사자의 이름을 줄줄이 새겨 둔다. 군인은 더 이상 눈에 띄는 공인(公人)이 아니다. 군복은 칙칙해졌고, 서민들 앞에서 별달리 위신을 세워 주지 못한다. - 68
우리가 겪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일상에서의 폭력적 묘사를 참지 않게 된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남자가 모욕에 쾌히 주먹으로 맞서는 것은 믿음직함을 뜻하는 신호였다. 그러나 요즘 그것은 망나니의 신호이고, 충동 제어 장애의 증상이고, 분노 조절 치료를 처방 받는 지름길이다. - 70
불과 최근까지, 아이들도 정당한 폭력의 대상이었다. 부모가 흔히 아이를 때렸으려니와-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된 행위이다 – 빗이나 주걱 같은 무기까지 동원했다. 통증과 창피함을 가중하기 위해서 아이의 엉덩이를 까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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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지금이라면 ‘고문’으로 간주디ㅗ어 해당 교사가 감옥에 갈 만한 벌을 내리곤 했다. - 74
홉스는 저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들의 세상에서는 경쟁이 피치 못할 결과라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진화에 딸린 조건이라는 사실을 안다. 경쟁자를 밀쳐 내고 먹이, 물, 탐나는 영역 등의 유한 자원을 차지하는 생존기계는 경쟁자보다 더 많이 번식할 테고, 결국은 그런 경쟁에 알맞은 생존 기계들만 세상에 남을 것이다.
우리는 남자들이 다투는 자원 중에 왜 ‘아내’가 끼어 있는지도 안다...암컷의 생식력이 희소 자원이 되고, 인간을 포함하여 많은 종의 수컷들이 그것을 놓고 경쟁한다.
여담이지만, 이것은 남자란 무릇 유전자의 통제를 받는 로봇이라는 말이 아니다. 강간과 싸움에 대해 도덕적 변병이 가능하다는 말도 아니고, 여자는 수동적인 성 전리품이라는 말도, 사람은 자식을 가급적 많이 낳으려는 법이라는 말도, 문화적 영향력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이런 생각은 모두 성 선택 이론에 대한 흔한 오해들이다. - 87
포지티브섬 게임은 행위자들이 다 함께 운을 향상시킬 선택지가 있는 시나리오다. 일상의 전형적인 포지티브섬 게임이라면 선의 교환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작은 비용으로 남에게 큰 편일 줄 수 있을 때 서로 그렇게 해 주는 것이다. 영장류가 서로 등에서 진드기를 잡아 주는 것, 사냥꾼이 혼자 먹기에는 너무 큰 동물을 잡았을 때 동료들과 나눠 먹는 것, 부모들이 번갈아 가며 서로의 아이를 돌봐 주는 것이 그런 예다. 인간의 협동 행위와 공감, 신뢰, 감사, 죄책감, 분노처럼 협동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감정은 포지티브섬 게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통찰이야말로 진화 심리학의 중요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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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티브섬 게임은 폭력의 동기도 바꾼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호의나 잉여를 교환한다면, 그가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편이 당신에게도 더 좋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상해 볼 동기가 주어진다. 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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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적’ 전체라는 비유는 엉뚱한 것이 아니다. 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와 외르시 서트마리는 문명화 과정과 유사한 진화적 동역학이 생명 역사의 주요한 변화들, 즉 유전자, 염색체, 세균, 진핵 세포, 생물체, 유성 생식을 하는 생물, 동물 사회가 차례차례 등장한 과정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매 단계마다, 자기를 돌보는 능력과 협동의 능력을 모두 갖춘 개체들은 자신보다 더 큰 전체에 포섭될 수 있는 상황에 처했을 때 늘 협동을 택하는 편이었다. 개체들은 서로 편익을 주고받으면서 각자 전문화했고, 하나가 나머지를 착취하여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 장치를 개발했다. - 155~158
법학자 도널드 블랙...우리가 범죄라고 부르는 행동의 대부분이 범인의 시각에서는 정의의 추구라고 지적했다. 블랙은 범죄학자들이 예전부터 잘 알았던 통계 하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따. 전체 살인 중에서 소수만이(아마도 10퍼센트 미만이) 실제적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실제적 목적이란 도둑질 중에 집주인을 죽이거나 체포되던 중에 경찰을 죽이거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노려 강도와 강간 피해자를 죽이거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더 흔한 살인 동기는 도덕적인 것이다. 모욕에 대한 보복, 집안싸움의 격화, 불성실하거나 자신을 떠난 연인에 대한 처벌, 그 밖의 질투, 복수, 자기방어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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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찰은 폭력에 대한 여러 정설을 뒤집는데, 그중 하나는 폭력이 도덕과 정의의 결핍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실은 그 반대다. 폭력은 도덕과 정의의 과잉에서 생겨날 때가 많다. 적어도 가해자의 마음에서는 그렇다. - 165~167
범죄 경향성에서 흔히 또 다른 용의자로 거론되는 경제 역시,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별반 더 낫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에 과연 실업률이 낮아졌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오히려 높아졌는데, 그럼에도 강력범죄는 미국처럼 줄었다. 프랑스와 독일도 실업률은 높아졌지만 폭력은 줄었고, 거꾸로 아일랜드와 영국은 실업률은 낮아졌지만 폭력은 늘었다. 이것은 언뜻 느끼기만큼 놀라운 일은 아니다. 범죄학자들은 실업률과 폭력 범죄 발생률이 무관하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았다...대공항 이래 최악의 침체를 야기한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3년 동안, 미국의 살인율은 14퍼센트 더 떨어졌다. 범죄학자 데이비드 케네디는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경제가 폭락하면 범죄가 심해진다고 굳게 믿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한 번도 옳은 적이 없습니다.” - 220
어떤 진보는-이것이 진보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보란 말인가- 사상에 의해 추진되었다. 제도적 폭력을 최소화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구체적인 논증에 의거해서. 또 어떤 진보는 감수성의 변화에 의해 추진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좀 더 공감하기 시작했고, 남들의 괴로움에 더 이상 무감각하지 않았다. 이런 힘이 융합되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생겨났다. 생명과 행복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는 이데올로기. 이성과 증거를 사용하여 제도를 설계하는 이데올로기. - 248
인간 제물이든 피의 비방이든 마녀 박해든, 제도화된 미신적 살해는 결국 두 가지 압력에 굴복했다. 하나는 지적 압력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의미가 있더라도 다른 의식적 존재가 꾀한 짓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물리적 힘과 순전한 우연에 의해 벌어진 일일 수도 있음을 깨우쳤다. - 258
두 번째 압력은 설명하기가 좀 더 어렵지만 못지않게 강력했다.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과 행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왜 판사가 고문의 비도덕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실험 삼아 하인을 고문했다는 이야기에 질겁하는가? 한 사람을 해쳐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는 타인일지라도 그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에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공감에 기초하여, 실체가 있는 현실의 인간에게 괴로움을 가하는 짓을 철저히 금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불행을 남들의 탓으로 돌리려는 본성까지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 유혹을 폭력으로 분출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점에서는 조금씩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타인의 안녕을 점차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인도주의 혁명이 그 밖의 야만적 풍습들을 폐지하는 과정에서도 공통적으로 기여한 요소였다. - 258
증명 불가능한 신념의 더 큰 위험은, 폭력적 수단으로 그것을 변호하려는 유혹이 든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에 집착하게 된다. 그 신념의 타당성이 자신의 능력을 반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권위를 주기 때문에, 자신의 지휘를 합리화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신념에 도전하는 것은 그의 존엄, 지위,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념이 오로지 믿음에만 의존할 때는 만성적으로 취약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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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거나, 신이 세 인간의 형태로 존재한다거나, 알리는 마호메트 이래 두 번째로 신성한 인간이라거나 하는 신념은 다르다. 사람들이 이런 신념에 따라 삶을 조직하며, 그리고 그런 신념이 없어도 잘 사는 듯한 사람을 보면-그 신념을 그럴듯하게 논박하는 사람이라면 더 나쁘다-그때는 자신이 바보로 보일 위험에 처한다. 게다가 신념이 오로지 믿음에 기반할 때는 회의주의자에게 설득력 있게 그 진실성을 변호할 수가 없으므로, 신자들은 불신에 대해 분노로 대응하기 쉽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모욕을 뭐든지 제거하려 든다. - 259
13세기,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는 알비파라는 이단 교리를 받아들였다. 선하고 악한 두 종류의 신이 있다고 믿는 교리였다. 분노한 교황은 프랑스 왕과 결탁하여 군대를 파견했고, 군대는 일비파 약20만명을 죽였다. - 260
1520~1648년 사이 유럽의 종교 전쟁이 지독하고 잔혹하고 길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저 종교 때문만이 아니라 영토와 왕조의 세력을 놓고서 싸울 때가 많았지만, 종교 차이가 사람들의 성미를 더 뜨겁게 달군 것은 사실이었다. - 263
또 어떤 면에서는 지적, 도덕적 변화였다. 영혼에 가치를 두는 태도가 생명에 가치를 두는 태도로 바뀐 것이었다. 영혼의 신성함이라는 교리는 얼핏 고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대단히 해롭다. 그에 따르면 지상의 삶은 인간이 거치는 일시적인 단계이자 인간 존재에서 무한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은 사춘기나 중년의 위기와 같은 삶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아니라 생명을 도덕적 가치의 소재지로 여기는 점진적 변화를 거든 것은 회의주의와 이성의 득세였다. 누구도 삶과 죽음의 차이나 고통의 존재 따위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불멸의 영혼이 육체를 빠져 나간 뒤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신념을 지니려면 세뇌가 필요하다.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17세기는 작가들이 경험과 논리로써 신념을 정당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런 주장은 영혼과 구원에 대한 교리를 잠식했고, 남들에게 칼을 겨눠...못 믿을 일을 믿게끔 강요해야 한다는 정책을 무너뜨렸다. - 265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정부는 폭력의 적법한 사용을 독점하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속성상 폭력을 행사하도록 설계된 제도인 셈이다. 이상적으로는 범죄자와 침략자에 대한 억제 정책으로서만 예비해 두어야 하겠지만, 수천 년 동안 많은 정부는 그런 제약을 지키지 않고 거침없이 폭력에 탐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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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점차 폭정을 줄이는 동안, 사상가들은 정부의 폭력을 가능한 한도에서 최소로 끌어내릴 수 있는 원칙적 방도를 고심했다. 그 시작은 개념의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정부를 사회의 유기적 일부로서 당연시하는 대신, 혹은 신으로부터 지배권을 위임 받은 존재로 여기는 대신, 일종의 장치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개인들이 집단으로 복지를 제고하고자 발명한 기계 장치와 같다고 보았다. - 288~291
가령, 셰익스피어의 팔스타프는 역사상 너무나 많은 폭력의 근원이었던 명예의 관념에 대해서 문학 역사상 가장 풀륭한 분석을 선보인다. 할 왕자가 “자네는 신에게 죽음을 빚졌네”라고 말하면서 전투에 나갈 것을 종용하자, 팔스타프는 이런 생각에 빠지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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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가 잘린 다리를 도로 붙여 주나? 어림없지. 팔은? 어림없지....그러면 명예란 놈은 수술의 재주가 전혀 없단 말인가? 없고말고. 그러면 명예란 대체 무엇이지? 말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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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캉디드>도 가상 인물의 입을 빌려 통렬한 반전 논리를 펼쳤다. 가령 전쟁을 정의하기를, “군복을 입은 100만 명의 암살자가 유럽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떠돌며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규율에 따라 살인과 약탈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했다. - 297, 299
칸트는 이어 영구 평화의 세 가지 조건을 개괄했다. 첫째 국가들은 민주 국가여야 한다. 칸트 자신은 공화국republic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는데, 민주주의democracy는 대중 통치를 뜻하는 단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자유, 평등, 법치에 헌신하는 정부였다. 칸트는 두 가지 이유에서 민주 국가들은 서로 잘 싸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민주 국가가 애초에 비폭력을 기초로 설계된 정부(‘순수한 법 개념에서 생겨난 정부’) 형태이기 때문이다. 민주 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힘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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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중요한 점으로, 민주 국가는 전쟁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전쟁의 이득은 지도자들에게 돌아가지만 그 대가는 국민들이 치르기 때문이다. 독재 국가에서는 ‘전쟁 선언이 세상에서 제일 결정하기 쉬운 일이다. 통치자는 전쟁에 직접 참여할 필요가 없고, 그는 국가의 소유자일 뿐 구성원이 아니고, 그의 식탁, 사냥, 별장, 궁정 기능과 같은 쾌락에는 최소한의 희생만 가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사소한 이유로도 흡사 파티를 결정하듯이 전쟁을 결정한다’ 반면에 국민이 고삐를 쥔 나라라면, 사람들은 어리석은 해외 원정에 자신들의 돈과 피를 낭비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히 따져 볼 것이다. - 301, 302
영어권 국가에서 민주주의 원칙이 명문화되기 한참 전부터 정치적 살인이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의식적으로 설계된 개혁에 앞서 감수성의 희미한 변환이 선결 과제였을지도 모른다. 경쟁 파벌들이 모두 살인을 권력 배분의 좋은 수단으로 여기는 생각을 벌지ㅣ 않고서야 어떻게 안정된 민주주의가 시행될 nt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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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점진적인 감수성 변환은 그 변화를 붓으로 적어서 실행하지 않는 이상 현실의 관행을 바꾸지 못할 때가 많다. 노예 무역 폐지는 도덕적으로 동요한 사람들이 권력자를 설득하여 법을 통과시키고 총과 군함으로 법을 지키도록 만든 결과였다. 유혈 스포츠, 공개 교수형, 잔인한 처벌, 채무자 감옥도 결국 도덕 선동가들의 공개 토론에 감화된 입법가들의 법률 덕분에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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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이 변했기 때문에 관습을 의문시하는 사상가들이 쉽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귿르이 논리가 더 쉽게 청중을 확보하고 채택되었다. 논리는 권력 수단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술집이나 식탁의 일상적인 토론에도 끼어들어 전체 문화의 감수성에 스며듦으로써 한 번에 한 명씩 여론을 바꿨다. 그리고 위에서 어떤 관습을 법으로 금지한 탓에 일상에서 그 행위가 사라지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선택지들의 메뉴에서도 그 행위가 지워진다. 사무실과 교실에서의 흡연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한때 흔한 일이었지만 금지된 일로 바뀌었고, 더 나중에는 상상조차 못할 일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노예제나 공개 교수형과 같은 관습은 산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예 상상조차 불가능하여 더 이상 토론에 오르내리지 않는 일로 바뀌었다.
인도주의 혁명이 일상의 감수성에 남긴 가장 큰 변화는 다른 생명의 고통에 대한 반응이다...요즘 사람들은 고양이를 태워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몇 백 년 전의 선조와 다르다. 그들은 다른 생명에게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괴로움을 가하는 것을 허락했고, 실시했고, 심지어 즐겼다. 그들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왜 그것을 안 느낄까? - 305~306
한 대안은, 삶이 편해지면서 사람들이 좀 더 연민을 품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페인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그래서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편해지면, 자신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남들의 생명도 더 귀하게 여기게 된다”고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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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부유한 편이었던 나라들 중에서도 가학성의 온상인 곳이 많았다. 로마 제국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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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물질적 풍요와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상관관계가 확인되더라도, 그 이유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게다가 과연 가난과 비참이 타인의 고통을 즐기도록 만드는가 하는 점도 분명치 않다. - 309, 311
17세기와 18세기에는 사람들이 읽을 내용도 더 많았다. 과학 혁명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경험이란 미시적인 차원에서 천문학적인 차원까지 이어진 방대한 연속선 상의 좁은 영역일 뿐임을 가르쳐 주었고, 우리가 사는 행성은 창조의 중심이 아니라 한갓 별을 공전하는 바위일 뿐임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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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도주의 혁명의 개시를 거든 외생적 변화로서 쓰기와 읽기 능력의 성장이 제일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한다. 마을과 친족으로 이루어진 비좁은 세상은 오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고, 교회라는 유일한 정보 제공자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람들, 장소들, 문화들, 사상들로 붐비는 변화무쌍한 만화경이 되었다. 그리고 정신의 확장은 여러 이유에서 대중의 감정과 신념에 좀 더 인간적인 면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314
독서는 관점 취하기perspective-taking의 기술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셈이다. 당신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장면과 소리를 접하는 것은 물론,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잠시나마 그의 태도와 반응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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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타인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그도 당신과 굉장히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어떤 일인칭, 현재 시제, 지속적인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남의 글을 읽는 버릇을 통해 남의 생각 속으로, 나아가 그의 기쁨과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버릇을 갖게 된다고 말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칼을 뒤집어 써서 얼굴이 흙빛이 된 남자, 불타는 장작을 밀어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여자, 200번째 채찍질에 몸부림치는 남자. 이런 사람들의 관점으로 잠시나마 들어가 본다면, 우리가 그런 잔인한 짓을 누구에게든 꼭 가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검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사람들의 믿음을 바꿀 수 있다. 외국인, 탐험가, 역사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당연시되던 규범을(‘원래 그렇게 하는거야’) 명시적인 관찰로(‘그것이 현재 우리 부족의 방식이야) 바뀌는 것이다. 이런 자의식은 그 관행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는 없는지를 자문하게 되는 첫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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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나빴다면 내가 저 처지였겠지’라고 곱씹는 버릇이 생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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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남성 독자들이 자기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평범한 여성이 (하녀일 때도 있었다) 겪는 금지된 사랑, 견디기 힘든 정략결혼, 잔인한 운명의 반전을 읽으며 눈물을 쏟았다. - 315~317
독서의 폭발적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습관을 갖게 만듦으로써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을 것이다. - 319
시간과 공급자가 충분하다면, 사상의 시장은 사상을 유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내용도 바꾼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만큼 똑똑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턴은(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1675년에 동료 과학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좀 더 멀리 보는 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입니다.”라고 시인했다.
인간의 정신은 복잡한 생각들을 하나로 묶고, 그것을 다른 사상들과 결합하여 더욱 복잡하게 조립하고, 그 조립품들을 묶어 더 큰 장치로 만들고, 그것을 또 다른 발상들과 결합하고, 이렇게 계속 나아가는 데 능숙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능 확장용 소프트웨어나 부품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여러 정신들이 엮인 그물망에서만 가능하다.
지구촌 캠퍼스는 사상의 복잡성뿐만 아니라 품질도 높인다. 은둔한 고립 상태에서는 갖가지 기이하고 유해한 사상이 곪기 쉽다. 그때 최고의 소독제는 햇빛이다. 나쁜 사상을 다른 사람들의 비판적 시선에 노출시키는 것은 그것이 시들어 죽어갈 계기를 제공하는 셈이다. - 320, 321
시작은 회의주의skepticism이다. 인류가 저지른 어리석음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우리 자신이 망상과 오류에 취약한 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을 믿기 전에 충분한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신앙, 계시, 전통, 독단, 권위, 황홀하게까지 느껴지는 주관적 확실성, 이런 것은 실수의 지름길이다. 지식의 원천으로는 기각되어야 한다. - 324
우리는 또한 이성에 헌신한다. 우리가 질문을 던지고, 여러 대답을 평가하고, 그 대답들의 가치를 남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곧 이성을 발휘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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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관찰을 적용하여 세계에 대한 잠정적 일반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른다.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고 조작하는 데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며, 우리에게 우주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확률적이고 늘 수정해야 하는 지식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과학은 지식을 얻는 방식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특정 기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가치 체계이다. 세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 후보로 떠오른 설명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 지식이 늘 임시적이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곧 과학이다.
이성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해서 개개인이 늘 이성적이라거나 열정과 망상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사람은 이성을 행사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개인들의 공동체가 이 재능을 연마하기로 결정하고 공개적이면서도 공정하게 사용하기로 선택하며, 그들의 집단이성의 발휘를 통해서 장기적으로 더 건전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 326
세상에 관한 여러 신념들 중에서 우리가 특히 굳게 믿는 것은, 남들도 우리처럼 의식이 있다는 생각이다. 남들도 우리와 같은 재로로 만들어졌다는 것, 우리와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 우리에게 고통과 기쁨을 일으키는 사건에 대해서 남들도 고통과 기쁨의 신호를 드러내며 반응한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에 따르면, 겉으로는 우리와 여러 모로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 성별, 인종, 문화 – 근본적으로는 우리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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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달라도 인간의 기본 반응은 공통된다는 사실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다. 첫째, 그것은 보편적 본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통의 기쁨과 고통, 공통의 추론 기법, 공통적인 어리석음에의 취약성이 (복수에의 갈망은 물론이다) 다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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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심리의 또 다른 의미는,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도 원칙적으로는 정신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성에 호소하여 당신을 설득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나와 당신이 둘 다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의거하여, 나와 당신이 둘 다 받아들이는 표준 논리와 증거를 이용하는 것이다. - 326, 327
왜 당신과 나는 함께 이런 도덕적 이해에 도달해야 할까? 논리적으로 일관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아니다. 우리가 서로의 이해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 이기주의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잉여를 나누고, 서로의 아이가 곤란에 처했을 때 구해 주고, 서로를 칼로 찌르지 않는 편이 잉여가 썩어 가도 혼자 쌓아 두고, 서로의 아이가 빠져 죽게 내버려 두고, 쉼 없이 혈투를 벌이는 편보다 서로에게 더 낫다. 내가 이기적으로 당신을 착취하고 당신이 바보처럼 당한다면 내게는 좀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가 둘 다 그런 이득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둘 다 나빠진다. 모름지기 중립적인 관찰자라면, 그리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이라면, 둘 다 이기적이지 않은 상태야말로 둘 다 목표로 삼을 상태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이란 웬 복수심 강한 신이 불러 주었거나 어떤 책에 적혀 있는 임의적인 규제들의 집합이 아니다. 특정 문화와 부족의 관습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관점으로 바꿔 본 결과이다. 이 세상에 허락된 포지티브섬 게임의 기회이다. - 327, 328
가령 정부는 좋은 것이다. 무정부 상태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자기 기만에 빠지고, 타인에게도 이런 단점이 있다고 걱정하게 되면 상시적으로 분란이 일어날 테니까. 그보다는 모두들 폭력을 포기하기로 동의하는 한 자신도 폭력을 포기하고 공평무사한 제삼자에게 권위를 맡기는 편이 모두에게 더 낫다. 그러나 그 제삼자도 천사가 아니라 인간일 것이므로, 그 힘을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견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통치자들이 피통치자들의 동의 하에서만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통치자들은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 외에는 피통치자들에게 무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개인들이 협동과 자발적 교환을 통해서 융성하도록 하는 제도들을 육성해야 한다. - 328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는 자기 참조적이고 수정 가능하고 조합론적인 추론 체계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제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 시대 인간들의 추론에 홈이나 오류가 있었다고 해서 계몽주의적 인도주의의 엔진인 합리성 자체를 반박할 수는 없다. 이성은 늘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늘 결함에 주목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그 결함에 넘어가지 않도록 규칙을 수정할 수 있다. - 334
사실과 이성으로써 가벼운 인상과 통념을 억제 – 374
지도자들은 물질적 보상만을 노리지 않았다. 그들은 우세, 명예, 장엄함과 같은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다. 지도를 굽어보며 자신의 영토를 뜻하는 색깔이 남들의 색깔보다 몇 제곱인치 더 넓게 색칠된 것을 감상하는 그 지복의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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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자존심 대결일 때가 많았다. 한 지도자가 다른 지도자에게 칭호, 예의, 좌석 배치 따위의 형식으로 경의를 표하느냐 마느냐가 유일한 쟁점이곤 했다. 깃발을 내려 경의를 표하길 거부했다든지, 깃발에 경례를 붙이지 않았다든지, 문장에서 어떤 상징을 제거하길 거부했다든지, 대사를 앞장세우는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든지 하는 상징적 모욕 때문에 전쟁이 야기되곤 했다. - 408
벨은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가 민족주의, 그리고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의 결합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앞선 기독교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나 나중에 올 파시즘과 공산주의처럼, 그 이데올로기는 구세주적이었고, 묵시록적이었고, 확장적이었고, 스스로의 올바름을 확신했다. 상대는 누구든 구제불능의 악으로 여겼다. 신성한 대의를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존재론적 위협으로 여겼다. - 418
낭만적 민족주의자들은 인류의 보편성이라고 불리는 무언가에 매몰되지 않는 독특함이 민족 집단에게 – 헤르더의 경우에는 폴크Volk, 즉 독일 민족에게 – 존재한다고 믿었고, 민족 집단은 합리적인 사회적 계약보다는 피와 흙의 유대로 묶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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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낭만적 민족주의가 역사의 꿋꿋한 변증법적 진보를 믿는 헤겔주의와 뒤엉킨다. 루어드는 헤겔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무릇 역사는 어떤 신성한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주권 국가는 그 계획이 스스로를 구현한 존재이고, 전쟁은 주권 국가들이 서로의 차이를 해소하는 방식이며, 그 결과 우월한 국가가(가령 프로이센) 득세하여 신성한 목적이 충족된다. 이런 사상은 결국 파시즘과 나치즘의 구세주적, 군사적, 낭만적 민족주의 운동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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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살을 지닌 수많은 사람이 한 명의 통치자, 하나의 국기, 군대, 영토, 언어와 동일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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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결’이 위험한 것은, 어떤 민족 문화적 집단이 어떤 땅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의 ‘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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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는 스스로 ‘민족’을 구현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거주자 중 많은 이들의 이해를 구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정치적 경계와 인종적 경계가 일치하는 세상을 낙원으로 여긴다면, 지도자들은 인종 청소와 민족 통일 캠페인으로 낙원을 앞당기려고 할 것이다. - 420~423
19세기에 유럽의 오랜 평화를 중단시킨 또 다른 사조는 낭만적 군사주의였다. 즉 전략적 목표와는 별개로 전쟁 그 자체를 건정한 활동으로 받는 관점이었다. 자유주의자이건 보수주의자이건 전쟁이 영웅주의, 자기희생, 남자다움과 같은 훌륭한 정신적 자질을 끌어낸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전쟁은 부르주아 사회의 나약함과 물질주의를 정화하고 활력을 고취시킬 치료법으로서 꼭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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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민족주의와 낭만적 군사주의는 서로 부채질했다. 독일이 특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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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의 낭만적 군사주의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전망이 생각만큼 끔찍하지는 않다고 보증했다. 오히려 반대라고 했다. 힐레르 벨록은 “나는 거대한 전쟁을 갈망한다! 그것은 유럽을 빗자루로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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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융성했다. 빗자루, 상쾌한 바람, 가지를 치는 가위, 깨끗하게 쓸어가는 폭풍, 정화의 불. - 423~426
제1차 세계 대전은 서구 주류의 낭만적 군사주의를 끝장냈고, 전쟁이 궁극에는 바람직하거나 불가피하다는 생각마저 끝장냈다. 루어드는 이렇게 지적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태도를 바꾸었다. 더 이상 고의적인 개전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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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전쟁은 영광스럽고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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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은 최초의 ‘문학적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씁쓸한 회고담들이 몰려나와, 1920년대 말에는 이미 전쟁의 비극성과 헛됨이 상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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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적인 예술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이, 독자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일인칭으로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타인의 고통에 좀 더 공감하게 되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는 젊은 독일 병사가 자신이 방금 죽인 프랑스 사람의 시체를 뒤지는 불후의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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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대고 말했다. “...나를 용서해요, 친구...어째서 사람들은 우리에게 당신들도 우리와 똑같은 가련한 인간일 뿐이고, 당신들의 어머니도 우리의 어머니와 똑같이 걱정할 거싱고, 당신들도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똑같이 죽음녀서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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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뭇거리면서 그의 지갑을 집어 들었다. 지갑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활짝 열렸다...그 속에는 여자와 어린 소녀의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담쟁이가 뒤덮인 벽 앞에서 찍은 아마추어 사진사의 작은 사진들이이었다. 그것과 함꼐 편지들도 들어 있었다. - 430~432
지도자들과 대중의 사고방식이 변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몇 가지 정상성 점검 항목들이다. 전쟁 친화적 사호방식의 모든 요소들은-국가주의, 영토에 대한 야심, 국제적 명예의 문화, 대중의 전쟁 수용, 인적 비용에 대한 무관심- 20세기 후반부에 선진국에서 한물간 것이 되었다. - 449
국경을 신성시하는 심리는 감정 이입이나 도덕적 추론보다는 규범과 터부에서 나온다. 점잖은 나라들에게는 정복이 더 이상 상상 가능한 선택지가 못 된다. 오늘날 민주 국가의 정치인이 딴 나라를 정복하자고 제안한다면, 대중의 반응은 논박이 아니라 난처함, 황당함, 혹은 웃음일 것이다. - 452
자유주의 평화 이론은 온화한 상업의 원리를 포함한다. 무역은 상호 이타주의의 한 형태로, 양쪽에게 포지티브섬 이득을 주고 서로 이기적인 이유에서 상대의 안녕을 바라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로버트 라이트는 협동의 역사적 확장을 살펴본 책 <넌제로>에서 상호성에 최고의 위치를 부여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일본을 폭격하지 말아야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내 미니밴을 만들기 때문이다.” - 493
러셋과 오닐은 분쟁 위험이 있는 모든 국가 쌍들에 대해, 무역에 더 많이 의존한 쪽의 무역량을(국내 총생산에 대한 비율로) 데이터로 입력했다. 그 결과, 어떤 해에 무역에 더 많이 의존한 나라일수록 이듬해에 군사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낮았다. - 496
국제 조직 중 세계 평화에 최고의 실적을 기록한 단체는 유엔이 아니라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일 것이다. 프랑스, 서독,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1950년에 창설한 이 기구는 석탄과 철이라는 두 중요한 전략적 필수품의 시장을 감시하고 생산을 조절한다. 기구는 참가국들의-특히 서독의- 역사적 경쟁심과 야심을 공통의 상업 행위 속에서 가라앉히려는 방안으로서 설계되었다. 석탄 철강 공동체는 유럽 경제 공동체의 무대를 닦았고, 그로부터 유럽 연합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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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은 이런 조직이 서유럽의 집단의식에서 전쟁을 몰아내는데 기여했다고 본다. 이런 조직은 사람, 돈, 물건, 생각이 국경을 쉽게 통과하게 만듦으로써 군사 경쟁의 유혹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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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조직의 사명이 반드시 유토피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국방, 화폐, 우편, 관세, 운하 통해, 어업권, 오염, 관광, 전쟁 범죄, 도량형, 도로 신호 등등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조정하기 위한 정부들의 자발적 협회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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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평화를 선호한다. 무역은 평화를 선호한다. 정부 간 국제기구 소속도 평화를 선호한다. - 500~502
많은 국제 관계 연구자가 이 생각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편향되게도 ‘현실주의’라고 불리는 유력한 이론...지도자들은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하고, 자국의 이익만 고려하고, 도덕성이라는 감상적인(그리고 자살적인) 생각에 따라 유화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현실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 본성의 결과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이 기저에 깐 인간 본성이론이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인간은 또한 도덕적 동물이다. 인간의 행동이 공평무사한 윤리적 분석에 비추어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감정, 규범, 터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적 직관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런 자질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자동으로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순간에 지도자들과 그 연합체들의 도덕적, 인지적 자질이 평화로운 공존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마침 알맞게 조합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감상적인 생각도 비과학적인 생각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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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한 국가들 간의 전쟁은 인도주의 혁명의 초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일로 여겨졌지만 차츰 논쟁적인 일로, 비도덕적인 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이윽고 애당초 생각되지 않는 일로 바뀐 다른 옛 관습들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노예제, 농노제, 바퀴로 부서뜨리기, 내장 꺼내기, 곰 곯리기, 고양이 화형, 이단자 화형, 마녀 익사시키기, 도둑 목매달기, 공개 처형, 썩어 가는 시체를 교수대에 전시하기, 결투, 채무자 감옥, 채찍질, 용골 끌기가 모두 그랬다. - 503
하나의 촌락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느낀다. 인간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범위가 자연적 상태에서 촌락이라면, 그 촌락이 전 지구로 확장되었을 때, 우리는 친척과 부족으로만 이루어진 촌락에 살던 때보다도 동료 인간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아침 신문을 폈을 때 1만5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어느 작고 헐벗고 겁에 질린 소녀가 네이팜탄 공습을 피해 달려오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고 그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는 세상에서는 어느 작가도 감히 전쟁이 ‘인간의 모든 미덕과 재능의 근본’이라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넓히고 인격을 향상시킨다’는 의견을 낼 수 없다. - 504
우리 유감스러운 종이 저지르는 다채로운 폭력 중에서도 집단 살해는 유별나다. 가장 극악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돈, 명예, 사랑을 놓고 치명적 싸움에 휘말리는지, 왜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지나치게 처벌하는지, 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전투를 벌이는지, 이런 의문들은 우리가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여자, 아이, 노인을 막론하고 죄 없는 사람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해 보려고 애써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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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에 따른 학살은 피해자의 행동이 아니라 존재를 표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이득, 두려움, 복수라는 통상적인 동기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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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와 방법을 차치하더라도, 집단 살해의 가해자들은 이유 없는 가학성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을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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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1975년 중국 문화 혁명 당시, 마오쩌뚱은 홍위병들에게 ‘계급의 적’을 겁박하는 약탈을 자행하라고 장려하여 대략 700만 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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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에 따른 학살을 이해하려면, 이해가 조금이라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범주화의 심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 소속, 관습, 외모, 믿음에 따라 머릿속 구획들에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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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집단으로 뭉치는 것은 정말로 어떤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비록 통계적인 공유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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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화의 문제는 이것이 종종 통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일례로 우리는 압박을 느끼거나 주의가 산만하거나 감정적일 때, 범주가 근사적 성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마치 모든 남자, 여자, 아이에게 그 고정관념이 적용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범주를 도덕화moralize하는 경향이 있다. 동지에게는 칭찬할 만한 특징들을 부여하고 적에게는 비난할 만한 특징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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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집단을 본질화essentialize하는 경향이 있다...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 구성원들은 유사 생물학적인 본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본질 때문에 집단이 균질하고, 불변하고, 예측 가능하며, 다른 집단과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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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집단 살해는 편의의 문제에서 비롯한다...토착민 집단 살해는 땅이나 노예를 편리하게 얻기 위한 일이었고, 희생자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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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살해는 또 다른 현실적 기능을 수행한다. 정복자에게는 집단 살해를 감행할 의지가 있다는 평판이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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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상대를 존재론적 위협으로 보고, 선제공격으로 없애야 한다고 본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보스니아인과 코소보인을 집단 살해했던 데는 자신들이 학살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거들었다.
집단 사람들이 자신의 동지가 희생되는 것을 보았다면, 혹은 스스로 희생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면했다면, 혹은 표적이 되었다는 걱정에 편집증적으로 시달린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도덕적 분노가 타올라서 적으로 인식한 자들에게 복수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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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가족, 친족, 부족은 결속력이 있기 때문에-특히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결의가 있기 때문에- 그중 한 명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사냥감으로 보인다. 규모가 비슷하고 자주 접촉하는 집단끼리는 복수를 ‘눈에는 눈’ 상호성으로 국한하는 편이지만, 그 규칙이 자주 위반되다 보면 일회적 분노가 만성적 증오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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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라는 본질주의적 개념은 요람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데서 생겨난 여러 생물학적 비유들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패퇴시킨 적들 중 소수라도 살려 두면 그들이 다시 늘어가서 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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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양, 암, 세균, 바이러스는 집단 살해의 시적 표현에 수사를 제공한 또 다른 음흉한 생물학적 개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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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에는 생물학적 오염에 대한 방어 기제가 진화되어 있다. 바로 혐오감이다...그런데 이 혐오감은 쉽게 도덕화된다. 도덕적 스펙트럼의 한쪽 극단은 영성, 순수함, 정숙함, 깨끗함과 동일시되고, 반대쪽 극단은 동물성, 더러움, 음탕함, 오염과 동일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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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덕적으로 평가절하된 사람들에게 혐오의 비유를 적용할뿐더러, 거꾸로 물리적으로 혐오스러운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평가절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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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살해로 가는 감정적 경로들은-분노, 두려움, 혐오- 다양한 조합으로 등장할 수 있다. - 552~564
솔제니친이 지적했듯이, 사람을 수백만명 죽일 때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개인을 도덕화된 범주에 가두는 유토피아적 신념이 강력한 체제에 뿌리 내리면, 그야말로 최대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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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를 일으켰던 이데올로기로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 전쟁을 일으켰던 기독교...프랑스 혁명에서 정치 살해를 일으켰던 혁명적 낭만주의, 오스만 투르크와 발칸의 집단 살해를 일으켰던 민족주의,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던 나치즘, 그리고 스탈린 치하 소련, 마오쩌뚱 치하 중국, 폴 포트 치하 캄보디아에서 숙청, 추발, 테러 기근을 일으켰던 마르크스주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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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이유에서 집단 살해를 끌어들인다. 첫째, 유해한 공리주의 계싼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므로, 그 도덕적 가치는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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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몇 명을 희생하는 것이 허락될까? 수백만 명쯤은 나쁘지 않은 거래로 보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다. 완벽한 세상에 대한 약속을 듣고서도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얼마나 사악한 자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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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가 집단 살해를 일으킬 수 있는 두 번째 위험 인자는 그것이 깔끔한 청사진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인간 집단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완고하게, 아마도 근본주의적으로, 완벽한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가치를 고집할 것이다...만일 당신이 깨끗한 종이에 완벽한 사회를 설계한다면, 당연히 이런 눈엣가시들을 계획에서부터 지우지 않겠는가? - 565, 566
이것은 서구 문화가 폭력에 대한 반감을 점점 더 낮은 수준까지 확장해 온 흐름의 일부였다. 전후에는 전쟁이나 집단 살해처럼, 수천, 수백만 명을 죽이는 폭력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다. 그 반감은 차츰 폭동, 린치, 증오 범죄처럼 수백 명, 수십 명, 혹은 한 자릿수의 사람을 죽이는 폭력을 확대되었다. 그리고 살인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위해로도, 가령 강간, 폭행, 구타, 협박으로도 확대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보호 대상이 아니었던 피해자들, 가령 소수 인종, 여성, 어린이, 동성애자, 동물과 같은 취약한 계층에까지 확대되었다. - 652
그것이 사람들이 여러 고질적인 관습들을 지적으로 성찰한 결과였고, 피부색, 계층, 국적보다 그 속에 담긴 정신이 경험하는 행복과 고통을 더 중요하게 보는 인도주의 사상이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한 결과였다. - 653
과거의 여성 억압은 가령 남편이 아내를 강간하고 구타하고 감금하는 것을 인정하는 법률이었다. 반면에 오늘날은 엘리트 대학의 공학부에서 남녀 교수 비율이 반반이 안 되는 현상에 그 말이 적용된다. 동성애자 권리를 위한 싸움은 동성애자를 처형, 절단, 투옥하는 법률을 폐지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결혼을 남녀의 계약으로만 규정하는 법률을 폐지하자는 것으로 발전했다. 내 말은 현 상태에 만족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차별과 학대에 대한 싸움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권리 운동이든 첫 단계는 그 수혜자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막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이런 승리의 순간들은 우리가 떳떳이 인정하고 음미하고 이해해야 한다. -655
증오 범죄란 어떤 사람의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때문에 그를 표적으로 삼는 폭력 행위를 말한다. - 661
감소세로 돌아선 것은 정부의 공식적 차별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각자 마음속에서 상대를 비인간화하고 악마화하는 사고방식도 적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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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로런스 보보와 동료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를 역사적으로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를 보면, 노골적 인종주의는 파괴할 수 없기는커녕 그동안 착실히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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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백인들 사이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백인보다 게으르고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에는 그런 믿음을 공언하는 응답자의 비율이 계속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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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과 민족에 대한 경멸적인 농담, 소수 집단에 대한 불쾌한 표현, 인종 간의 선천적 차이에 대한 무지한 몽상은 주류 담론에서 터부가 되었고, 그 때문에 여러 정치인과 언론인의 경력이 끝장났다. - 668~672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과거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아내 구타를 결혼의 정상적인 요소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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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다른 연구들을 보면, 요즘은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자기 알 바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이 옛날보다 줄었다. 1995년 조사에서 응답자의 80퍼센트 이상이 가정 폭력을 ‘아주 중요한 사회적, 법적 문제’로 보았고...87퍼센트는 여자가 다치지 않았더라도 남자가 아내를 때리면 주변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99퍼센트는 남자가 아내를 다치게 할 경우 법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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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는 남편이 아내를 허리띠나 회초리로 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10년 뒤에는 80퍼센트가 그런 행동은 언제나 잘못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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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여자들보다 가정 폭력을 좀 더 용인하지만, 그들도 페미니즘의 물결을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 696~697
지난 50년 동안 이 모든 영역들이 폭력에서 멀어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경향성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인간 본성의 강력한 흐름을 거슬러야 했다는 점이다. 외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악마화하는 성향, 남성의 성적 탐욕과 여성을 소유물로 보는 정서, 부모-자식 간 갈등이 영아 살해나 체벌로 표출되는 성향, 동성애자에 대한 성적 혐오를 도덕화하는 성향, 육식에의 갈망, 사냥에서 느끼는 짜릿함, 그리고 혈연, 상호성, 카리스마에만 기반하여 감정 이입을 하는 성향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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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비도덕적인 이상, 우리는 때로 본능, 문화, 종교, 관행을 단호히 거부해야만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다. 권리 혁명은 이 점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 대신, 감정 이입과 이성에 기반하고 권리의 언어로 선언된 윤리가 그 자릴 차지한다. 우리는 감각 있는 다른 존재들의 처지에 스스로를 대입해 봄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고려하게 된다. 시작은 다치거나 살해되지 않을 권리이다. 나아가 우리는 인종, 민족, 성별, 나이, 성적 지향처럼 눈길을 끌기는 하되 피상적인 특징들을 무시하게 된다. - 803~804
사상과 사람의 확산은 왜 폭력을 줄이는 개혁으로 귀결될까? 여러 경로가 있다. 가장 뚜렷한 것은 무지와 미신의 타파이다. 대중이 교육을 받고 서로 연결되면, 적어도 집단 차원에서 장기적으로는 유해한 신념의 미몽에서 깨어나기 마련이다. 다른 인종과 민족은 선천적으로 탐욕스럽고 배은망덕하다는 생각, 경제적 불운과 군사적 불운이 소수 민족의 배신 탓이라는 생각, 여성은 강간을 괘념치 않는다는 생각, 아이는 때려서 사회화해야 한다는 생각,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양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 한때 폭력을 불러들이고 용인했던 신념들이 최근에 타파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당신에게 어리석을 것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잔학 행위를 저지르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던 볼테르의 말이 떠오른다. - 807
폭력의 감소 덕분에, 이제 우리는 수천 년 동안 그 원인을 이해하는 일을 가로막았던 이분법을 버릴 수 있다. 인류가 근본적으로 악한가 선한가, 유인원인가, 천사인가, 매인가 비둘기인가, 전형적인 홉스식의 비천한 짐승인가 전형적인 루소식의 고귀한 야만인인가 하는 이분법이다. 자연적 상태로 존재하는 인간들이 반드시 평화로운 협동 상태를 구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규칙적으로 기갈을 풀어야 하는 피의 갈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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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는 포식성, 우월성, 복수처럼 폭력으로 몰아가는 동기들이 있지만, 연민, 공정성, 자기 통제, 이성처럼 – 적절한 환경에서는 – 평화로 있는 동기들도 있다. - 818
심리학자 리처드 트랑블레는 사람의 평생에 걸쳐 폭력 발생률을 측정해 보았는데, 그 결과 인생에서 가장 폭력적인 시기는 사춘기나 청년기가 아니라 그 이름도 절묘한 미운 두 살이었다. 걸음마를 배우는 시기의 아기들은 아무리 얌전해도 보통 남들을 발로 차고, 물고, 때리고 싸우지만, 이후에는 물리적 공격의 빈도가 아동기 내내 낮아진다.
트랑블레는 이렇게 말했다. “아기들은 물론 서로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기들에게 칼이나 총을 못 만지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공격성을 익힐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잘못된 질문이었다. 옳은 질문은 아이들이 어떻게 공격성을 버릴까 하는 것이다. - 820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좋다’는 것은 효율적이고 능력 있고 가치 있고 유능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착하고 정직하고 너그럽고 이타적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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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위주 편향의 대표적인 현상은 인주 부조화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평가를 조작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행동을 잘 통제한다는 인상을 지키려고 애쓰는 성향이다...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바람직한 재능과 특징에 있어서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평가하는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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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기와 공감을, 감사와 신뢰를, 외로움과 죄책감을, 질투와 분노를 느낀다. 이런 감정들이 내면의 규제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생활의 대가로 고통 ㅂ다지 않으면서도, 즉 사기꾼이나 무임승차자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생활의 이득을-상호 교환과 협동을-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협동할 것 같은 사람에게 공감, 신뢰, 감사를 느끼고, 우리도 그에게 협동으로 보답한다. 반면 우리를 속일 것 같은 사람에게는 화내고, 배척하고, 협동을 무르고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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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집단은 다양한 수준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지닌 협력자들의 시장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들통 나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실제보다 높게 선전한다. - 831
하나의 사건을 공격자, 피해자, 중립적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각각 서사가 달라지는 현상...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고 부르자.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self-serving bias이라는 더 큰 현상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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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도덕화 간극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는 보상 협상에서 서로 상보적인 전략을 펼친다. 불법 행위를 두고 법정에서 맞붙은 변호사들처럼, 사회적 원고는 피고의 행동이 고의였음을 강조한다. 적어도 불량할정도로 무심한 태도였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원고의 고통과 괴로움을 강조한다. 대조적으로, 사회적 피고는 자기 행동의 합리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원고의 고통과 괴로움을 최소화한다. 이렇게 경쟁하는 관점들이 보상 협상을 결정지으며, 구경꾼들의 공감과 믿음직한 상호 교환자로서의 평판을 더 많이 얻으려는 경쟁을 펼친다. - 831
양측이 진심으로 자기 위주의 이야기를 믿는다는 뜻이다. 누구나 자신은 무고하고 오래 고통을 겪은 피해자로 여기고, 상대는 악랄하고 배은망덕하고 가학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양측은 자신의 진심 어린 믿음에 부합하는 역사적 서사와 사실적 데이터를 수집한다. - 835
피해자는 너무나 많이 기억하는 반면에, 가해자는 너무나 적게 기억한다. 나는 1992년에 일본에 갔을 때 유용한 일본사 연표가 담긴 관광 책자를 샀다. 그런데 1912~1926년까지의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 다음은 곧장 1970년의 오사카 만국 박람회였다. 그 사이에 일본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 아무것도 없었나 보다. - 837
바우마이스터는, 여전히 심리의 안경을 쓴 채, 이것을 순수한 악의 신화myth of pure evil라고 불렀다. 우리가 도덕의 안경을 썼을 때 채택하는 사고방식은 피해자의 사고방식이다. 악은 그저 피해를 입힐 요량으로 이유 없이 일부러 자행된 행위이고, 뼛속까지 사악한 악당이 자행하는 행위이고, 죄 없고 착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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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악의 신화는 종교, 공포 영화, 아동 문학, 민족주의 신화, 선정적인 언론 보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정관념들을 낳는다. 많은 종교에서 악은 악마로 개체화되거나...대중문화에서 악은 칼부림하는 사람, 연쇄 살인범, 요괴, 괴물, 조커, 제임스 본등 풍 악당, 혹은 영화의 시대에 따라 나치 장교, 소련 스파이...아랍 테러리스트...그가 정말로 갈망하는 것은 무고한 피해자에게 혼란과 고통을 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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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수송 담당 아들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관한 글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남자의 평범성과 동기의 평범성을 포착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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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년 동안 사회 심리학은...해로운 결과를 낳는 동기들이 대부분 평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841~842
지난 25년동안 유통되었던 폭력에 대한 이런저런 착각 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널리 퍼진 착각은, 낮은 자존감이 폭력을 낳는다는 가설이다...폭력은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지나친 자존감의 문제이다. 특히 근거 없는 자존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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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나 폭력적인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이 있다. 자신의 성취에 비추어서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자신에게 타고난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현실이 침입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 그들은 그 나쁜 소식을 개인적 모욕으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의 취약한 평판을 위태롭게 만든 그 소식의 전달자를 사악한 중상모략자로 여긴다. - 880
나르시시즘의 핵심에 있는 세 징후는-과대망상, 감탄을 얻으려는 욕구, 감정 이입의 결여-자로 잰 듯 독재자들에게 들어맞는다. 독재자들이 세우는 허영의 기념지, 성인전을 방불하는 이미지 제작, 그에게 알랑거리는 군중집회를 보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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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골목대장이나 깡패처럼 독재자들도 근거 없는 자존감이 언제든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반대를 비판이 아니라 가증스러운 범죄로 취급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감정 이입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현실의 적이나 상상의 적을 처벌할 때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 882
사람의 개인적 정체성 중 일부는 그가 제휴를 맺은 집단의 정체성과 융합된다.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들의 자리가 있듯이, 집단들의 자리도 있다. 그리고 모든 집단들은 저마다의 신념, 욕망, 바람직하거나 비난할 만한 특징들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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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적응도는 각자의 운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무리, 마을, 부족의 운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 힘은 실제 혈연과 가공의 혈연, 상호성의 그물망, 그리고 가령 집단 방어와 같은 공익에의 헌신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단에 공정한 기여를 내놓지 않는 기생자를 처벌함으로써 공익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관리자들에게 집단적 존경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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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단을 대신하여 다른 집단에게 공감하고, 고마워하고, 화내고, 죄책감을 느끼고, 신뢰하고, 불신한다. 그리고 상대 집단 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와는 무관하게 그들 모두에게 이런 감정을 적용한다. - 883
집단 감정의 어두운 면은, 우리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우세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설령 상대 집단의 구성원 각자에게 개인적으로는 다르게 느끼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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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에 대한 선호는 어려서부터 나타난다. 자라면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벗어나야 하는 습관인 듯하다. 발달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유치원생들조차 인종 차별적 태도를 보여 진보적인 부모를 소스라치게 만든다. 아기들조차 인종과 억양이 같은 사람과의 송호 작용을 선호한다.
심리학자 짐 시다니우스와 펠리시아 프라토는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이른바 사회적 우세social dominance의 동기가 있다고 말한다. 좀 더 직관적인 용어로는 부족주의tribalism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 집단들 사이에 위계가 구축되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보통은 자기 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우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다.
두 연구자는 사회적 우세 성향이 있는 사람일수록 애국주의, 인종주의, 운명, 업보, 카스트, 국가의 운명, 군사주의, 범죄에 대한 강경책, 기존 권위와 불평등의 보존 등의 견해와 가치에 끌린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거꾸로 사회적 우세에 반대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인도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보편 인권, 정치적 진보주의, 기독교적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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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몹시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눈다. 표현주의 화가에 대한 취향으로도 나뉘지 않았던가. 심리학자 로버트 커즈번, 존 투비, 레다 코즈미데스는 우리 진화 역사에서 여러 인종들이 바다, 사막, 산맥으로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애초에 인종 차이가 진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좀처럼 얼굴을 맞댈 계기가 없었음을 지적했다. - 884~886
민족주의nationalism 현상은 심리와 역사의 상호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가 결합된 결과이다. 부족주의 이면의 감정적 충동, ‘집단’을 같은 언어, 영토, 조상 따위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인지하는 개념, 정부라는 정치 도구.
아인슈타인은 민족주의를 가리켜 ‘인류의 홍역’이라고 했다. 이 말이 늘 옳다고는 할 수 없다(가끔은 가벼운 코감기 정도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적 나르시시즘의 집단적 형태, 즉 무턱대고 자신의 탁월성을 주장하는 과대망상에 허약하기까지 한 집단 에고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합병증을 일으키면, 정말로 유해한 질병이 될 수 있다.
앞에서 나르시시즘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르시시스트가 현실로부터 불손한 신호를 받아 격분할 때다. 나르시시즘과 민족주의가 결합하면, 정치학자들이 르상티망(ressentiment, 분노[resentment]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라고 부르는 치명적 현상이 등장한다. 자신의 민족과 문명은 역사적으로 위대해질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위신이 낮은데, 그것은 오로지 내부나 외부의 적이 행사하는 악의 때문이라고 믿는 상태이다.
르상티망은 나르시시스트가 사로잡히기 쉬운 좌절된 우세의 감정들을 – 굴욕, 시기, 분노 – 끓어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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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라들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유럽의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나라들은 18세기에 우세 경쟁 게임을 그만두고, 가슴은 덜 뛰지만 더 구체적인 것에 자존감을 걸기로 했다. 돈을 버는 것, 국민들에게 쾌적한 생활을 제공하는 것 등이다. - 887~888
오늘날, 온화한 나라들은 내부의 부족주의 심리를 씻어 내면서 민족국가를 재정의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스스로를 특정 민족 집단의 혼이서린 결정체로 여기지 않는다. 그 대신, 어쩌다보니 한 땅덩어리에 살게 된 모든 사람들과 집단들을 포용하는 계약으로 여긴다. - 889
남자들이 추구하는 영광이란 영장류다운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은근히 암시한다. 그것은 혈류 화학 물질이 드러내는 증상일 뿐이고, 우리가 수탉이나 비비원숭이에게서 목격할 때는 웃음을 터뜨리기 쉬운 본능적 행동일 뿐이라고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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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이 의식에 알려 주는 바를 고분고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지 않고 본능 자체를 조명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본능이 우리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 때 그 힘을 뿌리치는 첫 단계이다. - 895
가학성sadism...누군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이유 외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다니, 도덕적으로 기괴할뿐더러 지적으로 당황스럽다. - 926
인정하기 괴롭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타인의 고통에서 만족을 느끼는 동기가 적어도 네 가지 존재한다. 첫째는 생명의 허약함에 기괴하게 매료되는 현상으로, 마카버macaber라는 단어로 잘 표현된다. 소년들이 메뚜기 다리를 뜯어내는 것, 확대경으로 개미를 태워 죽이는 것이 이런 심리이다....그 궁극의 동기는 아마도 자신의 안전을 포함하여 생명계 전체를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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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세 경쟁이다. 강자의 몰락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가 당신을 괴롭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힘의 궁극적 형태는 뭐니 뭐니 해도 내 뜻대로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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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성의 세 번째 상황은 복수이다. 좀 더 건전하게 제삼자의 버전으로 바꾸면, 곧 정의이다...복수가 완성되려면 표적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로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고, 복수자도 표적이 인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복수자가 몸소 표적에게 고통을 가할 때만큼 확실하게 서로 그 사실을 아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성적인 가학성이 있다....섹슈얼리티와 공격성의 회로들은 변연계에서 얽혀 있고, 둘 다 테스토스테론에 반응한다...경찰국가의 정부 고문자들이 스스로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성적으로 흥분했다는 보고도 있다. 로이드 데모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이렇게 전한다...친위대 사령관들이 채찍질 도중 자위하는 모습을 나는 서른 번 넘게 목격했다. - 930~933
가학성의 원천이 이렇게 많은데, 실제 가학성을 보이는 사람은 왜 이렇게 적을까? 분명 우리 마음에는 남을 해치는 데 대한 안전장치가 갖춰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고장 나야만 가학성이 분출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안전장치는 감정이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면, 타인을 해치는 것이 자신을 해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피해자를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하여 감정 이입의 범위에서 쫓아낼 때 가학성이 더 쉬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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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이입에 더불어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일치시키는 능력도 필요한데, 이것은 감정이입이라기보다는 공감이나 연민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또한 바우마이스터는 공감에 또 하나의 감정이 끼어들어야만 가학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죄책감이다. 바우마이스터는 죄책감이 사후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따. 대부분의 죄책감은 예기적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죄책감을 느낄 듯한 예감 때문에 그 행동을 꺼린다.
가학성의 또 다른 제동 장치는 문화적 터부이다. 고의로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는 공감으로 억제하는 것은 둘 때 치고 애초에 선택지도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믿음...고문이 대중오락이었던 고대, 중세, 근대 초기와는 달리, 오늘날 정부들이 고문을 실시할 때는 거의 늘 은밀하게 한다. 이것은 터부가 널리 인식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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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가학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억제 장치는 좀 더 원초적인 것, 즉 남을 해치는 것에 대한 본능적 반감이다. 대부분의 영장류는 다른 개체가 고통에 겨워 지르는 비명 소리를 싫어하낟. 동료가 충격을 겪는 것을 듣거나 눈으로 볼 때는 음식도 안 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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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대일 주먹다짐을 선뜻 벌이지 못한다. 전장의 군인들은 방아쇠를 당길 시점에 굳어 버린다. - 935~936
왜 사람들은 이렇게 자주 양 떼처럼 순응할까? 순응이 본질상 비합리적인 일은 아니다.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보다 나은 법이고, 자신이 혼자서 다 생각해낼 수 있는 천재라고 믿기보다는 수많은 사람과의 소중한 지혜가 모인 문화의 지시를 믿는 편이 현명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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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때로 순응은 개인에게는 이득을 주지만 집단 전체로는 병리 현상을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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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남들이 그것을 쓰니까 자신도 쓰는데, 그 때문에 더 우수한 경쟁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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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도서, 패션, 유행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예상 밖에 성공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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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회 연결망을 통한 순응의 확산 때문에 사람들이 전혀 설득력 없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일도 가능할까? 사람들로 하여금 속으로는 절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실천하게 만드는 일도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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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적 이데올로기가 인구를 장악하는 일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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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역학의 한 종류로, 다원적 무지, 침묵의 나선, 애벌린의 역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분통 터지는 현상이 있다. 마지막 이름은 텍사스에 사는 어느 가족이 애빌린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는데, 찜통 같은 오후에 온 가족이 불쾌한 여행을 떠난 이유는 다들 남들이 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서였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개인으로는 한심하게 생각하는 관행과 견해를 남들이 다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지지할 때가 있다. 대학생들이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관습이 고전적 사례이다. 수많은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학생들 개개인에게 물으면 모두 폭음은 멍청한 짓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자기 친구들은 모두 그것을 멋진 일로 생각한다고 믿는다...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 이슬람 사회에서 순결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명예 살인...집단 폭행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은 다 좋은 일로 생각한다고 착각한다. -948~950
사람들은 남들이 다 믿는다는 착각에서 가당찮은 신념을 맹세할 뿐 아니라, 맹세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처벌하기까지 한다. 그 역시 주된 이유는 남들이 강제를 바란다고-역시 착각이지만-믿기 때문이다. 메이시와 동료들은 거짓된 순응과 거짓된 강제가 서로 강화함으로써 악순환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각자 개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온 인구가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자신도 기각하는 신념에 대해서 그것을 거부한 이단자를 처벌할까? 메이시와 동료들의 추측에 따르면, 그것은 스스로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강제자들에게 자신은 강령을 편의상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는다고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야만 처벌을 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얄궂게도 그 동료들 역시,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처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단자를 처벌한다. - 951
전체주의 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은 속마음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철저히 통제하는 법을 익힌다. 과거 홍위병이었고, 나중에 역사가로서 마오쩌뚱 치하에서의 삶을 회고록으로 기록했던 장융은 이런 말을 했다.
마오쩌둥의 모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했다는 사실을 찬양한 포스터를 보고 자신은 위대한 지도자의 부모가 현재 계급의 적으로 규탄 받는 부유한 농민이었구나, 하는 이단적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자마자 스스로 그 생각을 억누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 952
강제자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저 혼자 일탈하려는 동기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 953
현실 사회도 이렇다고 말해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제임스 페인은 20세기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장악된 과정이 공통된 순서를 따랐다고 말한 바 있다. 어느 경우든, 소수의 광신적 집단이 ‘폭력을 포함한 극단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순진하고 격렬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고, 다음에는 폭력을 기꺼이 수행할 불량배를 모집했으며, 이후 점점 더 많은 인구를 겁박하여 묵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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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과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고 통신 채널이 잘 발달된 열린 사회일수록 망상적 이데올로기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적지 않을까 하는 교훈이 절로 떠오른다. - 954
사람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면 남들이 깔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자신도 내심 동의하는 의견을 가진 타인을 오히려 비판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들은 짓궂게도 대중의 견해가 객관적 가치에 따르기보다는 교양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따라 형성된다고 짐작되는 두 분야를 골랐다. 와인 감식과 학문성 평가였다. - 955
사람들은 남들이 어떤 견해를 지지한다고 오해할 때는 속마음은 다르더라도 자신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심지어 지지하지 않는 타인을 짐짓 비난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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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개인으로는 지지하지 않는 신념이라도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해 보이고자 남에게 그것을 강제한다는 가설...더 나아가, 구성원 다수가 개인적으로는 지지하지 않는 신념 체계라도 사회 전체가 그것에 장악될 수 있다는 다원적 무지 – 957
도덕적 유리의 두 번째 매커니즘은 점진주의gradualism이다. 사람들은 어떤 야만 행위를 한 번에 해치우라면 못하지만, 한 발 한 발 다가가서 빠져들 수는 있다. 그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도 자신이 기존의 규범에서 엄청나게 벗어난 일을 한다는 느낌이 안 들기 때문이다.
나치가 악명 높은 역사적 사례이다. 나치는 처음에 장애인과 정신 지체자를 안락사시켰다. 다음에는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게토에 감금하고 추방했다. 마지막에는 최종적 해결the Final solutiond라는 궁극의 완곡어법으로 표현했던 조치들로 절정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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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 대한 폭격인 민간인 주거지 근처의 공장에 대한 폭격으로 슬며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민간인 주거지에 대한 폭격으로 슬며시 바뀐다. - 960
20세기 후반부는 심리학의 시대였다. 학계의 연구가 점차 상식에 통합되었다...비단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 대중의 의식에 스며들었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렌즈를 통해서 인간사를 바라보는 습관도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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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우리를 슬로 모션으로 쫓는 시선,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점차 자신의 상황을 두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하나는 자기 머릿속의 시점으로, 사건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진화한 뇌의 활동 패턴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뇌의 온갖 착각과 오류까지 포함해서. - 965
약간의 심리학이 큰 차이를 낳을 수 있다. 우리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인간적 비참함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인지적, 감정적 구조 중에서도 소수의 기벽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그런 기벽을 조금이나마 다 함께 감지했기 때문에 폭력 피해가 다소나마 줄었고, 앞으로도 더 많이 줄 가능성이 있다. - 965
감정 이입의 원뜻이었고 가장 기계적인 뜻은 투사projection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 동물, 물체의 입장에 놓고 그 처지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질지 상상하는 능력이다. - 975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기만 해도 괴로움을 느낀다. - 977
공감은 타인의 쾌락과 고통을 인지한 뒤에 그의 안녕과 자신의 안녕을 나란히 놓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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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짖어 대는 개에 놀라 마구 울부짖는다면, 내 공감적 반응은 아이를 따라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심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다. - 978
공감적 관심이라는 도덕적 의미의 감정 이입은 거울 뉴런의 자동 반사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끄고 켤 수 있는 반응이고, 심지어 역(逆)감정이입으로 도치될 수도 있다. 남이 기분 나쁠 때 나는 기분이 좋아지거나 그 역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역감정 이입의 유발 기제로는 복수가 있다....경쟁은 또 다른 유발 기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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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전염, 모방, 대리 감정, 거울 뉴런 따위를 뜻하는 감정 이입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계획의 문제는,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바라는 종류의 감정 이입을 일으킨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타인의 안녕을 염려하는 공감적 관심만을 일으킨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공감은 내생적 반응으로, 사람들의 관계 양식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이다. 우리가 그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고통에 대한 반응은 감정 이입일 수도 있고, 중립일 수도 있고, 심지어 역감정 이입일 수도 있다. - 980~981
감정 이입 뉴런들로 구성된 감정 이입 중추란 것은 없다. 그저 복잡하게 활성화되고 주절되는 활동 패턴들이 있을 뿐이다. 그 패턴들은 뇌가 상대의 곤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리고 상대와 어떤 관계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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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연민이라는 뜻의 감정 이입과 긴밀한 뇌 조직은 겉질이나 겉질 하부 기관이 아니라 호르몬 전달 체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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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옥시토신의 진화적 기능은 출산, 수유, 육아 같은 모성적 활동들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이 호르몬의 능력을 진화를 거치면서 다른 관계에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성적 각성 상태, 일부일처 종에서 이성애적 유대, 부부나 친구의 애정, 비혈연 개체들의 공감과 신뢰 등이다. 그래서 옥시토신을 포옹 호르몬이라고도 부른다. 뱃슨은 옥시토신이 이처럼 다양한 인간 관계에서 사용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모성적 돌봄이 모든 공감 능력의 진화적 선조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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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토신은 타인의 신념과 욕망에 공감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결정적 방아쇠인 듯하다. - 982~984
공감은 보통 공동체 관계에서 표현된다. 그런 관계에는 죄책감과 용서도 따른다. 그렇다면, 공동체 관계를 창조하는 인자라면 무엇이든지 공감도 창조할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 의식을 구축하는 첩경은 사람들에게 상위 목표를 주어 서로 협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로버스케이브 캠프 실험이 고전적인 사례로, 아이들은 진흙탕에 빠진 버스를 함께 끌어내야 했다). - 994
공감을 일으키는 외생적 기제로 가장 강력한 것은 아주 값싸고, 널리 적용되며,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픽션, 회고록, 자서전, 르포를 읽으면서 타인의 관점을 취해 보는 것이다. - 995
이 연구의 결론은,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몹시 싫어하더라도 그 속에 포함된 어느 낯선 구성원의 관점을 취하면서 그의 사연을 들으면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가 대변하는 집단으로까지 진심으로 공감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 999
소설을 읽은 피험자들이 사실적 기록을 읽은 피험자들보다 알제리 여성들에게 더 많이 공감하여, 그들의 괴로움을 그들의 문화, 종교 유산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덜 보였다. - 1001
이런 연구는 요즘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감정 이입의 시대’ ‘감정 이입의 문명’을 추구해선 안 되는 이유를 상기시킨다. 감정 이입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감정 이입이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공정성의 원칙과 충돌할 때는 사람들의 안녕을 뒤엎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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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와 정부 관료가 감정 이입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래서 친척과 벗에게만 다정하게 특권을 나눠 준다면, 낯선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분배할 때보다 사회에게는 큰 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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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회 제도들은 운영자들이 사회로부터 위임 받은 추상적 의무를 수행할 때 감정 이입의 유대를 초월해야만 제대로 돌아간다.
감정 이입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두루 고려하는 힘이 되기에는 너무 편협하다는 점이다...감정 이입은 우리가 상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켜졌다 꺼졌다 하고, 아예 거꾸로 작동하기도 한다. 감정 이입은 귀여움, 잘생긴 외모, 혈연, 우정, 유사성, 공통의 유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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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감정 이입은 그동안 간과된 집단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자는 통찰을 제공한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통찰만으로는 부족하다. 감정 이입이 실제로 중요하게 작용하려면, 그런 집단들에 대한 정책과 규범을 바꾸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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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책과 규범이라야 한다. 그것이 22의 본성이 되어, 감정 이입이 아예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듯이, 감정 이입만으로도 부족하다. - 1002~1005
폭력도 대체로 자기 통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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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역사상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던 현상, 즉 중세 유럽에서 근대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살인율이 30분의 1로 줄었던 현상은 자기 통제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이론에 따르면, 국가 통합과 상업 성장은 단지 사람들에게 약탈을 꺼릴 유인을 제공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에 자기 통제의 윤리를 주입하여, 절제와 예절을 제2의 천성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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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에 반격하는 사람을 존경하던 명예의 문화는 충동을 다스리는 사람을 존경하는 품위의 문화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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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는 정말로 충동과 자기 통제를 담당하는 경쟁적인 체계들이 있을까? - 1005~1006
뇌에는 당장의 보상에 대한 체계와 먼 미래 혹은 가상적 보상에 대한 체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 1010
이마엽이 손상된 환자들은 자극에 따라 곧이곧대로 행동한다. 그들 앞에 빗을 놓으면, 그들은 당장 그것을 집어서 머리카락을 빗는다. 그들 앞에 음식을 놓으면, 그들은 당장 그것을 입에 집어 넣는다...즉 스스로의 목표와 계획에 부합하게 행동하려면 이마엽이 온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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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확겉질이 손상된 환자들은 충동적이고, 무책임하고, 산만하고,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때로 폭력적이다. - 1013
신경 과학자들은 우리가 인생의 상충하는 요구들 사이에서 유연하게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이마극 때문이라고 본다. - 1014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들은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능력이 더 뛰어났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때 괴로움을 덜 느끼는 편이었다. 그러나 타인에게 더 공감하는 편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덜 공감하는 편도 아니었다. 흔히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은 꼬장꼬장하고, 억압되어 있고, 신경질적이고, 속으로 삭이고, 긴장되어 있고, 강박적...통설이 있지만, 연구 결과는 그 반대였다.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일수록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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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기 통제가 약한 사람들이 폭력을 더 많이 저지를까? 정황 증거로 보면 그렇다....자기 통제가 약한 사람들일수록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론을 소개했다....그런 사람들은 정직한 노력으로 거두는 장기적 결실 대신 부정하게 얻는 눈앞의 작은 이익을 택하는데, 철창에 갇히지 않는 것도 장기적 결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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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범죄는 놀랍도록 충동적일 때가 많다....또는 욕설이나 모욕을 접하자 느닷없이 칼을 꺼내 상대를 찌르는 식이다. - 1018
인간에게는 자기 통제의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폭력적 충동과 비폭력적 충동을 둘 다 조절하며, 개인의 일생에서 더 강화되거나 더 넓게 일반화될 수 있고,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 - 1037
옥시토신
포옹 호르몬이라고 하는 옥시토신은 공감과 신뢰를 북돋운다. 옥시토신은 뇌의 곳곳에 존재하는 수용기들에게 작용하는데, 수용기들의 개수와 분포는 개체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실험이 있다. 공격적이고 난교성인 초원밭쥐에게는 바소프레신(옥시토신과 비슷한 호르몬으로서 수컷의 뇌에서 작용한다) 수용기가 없다. 그런데 생물학자들이 그 수용기를 생성하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삽입했더니, 세상에, 초원밭쥐들이 애초에 수용기가 있는 진화적 사촌 프레리밭쥐들처럼 일부일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옥시토신-바소프레신 체계의 단순한 유전자 변화만으로도 공감과 유대에, 나아가 공격성 억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 1046
신경 전달 물질neurotransmi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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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단백질 효소 중에 모노아민 산화 효소 A, 줄여서 MAO-A라는 것이 있다. 이 효소는 신경 전달 물질이 뇌에 계속 쌓이지 않도록 분해하는 일을 맡는다. 신경 전달 물질이 축적되면, 생물체는 위협에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공격성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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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많은 유전자와는 달리, 저활성 MAO-A 유전자는 다른 특징들과는 상관관계가 없고 공격성에만 꽤 특수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저활성 MAO-A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자라면 특히나 공격성을 띠기 쉽다. 가령 부모에게 학대와 방치를 당한 경우, 학교에서 유급을 당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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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하는 부모와 학대 받는 자식이 그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 반응을 끌어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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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핏과 카스피는 이 유전자의 저활성 형태가 폭력에 기여한다기보다는 고활성 형태가 폭력을 억제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요컨대, 고활성 MAO-A 유전자는 우리가 삶의 스트레스에 과잉 반응하지 않도록 막아 준다는 것 – 1047~1049
피스케의 체계는 네 가지 관계 맺기relational model에서 도덕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관계 맺기 모형이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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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모형인 공동체적 공유(Communal Sharing, 줄여서 공동체성Communality)는 내집단 충성과 순수함/신성함을 결합한 것이다. 공동체성 사고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은 집단 내에서 자원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누가 얼마나 주고받았는지를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집단은 ‘하나의 몸’으로 개념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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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체 접촉, 공동 식사, 통일된 움직임, 제창으로 노래하고 기도하기, 감정적 경험 공유, 공통의 신체 장식과 훼손, 양육과 섹스와 피의 의식에서 체액을 섞는 행위 등등 유대와 융합을 꾀하는 의식을 실시함으로써 직관적인 통일성을 강화한다. 또한 모두가 공통 선조에서 유래했다는 신화, 한 족장에게서 나온 후손이라는 생각, 한 영토에 뿌리 내렸다는 생각, 토템적 동물과의 연관성 등으로 통일성을 합리화한다. - 1061~1063
어떤 사회도 황금률이나 정언 명령에 따라 일상의 미덕과 악덕을 정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도덕 감각은 특정 행위가 관계 맺기 모형들(혹은 유리들, 도덕의 기반들)증 하나를 존중하느냐 침해하느냐 하는 점에 따라 결정된다. 자신이 속한 연합체를 배신하고 착취하고 전복했는지, 자기 자신이나 공동체를 오염시켰는지, 적법한 권위에 반항하거나 모욕을 주었는지, 도발이 없었는데도 남을 해쳤는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득을 취했는지, 자금을 유용하거나 특권을 남용했는지 등등. - 1065
관계 맺기 모형을 위반하는 행위는 두말할 것 없이 잘못된 일로 도덕화된다. 보통의 친구 사이를 다스리는 공동체적 공유 모형에서, 공유에 인색한 것은 나쁜 짓이다. 한편 동등성 모형에 따라 여행에서 기름값을 분담하는 특수한 경우에는, 자기 몫을 안 내는 것이 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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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그때까지 암암리에 동의했던 관계 맺기 모형의 조건을 위반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를 무임승차자나 사기꾼으로 간주하고 도덕적 분노를 겨눈다. - 1067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은 이때 신성하게 여겨지는 자원이 결부되면 터부의 심리가-누군가 어떤 생각을 발설하기만 해도 분노로 반응하는 것-발휘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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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자원은 공동체성, 권위 서열 같은 원초적 모형이 지배하고, 누군가 그것을 동등성이나 시장 가격처럼 좀 더 발전된 모형으로 다루려고 하면 바로 터부 반응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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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보험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에 금전 가치를 부여한다는 생각 자체에 격분했다. 아내에게 남편이 죽을 확률을 따지게 한다는 점에 분노했다. - 1068~1069
피스케가 지적했듯이,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어떤 모형으로 관계 맺을 필요는 없다. 피스케는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null) 관계, 혹은 무사회적asocial관계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어떤 관계 맺기 모형에도 포함되지 않는 타인을 비인간화한다. 그들에게는 인간 본성의 핵심 속성들이 결여되었다고 간주하고, 사실상 무생물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마음대로 무시하고, 착취하고, 농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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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관계 맺기 모형의 가호 아래에 둔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의 이해를 최소한이나마 고려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공동체적 공유 모형은 공감과 온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내집단 구성원들에게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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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자들에게는 자기 부족을 하나로 묶는 모종의 순수하고 성스러운 본질이 없는 것ㅊ러머 보이고, 그들이 동물적 성질로 자기 부족을 오염시킬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공유는 아늑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부족, 인종, 민족, 종교에 기반한 집단 살해 이데올로기의 심리를 뒷받침한다. - 1076
도덕의 심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기에 인도주의 혁명, 긴 평화, 권리 혁명과 같은 폭력 감소를 장려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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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적 진보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성은 공동체와 권위의 가치들에서 멀어져서 평등, 공정, 자율,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에 기반한 가치들로 향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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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자원의 투자를 공동체, 신성, 권위로부터 거둬들이는 것이 어째서 폭력에서 멀어지는 방향일까? 공동체성이 부족주의와 패권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점이 한 이유이고, 권위가 정부의 억압을 정당화한다는 점도 이유이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도덕 감각의 기반이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정당한 처벌 대상이 되는 위반 행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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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든 그르든, 우리가 전통적인 공동체, 권위, 순수성의 영역으로부터 도덕 감각을 철수 시킨다면 반드시 폭력은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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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부족과 권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타인의 자율과 안녕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선택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현대 사회에서 도덕 감각은 단순히 공동체성과 권위에서 멀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법적 제도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이런 변화에도 평화화 효과가 있다. - 1078~1080
한 가지 분명한 힘은 지리적, 사회적 이동성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가족, 마을, 부족의 좁은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런 세상에서는 순응과 결속이 삶의 핵심이고, 배척과 추방은 사회적 죽음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다른 집단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다. 단른 세상은 대안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집단에 대한 무조건 숭배보다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초당파적 도덕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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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개인들이 섞이고, 상업에 종사하고, 직업 조직과 사회 조직에 속하여 상위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협동하면, 순수성에 대한 직관이 희석되기 마련이다....개인적으로 동성애자를 아는 사람들은 동성애를 더 관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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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권위, 순수성을 전복시키는 또 다른 요인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연구이다. - 1085~1086
현대 사회가 수많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똑똑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다 같다면, 똑똑한 세상일수록 폭력이 적다. - 1090
우리의 결정이 정말로 직관을 따르더라도, 어쩌면 직관 자체가 사전에 진행되었던 도덕적 추론의 유산이다. 개인의 숙고이든, 식탁에서의 토론이든, 과거 토론들의 결과로 축적된 규범이든. 사례 연구를 보면, 사람들은 개인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가령 여성이 낙태를 결정하는 순간)과 사회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가령 시민권, 여성권, 동성애자 권리를 주장하며 투쟁하는 시기, 전쟁에 참가한 시기)에 고통스러운 숙고와 고민에 열중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과거의 많은 도덕 변화는 고통스러운 지적 논거에서 유래했고, 그 논거에 대한 격렬한 반박도 뒤따르곤 했다. 그러나 일단 토론이 정리되면, 이긴 쪽의 생각은 사람들의 감수성에 깊이 파고든 뒤에 자신의 자취를 지웠다. - 1092
허튼 생각들의 정체가 폭로되면-신이 인신 공양을 요구한다는 생각, 마녀가 주문을 건다는 생각, 이단자는 지옥에 간다는 생각...아프리카 사람은 야만스럽다는 생각, 왕에게 신성한 왕권이 있다는 생각- 폭력의 논거는 약화되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이성은 자기 통제와 나란히 간다는 점에서도 평화를 가져온다...자아에게 자아를 통제할 이유를 알려 주는 것이 바로-행동의 장기적 결과를 유추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이다...자기 통제는 또한 우리가 기본적인 본능을 억누르고, 그 대신 의식적으로 좀 더 정당화되는 다른 동기를 따른다는 뜻이다...우리는 더 나은 판단으로 심리 편향을 극복할 수 있다. - 1094
포식자를 억제하고 억제되지 않는 사람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라도 약간의 폭력은 늘 경찰과 군대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예비로 간직한 수단일 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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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진보는 실력 행사를 전체적으로 삼가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계산된 양만 조심스럽게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 1095~0196
이성이 폭력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법은, 폭력을 하나의 정신 범주로 추상화한 뒤에 그것을 이겨야 할 경쟁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로 해석하는 것이다. - 1096
인간은 원초적 이성을 지닌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우리 선조들은 문자, 도시, 장거리 여행, 통신의 등장에 발맞추어 아주 조금씩 이성을 계발했고, 갈수록 더 넓은 관심사에 그것을 적용했다.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집단적 이성이 연마되면, 근시안적이고 다혈질적인 폭력의 충동이 점차 깎여 나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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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의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추론하는 능력을 갖게 되고,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아지면, 이르든 늦든 그들은 비폭력을 비롯한 상호 존중의 관행이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깨우칠 것이다. 그리고 그 관행을 점점 더 넓게 적용할 것이다. - 1099
우리는 이성의 힘이 향상되면-특히 개인의 경험을 제쳐 두고,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고, 자기 생각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로 표현하게 되면-사람들이 더 나은 도덕적 행위를 한다는 가설, 여기에 폭력 회피도 포함된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를 보았다. - 1112
심리학자 마이클 사전트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지 수요’가 큰 사람일수록 – 즉, 정신적 도전을 즐기는 사람일수록 – 형사 정의에 대해 징벌적인 태도를 덜 취하는 편이었다. - 1113
그들의 믿음은 그저 괴상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어리석은 것이 많았다. 그런 믿음들은 지적 검증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스스로 주장했던 다른 가치들과 일관성이 없다고 드러날 것이다. - 1115
지능과 폭력 범죄
첫 번째 고리는 가장 직접적이다. 사회 경제 지위나 여타 변수들을 모두 고정했을 때, 똑똑한 사람일수록 폭력 범죄를 덜 저지르고 폭력 범죄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도 낮다. - 1120
추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상호 협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안긴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상대도 똑같이 추론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리하여 동시에 신뢰로 도약함으로써 이득을 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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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을 예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상황에서 지능은 상호 협동을 장려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똑똑한 사회일수록 더 많이 협동하는 사회일 것이다. - 1121~1122
폭력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그 잔인함과 무익함에 거듭 충격을 받는 것이다. 때로는 분노와 혐오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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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벌거벗은 유인원이 같은 종족에게 가했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가없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행성이 고정된 중력 법칙에 따라 우주를 돌고 또 도는 동안, 우리 종은 그 수를 줄이는 방법을 계속 찾아냈다. 그리하여 우리 중에서 점점 더 많은 수가 평화롭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감소는 분명 우리가 음미할 업적이다.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 문명과 계몽의 힘들을, 우리는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 - 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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