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제 자신이 너무 모른 체 살아온 것 같습니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 많은 잘못들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안다고 다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공부하고 생각하다보면 작은 변화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하나는...좀 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건데 싶습니다. 나 자신 밖에는 생각 못했던 내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후회되기도 하고,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던 내가 불쌍하기도 합니다.
글쓴이와 이 책에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의 삶과 마음이 제 가까이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을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났던, 지금도 알고 있는, 앞으로도 만날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느끼고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욕심만으로, 아니면 멍하니 무심히 바라보지 않고 이 책의 이야기들을 빌어 좀 더 따뜻하고 열려 있는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쓴이의 삶에 따뜻하고 깊은 공감과 행복이 함께 하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에 대해 뭔가 보답을 하고 싶지만...특별히 할 게 없어서, 그냥 제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음악 한 곡 마음을 보냅니다)
홍승희, <붉은 선-나의 섹슈얼리티 기록>, 글항아리, 2017
화장실에서 초조하게 임신테스트기를 바라보던 어느 날 오후, 두 개의 붉은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붉은 선은 ‘너의 삶은 이제부터 정지될 예정’이라고 선고하는 것 같았다. 예감은 실제였다. 임신중절수술 후 몇 개월 동안 두통과 복통, 외로움과 배신감에 떨었다. 내 몸속에 정자를 배출한 애인은 사회 정의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며 갑자기 연락이 되질 않았다. - 5
학교와 집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생에서 낙오된다고 협박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여자인 나에게는 협박 하나가 더 생겼다.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니면 걸레가 된다.’ ‘여자가 손해니까 몸조심해라.’ - 19
여자 중학교에 다녔던 나는 친구들과 여자애들의 잠자리 소문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즐겼다. ‘쟤 남자친구랑 잤대’ ‘어느 고등학교에 어떤 언니가 임신을 해서 자퇴를 했다더라’ ‘걔 걸레래’ ‘더러워’ 그런 더러운 짓을 내가 했다. 게다가 친구들도 있었던 그의 집에서. 소문이 나지 않을까? 내 몸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몸과 나를 분리시키고 싶었지만, 밖으로 돌출된 남자의 성기와 달리, 어둡고 눅눅한 동굴 속 질 벽은 어미 오염된 것 같았다 – 23
그가 추구하는 숭고한 사랑에 우리의 섹스는 포함되지 못했다. 추상적인 사랑은 구체적인 육신의 뒤엉킴을 소외시키는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한 사랑과 동물적인 섹스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 85
‘콘돔은 있어? 없으면 섹스는 안 돼’ 다음엔 꼭 이렇게 말해야지 다짐했지만 번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렇게 불편한 섹스를 하면서도 나는 왜 불편하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섹스할 때 내 고통이나 걱정, 불안, 피임, 임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라고 느꼈다. - 158
섹스와 임신은 둘이 함께 했는데 이 고통에서 왜 나는 혼자일까. 그는 낙태한 내가 부담되어서 도망갔다. 그는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렇게 한다. 수많은 여성이 이렇게 방치되어왔을 것이다. 사회는 영아를 유기한 여자를 손가락질하고, 자기 배 속의 태아를 낙태시킨 여자를 살인마라 부른다. 거기에 남자들은 없다. - 182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낙태수술을 증언하는 글을 써서 공유했다. 그리고 인도로 떠났다. 생각보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여성이 내 글을 읽고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아요. 얼굴도 본 적 없고, 나는 당신을 잘 모르지만 끝까지 손 놓지 않을게요” 보이지 않는 끈이 내내 나를 잡아주었다. 6개월 뒤 한 국에서 ‘검은 옷’ 시위가 열렸다. “숨은 남자, 드러나는 여자‘라는 구호가 보였다. 많은 여성이 검은 옷을 입고,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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