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마을 이장里長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영화를 보니 이장里長이 아니라 묘를 옮긴다는 이장移葬이더라구요. ^^
참 참 재미나고..슬프다기 보다는...참 참 서글프기도 한 영화였어요. 평화롭고 따뜻하고 행복한...제게는 환상과도 같은 가족이 아니라 제가 직접 겪고 보고 들은 현실 가족의 모습 같았거든요.
고립 1 - 큰 아빠
영화의 주된 배경은 어느 섬 마을이에요. 섬 마을이라고 하면 한가롭고 아늑하고 고요한 느낌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햇살 비치는 어느 섬 마을, 선착장 근처에서는 강아지들이 뛰어놀고, 배들은 통통통 소리를 내며 오가는...
그런 것도 섬 마을의 모습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다른 모습,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다를 수도 있을 거에요.
큰 엄마가 큰 아빠에게 물어요.
애들한테서 전화 왔었나요?
큰 아빠의 대답은요?...없어요. 그냥 뒷짐지고 먼곳을 바라봐요. 큰 엄마가 한탄하지요.
사람이 말을 하면 무슨 대꾸를 하든지 해야지 원...
두 사람이 살고 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데 다른 사람은 대답이 없어요. 둘이 싸워서 그런 거 아니냐구요? 만약 싸워서 그랬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아마 큰 엄마와 큰 아빠는 평생 그랬을 거에요. 한 집에서 함께 밥 먹고 함께 자고 그랬지만 서로 속 시원히 말 한 번 해보지 않고 산 거지요.
큰 엄마는 어떻게든 말도 해보고 남편과 교류를 해보려고 애를 썼을 것이고, 큰 아빠는 그게 무슨 대단한 신념이나 종교인 것처럼 꾸욱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요. 마누라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특히나 더 개무시하면서...
두 사람 사는데 한 쪽에서 교류를 거부하니 서로가 고립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지시하고 명령하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따뜻하고 속 깊은 교류는 언감생심이지요.
고립 2 - 한남의 씨
대학생인 혜연이 학교에다 대자보를 붙여요. 짧게 지나는 장면이라 내용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가부장제에 관한 내용 같았어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서 표현한 거지요. 그런데 잠시 있다 돌아와 보니 대자보 위에 큰 스프레이 글씨로 이런 식의 말이 적혀 있는 거에요.
너도 한남의 씨일 뿐이다.
큰 엄마가 큰 아빠에게 애들한테서 전화 왔냐고 물었어요. 사회 생활에 적절한 대답은 무얼까요? 당연히 '전화 왔었어요', '조금 전에 출발 한대요'와 같은 것들이겠지요.
그러면 한 사람이 사회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의견을 글로 적어서 대자보를 붙였을 때 사회 생활에 적절한 대답과 방식은 어떤 걸까요? '너도 한남의 씨일 뿐이다'라는 대답과 그 방식이 적절했을까요? 아니면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적어서 대자보를 붙이는 게 좋았을까요
제 블로그에 어떤 사람이 댓글을 남겼더라구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한 글에 붙었던 건데,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서 지워버렸어요. 그 내용은 이런 식이었어요.
계집들 요즘 쳐맞질 않아서 기어오르는구나
이런 비유를 굳이 쓰고 싶지 않지만...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화가 잘 안 될 것 같아서...만약에 계집들이 요즘 쳐맞질 않아서 기어오른다고 생각한다면...이런 생각이나 표현은 어떨까요?
껌둥이들 요즘 쳐맞질 않아서 기어오르는구나
조센징들 요즘 쳐맞질 않아서 기어오르는구나
<이장>에서 딸들이 뭐라 뭐라 하니까 큰 아빠가 멀쩡히 가만 있는 항아리를 냅다 집어던져서 깨버려요.
상대방이 이러 저러 해서 이래 저래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요래 조래 하니 이러쿵 저러쿵 하자고 의견을 말하면 될건데...냅다 욕하고 화부터 내는 거지요.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상대방의 의견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나의 의견이 무엇인지 등등을 느끼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에요.
고립되어 있고, 분노하고 있고, 거친 언행 말고는 잘 모르는 거지요.
고립 3 - 승락
물론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이장>에 나오는 동민이가 그래요. 동민이는 계속해서 말을 해요. 그냥 이런저런 말을 잘 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 이 말 저 말, 온갖 욕과 짜증까지 섞어서...그러다보니 엄마도 그렇고 곁에 있는 사람들도 힘들어 하는 거에요.
반대로 이 집안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인 승락은 말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자주 하는 것이 잠수를 타는 거에요. 잠수를 타고는 어느 구석진 방에 쳐박혀 있는 거지요. 왜 그러느냐,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도 그냥 입을 꾸욱 다무는 거지요.'
다른 사람과 적절하게 대화를 하고, 사회적 교류를 하고,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상당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일 같아요.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것이나, 맥주와 소주를 잘 섞는 것보다는 훠어어어얼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지요.
다른 사람과 적절한 사회적 교류를 하고 지내려면 먼저 생물학적인 토대가 있어야 할 거에요. 기질적으로 또는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힘겨운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생물학적 토대가 있다면,
특히 뇌가 발달하고 사회 관계를 보고 듣고 배워가는 어린 시절을 잘 보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성인이 되어서도 바뀔 수 있지만, 성인이 되어 바꾸기 위해서는 더 더 많은 많은 노력이 필요할테니까요.
승락은 어땠을까요? 승락이 문제만 생기면 잠수를 타는 건 발달/성장 과정과 큰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고,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를 인지하고, 어려움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등등의 경
험을 별로 해보지 못한 건 아닐까요.
장남이라고 남자라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계속해서 거부하라고 요구 받고, 하고 싶지도 않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은 계속 배우고 익히라고 하고, 스스로 풀어야 할 일들도 남들이 해결해 버리니...책임과 의무 속에서 살며 정작 자기 자신과는 멀어지고, 자기 자신과 멀어지니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기도 어려웠던 건 아닐까요.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승락이 어떤 마음일지 꽤나 알겠더라구요. 내가 어느 집안 어느 가문의 몇 대 손이며, 시조는 어떤 어른이고, 누가 누가 우리의 몇 촌이고, 제사상은 어떻게 차려야 하고, 술잔은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등등을 배우며 살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거시기 해요. 술잔을 올린다고 해서 정말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드실 것도 아니고, 술잔을 오른쪽으로 돌리나 왼쪽으로 돌리나 그게 무슨 큰 일일까 싶어요.
고립 4 - 혜영
이 영화에서 제 마음에 가장 크게 남는 인물은 큰 딸 혜영이었어요. 극중 인물도 좋았고, 배우의 연기도 좋아서 다른 출연작을 찾아보기도 했어요.
혜영은 동민이라는 아들과 둘이 살아요. 엄마가 아들과 둘이 산다는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고 흉을 볼 일도 아니고 그냥 그런 거에요. 나의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고 저를 키우며 살았듯이 말이에요.
아무튼 영화속에서는 동민이가 아빠 얘기를 여러번 해요. 동민이 아빠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데...혜영과 그 남자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개인 생활이나 사회 관계에서 여려움을 겪는 동민이를 위해 혜영이 직장에 육아휴직을 신청하려 했던 것 같아요. 남들은 동민이를 향해 키우기 힘든 애, 사고뭉치 등등의 좋지 않은 말을 하지요 혜영은 어떻게든 동민이를 돌보려고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이고 했을 거에요. 그래도 안되니 직장을 쉬면서 아이를 더 돌보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직장에서는 휴직 뒤에 퇴사하기를 권해요. 아이를 키우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자니 아이를 돌보는데 쓸 시간과 에너지가 모자라고, 아이를 더 잘 돌보기 위해 직장을 쉬려고 하니 아예 나가라고 하는 거지요.
직접 보지 않고 듣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혜영은 어릴 때부터 큰 딸이라고 많은 책임감을 요구 받았을 거에요. 딸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을 거고, 큰 딸이니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했겠지요. 그 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구요. 그리고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지만...애 아빠는 온데간데 없고, 돈 벌랴 애 키우랴 또 인생이 정신이 없네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왔고,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지만 정작 혜영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혜영이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느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고, 누군가와 포근한 정을 나누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따스히 가만히
영화에 나오는 섬이 어디쯤인지 대강 알 것 같아요. 저희 집에서 차를 타고 가면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걸릴 거에요.
<이장>속 5남매는 육지와 떨어진 한 섬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모두 뭍에서 살고 있구요.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지요. 둘째딸 금옥이는 지금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어요. 셋째달 금희는 그냥 봐도 아직 철이 덜든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구요. 막내딸 혜연은 꼬추를 벼슬로 여기는 사람들과 얽히며 살고 있을 거구요.
첫째부터 막내까지의 삶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아빠의 꼰대질이 지긋지긋 하지만...아빠를 화장하고 혜영은 밥을 먹으며 눈물을 뚝뚝 흘려요. 아빠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화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그래도 또 아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거에요. 그토록 끊고 싶고 그렇게 멀리하고 싶은데, 또 한 켠 이어져 있는 거지요.
혼자 있으면 썰렁하고 추워요. 움츠러들기 쉽구요. 그렇다고 무조건 함께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거나 기쁨을 느끼는 것도 아니구요.
인간에게는 다른 누군가가 필요한 것 같아요. 섬과 뭍이 배로 이어지고 다리로 이어지듯이 말이에요.
그리고 함께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함께 있다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큰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해오던대로, 배웠던 대로가 아니라 새롭게 배우고 다시 느끼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언제나 뜨겁게 환히 빛나는 태양이 되기는 어려워도
때로는 따스히 가만히 감싸주는 햇살이라도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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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Nocturnes - ClassicMana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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