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도 좋았는데, 이 작품도 좋았어요. 음..뭐랄까...다양한 색채의 가을 나무들 같다고 할까...
큰(?) 사건은 없어요. 이때 큰 사건이라 하면 본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같은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죽이고 도망가고 쫓아가고 같은 것들은 없다는 거지요. 게다가 이 영화는 촬영 장소도 딱 그 한 찻집에요. 찻집에 두 사람이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에요.
큰 사건은 없는데...영화 포스터에 나오듯이 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작지도 않은 큰 사건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유미가 '아쉽다'라고 하는 말...옛 애인을 만났는데...나름 그래도 기대와 설렘도 있었을 건데...여전히 철이 없고 자기 밖에 모르는 그 모습이 아쉬웠을 수도 있겠지요. 세월이 흘렀으니...이제는 좀 변했겠거니 하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구요.
정은채가 '진도를 참 빨리 빼시네요'라고 했을 때, 거기에 참 여러가지 일들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과정에 '진도'라는 건 어떤 걸까요? 감정이 깊어지는 거? 서로를 껴안는 거? 둘의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거? 아님 세 번인가 만나고 섹스를 한 거?
한예리가 말하지요. 그 스포츠 용품점 사장을 작업하려고 했는데, 가난한 그 직원이 좋아졌다고. 인생 참...어찌될지 알 수 없어요, 그쵸? 뜻하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 뜻하지 않은 사랑을 느끼게 되니 말이에요. 어쩌면 가난한 사람과도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을 늘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임수정이 말해요. 난 선택한 게 없다고, 상황이 그랬을 뿐이라고. 나쁜 년이냐구요? 아니요. 제가 보기에는 나쁜 년은 아니네요. 나쁘다기 보다는...그냥 인간의 모습인 것 같아요. 이렇게도 마음이 끌리다가 저렇게도 마음이 흔들리고, 지금 이러고 싶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저래야 할 것만 같고. 그냥 그게 인간인 것 같아요.
큰 사건이 없는만큼 영화는 온통 배우의 말과 표정으로 꽉 차요.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배우의 연기라는 게 정말 예술 작품이 되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들의 눈빛, 웃음, 목소리, 몸짓 하나하나가.
얼굴은 대상 인지에 가장 중요한 범주다. 얼굴이 우리가 타인과 심지어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하는 주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굴을 알아봄으로써 누군가가 친구인지 아니면 피해야 할 적인지를 파악하며, 얼굴 표정을 보고서 타인의 감정 상태를 추론한다. - 에릭 캔데, <통찰의 시대> 가운데
이 영화가 다채롭게 느껴졌던 건 배우들의 연기, 그들의 얼굴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일 거에요. 액션 영화가 적은 감정들로 재미와 흥분을 만든다면, 이런 영화는 다양한 감정들로 공감과 이해를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담백하고 감칠맛 나는 나물 비빔밥 같다고 할까요? 양념이나 고추장을 조금 넣었는데도 그 나물들 각자가 싱싱하고 살아 있는 맛이 나는...고사리는 고사리대로, 콩나물은 콩나물대로...뭐 그런 거? ^^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제 마음에도 생동감이 이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일 수도 있고, 저 또한 여러 상황과 감정 속을 살아 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든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은섭이든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많은 부분 감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도 또한 나의 감정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소중히 여겨주고 아껴주길 바라는 걸 테구요.
만남을 통해서든 예술을 통해서든 생동하는 인간의 감정을 느낄수록
나 자신의 감정들이 더욱 생명력을 얻고 피어나는 것 같아요.
나 자신의 감정들이 더 살아나고 더 잘 느껴질수록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무얼 느끼고 있을지도 좀 더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구요.
내가 나를 좀 더 잘 느낄 수 있고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잘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편안해지고
우리는 좀 더 안심이 될 것 같아요
한 잔의 커피를 그토록 달콤하게 만드는 것은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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