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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읽고

순돌이 아빠^.^ 2020. 12. 4. 22:08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가운데 세번째 책이에요. 

 

어쩌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릴라나 레누의 모습을 닮았을 거에요.

누군가는 스테파노나 엔초의 모습을 닮았을 거구요.

피에트로의 엄마 같은 사람도 있을 거고 레누의 엄마 같은 사람도 있을 거에요.

저는 니노를 보면서 제 모습이 여러번 떠오르더라구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으로...ㅠㅠ 

 

그 많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 삶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무언가 떠오르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건...그만큼 내가 살아온 모습이기도 하고 내가 바라보거나 겪어본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 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세세히 느끼거나 생각하진 못했을 거에요. 대부분은 휙 지나가기도 하고 어~~~하는 사이에 벌써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기도 했겠지요. 

 

그러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읽으며 나의 삶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을 되짚어 보기도 하는 거겠지요. 

 

그런 시간을 안겨준 소중하고 고마운 책이에요. 감사합니다. ^^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한길사, 2019

내 근처에 있던 학생 서너 명도 갑자기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눈빛만 마주쳤을 뿐인데 욕설을 퍼붓고 주먹다짐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심한 사투리로 피를 갈망하는 수컷의 분노를 서로에게 마음껏 쏟아부었다.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안전한 곳일 줄 알았던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위험을 감지한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21

동네에는 내 책과 끊임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
어머니는 나를 창녀라고 부른 정육점집 아들들을 내 남동생들이 흠씬 두들겨 팼어야 했다고 고함을 질렀다. 엘리사에게 네 언니처럼 더러운 짓거리를 해보라고 요구한 엘리사와 같은 반 사내아이의 면상도 박살을 내야했다고 악을 썼다. - 112

릴라는 엔초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나는 릴라가 엔초에게 본 것이 그녀가 지난날 스네파노나 니노에게서 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엔초를 통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일단 돈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실체 없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었다. 니노의 경우에는 지성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릴라에게 아픔만 남기고 시꺼먼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 136

릴라는 엔초가 다른 여자에게 반해서 자신을 쫓아낼가봐 두려웠다. 살 곳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당장은 햄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꼈다. 놀랍게도 예전에 스테파노와 결혼해 수중에 돈은 많았지만 그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보다 더 강하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엔초의 상냥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자신의 모든 걱정에 대한 엔초의 관심과 그가 발산하는 평온한 기운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릴라는 그런 엔초 덕분에 니노의 부재와 스테파노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엔초는 릴라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 139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라운 속도로 앞치마를 헤집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을 침범해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 145

하지만 남성이 여성의 몸에 들어올 때 응당 느껴야 할 쾌락을 릴라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
사내들은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자기 물건을 자신들보다 더 소중히 여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 196

언젠가 내가 리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거든. 너무 두려워서 누구에게라도 내 감정을 드러내야만 했어. 나는 리나에게 내 비밀을 말했고 그때 리나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었어. 덕분에 나는 안정을 되찾았지. 그날 대화는 의미가 컸어. 리나는 귀가 아니라 리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신체 기관으로 내 말을 듣는 것 같았어. 덕분에 뭐든 말해도 될 것 같았어. 
...
나는 게이야, 레누. 여자에게 끌리지 않아. - 292

피에트로오는 어떠한 합의도 볼 수 없었다...그는 이런 식이었다.
"당신이 가면 다시는 아이들을 못 보게 할 거야"
"아이들을 데려가면 나는 자살할 거야"
"당신이 떠나면 가출했다고 경찰에 신고할 거야"
"우리 넷이 여행을 하자. 빈으로 떠나는 거야"
"얘들아 엄마는 너희들보다 니노아저씨를 더 좋아한단다"
갈수록 피에트로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안토니오와 헤어지려 했을 때 그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는지 기억났다. 하지만 그때 안토니오는 멜리나의 불안한 머리를 물려받은 소년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피에트로처럼 교육을 받지 못했다.
...
'지금까지 제대로 교육받은 이성을 너무 맹신했나봐. 좋은 책을 읽는 것과 절제된 표현 능력, 정치적 성향을 너무 믿었던 거야. 버림받는다는 사실 앞에 사람은 모두 똑같아지는 것 같아. 논리적인 사람조차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인가봐"
...
내가 우리 결혼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자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설득하려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다.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자기 뺨을 때리더니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