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들었던 기분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안타까운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고 아쉬운 것도 아니고...
그냥...사는 게 뭔지 싶어요. 산다는 게, 살아간다는 게 뭔지 싶구요.
후회되거나 회한이 일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한두마디로 다 말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가 있어요.
아마도 릴라 때문일 거에요. 릴라와 그 주변 사람들 때문이기도 할 거구요.
릴라에게 좀 더 따뜻하고 다정한 아빠와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릴라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할 때 격려해주고 도와주려고 했다면 어떨까 싶어요.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쓰다듬어 주고, 우리 딸은 참 똑똑하구나 라며 칭찬을 해줬더라면 싶어요.
릴라가 부자는 아니어도 너무 가난하지도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학교를 가고 책을 읽을 형편만이라도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구요. 온갖 추행과 욕지거리를 겪으며 햄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도 리노를 키울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구요.
릴라가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고 좀 더 책임감 있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스테파노처럼 폭력적인 개망나니도 아니고 니노처럼 무책임한 사기꾼이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요.
좀 더 배울 수 있고
좀 더 표현할 수 있고
좀 더 경험할 수 있고
좀 더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자신을 감추지도 않고
그렇게 상처 받지도 않고
그렇게 악을 쓰지도 않고
그렇게 외롭지도 않고
레누와 친구들에게는 다정한 친구로
엔초와는 삶을 함께 하는 동료이자 연인으로
이웃들에게는 마음씨 좋고 베풀줄 아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하고 너그러운 릴라로
살고 일하고 돌보고 웃으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게 모두에게서 자신을 지워버리기보다
이제는 함께 나이든 여성이자 친구로 레누와 함께
수 십 년 동안 간직해 왔던 티나와 누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커피도 마시도 스파게티도 먹으며
지난 세월을 따스히 얘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책은
릴라와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릴라와 같은 삶을 살아낸 여성들에 대한 위로 같기도 해요.
꾸며낸 소설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인생을 수 십 년동안 담아온 다큐멘타리 같기도 하구요.
코로나에 더해 날은 춥고 미세먼지도 매우나쁨이어서 오늘은 하루죙일 순돌이라 둘이서 집에 있었어요. 지금은 순돌이가 제 무릎위에 엎드려 졸고 있어요. 졸다가 깨면 한번씩 오늘은 산책 안 나가냐고 묻는 듯 쳐다봐요. ^^
이 순간이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릴라가 어디선가 저의 얘기를 듣고 있다면 집으로 초대해서 따뜻한 레몬차를 대접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순돌이도 금방 릴라와 친해져서 '릴라 이모 안아 주세요' '릴라 이모 과자 주세요'라고 할 것 같아요.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한길사, 2017
리나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내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준 일이야. 리나는 내가 여자의 맨발을 스칠 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남자의 맨발을 만지고 싶은 욕망에 죽을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줬엉. 그의 손을 쓰다듬고 손톱깎이로 그의 손톱을 다듬어주고 거뭇한 여드름을 짜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
알폰소는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누군가 말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았다.
...
알폰소는 내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기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우리 사이에 새로운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 - 290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내게 한 말("너는 너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도 오래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타고난 내 성향과 내가 받아온 교육을 고려할 때 나라면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돌아가셨다. 이런 생각은 나의 내면에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봤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을 열심히 돌보기 시작했다. - 306
게다가 언젠가부터 임마에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임마는 순종적인 아이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해주지 않을까봐 뭐든 빨리 포기해버리고 포기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해했다. 차라리 니노의 뻔뻔스러운 매력과 철없는 활기찬 성격을 물려 받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했다.
임마는 순종적이었지만 욕구불만이었다. 실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 하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은 척했다. - 448
그에 비해 릴라는 어떠한가. 릴라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데다 상점 주인의 젊은 아내일 뿐이었다.
...
지난날 니노가 릴라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니노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없는 어떠한 것을 릴라에게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 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름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 564
엔초와 함께한 여행은 의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엔초보다 감수성이 섬세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 576
니노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싸웠다. -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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