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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그레이스>를 보고

순돌이 아빠^.^ 2020. 12. 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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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에 걸쳐 <그레이스>를 봤어요. 어제 밤에 잠자리에 누워 마지막회를 보고 잤는데...자는 내내 그레이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그래서 그레이스가 살인범이라는 건지 아닌 건지 도대체 결론이 뭔지 모르겠더라구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검색을 해 봤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찾아보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들도 헷갈려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굳이 정리하지 않고 애매한채로 놔두려구요. 물론 살짝 제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름이 그레이스에요Grace에요. 신의 은혜나 은총을 뜻하는 걸까요? 이름은 그레이스인데 사는 건 안 그레이스 해요.

 

캐나다로 이민 온 가난한 가족 속에서 자랐어요. 엄마는 개쓰레기 같은 아빠한테 시달리며 살다 배 안에서 죽었구요. 게다가 아빠는 딸인 그레이스를 추행해요. 그러면서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고 하지요. 어린 동생들이 걱정되지만...남겨진 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대로 먹기는커녕 늘 구박 받고 두들겨 맞으며, 성적인 학대를 당하진 않았을까요? 힘을 가진 남자인 아빠와 힘 없는 아이들.

 

그레이스는 어느 집에 하녀로 들어갔어요. 말 그대로 하녀에요.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리고 월급 받고. 계약대로 일하고 돈만 받았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할 텐데...그레이스의 안 그레이스한 삶이 그렇게 놔두질 않네요.

 

이번엔 주인집 아들인 존이라는 놈이 괴롭혀요. 밤에 혼자 자고 있는데 어떻게든 방안에 들어오려고 난리를 피우지요. 그레이스가 이 집에 일하러 온 것은 맞지만,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이유도 의무도 전혀 없어요. 하지만 남자인데다 주인집 아들인 존은 자신이 뭐든 다 가져도 되고,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름은 다르지만 아빠와 하는 짓은 비슷해요.

 

신분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 괴롭히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건 그들에게 공통된 어떤 유전적 요인이 있는 건 아니가 싶기도 하구요.

 

낸시의 제안도 있고 존도 피하고 싶어 다른 집으로 옮겨가요. 괴롭힌 놈은 아빠이고 존인데, 옮겨가는 건 그레이스이지요. 옳고 그름이나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힘이 있느냐가 중요하게 되는 거지요.

드라마를 보는내내 조마조마 한 것은 그레이스가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 놓인 어린 여성이라는 점이에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을 보호할만한 힘이 적은 인간에게 계속해서 이런 저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요. 무인도도 아니고 창살도 없지만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아빠도, 존도, 정신병원의 의사도, 교도소의 간수도, 심지어 자신의 변호사조차 그레이스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없어요. 그저 찝적대고 섹스를 하려 하고,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비명지르도록 괴롭혀요.

 

한 여성이 살아가면서 겪는 불쾌하거나 괴로운 일을 통계로 만들어보면 과연 몇 건이나 될까요? 집 안은 집 안이라 위험하고, 집 밖은 집 밖이라 위험하고, 가까운 사람은 가까워서 위험하고, 낯선 사람은 낯선 사람이라 위험하다면...언제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숨 쉬며 살 수 있게 되는 걸까요

 

1년 365일 내내 불행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늘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은 거에요. 웃을 때조차 혹시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사랑을 속삭이는 그 순간조차 만약에...라는 기분이 든다면 싶은 거구요. 

그레이스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별 일 아니었다, 장난이었다, 오해였다 등등등. 아빠가 그레이스의 입술을 빨아대던 것도 별 일 아닌 것처럼, 존이 밤에 그레이스의 방 문을 어떻게든 열려고 쿵쾅거렸던 것도 장난인 것처럼, 진찰과 치료를 한답시고 그레이스의 다리를 더듬던 것도 오해인 것처럼 만드는 거지요.  단지 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본인들은 그렇게 믿을 수 있어요. 

 

성욕 때문이었고, 내가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고, 니가 힘 없는 여자라서 쉽게 생각했다고는 인정하지 않겠지요. 

 

되레 그레이스가 유혹한 것이고, 그레이스가 꼬리친 것이고, 그레이스가 과대망상에 빠진 것치고, 그레이스가 원래 행실이 나빠서이게 만들 수도 있구요.  

 

상황이 그렇게 되면 그레이스가 무슨 말을 한들 남들은 잘 믿지 않아요. 믿지도 않을 거면서 말을 해보라고 하고, 이미 자신의 마음에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놓고는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하지요. 

 

그래서 누구의 입장에 서는지, 누구의 말에 귀 기울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에 따라,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세상은 참 다르게 보여요. 그레이스가 의사 조던에게 침대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선생님은 침대를 떠올리면 휴식이 생각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침대라는 것이 절망일 수도 있다고 하지요. 그레이스의 소중한 친구 매리도 바로 그 침대라는 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구요. 

 

침대에 깔려 있는 이불도 마찬가지에요. 누구는 그것이 얼마나 깨끗하냐 예쁘냐라고 하지만 누구는 그걸 매일 손으로 빨고 널고 펴고 하느라 애를 먹는 거에요. 같은 인간이지만 침대 하나 이불 하나에서 다른 걸 느끼는 거지요. 

 

메리가 이런 말도 했어요. 누구는 너무 많이 가지고, 누구는 너무 적게 가진 것이 싫다고. 늘 대접 받으며 살다보면 자신이마치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인간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큰 집에서 요강 한 번 비우지 않고, 바닥 청소 한번 하지 않으면서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으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어요. 늘 그래왔던 것이고, 늘 그래왔던 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침마다 남의 오줌을 변소에 버려야 하고, 허리 굽혀 바닥을 빡빡 문지르며 청소를 해야 하고, 행여 옷에 얼룩이라도 묻으면 그거 지우느라 온갖 용을 써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 상황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게다가 욕을 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몸을 더듬고 억지로 섹스를 강요한다면 그게 어찌 정상(?)처럼 느껴질까 싶어요. 

 

메리가 숲으로 들어가 반란군이 되고 싶어하고, 자유와 억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요. 

그레이스에게는 메리가 있어 참 다행이에요. 그레이스가 처음 하녀 생활을 시작할 때 그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힘들 일을 할 때도 수다와 장난으로 함께 웃을 수 있었지요. 함께 방을 쓰면서 결혼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서로에게 소중한 선물을 건네기도 하지요. 또한 메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남자를 만날 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요. 

 

만약 그레이스에게 메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이가 없어서 외로웠겠지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암담했을 거구요.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에 나오는 레누와 릴라의 관계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나의 삶 속에 깊이 남아 순간순간마다 떠오르는 친구. 지금은 곁에 없지만 왠지 삶의 길을 열어주는 것 같고 용기를 주는 것 같은 친구. 

 

곁에 없지만 함께인 것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