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0년 12월31일입니다. 한해의 마지막날에 <김지은입니다>라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읽는데 힘이 많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말이 어려워서 그런게 아니라...화가 나고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습니다. 이런 책은 책장을 몇번만 넘겨도 벌써 기운이 딸려요. 심장이 쿵쾅거리기도 하고 그래서...
비서가 하는 일들을 쭈욱 적어 놓은 것을 보면서 책에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적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더라구요. 지금이 조선시대라서 왕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도대체 21세기에 이 무슨 짓입니까. 비서라는 업무를 맡은 노동자가 마치 무슨 몸종인 것 같아 정말 어이없더라구요.
이 사건(?)에 대해 몰랐던 게 아닙니다. 저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도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싶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일 줄 몰랐습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다 싶었는데 정말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이래서 저 같은 사람은 계속 배워야 합니다.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에요.
시험을 칠 것도 아니고, 어디 나서서 큰 목소리 낼 것도 아니지만...나 한 사람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합니다.
김지은님,
제가 그 아픔과 고통의 1,000분의 1도 모르지만...힘든 이야기를 꺼내고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앞에 놓고 고맙다고 해도 되는 건지 어떤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응원합니다. 부디 하루빨리 님께서 말씀하셨던 노동자 김지은으로 건강하게 돌아가실 수 있기를 빕니다.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2020
시간이 지나고 수행업무를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안희정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범죄 피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 내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그대로 굳어져갔다. 나중에 알게 된 단어지만, 그것은 '학습된 무기력'이었다.그저 내가 떠안고 살아야 하는 폭탄, 입을 떼는 동시에 나도 함께 폭발해 죽는 뇌관이 내 온몸에 감싸여 있었다. - 14
그러고는 "너는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미투에 대한내 의견을 물었다.
...
"제가 감히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내게서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결국 내 대답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후 안희정은 내게 다시 성폭행을 가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덫을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에게서 나는 옴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비틀려졌다. - 17
근처로 친구가 온다고 했다. 변호사 사물에서 같이 있기로 했다. 선고 전에 친구를 보니 괜히 마음이 놓이고 고마웠다.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 친구도 어제 오늘 내내 나와 같은 상태였다고 했다. 활동가 선생님도 비슷했다고 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고마운 사람들 때문에 내가 지금껏 견뎌왔다는 사실을 오늘 선고일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163
"성폭력 피해가 다른 범죄 피해와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80.4퍼센트가 "다른 범죄와 차이가 있다"고 응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가 비난받기 쉬워서"였다. "주변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와 관련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한다고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피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 알려봐야 너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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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은 성폭력 트라우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주변 반응'을 가장 많이 꼽았다.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 피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질책 어린 시선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사건을 해결해나가야 할 시간에 위로는커녕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에 상처받고, 덧나고 있었던 것이다. - 169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됨을 직접 경험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 170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 무형적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때로는 직급으로 인해, 때로는 성별로 인해, 때로는 나이로 인해, 때로는 조직이나 재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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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 174
모두가 그전에 겪어보지 못한 압박을 받으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지쳐갔지만, 진실을 붙잡고 서로 연대했다. 함께였기에 버틸 수 있었다. 고통을 나눠준 그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가장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다. - 188
적어도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오죽했으면 나왔을가, 혼자 앓다가 죽겠구나 싶으니까 나왔겠지 싶었다고 했다. 또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냐며 미안해했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나를 위로하고 보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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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연락했다고, 우리가 김지은을 잘 아니까 충분히 믿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품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연락을 받으면서 내가 그동안 바보같이만 산 건 아니구나, 다행이구나 싶었다. 일에 파묻혀 잊고 지냈지만 내게도 가족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다. - 190
뉴스를 보다가 '안정화'라는 단어를 보고 안희정인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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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기사만 봐도 내 얘기가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른 뉴스에 사건을 연상시키는 말들, 충남도청, 민주당, 국회의원, 도지사, 러시아, 스위스, 미투 등이 나오면 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연쇄 작용이라는 것은 놀랍다. 찰나에 순간이동을 해 나는 다시 한번 사건을 경험한다. 어느 때는 내 심장이 콩콩콩 뛰는 것조차도 아프고 저리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것 같다. - 220
집 문손잡이를 보면 누군가 벌컥 문을 따고 들어와 나를 해칠 것 같고, 발소리나 사람들 목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올 때면 바짝 긴장해 그대로 불을 끄고 이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불도 켜지 못해 캔들을 켜놓고 살았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했다. 조금 나아졌을 때는 인덕션 위 환풍기 후드의 작은 조명을 켰다 - 222
성폭행 피해자 위니 리의 자전 소설 <다크 챕터>와 이해인 수녀의 시집 <작은 위로>. 보내주신 분의 온기가 책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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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엄마와 같이 책을 읽었다. 엄마에게는 <작은 위로>를 드렸다.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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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항상 내 앞에서, 아빠와 동생 앞에서 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 괜찮다" "괜찮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다 괜찮다" "너만 이겨내면 돼" "너만 아프지 마"라고 말했다. 살면서 늘 모듬 것을 참아왔던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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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아플 텐데 내 걱정만 하는 엄마를 보며 너무 걱정스러웠다. 속병이 나서 아픔녀 어쩌나 염려됐다. 시집을 읽다가 펑펑 소리 내어 우는 엄마를 보니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이 후련했다. 책을 선물해주신 그분에게, 이곳을 빌려 말씀 전하고 싶다. 우리 엄마의 마음을 위로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258
한번은 제가 피고인 눈빛에 대해 후배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정무비서가 된 이후에 그 후배가 제게 "언니가 그때 말했던 지사님 눈빛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지사님이 저를 자꾸 불러요 저를 찾아요"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정무로 가서 지사의 소굴에서 벗어난 건가 생각했는데, 제가 아닌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는데, 그렇게 제가 겪었던 아픔을, 거기서 나오지 못했던 족쇄를 다른 누군가에게 혹시라도 채우게 되는 것 같아서, 제가 그걸 누군가에게 채우게 두는 방관자가 될까 봐 겁이 났고 그게 제 후배가 될까 봐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조건 막아야만 했고, 그게 저의 마지막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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