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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무스탕-랄리의 여름>을 보고

순돌이 아빠^.^ 2021. 4. 1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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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에 <좋은 쿠르드 나쁜 쿠르드>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터키 정부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쿠르드인들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쿠르드인들의 투쟁에 관한 영화가 제게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한국 사회 말고는 잘 모르기도 했고, 관심도 크게 없었던 저에게 세상을 좀 더 넓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그 이후로 쿠르드는 물론이고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번에 본 <무스탕-랄리의 여름>의 배경도 터키이고, 이 또한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점이라면 터키에 사는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아빠가 죽고 할머니와 삼촌이 키우고 있는 다섯 자매의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고 놉니다. 그런데 집에 오니 할머니가 자매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때리기 시작하네요. 남자들한테 아랫도리를 문질렀다구요. 

 

쩝...제가 입으로 옮기기도 거시기한 말입니다. 남자들한테 아랫도리를 문질렀다니요.

 

그 장면을 본 동네 아줌마가 할머니한테 신고(?)까지 한 겁니다. 그 집 손녀들이 남자들하고 어울려 놀고 있다고. 

 

바다에서 첨벙첨벙 하하하 깔깔깔 웃으며 놀았던 것이 그렇게 몹쓸짓이었을까요.

 

아무튼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때부터 단속(?)과 억압이 더 심해집니다. 삼촌은 동네 소문 다 났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소리를 지르구요. 

자매들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옵니다. 또 한판 난리가 나지요.

 

자매들이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할수록 집의 담은 높아지고, 창문에는 쇠창살에 달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점점 자매들의 자유가 사라지더니, 어느날 또다시 큰 위기(?)가 다가옵니다. 바로 결혼이지요.

 

신의 뜻이라고, 축하한다고 하나마나한 소리가 오갑니다. 당사자는 가만 있고 소위 집안 어른들끼리 모여 앉아서 결정을 합니다.

 

상대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성격은 어떤지 등등에 대해 알아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저 아내가 될 여자의 껍데기를 한 두 번 보여주고 나면 결정이 되는 거지요. 

 

당사자가 생각해보고 알아보고 계획해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결정을 하고, 그렇게 결정이 되는 겁니다. 

이 결혼에서 정말 아주 대단히 완전 중요한 것이 여성의 순결입니다. 남성의 순결은 아니구요. 

 

여성이 순결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지 아닌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명 '처녀막'의 존재 여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누가요?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이요. 심지어는 결혼 첫날밤에 섹스를 한 뒤 깔았던 침대보를 보여달라고 가족들이 요구합니다. 피가 나왔냐는 거지요. 피가 나오지 않으면 난리가 나구요. 

 

하지만 일명 '처녀막'이란 게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닌가요. 꼭 섹스가 아니어도 운동이나 다른 이유로 없어질 수도 있는 거구요. 

 

www.huffingtonpost.kr/2017/09/04/story_n_17906840.html 

 

'처녀막' 아닌 '질막'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

사실 '처녀막'은 틀린 말이다. 여성의 성관계 여부와 '처녀막'으로 불리는 여성의 신체 부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처음 이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www.huffingtonpost.kr

그러니까 여성이 결혼전에 다른 남성과 섹스를 했는지 아닌지를 너무 너무 너무 킹왕짱 억수로 중요하게 여기고,

그걸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증거(?)를 가지고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하는 거에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일명 '처녀막'이라는 것의 존재 여부를

결혼식을 하자마자 섹스를 한 뒤에 침대보에 뭍은 피를 통해

다른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떠들썩하게 공개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고 있는 거구요.   

 

여성이 남성과 남성이 속한 가족의 번식욕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출산 도구인가 싶어요.

이런 식의 결혼이라면 결혼이란 게 출산 도구를 획득하는 떠들썩한 과정인가 싶구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부족일까요?

여성의 삶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고집일까요?

 

집단적인 편견과 무지 속에

안심하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당황하며 분노하기도 하는 건가요?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고, 순결을 지키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남자들을 만나지 않아야겠지요

그러려면 사회 활동이나 여러가지 인간 관계를 차단해야 할 거구요

그게 아니면 아예 집에만 머물도록 해야겠지요. 

집에만 있지 않으려 하면 쇠창살을 만들어서 가둬야 될 거구요.

 

쇠창살은 실재하는 물리적인 쇠창살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성의 다양한 활동과 만남, 참여를 제한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을 거구요.

그렇게 그렇게 해서 여성이 집에만 있게 되었다고 치지요.

그러면 집과 가족은 여성들에게 안전하고 믿을만한 것인가요

 

이 다섯 자매에게 물리적 정신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매들에게 차례로 성폭력을 행사한 놈이 바로 삼촌입니다. 할머니도 삼촌이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구요. 

 

가장이자 남성이자 

순결, 몸가짐, 가족, 명예를 그토록 강조하던 바로 그 삼촌이 자매들을 학대하고 괴롭혔던 거지요.

 

news.v.daum.net/v/20201126181358737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 "아버지가 죽어도 기억은 지워지지 않아요"

[경향신문] 명아(가명)는 울 수 없었다. 울면 쫓겨났고, 무엇보다 어린 명아는 가족을 잃는게 무서웠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1년간 학대와 성폭력을 일삼던 아빠는 명아에게 최고의 존

news.v.daum.net

이런 상황을 대하는 다섯 자매의 모습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누구는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창문을 넘기도 하지요

누구는 체념한듯 남들이 하라는대로는 맞추려고 하구요.

그리고 에체의 모습은 많이 안타깝습니다.  

 

과자 같은 것을 마구 먹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위험한 섹스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쾅! 소리와 함께 자살을 합니다. 

 

누가 에체를 죽였을까요

무엇이 에체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을까요

여성스러움이나 여자의 운명이란 것이 결국은 자포자기 아니면 자살인가요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자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건 막내 랄리 때문입니다.   

 

랄리는 이 모든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언니는 이런 결혼을 하고 싶냐고 묻는 겁니다.

 

생각을 해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겁니다. 이어 탈출(?)/ 새출발(?)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당장에 삼촌과 가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하니 운전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항하고 도전합니다. 삼촌이 가만두지 않겠다고, 죽여버리겠다고 해도 무시하고 집과 가족을 떠나버립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지만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다른 길을 찾는 거지요. 길을 찾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니 손을 붙잡고 실제로 다른 세계를 향해 떠나는 거에요.

어린 아이들이 집을 떠나면 어떻게 되겠냐구요?

 

어린 아이들이 집에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삼촌은 이들에게 성폭력을 가할 거고, 할머니는 그 사실을 감추며 얼른 누군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겠지요.

 

그렇게 시작된,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시작한 결혼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듯 시작된 결혼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남들이 하던대로, 오랜 세월해왔던 대로 한다고 기쁨과 행복, 안전과 평안이 저절로 주어지나요

 

랄리와 언니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알 수 없고 불안한 세계이지요. 하지만 그 길이 처음에는 어렵고 낯설고 두려워도 조금 지나면 오히려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될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몸과 마음에 온갖 병을 짊어지고 사느니 차라리 위험한 도전을 통해 더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어느 누구도 미래의 일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해 놓고 살진 않습니다. 어느 정도만 계획하고 나머지는 그때 그때마다 살펴보고 선택하고 행동하며 풀어가는 거지요. 

인간은 왜 자유로워지려 하는 걸까요? 많은 위험이 따르고 때로는 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워지려는 성향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뇌속에는 자유와 관련된 신경세포들이 있는 걸까요? 

 

진화의 과정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개체가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 생존에 더 유리했을까요? 

 

인간이 왜 자유를 추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건 랄리와 같이 많은 인간들이 속박이나 억압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감정이나 생각에 따라 살기 위해 생각하고 노력하고 도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지, 그런 용기, 그런 태도가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구요.

 

youtu.be/HoO7pHDAjeY

랄리와 그의 자매들이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의지하며 살던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랄리가 언니들과 함께 나눴던 즐겁고 따뜻하고 포근했던 그 시절이 그의 마음에 남아 

힘겹고 불안한 순간들을 이겨내고 그 맑고 밝은 웃음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호기심 많은 

깊은 눈빛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