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파르바나-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인데, 다 보고 나니 눈물과 함께 '생명력'이라는 말이 떠오른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공간으로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시간으로 보면 탈리반이 지배하고 있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탈리반이요? 싸가지라고는 밥말아 쳐먹은 놈들이지요. 이슬람이나 무슬림이라고 해서 모두 탈리반 같지는 않아요. 이슬람 세력 가운데서도 아주 멀리 나간 놈들이지요.
2001년 미국에서 9.11이 일어나고, 미국은 아무 관계도 없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요. 그러곤 카불에서 탈리반을 몰아내지요. 싸가지 없는 것들끼리 싸움을 벌여서 한 놈이 쫓겨난 거지요.
이 영화는 주로 여성들의 삶에 촛점을 맞췄어요. 그리고 장면 하나 하나에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이 겪었던 수많은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아빠가 파르바나에게 들려주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이야기도 그렇고, 아빠가 왜 다리를 잃었고 오빠가 왜 죽었는지...길거리에 널려 있는 불탄 자동차. 그리고 탈리반에 지배하기 이전에는 엄마와 아빠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최근 수 십 년 동안만 봐도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요. 소련과의 전쟁, 여러 군벌들의 전쟁, 탈리반과 미국의 전쟁. 그리고 지금도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탈리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IS를 비롯한 여러 무리들이 곳곳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imnews.imbc.com/replay/2021/nw1200/article/6173050_34908.html
탈리반이 지배하기 전과 후, 여성들의 삶만 비교하면 탈리반 지배 이전이 훨신 자유로웠을 겁니다. 직업도 가지고 학교도 다니고 그랬지요. 하지만 탈리반이 지배한 이후에는 직업도 잃고 학교도 갈 수 없었지요. 여성은 집에만 있으라는 게 탈리반의 주장이었으니까요.
그나마 거리를 다니려면 부르카라는 그야말로 온 몸을 가리는 천을 쓰라고 했습니다. <파르바나>에도 보면 파르바나의 엄마가 부르카를 쓰고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지는 장면이 있지요.
부르카를 쓰면 다닐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여성은 혼자 거리를 다닐 수 없고 반드시 남자와 함께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남자는 애인이나 친구는 아니고 반드시 가족이나 친척이어야 하지요.
파르바나의 경우처럼 집에 함께 밖으로 나갈 남자가 없고, 먹을 것도 물도 떨어졌을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굶어야 하나요? 아니면 파르바나의 엄마가 그랬듯이 집에 있는 큰 딸을 다른 사람에게 사정(?)해서 결혼시켜야 할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할까요?
파르바나의 선택은 오빠의 옷을 입고 남자아이인 것처럼 해서 집을 나서는 겁니다. 남자아이처럼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서야 쌀이며 빵을 살 수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남장을 하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수는 있지만, 물건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여성의 모습으르는 직업을 가질 수도 물건을 사고 팔 수도 없어서 남장을 했지만, 어린아이가 돈을 벌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파르바나는 남이 집에서 물건을 날라주기도 하고, 가지고 있던 옷을 팔기도 하지요. 이 과정에서 라자크라는 한 탈리반 대원을 만납니다. 이드리스라는 놈이 폭력과 신념에 집착하는 것에 비해 라자크는 다른 사람의 곤경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파르바나가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지요.
남자건 여자건, 이슬람이건 기독교건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가진 풍성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느냐겠지요. 다른 사람이 슬프고 아플 때 안타까워 하고 도움주려 하는 마음일 거구요.
라자크는 파르바나가 만났던 남자들 중에 유일하게 파르바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녀에게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죽을 수 있는 큰 위험을 겪기도 하지요.
파르바나는 친구와 약속을 해요. 20년쯤 뒤에 어른이 되고 나서 바다에서 만나자구요. 아직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뿐만 아니라 생명력을 느낀 것은 파르바나 때문이에요. 그냥 보면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에요. 집 밖을 나설 수도, 일을 할 수도, 물건을 살 수도, 돈을 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무얼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파르바나는 가만 있지 않아요. 집을 나서고, 일을 하고, 물건을 사고, 돈을 벌어요. 동생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혼자 아빠를 찾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기도 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많은 것을 하는 거지요.
파르바나 뿐만 아닐 거에요.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와 평화를 노력하고 있을 거에요.
쉽지 않고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맞아요. 탈리반이 지배하는 것도 힘들고, 그렇다고 미국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폭탄을 퍼붓는 것도 힘들어요. 2021년 9월까지 미군이 떠난다고 했으니, 그럼 앞으로 또 정부군과 탈리반 등등 사이에 어떤 전쟁이 벌어질까 걱정도 되지요. 탈리반이 세력을 넓힐수록 여성들의 자유가 박탈당할 거라는 우려는 당연한 것일테구요.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느 하나의 요인으로 현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닐테구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변화를 위해, 새로움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응원하는 것이네요.
많은 시간이 걸리고
험하고 거친 과정일지라도
그들의 삶에 희망과 빛이 가득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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