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이 쓴 <빌러비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미국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보면 백인 주인의 강간, 학대, 강제노동 등을 피해 도망가는 흑인 노예들이 나옵니다. 노예가 도망가면 주인과 사냥꾼은 이들을 쫓아 다시 잡아오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노예가 노예인 이유는 그들이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서가 아니겠지요. 자유인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니까요.
노예가 노예인 이유는 그들이 물건처럼 사고 팔릴 수도 있으며, 섹스든 밭일이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고, 주인이 그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에게는 누구와 함께 지낼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살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노예일 겁니다.
나는 더이상 두들겨 맞고 싶지도 않고 강제로 고된 노동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면 그냥 주인한테 가서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거야'라고 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 건 자유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노예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몰래 탈출을 감행해야 하고, 탈출 뒤에도 언제 주인이 찾아와서 자신을 죽이거나 다시 끌고 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합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0028.html
'자유'가 무엇인지, 그 사회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떠나 글자만 보면 스스로 자自, 말미암을 유由입니다. 스스로에게 그 까닭, 그 이유가 있다는 거지요. 니가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내가 이러고 싶고, 내게 이런 저런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영화 <인비저블맨>을 보면 여자 주인공이 남편의 학대를 피해 집을 떠납니다. 그런데 남편은 투명인간이 되어 이 여자를 괴롭히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까지 죽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자신에게 복종하고 자신이 시키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과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기를 원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 남자가 원하는 일이지 그 여자가 원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은 남자의 곁을 떠나 새롭게 직장도 얻고 집도 얻고 이제는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겁니다.
언제 누구와 만날지, 언제 누구와 헤어질지는 그 여자가 결정할 일입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바램을 표현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것을 넘어 강요하고 협박하며 폭력까지 행사한 거지요.
여자의 자유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여자가 복종키를 요구했던 겁니다. 여자가 이제는 놓아달라고 했지만, 여자를 지배하려는 욕망과 행동을 멈추지 않았던 거지요.
지금 제 피아노 앞에는 유재하의 <그대 내 곁에> 악보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유재하의 여러 노래를 들었구요.
유재하가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많은 것은 만남과 이별에 관한 것입니다. 만남과 이별의 설레임, 따뜻함, 아쉬움, 애틋함 등이지요.
그리고 그런 설레임이나 따뜻함은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우리 자신 각자가 느끼는 것일 겁니다. 그 누가 우리에게 만남과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애틋함을 억지로 느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재하가 표현하는 사랑에 관한 감정과 생각들은
자유인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노예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저절로 떠오르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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