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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희, <국도극장>을 보고

순돌이 아빠^.^ 2022. 4. 17. 09:49

 

박중훈과 안성기가 나왔던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여러번 봤어요. 88년도 가수왕의 영광을 가슴에 안고 어두운 허세나 부리던 최곤이 점점 밝고 따뜻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좋더라구요. 서울과 영월이라는 장소를 달리하면서.

 

<국도극장>의 기태도 서울서 살다가 고향 벌교로 내려와요. 기태도 최곤처럼 서울로 ‘올라’갔었지만, 지방으로 ‘내려’온 셈이지요. 기태도 최곤처럼 ‘내려’ 와서 좀 더 밝고 삶의 따뜻함을 느끼는 인간으로 변해가요.

 

영화에서 서울 이야기가 여러번 나오는데,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저는 알 것 같아요. 아마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부산에 살 때 서울이라고 하면 뭐랄까…왠지 저 높은 건, 뭔가 근사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덕수궁 돌담길 하면 정말 운치 있을 것 같고, 인사동에 가면 수천년의 세월이 담겨 있을 것 같고 그렇더라구요.

 

그러다 어째저째 서울에서 살게 되었죠. 저도 기태처럼 뭔가 새로운 것, 더 멋진 것을 해 보려고 서울로 ‘올라’ 갔던 거죠. 

 

근데…덕수궁 돌담길? 서울시립미술관 갈 때 그냥 지나치는 정도? 인사동? 외국에서 손님이 와서 기념품 사고 싶다길래 데리고 가는 정도? 광화문 네거리? 별 거 없는데도 밥값은 왜 이리 비싼지 ㅋㅋㅋ

 

<국도극장>에서 오씨 아저씨가 물었죠

 

서울이 문젠거여? 니가 문젠거요?

부산에 살 때는 여름에 해운대에 안 갔어요.겨울이면 몰라도. 여름에는 너무  복잡하고 지저분하니까요. 서울에 살 때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기왕이면 광화문이고 종로고 나가기 싫더라구요. 시끄럽고 사람 많아서 ㅋㅋㅋ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막상 지내보니 별 거 없더라구요. 그렇다고 나쁘다거나 의미 없다 그런 건 아니에요.

 

확실한 건 서울이 부산보다 크고, 사람도 많고, 뭔가 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많다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건 서울이 크다고 해서 내가 저절로 커지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많다고 해서 나한테 그 기회가 냅다 달려드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

뭔가 특별한 게 있고, 나는 다르게 살 거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사람 사는 거 그게 그거인 것 같아요. <라디오 스타> 최곤이 과거의 영광을 가슴에 안고 살지만, 현실은 그저 그런 한물간 가수이거나 흔한 아저씨일 뿐이듯이 말이에요

 

저야 뭐 가슴에 안고 살 과거의 영광도 없고 그러니 더더욱 그냥 평범한 아저씨가 되었네요. 흰머리가 느는 속도에 맞춰서 배가 튀어나오는 ㅋㅋㅋ

 

<국도극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 햇살 받으며 담배를 피우는 오씨 아저씨의 모습이 꼭 저 같아요(전 담배를 피우진 않지만). 게다가 재떨이가 동원 참치 깡통인 게 너무 재밌어요. 

평범하게 보인다고 해서 누구나 똑같다는 건 아니에요. 남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 오씨 아저씨의 인생도 있고, 여러해 동안 서울에 살면서 외로웠다는 기태의 인생도 있고, 어두운 술집에서 노래하는데 지쳐 서울로 오디션보러 다니는 영은이의 인생도 있지요. 

 

다만 인생이란 게 이런저런 사연은 많지만 특별히 누가 더 잘났거나, 누가 더 못났거나 하는 거는 없는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남들한테 큰 소리치던 전두환도 죽음을 향해 호통치며 쫓아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 돈 많던 이건희도 영원한 삶을 돈으로 살 수는 없었지요. 

 

어제 테레비에서 영화 소개 프로를 보는데 새 영화 소개하면서 산드라 블럭이 나오더라구요. 키아누 리브스하고 <스피드>에 나왔을 때하고는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구요. 아무리 유명해도 세월은 정말…

하루에 열끼 먹는 사람 없어요. 열끼는커녕 이제는 맛있는 것도 조금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되고 더부룩해서 힘들어요. 아무리 예쁘고 잘생긴 배우가 테레비에 나오면 뭐해요. 눈이 침침해서 얼굴을 똑똑히 볼 수도 없는데 ㅋㅋ

 

그렇다고 영은이처럼 새로운 것을 찾아 서울로 ‘올라’가고, 뭔가를 향해 도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에요. 그건 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거지요. 저도 기회가 되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구요.

 

서울에서 노래를 하든 벌교에서 극장표를 팔든 그저 각자의 인생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지 싶어요. 

 

서울에서 법대 나와 지금은 국도극장에서 표를 팔고 있는 기태나, 고등학교를 나와 지금은 차를 팔며 돈을 잘 벌고 있는 상진이나 다 그냥 하나의 인생인 것 같아요. 

영화 전반에 흐르는 화면의 밝은 빛이 참 좋더라구요.

 

벌교에서의 시간이 흐르면서 기태의 표정도 그렇게 점점 더 밝아져요. 영화 초반에 보였던 어둡고, 좌절한 듯한 표정이 조금씩 사라지는 거지요. 다른 사람에게도 날이 서 있고, 뭔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애쓰던 모습도 없어지고 하나 둘 친근하고 편안한 사람이 되어가요.

 

오씨 아저씨가 그랬듯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영화관에서 일을 하면 어때요. 엄마가 두고 떠난, 리모콘도 고장난 낡은 테레비 앞에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면 어때요. 

 

영화관 앞 길바닥에 핀 노란꽃이 좋고, 멀리서 보내온 영은이의 사진을 보며 행복할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싶어요. 

 

평온한 마음으로 웃으며 살 수 있으면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https://youtu.be/PL5t6P3W6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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