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정말 멋지고 훌륭한 영화였어요. 수많은 장면 장면들이 나오는데 하나 같이 좋더라구요. 영화 시작하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제 입에서 절로 말이 나왔어요.
아~~~ 영화 너무 좋은데!
부르주아를 동경하는
부모도 없이 어릴 때부터 가난한 노동자로 살았던 마틴이 부르주아들의 삶을 동경한 것을 보면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닮은 면도 있어요.
가난과 폭력, 비난과 조롱이 넘쳐 나는 삶에 비해 그들의 삶은 고요하고 안정되며 예의도 있고 우아하기까지 보이니까요.
저라도 그랬을 거에요. 부르주아들이 보여주는 뭔가 근사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삶이 부러웠을 거에요. 마틴이 엘레나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고 했듯이 말이에요.
엘레나가 피아노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해요. 마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신비로운 세계지요. 저라도 마틴처럼 혹 했을 거에요.
저의 10대, 20대에도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뭔가 고상하고 뭔가 나와는 다른 세계 같고 뭔가 저 높은 분들이 즐기는 것 같았으니까요. 근데 내 눈 앞에서 예쁜 여자가 피아노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한다? 심장이 쿵쾅거렸겠지요 ㅋㅋㅋ
물론 지금은 클래식 음악이라고 해서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해요. 하루종일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생활하고, 피아노로 음악을 공부하고, 많지는 않아도 한번씩 연주회에 가기도 하지만…
클래식 음악이라고 뭐 별거 있겠어요? 클래식이든 실용음악이든 국악이든 재즈든 각자의 음악이 있고 각자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만인 거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가 그 사람의 높낮이를 드러내는 거는 아니잖아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이해심이 많고 착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것들을 동경할 수는 있는데, 동경하는만큼 뭔가 특별한 거는 없지 싶어요. 스테이크를 썰어 먹든 돈까스를 뜯어먹든 그게 그거잖아요 ^^
마틴이 엘레나 집에 있던 그림을 보며 이런 말을 하죠.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니 얼룩처럼 보여요
부르주아와 환멸
환멸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가졌던 기대나 이상, 꿈 등이 깨어질 때 느끼는 실망감이나 허무감
마틴이 가졌던 게 부르주아에 대한 동경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배우고 싶고, 알고 싶고, 책을 읽고 싶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있었던 거지요. 게다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구요. 그 능력을 바탕으로 부르주아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동경하던 부르주아의 삶이지만…결국 마틴이 환멸을 느낀다는 거에요.
그들처럼 문법에 맞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보들레르도 알게 되었고, 좋은 옷도 입게 되었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비서도 둘 수 있게 되었지만…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이의 갈등이나 대립의 측면을 보면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과도 닮은 것 같아요.
사회의 한 켠, 그러니까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은 근사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거드는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조금씩 입에 넣고 씹어 삼키지요. 우걱우걱 소리내어 먹지는 않아요.
정부가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해요.
뭐 이렇게 좋은 얘기도 할 줄 알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기부를 하거나 도울 줄도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누리는 그 호화로운 생활의 물질적 기반이 어디에 있냐는 거에요.
<제르미날>에서 보는 것처럼 어둡고 덥고 위험한 곳에서 숨을 허덕이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바탕인 거지요. 그들이 그렇게 졸라 검댕이 묻혀 가며 일을 한 결과로, 부르주아들은 깨끗하고 하얀 식탁보 위에서 밥을 먹고 근사한 파티를 열 수 있는 거지요.
마틴은 두 세계를 모두 경험했어요. 한 사회 안에 공존하나 화합하기는 어려운 두 세계인 거지요. 새끼들 먹이려고 식료품점 주인에게 사정 사정 해서 외상으로 빵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고, 그 곁에 마틴이 동경했고 엘레나가 살고 있는 그 세계가 있는 거지요.
물론 그들도 자유와 인권을 얘기하고, 봉사와 복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 세계의 물질적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왜 가난한 자들이 그토록 악다구니를 쓰며 소리를 치는지에 대해서는 모른체 하거나 애써 무시하려고 하지요. 자본가이든 판사든 마찬가지에요.
누군가 이 사회가 큰 문제를 안고 있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하면 어이 없어 하고, 화내고 공격하려 들지요.
평소에는 고상한척 우아한척 하다가 자신의 이익이나 힘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법이든 폭력이든 휘둘러 대는 게 부르주아들이고 지배자들이지요.
부르주아들은 악마이고 노동자는 천사냐?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그 사람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지가 그 사람의 인성을 말해주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누리고 익히고 행동해 왔던 것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엘레나가 그토록 마틴을 잊지 못해 찾아와 놓고는 마틴이 ‘빌어먹을’이라고 한 마디 했다고 정색을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집단과 개인
옛날 옛날에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차인표가 무슨 사장인지 상무인지 암튼 부르주아이고, 신애라가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던 것 같아요.
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계급적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다는 뭐 그런 얘기로 가득해요. 아마도 노동자들에게 우리도 부르주아처럼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거나, 아니면 드라마 속에서나마 팍팍한 현실을 잊고 근사하게 신분이 상승하는 꿈을 심어주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암튼 신분이나 계급이 다르고, 서로가 보고 듣는 게 다르고, 만나던 사람이 다른 데 사랑에 빠졌다고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방향으로 개인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라…글쎄요…
이재용이 최저 임금 인상을 주장할 날이 올까요? 집단에서 벗어나 개인은 어느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엘레나가 마틴과 함께 하기 위해 부모와 가족도 버리겠다고 하지만…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부르주아들과도 어울리고 사회주의자들과도 어울리는 루스라는 인물이 나와요.
부르주아들을 보면서 한심해하고 따분해해요. 사회주의자들과도 어울리지만 뜻이 꼭 맞는 건 아니에요. 이 집단에 속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고, 저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개인인 거지요.
영화에 보면 붉은 깃발을 든 사회주의자들과 검은 깃발을 든 아나키스트들이 나와요. 저는 살면서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할 때도 있었고, 아나키스트들을 지지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마틴이 사회주자들 앞에서 개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어느만큼 공감이 되더라구요.
계급의 문제와 집단적인 저항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개인의 마음 상태나 윤리적 실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함께 모여 힘을 쓰면서도, 그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생동감 있게 살아 있으면 하는 거지요.
머물 곳 없는 곳에서 머물기
작가로서 자신을 표현하고도 싶고, 부르주아들처럼 살고도 싶지만, 또한편 부르주아들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틴.
이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마틴.
가난한 작가 시절,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하숙집 아줌마가 함께 살자 해도 돌아가지 못하는 마틴.
그리고 어느새 시작된 전쟁.
마틴은 어느 곳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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