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하여 죽음의 의미는 바로 삶 속에 있고 오직 삶의 가치를 알아야만 비로소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모두 인간관계 속에 있으며, 너와 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 있다. 이 관계 자체가 바로 본체이고 실재이며 진리이다. ‘새나 짐승과는 함께 무리지어 살 수 없다. 이 사람들이 아니라면 내가 누구와 함께 살겠는가?’라고 함은 자기가 인간이라는 중족에 속함을 자각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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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초월적 본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마치 캉유웨이가 세운 공자교를 장타이옌이 공격하면서 말한 ‘국민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성격으로 볼 때 그들이 관심을 기울여 관찰하려는 것은 정치적인 일과 일상생활에 있으며, 힘쓰는 곳은 공업, 상업, 농사일이며, 지금 살아 있는 것들에 극진하게 하는 데 뜻을 두어야 하고 경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으며 또한 체體와 용用은 둘이 아니다는 의미의 체용불이와 같다. - 592
- 리쩌허우, <중국고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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