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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일 하네케, <하얀 리본>을 다시 보고

순돌이 아빠^.^ 2022. 9. 7. 12:11

 

정말 묵직하고 훌륭한 작품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으면서도 섬세하다고 할까요

 

마음이 좀 무거워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다 보니…

 

시골 또는 농촌

 

영화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독일의 어느 시골 마을입니다. 

 

시골이나 농촌을 떠올리면 낭만과 여유, 인간적인 정情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 넓은 자연의 모습들.

 

그리고 그곳에는 또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영우를 괴롭히는 학생들과 싸우는 동그라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아빠가 영우를 시골 학교로 전학시킵니다. 영우에게 장애가 있다고 학교 애들이 괴롭혀서요. 도시보다는 낫지 않겠나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농촌 지역이라고 해서 괴롭힘이 없는 게 아니지요. 

 

도시도 농촌도 다 사람 사는 데다 보니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는 거지요.

제게 농촌이라고 하면 지금은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에게 할머니는 말 그대로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입니다. 

 

저녁 무렵이면 일하고 돌아오신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습니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평상 위에 앉아 된장찌개를 먹었던 기억이 제 삶의 큰 평온과 행복의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 고모가 그러더라구요. 

 

난 너거 할머니가 참 원망스럽다. 그놈의 아들, 아들. 늘 아들 타령만 하더니…

 

저에게는 살짝 충격이었습니다. 그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할머니는 말 그대로 언제나 푸근한 시골 할머니일 뿐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묻지 않았고, 말씀하신 적도 없네요. 8남매를 낳고 키우고 농사에 집안일까지 하시며 사시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얀 리본>에서처럼 할머니 살던 마을에도 온갖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할머니도 온갖 것을 겪고 보고 들으셨을 건데…

 

그러보 보면 결국 중요한 것은 도시냐 농촌이냐 보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겠지요

 

집과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

 

영화는 14살 안나의 아빠가 말을 타고 가다가 떨어져서 부상을 입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안나의 엄마는 죽었어요. 그리고 어린 동생이 있는데 안나가 마치 엄마처럼 동생을 돌보며 삽니다. 

 

의사인 아빠는 대단한 난봉꾼입니다. 엄마와 섹스를 하면서도 옆집 여성과도 관계가 있지요. 

 

섹스만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인성도 XXX입니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진짜 XXX입니다.

아빠는 옆집 여성과의 관계도 모자라 안나에게 성폭력을 행사합니다. 심지어 동생이 그 장면을 목격 하구요. 

 

엄마가 죽은 가족 안에서 여자 아이가 엄마가 했던 음식 만들기, 청소하기, 아이보기 등등의 역할을 떠맡게 된 거지요. 게다가 아빠의 성욕 해소를 위한 도구의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도 안나는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든 가족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jtbc

집과 가족이라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고 잘 모르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게 과연 안나의 일이기만 한 걸까요? 

 

남들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설사 겨우 말을 한다 해도 믿지 않는 경우는 없을까요? 아이는 어리고, 아빠는 의사인데…아빠인 의사가 적당한 말들로 둘러대면 있었던 일이 없던 일처럼 되는 건 아닐까요.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렵다고 알면서도 모른 척, 들었으면서도 안 들은 척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일을 겪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한 인간의 삶과 마음에는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아빠가 타고 달리던 말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줄에 걸려 넘어진 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의사가 늘 다니던 길에 줄을 매어둔 건 안나일까요, 아니면 안나의 얘기를 들은 다른 친구일까요? 

 

계급과 분노

 

한 소작농의 아내가 남작이 소유한 제재소에서 일을 하다 사고로 죽습니다. 

 

아들 : 위험한 일이었어요.

아빠 : 그래서 어쩌려고? 남작을 고소해? 아니면 관리인을 죽일까? 낫으로 목이라도 베어 봐라. 네 엄마가 돌아오진 않아. 

아들 : 엄마를 사랑하셨잖아요.

아빠 : 닥쳐! 

 

아빠는 남작에게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당장에 땅과 일자리를 빼앗기고 나머지 자식들이 굶주릴 거라 합니다. 그러니 참을 수밖에 없다는 거겠지요.

 

갑자기 엄마를 잃은 아들은 그런 아빠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렵구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하다 사고로 죽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를 잃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작농 가운데 누군가 남작의 아내나 아들에게 조그마한 상처라도 입혔다면 아주 큰일이 나겠지요. 

 

똑같은 인간인데 속한 계급이 다르기 때문에 분노가 쌓여도 참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거지요. 

 

계급과 힘의 차이 때문에 억눌리고 쌓여가는 분노. 

 

순수함과 편협함

 

영화 포스터에 보면 마르틴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빛. 

분노, 모멸감, 수치심, 원망…

 

마르틴의 눈빛과 눈물이 이 영화의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르틴의 아빠는 교회 목사입니다. 엄격한 표정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대합니다. 그리고 순수함을 내세우며 하얀 리본을 달도록 하지요. 

 

마르틴에게도 성욕을 억제하라며, 심지어는 침대에 두 손을 묶어 두기도 합니다.

왜 성욕을 무조건 억제해야 하나요? 성욕을 무조건 억제한다고 그게 되나요? 

 

성욕을 실현/해소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어서 문제인 것이지 성욕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죄악시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그런 목사 본인은 성욕을 억제하나요? 자신이 성욕을 억제했으면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지는 않았겠지요. 

 

성욕은 성性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욕慾망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계속해서 억누르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목사와 같이 언제나 굳은 표정의 딱딱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인간이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기쁨도 얻고 만족감도 얻고 실패도 맛보고 그러는 거니깐요. 삶의 활력이나 생기도 얻게 되는 거구요.

목사의 큰 딸 클라라가 아빠가 기르던 새를 죽입니다. 그것도 목사가 보라고 십자가 모양으로.

 

새는 아무 잘못이 없기 때문에 클라라가 새를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클라라는 왜 가만있는 새를 죽여서 아빠가 보도록 전시했을까요. 마르틴의 눈빛과 함께 클라라 행동에 저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클라라의 평소 행동은 남들이 보면 정말 반듯하고 나무랄 데 없는 목사 집 장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늘 아빠한테 두들겨 맞고, 동생과 친구들 앞에서 모멸감을 느끼고 있지요.

 

두들겨 맞고 모멸감을 느끼며 자라온 인간이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갖게 될까요.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 탐구하는 <마인드 헌터>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범죄자들을 인터뷰를 합니다.

 

그리고 범죄자들은 자신이 어릴 때 어떻게 학대를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학대를 받았다고 해서 남들을 괴롭히는 게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대를 받으며 자랐지만, 대부분은 그들처럼 살인을 하거나 강간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이 살인자나 강간범이 되는 과정에서 학대가 미치는 영향입니다. 

 

학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나, 살인자가 학대를 받으며 살았을 가능성은 있는 거지요. 학대를 받으면서 심리 상태나 행동 패턴이 변했을 수 있구요.

 클라라는 자신을 괴롭혔던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아빠는 자신보다 힘이 세니까 직접 맞서 싸울 수는 없고, 대신 아빠를 괴롭히기 위해 아빠가 소중하게 여긴다 싶은 새를 죽였던 건 아닐까요. 

 

나를 괴롭혔던 강자에게는 저항하지 못하고 대신 약자를 공격하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마르틴이나 클라라가 겪었던 일이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훨씬 많은 독일인들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었다면. 

누군가 장애를 가진 칼리를 공격해서 칼리가 크게 다칩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하루는 동네 아이들이 칼리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학교 선생이 아이들에게 여기서 뭐하느냐고 물으니 아이들은 칼리가 걱정돼서 그런다고 합니다. 선생은 그런 아이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칼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이 이상했습니다. 칼리의 장애 때문에 아이들은 평소 칼리를 무시했으니까요

 

나치 독일은 유대인만 죽인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죽였지요. 왜 그랬을까요? 왜 히틀러뿐만 아니라 많은 독일인들은 그런 일에 동조하거나 참여했을까요?

목사와 같은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말고는 모두 배척하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쉽게 폭력을 휘두르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인물이지요.

 

그런 인간들 곁에서 학대받고 무시당하며 분노와 공격성을 키운 아이들이 자랍니다.

 

목사가 순수를 내세웠듯이 나치 독일 또한 순수를 내세웠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세균이고 바이러스고 쓰레기라고 했지요. 제거해야 하고 무찔러야 된다고 했구요.

 

순수함을 내세우는 것과 타인에게 편협한 것은 때론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겠지요.

분노와 공격성을 잔뜩 품고, 누군가를 죽이고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도 품고 있던 인간들 앞에 쓸어버려야 할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나 적을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게다가 그 바이러스나 적이 나보다 약한 존재라면. 

 

또한 권력을 가진 자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규율이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너무 익숙하다면. 

 

귀싸대기 날리고 발로 걷어차고 온갖 욕을 퍼붓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여겨왔다면.

 

한 개인과 온 나라

 

영화 도입부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말하려 합니다. 이 나라의 일까지도 설명할 수 있거든요

 

인구도 그리 많지 않은 시골 마을의 이야기로 이 나라의 일까지도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국일보

<하얀 리본>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7년 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힘을 키워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 1939년이구요. 히틀러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일인이 온갖 나쁜 짓에 참여하거나 동조합니다. 

 

혹시 영화 속 아이들이 자라 나치 독일의 바로 그 독일인들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영화 막바지에 남작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렇게 악의와 시기심, 무관심과 폭력이 가득한 이곳에서 애들을 키우기 싫어요

학대와 협박, 뒤틀린 복수…전부 지쳤어요

 

어떻게 나치가 그렇게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에 참여했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가지는 그들의 심리 상태나 행동 패턴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입니다. 

 

그리고 그 심리나 행동은 그들이 자라온 환경, 그들이 겪어온 인간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건 아닐까 싶구요.

만약 그런 가족/사회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면 반대의 길 또한 존재할 거라 생각합니다. 

 

목사의 새가 죽자 꼬마 아들이 자신이 아끼고 키우던 새를 아빠에게 가져옵니다. 

 

목사 : 이게 뭐지?

아들 : 핍시 대신이에요. 슬프시잖아요.

 

늘 무뚝뚝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목사의 목소리가 이 순간 잠깐 떨립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거겠지요.

 

아이의 행동은 놀라운 일입니다.

 

첫째, 아빠가 키우던 핍시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둘째, 아빠가 그 때문에 슬플 것을 알아야 하고

셋째, 아빠를 위해 무언가 하려는 마음이 생겨야 하고

넷째, 아빠가 새를 잃었으니 다시 새를 가지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야 하고

다섯째,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것을 포기해야 하고

여섯째, 내가 새를 드렸을 때 혹시나 아빠가 좋아하지 않거나 되레 화를 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이겨야 하는 등등의 과정을 거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라고 목사한테서 많은 사랑과 관심과 격려를 받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아이는 다른 존재의 마음을 살피고, 그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행동까지 합니다. 

어두운 쪽이라고 하면 이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온 나라에 퍼져 있을 거라는 거지요.

 

밝은 쪽이라고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친 새를 데려와 치료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아이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어두움만은 아니고

 

어두움 곁에 

밝음이 있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