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회심리학자들은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기저에 깔려 있는 심리작용/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사회심리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던 Kurt Lewin은 ‘훌륭한 이론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겼고...이 말에는 도심의 폭력이나 인종편견 같은 극히 어려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에 내재된 인간의 본질과 사회적 상호작용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역동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 Elliot Aronson, <사회심리학>
사랑 많은 인간이 사랑 많은 인간을
이 드라마에서 제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등장 인물들의 모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른 무엇보다 사랑과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먼저 온조입니다.
뭐랄까…이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가 더 안정되고 평화로워질 것 같은 사람입니다.
싸움을 잘해서 좀비들을 물리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지요.
그렇다고 곧바로 안정이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구요.
0에서 +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할 겁니다.
그 +가 어떤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온조 같은 사람이고, 온조의 말이나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온조는 평소에 그리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닙니다. 남라처럼 전교1등인 것도 아니고, 나연처럼 부잣집 딸인 것도 아니지요. 아빠와 둘이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온조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습니다.
먼저 이삭이나 청산 같은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온 친구가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이삭이 좀비로 변했는데도 온조는 이삭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누가보면 지 죽을지 모르고 하는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지요.
그리고 그런 온조의 삶에 대한 태도가 남라를 변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일체 단절하고 공부만 하며 살아온,
전교1등 남라가 꼴찌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위권을 맴도는 온조 때문에
친구가 생기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거지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건 어떤 걸까요
물리적/화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동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주위에 사람이 많을 때는 잘 못 느낄 수 있지만, 세월이 가고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 ‘가깝다’ ‘친하다’고 말할만한 친구나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온조-이삭, 온조-청산과 같은 관계가 사라지는 거지요. ‘너만 알고 있어야 돼, 비밀이야’라고 말할만한 사람이 없어지는 거지요.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는 데 정작 나의 아프고 외롭고 슬픈 마음을 말할만한 사람의 숫자는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박승화의 가요 속으로>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라디오 친구를 소개합니다’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사연을 보내서 연락이 끊겨 30년씩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다시 만나곤 합니다.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친구를 찾는 건 왜 일까요. 무엇을 되찾고 싶은 걸까요.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 그것도 서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얘기를 나누고 어려움도 이겨냈던
그런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건 아닐까요
내가 가지고 있어 줄 수 있는
온조가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빠 소주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등학생인 온조의 시험을 앞두고 부녀가 식탁 앞에서 대화를 합니다.
아빠 : 야 어차피 성적 잘 안 나올건데 너무 스트레스 많이 받지 말라고
온조 : 포기하지 마 아빠 나 할 수 있어
아빠 : 포기는 아니고 그냥 기대를 안하는 거야
온조 : 그게 포기야
…
아빠 : 안전하고 건강한 게 최고야
온조 : 아, 진짜 나 이번에 5등급까지 올릴 거라니까?
아빠 : 무리하지마
온조 : 그럼 6등급까지는 어떻게든 해 볼게
아빠 : 아빠한테 사기치는 거 아냐
그러면서 아빠는 온조에게 닭다리를 건넵니다. <스카이 캐슬>에서 예서 엄마가 보이는 행동과는 많이 다르지요.
온조 아빠는 온조와 많이 닮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선해요.
직업이 소방관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우려고 합니다.
어쩌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서 직업을 소방관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르지요.
온조는 소주의 유전자를 받았기 때문에 아빠처럼 선하고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타고난 것뿐만 아니라 아빠가 만들어준 성장 환경이 그런 온조의 성향을 더 강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구요.
CREB-1에 의해 활성화된 유전자들은 새 시냅스 성장에 필요하다. 자기기억 형성을 위해 유전자가 켜져야 한다는 사실은 유전자가 단순히 행동의 결정자인 것이 아니라 학습과 같은 환경적 자극에 반응하기도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새 시냅스 말단들의 성장과 유지는 기억이 영속하게 한다...이렇게 경험의 결과로 새 시냅스 연결들을 성장시키는 능력은 진화 과정 내내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 308
- 에릭 캔델, <기억을 찾아서>, RHK, 2017
가지고 있는데다, 아빠라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교류하고 배우고 지지 받으면서 관련 유전자들이 더욱 활성화되는 거지요.
아빠라는 존재가 온조에게 준 , 소주라는 존재가 인간 세상에 준 큰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소주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온조에게 줄 수도 없었을 겁니다
내가 무언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존 보울비가 <애착>이란 책에서 아이의 성장 환경이 아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만약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성장 환경 같은 것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지요.
타고난 것이 중요한데, 환경 또한 영향을 미치는 걸테구요
청산만봐도 그렇습니다.
청산의 엄마는 청산을 참 좋아합니다. 엄마가 아들을 좋아한다는 거야 당연할 수도 있고, 청산 엄마의 모습을 보면 당연하지만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청산이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청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참 인상적이더라구요.
타인을 경청할 수 있는 예민한 마음, 누군가 나의 마음을 들어준다는 것에 대한 깊은 만족감, 더욱 진실될 수 있는 능력, 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끌어 내는 더욱더 많은 진실성,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더 큰 자유...내 경험에 의하면 바로 이런 것들이 상호 간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풍성하게 해 주고 강화시켜 주는 요소들입니다.
- 칼 로저스, <사람중심상담> 가운데
청산이 유치원때부터 온조를 물끄러미 바라봐 왔던 것도 엄마의 모습을 닮았다 싶습니다.
엄마가 위험을 무릎쓰고 청산을 찾아나섰던 것처럼 청산도 자신을 희생하며 친구들을 지키려하지요.
엄마에서 청산으로, 청산에서 친구들에게 전해지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당장에 그것을 눈으로 보거나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확인할 수도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고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있는 거지요.
사람이 만드는 사람
좀비가 나타나 세상을 큰 혼란에 빠트린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타인에 대한 지배와 폭력입니다.
과학교사 이병찬의 아들이 다른 애들한테 두들겨 맞고 괴롭힘을 당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성폭력과 촬영을 당하고, 좀비가 되어서도 핸드폰을 부수고 있는 은지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참 아프게 합니다.
좀비가 된 은지는 다른 사람을 물어뜯습니다.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되지요.
그런데 따져보면 은지를 괴롭힌 인간들이 좀비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물어뜯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인간들입니다.
좀비를 만든 건 좀비 같은 인간들인 거지요.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을 살겠다는 교장이 있는반면, 교사 선화는 어떻게든 학생들을 위험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저 잘난 맛에 살던 나연을 구한 것도 선화이고, 나연이 친구들에게 좀 더 다가갈 마음을 먹게 만든 것도 선화이지요.
좀비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을 밖으로 나오게 하고 다른 인간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1차 대전 첫해 북부 프랑스에서 수만 명이 죽어나간 총격전 이후, 진퇴양란의 참호전 상황에서, 대치하던 두 부대의 군인들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live and let live”라는 아주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상부의 명령을 암묵적으로 불복종하면서, 중간지대 너머로 서로를 겨누던 군인들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
협동하려는 성향, 그것은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보편성이다.
…
이타성-친족 이타성도 아니고 호혜적 이타성도 아닌,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을 상대로 한 진정한 의미의 이타성-은 분명 존재한다. 약 30여년 전, 리처드 티트머스는 <선물 교환관계the gift relationship>란 책을 통해 혈액은행은 기부자들의 이타성 덕분에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이 자신의 희생이 나중에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되갚아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수단을 제공해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피터 싱어, <다윈주의 좌파-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서로 적으로 싸우던 독일과 프랑스 등의 군인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전투를 중단하고 어울려 노래를 하고 축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mbc <서프라이즈> 같은데도 나왔고, 실화라고 하지요.
누군가 시작했던 겁니다. 비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거지요. 그러면 상대가 ‘아 적대적이지 않구나’라고 느꼈을 겁니다.
이어서 비적대적일뿐만 아니라 친근하거나 온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아 나에게 친근하고 온화한 상태구나’라고 느꼈겠지요.
그러면서 총과 대포를 쏘기는커녕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가지고 있던 것을 나눠먹기도 했을 겁니다.
첫 시작을 누구라고 정할 필요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서로가 그렇게 변해갔던 것이겠지요.
그 변화가 서로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짧은 시간이지만 평온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했을 거구요.
함께 살기
<지금 우리 학교는> 속 인물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고, 좀비가 된 사람도 있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학생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함께 살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청산이나 준영은 ‘함께 살기’를 넘어 나를 죽이더라도 너희들을 살리겠다는 희생을 보여줬구요.
학생들이 좀비에게 쫓기다 체육관 비품실에 갇힙니다. 오랜시간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이지요. 우연히 초코바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거 하나를 가지고 10여명이 나눠먹습니다.
한입씩
조금씩
그런데 이때조차도 자기 몫은 먹지 않고 친구들에게 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도 아니고, 과자를 싫어해서도 아니겠지요. 다른 친구들이 조금이나마 더 먹을 수 있도록 자신은 먹지 않은 걸 겁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함께 살기’에 나섰을 수 있었던 걸까요.
첫째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감정/정서 때문일 겁니다
둘째는 공동체/연대 의식 같은 거겠지요.
소주가 딸 온조를 구하러 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딸을 구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소주는 그 사람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합니다.
학교 친구들은 말 그대로 학교 친구들입니다. 비록 가족은 아닐지라도 많은 시간 함께 자고 놀고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지요.
서로 친한 사이는 물론이고, 서로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같은 학교이고 같은 반이고, 게다가 서로의 얼굴을 아는 사이인 거지요.
생판 모르는 사람도 위험에 처한 걸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더더군다가 매일 얼굴을 보고 사는 사람이야 그런 마음이 더욱 커지겠지요.
낯선 사람보다는 가까운/아는 사람에게서 공동체/연대 의식이 커질 거구요.
셋째는 공동 과제일 겁니다.
사회심리학 같은 데서 나오는 이야기일 겁니다. 서로 잘 모르거나 친하지 않던 사람도 한 팀을 만들어서 공동 과제를 해결하게 하면 친밀도가 높아진다는 거.
간단한 사회 실험에서도 그런데 좀비나 생존이라는 거는 그들에게 더 큰 공동의 과제일 거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 거겠지요.
사랑의 힘?
사랑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정서나 감정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편안해지고 안심하게 되는 거겠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우울한 기분도 줄어들고 없던 용기도 생길 수 있구요.
그렇다고 사랑이 곧바로 좀비를 물리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사랑이 무능력하냐면 그것도 아니지요. 사랑이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거구요.
<지금 우리 학교는> 남라를 보면 됩니다.
처음에 남라는 다른 친구들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친구들도 남라는 대충 무시하고 살구요.
그런데 위기의 상황에서 조금씩 친구들과 가까워진 남라는 방송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남라는 절반은 좀비, 절반은 인간인 절비 상태가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인간처럼 행동하다, 귀남과 같은 좀비들을 친구들을 헤치려고 하면 좀비와 같은 상태가 되어 싸웁니다.
좀비처럼 되었는데 인간을 뜯어먹는 게 아니라 다른 좀비와 싸우는 겁니다.
남라가 친구들에게 사랑이나 우정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겠지요.
사랑의 마음이 있으니 좋은 방법도 생각해내고, 없던 힘도 쓰게 되는 겁니다.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이 있으면 해결 방법을 찾게 되는 거겠지요.
학교라는 곳이 인간에게
사랑보다는 경쟁을 가르치고
사랑보다는 성적을 더 중요케 여긴다 하더라도
인간의 가슴속에 언제나 꿈틀거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불쑥 낯선 손님처럼 우리 앞에 나타날 수도 있구요
'사랑.평화.함께 살기 > 삶.사랑.평화-책과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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