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원자와 분자, 유전자와 세포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원자나 세포로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한 존재, 한 생명체로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정신이라는 생명체의 활동이 있습니다.
정신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이 어떤지를 파악하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를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정신활동에서 중요한 것이 타인의 삶입니다.
타인의 삶에 대해 보고 듣고 배우면서 우리는 자기 삶의 길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 한나 아렌트의 삶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고 망명자이기도 했던
그러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탐구하고
친구와 시를 좋아했던 한 인간의 삶
1964년 독일의 저명한 기자이자 평론가 귄터 가우스와 나눈 대담에서 한나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깨달았는지 털어놓았다.
아주 꼬맹이일 땐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처음으로 이 말을 접한 건 길에서 아이들이 유대인을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죠.
…
알다시피 유대인의 어릴 적부터 차별적 언사와 무주해요. 어릴 적부터 영혼이 그런 말들에 상처를 입지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언제나 당당하게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라고. - 37
한나는 마지막 저서 <정신의 삶>에서 ‘의지’를 다루었다.
…
한나는 어떻게 어떤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는지 알고 싶었다. - 64
한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은 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한나는 심지어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나에 따르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세계는 단 하나,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다. 한나는 신의 구원 대신 세속적 사랑에 기댔다. 사랑으로 변모한 의지는 무게, 즉 성격을 형성하는 중력을 지녔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도록 자아를 길들인다. - 65
마르틴 하이데거가 사유를 고독한 자아의 내면 탐구로 이해했다면, 야스퍼스는 사유를 다원성을 띤 대화로 이해했다.
…
야스퍼스의 강의는 지식 전달이 아닌 ‘소통의 형태’를 취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에게 말했듯이 야스퍼스도 지혜란 이 병의 와인을 빈병에 붓는 것처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 옮겨 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그 대신 배움은 대화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 66-69
아우쿠스티누스는 사랑, 욕망, 박애를 서로 구분했는데, 한나는 이를 바탕으로 아모르 문디amor mundi라는 자신만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는 세계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인간은 세계를 사랑함으로써 이 세계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이 세계에 오롯이 기대어 내 안에서 선과 악을 발견한다. - 71
한나는 집을 공산주의자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 조직체를 위한 임시 은신처로 활용했다. 어머니 마르타와 조카 엘제 아론도 불시에 왔다 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이 일을 도왔다.
…
마르타는 정부 단체에서 일하는 지인들을 동원해 수배당한 좌파 집단에 대한 소식을 캐내고 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적법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위한 오래도니 도덕 범주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옳은지 결정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양심을 지키려면 무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 100
한나가 생각하는 파리아는, 파리아로 살기 위해 자신의 남다름을 일평생 간직하면서 이방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한나는 언제든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맞출 준비가 된 파브뉴의 낙관주의를 거부하는 대신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파리아를 높이 치켜세웠다.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손해를 감수한다는 뜻이다. - 114
한나에게 ‘ㅡ주의’란 살아 있는 경험이 주는 의미를 경시하는 이데올로기적 사상이 탄생할 수 있음을 알리는 위험신호였다. - 153
한나의 분석에 따르면 인종편견이 단지 의견에 불과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기의 전환기에 제국주의 시대와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대륙을 식민지화한 과정)을 거치며 상황이 바뀌었다.
인종편견은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고 열강들을 이 이데올로기를 무기화해서 땅을 빼앗고 자본과 노동을 갈취하는 정치적 폭력의 도구로 삼았다.
인종편견은 인종차별주의로 변모했고, 인종차별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한 인종차별적 언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될 정도로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다.
한나는 현대 대중사회를 휩쓴 두 가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계급 차별과 인종차별을 꼽았다.
한나는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열쇠나 모든’ 우주의 수수께끼’의 해결책 또는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숨겨진 우주의 법칙에 대한 은밀한 지식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단순한 의견과는 다르다”라고 말한다. - 190
한나는 전체주의는 권위주의나 폭정, 파시즘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개개인을 철저히 개별화하고, 자발성 및 자유를 없애는 데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공포를 도구로 이용하고 강제수용소를 짓는 행위야말로 전체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들이었다.
한나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가 무서운 진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살아남는다 해도, 수감자들은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것보다 더한 단절을 겪는다. 공포가 망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191
전체주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힘이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 나온다면 각자 고립된 개개인은 당연히 무력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 정권은 공포를 통해 개개인을 타인에게서 분리하고, 외롭게 고립된 개개인을 다른 모두의 적으로 돌린다. 세상은 황무지로 변하고 한나의 말처럼 경험도 생각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 196
이데올로기는 공포가 확산될 때 힘을 얻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마주했을 때 분별 있게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가 없다. - 196
한나는 마르틴 루터의 말을 인용해 사람이 외로울 때 얼마나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강조했다. 외로운 사람은 현실이 아닌 상상에 뿌리를 두고 생각의 논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 197
전체주의는 사람들의 사유 능력 및 그들 자신과 맺는 관계를 망가뜨려, 인간 사이에 공간을 파괴한다.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고립되면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 198
경험 세상과 기꺼이 있기 위해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추측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한나는 “(사유는) 직접 겪을 사건들에서 생겨나고, 어떤 방향을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인 이 사건들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사유할 때만 비로소 스토리텔링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19
한나는 사유를 ‘하나 안의 둘’의 대화, 즉 나 자신과 대화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사유함으로써 자의식이 양심에 호소할 수 있고, 타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으며,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219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었다. 즉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나는 아이히만에게는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인 포괄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 238
엄밀히 말해서 나치 정권 아래 자행된 모든 일은 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일반적으로 기소될 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명백히 잘못이었다. 잘못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문제다. 법이 아닌 도덕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어떻게 개인의 책임을 물어야 할까? - 240
한나는 마땅히 본 대로as she saw it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타인이 바라보는 방식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 세상 경험을 기록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 256
진실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실이 공공의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정치영역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치영역에서 진실이 무력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크라테스 이래 진실을 말하는 자들은 정치 영역 바깥에 서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비정치적이고, 권력자에게 도전하는 일이기에 위험하다. 정치에서는 의견만 존재할 수 있다. - 257
거짓이 계속해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거짓이 진실을 음해하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 257
이 논문이 강조하는 바는 공통된 세상의 존재다. 한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인간이 머리로 만들어낸 원칙이나 이론보다도 약해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중대한 위험에 처했다고 우려한다. 세상속 경험과 사건에서 사실이 비롯된다. 다시 말해, 사실 존속 여부는 기억과 이야기에 달렸다. 누군가 사실을 각색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한 세상은 사라진다. - 257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박해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느끼는 선함과 따뜻함에 대한 일련의 사색의 초상화를 제공한다. - 265
한나는 우정의 원천이 대화라고 생각했다. 한나에 따르면 “수다스러운 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그리고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과 상대방이 하는 말에서 얻는 즐거움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이야기나 토론과 다르다” - 266
한나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사유는 악행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한나는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듯이 사유를 하면 악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건 오직 선뿐이며, 나는 내가 사유하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선이 아니어서 우리가 사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치 및 도덕 관련 사안에 사유하지 않는 것은 사회에서 주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 규칙이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사람들을 가르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규칙에 익숙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는 데 익숙지 않다. 누군가 옛, 규칙, 즉 오래된 사회규범을 더 빨리 고수할수록, 그들은 더 빨리 새로운 규칙에 동화되기를 갈망할 것이다. 자신은 이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텐데, 그건 참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 284
한나에 따르면 사유는 알고자 하는 욕구나 진실 추론과는 달리 세상 경험에서 의미를 창출하는 행동이다. - 288
한나는 사유 활동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즉 사유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경험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 291
한나의 책을 출판한 출판인 윌리엄 요바노비치는 한나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한나는 정의를 믿는 사람들만큼이나 그리고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 응당 그래야 하듯이 열정적이었다. 폭력은 싫어해도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불복종은 지지했다. 진지하게 탐구할 일에는 언제나 서슴없었다. 혹여 적을 만들었다면 그건 결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내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한나 덕분에 나는 인간인 게 그나마 덜 수치스러웠다. - 302
제롬 콘은 한때 “한나 아렌트의 문제는 지나치게 많이 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박식함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연관성을 꿰뚫는 통찰을 말한다. -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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