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한 사람이 죽고 나서 누가 범인인지를 찾는 과정처럼 보여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점점 누가 살인자인지는 별로 안 중요해지고, 카야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만 중요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고립된 세계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성소수자들과 그들의 엄마가 나와요.
하루는 이들이 거리에서 행사를 열어요. 그런데 이들에게 반대한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지요.
왜 그럴까요?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에게 '너희는 사탄의 자식이다'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도 아니고, 트렌스젠더가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돈을 훔친 것도 아니에요.
성적인 정체성이나 지향이 다르다는 게 누구를 죽이는 일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다르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로 욕을 하고 모욕을 주고 차별을 하면 누군가는 고립된 세계에서 살 수 밖에 없어요.
많은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괴롭혔지요. 유대인이 무슨 인간 바이러스라도 되는냥 그랬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유대인들은 다른 독일인들을 집단적으로 괴롭히거나 대단한 범죄를 저지른게 아니지요. 나치를 비롯한 독일인들이 지들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그런 짓을 저지른 겁니다.
유대인들이 나쁜 짓을 저질러서 고립된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이 윽박지르고 욕하고 두들겨 패니까 고립된 거지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체이스가 죽는 일이 벌어져요.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카야가 그랬을 거라 그래요.
습지에 사는 여자 짓일 거에요
딱봐도 미친 사람 같잖아요
누구라도 하나 죽일 것 같고
우리가 오빠가 그 여자는 진화가 덜 됐대요
증거고 맥락이고 필요 없어요. 이미 카야는 생김새만 봐도 누구 하나 죽일 것 같고, 진화가 덜 된 인간인 거에요.
카야에게 혹시 어찌된 일인지 물어볼 것도 없고, 카야의 얘기를 들어볼 것도 없어요.
카야가 원하면 습지에서 나와 마을에서 물건을 살 수도 있고 버스를 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미 관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다른 이들에게서 고립된 세계에 살고 있는 거지요.
폭력의 세계
<재즈맨 블루스>라는 영화에서 동네 백인들이 흑인 바이우를 죽이려고 몰려와요. 그러자 바이우는 일단 내 얘길 들어보라고 하지요.
하지만 백인들은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바이우를 나무에 매달아 죽여버려요.
이미 백인들은 판단을 하고 있었고 어떤 방향으로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있었던 거지요.
바이우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러니 흑인들은 조심 조심 또 조심 숨듯이 지낼 수 밖에 없겠지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어린 카야가 혼자가 돼요. 그런 카야를 보고 가게를 운영하는 흑인 부부가 대화를 해요.
메이블: 불쌍한 것. 엄마도 떠나고 이젠 아빠도 떠난 모양이네
점핀 : 백인들 일에 끼어들면 안 돼. 조심해야지.
남편 점핀이 특별히 인간성이 나쁘거나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 거에요.
1950~1960년대 미국 남부 지역, 그리고 주변에 온통 백인들이 우글거리는 동네에 사는 흑인들 입장에서는 조심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동안 그들도 험한 일을 겪을 것이고, 자신의 이웃이나 가족이 죽거나 두들겨 맞는 것을 보기도 했겠지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카야의 아빠는 X자식이에요.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욕을 퍼붓는 아주 나쁜 놈이에요.
그런 아빠와 살면서 카야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다른 가족들처럼 아빠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법을 배웠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하고, 모습을 보이지 말고,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다.
이런 카야의 마음을 어느정도는 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의 어린 시절도 비슷했거든요. 폭력적인 아빠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고, 술에 취하면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려고 애를 썼지요.
그래서 제가 자라면서 눈치를 많이 보는 인간이 되었는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눈치를 잘 살펴서 말과 행동을 해야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집안을 때려부수는 걸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었으니까요.
인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채 살아온 것도 그런 영향이 있지 싶어요.
폭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
저와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카야와 저의 가장 큰 차이는 사랑의 능력인 것 같아요.
우리는 이 우주, 이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에요. 그 사실은 바꿀 수는 없어요. 내 삶의 조건인 거지요.
그런데 그 조건 속에서 누구와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카야의 엄마는 카야를 많이 사랑해요. ‘소중한 우리 딸’이라고 하며 카야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러워요.
저는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거든요.
어쩌면 카야가 가진 사랑의 능력은 엄마로부터 물려 받았는지도 몰라요. 물려 받은 것에다 엄마를 통해 느끼고 경험한 거지요.
아빠의 폭력, 혼자 남겨진 불안과 외로움, 주변의 손가락질, 체이스의 괴롭힘 등등의 일이 있었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던 건 엄마가 준 큰 삶의 선물인지도 모르지요.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엄마를 따라 카야도 그림을 그리게 되었듯이 말이에요.
혹시 영화를 보시는 분이라면 마지막 자막이 다 올라갈때까지 보시라 권하고 싶네요. 자막과 함께 카야의 그림이 나오거든요.
카야의 그림은 작지만 세밀해요. 그렇게 그리려면 자세히 천천히 관찰해야겠지요. 곤충이든 풀이든 깃털이든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그런 그림도 가능할 거구요.
그림을 그리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마음의 문제일 거에요.
혼자 남겨진 어린 카야를 도와준 건 흑인 부부에요. 아내인 메이블이 이런 말을 하지요. 아마도 성경의 구절인가 봐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메이블이 손가락을 들어가며 강조한 말이 ‘지극히 작은 자’에요.
카야는 남들은 거들떠보지 않을 작은 곤충이나 나뭇잎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려요. 그리고 메이블 부부는 남들이 이상하다고 하는 작은 아이가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요.
지극히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에요.
아빠에게 뺨을 맞는 카야를 구하기 위해 저보다 덩키가 큰 아저씨에게 제 몸을 던지는 테이트도 그렇고, 신발도 없이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카야를 보며 안타까워했던 톰도 그렇지요.
같은 우주, 같은 지구에 살아가지만 그들만의 사랑의 세계가 있었던 거지요.
조화의 세계
영화 전반에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펼쳐져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단지 시각적으로 예쁘다는 것을 넘어 경외심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더라구요.
카야갸 자연과 인간을 대하는 모습, 마지막에 죽음을 대하는 모습까지 모두 묘한 마음을 일으켰어요.
조화라는 말과 함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생각나더라구요.
그 조화의 세계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안락하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닐 거에요.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이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어요.
그리고 가끔 멋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
its predator must die
약자들이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거겠지요.
조화의 세계는 모든 것이 완벽한 환상의 세계도 아니고,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 그런 엄악한 세계도 아닐 거에요.
약자들 또한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싸우기도 하는 그런 세계일 거에요.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고, 행복과 사랑을 느끼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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