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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순돌이 아빠^.^ 2023. 6. 2. 10:59

어제 밤에 이 영화를 보고 잠들었는데…잠들면서도 자면서도 깨면서도 계속 생각나더라구요.

참 좋은 영화였어요.

시선

먼저 좋았던 점은 영화의 시선이었어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랄까…

좋다거나 싫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게 없어요. 그냥 바라보는 거에요. 니가 잘났든 못났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니가 내 친구라는 게 중요한 거지요.

태희가 그래요. 혜주가 증권회사에 다니든, 지영이 청소일을 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아무 일 없어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고, 혹시라도 연락이 잘 안되면 집이라도 찾아가서 어찌 지내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세상에는 사람을 위 아래로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니가 힘이 세냐 내가 힘이 세냐, 니가 돈이 많냐 내가 돈이 많냐로 나누는 거지요. 그러고는 그에 따라 으시대기도 하고 굽신거리기도 하지요.

자기 혼자 그러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에게 그게 세상이야, 그게 사회 생활이야라고 가르치려고도 하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태희 같은 사람 또한 세상에 많아요. 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더 눈에 띄기도 하구요.

그런면에서 이 영화가 좋다는 거에요. 태희의 시선과 영화의 시선이 닮아 있어요. 

그녀들이 서울이 아닌 인천 출신이라고, 인문계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라고, 차도 없이 맨날 지하철 막차 타고 다닌다고, 내세울 것도 별 볼 것도 없는 집안 출신이라고 업신여기거나 하찮다고 하지 않아요.

그녀들을 그렇게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영화 속에도 등장해요.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어 지영이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지요. 그러자 남성 면접관이 이런 걸 물어요.

100m는 몇 초에 뛰어? 낮술은 잘 하나?

돈이 필요하고 일자리가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 그리고 여성에게 술을 잘 먹는지는 왜 물어보는 거지요? 

그 앞에 있는 사람이 지영이가 아니고 그 회사 사장이거나 대통령쯤 되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지요. 그렇게 키득대지도 않았을 거구요.

혜주는 팀장을 좋아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해요. 그리고 팀장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구요. 하지만 팀장은 혜주를 한마디로 정의하지요.

저부가가치 인간

달리 말하면 자기는 고부가가치 인간인 걸 테구요. 혼자 자기만의 사무실을 사용하고, 영자 신문을 들고 출근을 하는 멋진 증권사 직원인 셈이고, 혜주는 그저 회사에서 잔신부름이나 하는 고졸, 그것도 여상 출신의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는 거지요.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는 건 그저 팀장 지 생각일 뿐이에요. 학력이나 지위에 따라 어떤 인생이 더 가치 있고, 어떤 인생이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구요.

서울대 법대 나오고 검찰총장을 거쳐 대통령까지 된 윤석열을 보세요. 대학교수에 회사 대표까지 지내고 수십억대 재산을 지닌 김건희를 보세요. 

참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본 받을 만하고 다른 사람이 보고 배웠으면 싶은 인생인가요? 만약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할 건가요?

00아 너도 크면 꼭 저렇게 윤석열 대통령이나 김건희 여사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알겠지?

제가 아는 00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여상을 나왔어요. 하루는 둘이서 술을 먹다 어째저째 해서 십원짜리 동전을 바닥에 떨어뜨리게 됐어요. 그러자 00이 갑자기 펑펑 우는 거에요. 

내 인생이 저 십원짜리 같아요

저의 할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요. 전화기의 전화번호도 누르지 못하셨지요. 그 세월에 여성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 할머니가 힘든 농삿일에 집안 살림에 8남매까지 다 키우셨어요. 

삶의 의미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여러 인간의 생존과 성장에 큰 기여를 하신 분이지요. 

손자인 저한테도 언제나 작은 거 하나라도 주시려고 했던 분이에요. 먹을 것을 챙겨주신 거야 말할 것도 없구요.

그에 비하면 저는 할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없어요. 가방끈으로 따지자면 저는 대학원까지 나왔으니 할머니에 비하면 훨씬 많은 것을 가졌지만 정작 할머니에게 구체적으로 해드린 것도 도움이 된 것도 없는 거지요. 

팀장의 말처럼, 팀장의 기준으로 보면 팀장이 혜주보다 부가가치가 더 높을 수 있어요. 자본주의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 부가가치는 아마도 회사 수익으로 수치화된 것을 말할 거에요.

하지만 삶의 의미는 물론이고, 타인에게 경제적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누군가의 생존과 성장에 기여한다는 의미로 보면 팀장이 혜주보다 꼭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생산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팀장이 1년에 회사에 100억의 수익을 벌어온다고 해서 길에서 떠돌던 고양이 티티에게 꼭 먹을 것을 준다는 보장은 없어요. 왜냐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길고양이를 사랑한다는 보장은 없는 거지요.

길고양이 티티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꼬옥 안아주는 것은 여의도 증권회사 팀장이 아니라 공장이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은 지영이이에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에 살면서 자기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은 지영이가 고양이 티티에게 먹을 것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요.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엄마도 아빠도 없지만, 지영이는 티티를 꼬옥 안아줘요.

고양이 티티에게는 증권회사가 1년에 수천억을 벌든 말든 팀장의 수익률이 1,000%이든 말든 아무 상관 없어요. 누군가의 계좌에 1천억 달러가 찍힌들 무슨 상관이겠지요. 

중요한 건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내가 배가 고플까봐 먹을 것을 주고 비를 맞을까봐 지낼 곳을 마련해주는 사람이고 마음이겠지요.

자기가 가진 시선에 따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돼요. 팀장의 시선에는 혜주가 저부가가치 인생인 거고, 티티에게는 지영이가 나의 생명을 지켜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 거지요.

영화 <부산행>에서 수안의 아빠 공유는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인지 뭔지로 나오지요. 하지만 아빠가 아무리 잘 나가도 수안이 정말 원하는 걸 줄 수는 없어요.  

자본주의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해서 아빠로서 친밀감이나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거는 아닌 거지요.

수안의 시선으로 보면 삶의 중요한 가치는 얼마나 높은 수익률을 내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자신과 함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맛있는 떡뽁이도 먹고, 큰 지르며 게임도 하는 그런 모습일 거에요. 

우리는 각자의 세계 속에 살고, 각자의 시선을 가지고 살아요.

팀장의 시선도 있고, 태희의 시선도 있는 거구요.

현실

<고양이를 부탁해>가 좋은 또 하나의 모습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거에요. 우리가, 또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거지요.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살지 않을 거구요. 각자의 현실이 있는 거니까요.

얼마전에 <히트>라는 영화를 봤어요. 알 파치노~~~~캬~~~~

특히 총격 장면이 정말 인상적더라구요. 수많은 영화에서 총격 장면이 나오는데 이 영화를 특별하더라구요.

겉멋 들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선이 굵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까…특히 그 소리가…탄피 떨어지는 소리까지…마치 제가 현장에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더라구요.

그리고 제게 <고양이를 부탁해>와 <히트>의 가장 큰 차이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저의 또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면 <히트>는 현장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저의 또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아니라는 거에요.

지하철 막차 놓칠까봐 술에 취한 친구를 끌고 헐레벌떡 뛰기는 하지만, 기다란 총을 이리저리 쏘아대며 달릴 일은 없으니까요. ^^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 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에 비해 지영이나 혜주 같은 사람은 이름을 대라고 해도 당장에 여럿 댈 수 있어요. 

<히트>가 그들의 이야기인데 현장감을 잠깐 느낄 수 있었다면, <고양이를 부탁해>는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가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현장감을 살린 영화가 아니라 우리 사는 이야기 그대로인 것 같은 거지요.

제가 아무리 알 파치노 보고 멋있다고 해도 제가 알 파치노가 될 수는 없어요.

그런데 혜주를 보고 지영을 보고 태희를 보면 그 속에 저의 삶이 있고, 제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 있어요.

큰 소리가 나고 유리창이 깨지는 집을 뛰쳐나오는 혜주의 모습은 저의 모습이기도 해요. 

모든 게 자기 중심적이고 제 멋대로인 아빠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태희의 모습은 제가 아는 B의 모습 같기도 하구요. 

비좁고 어두운 집에 가족이 모여 지내는 지영네 모습은 제 친구 C의 모습 같아요. 

지영이 할머니가 지영이를 찾아온 태희에게 그랬죠. 지영이 친구가 집에 찾아온 건 처음이라고.

제 친구 C의 집에서 하룻밤 잘 때 C의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C가 친구를 데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여기저기 파출부며 청소일 다니는 ‘아줌마’가 나오지요. 수십년째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얼마전에도 통화를 했던, D가 떠오르네요.  

제가 이 영화가 우리 삶의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제가 아는 E는 병으로 시력을 많이 잃었어요. 그래서 세상이 아주 희미하게 조금만 보여요. 그런데 하루는 만났다 헤어지면서 제가 별 생각 없이 불쑥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어요. 

잠깐이지만 침묵이 흘렀어요. E가 제가 손을 내민 걸 보지 못했던 거지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제가 왜 그랬을까 싶어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안다고 떠들기는 쉬워도, 정작 내 앞에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조차 잘 모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야 된다, 저러면 안된다 중얼거릴 때가 많은 거지요.

ktv

TV나 영화를 많이 보다보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나의 현실인 것처럼 느껴져요.

그 영상 속에 있는 것들이 세상의 참 모습이고, 오히려 내가 사는 것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나는 당장에 다음달 낼 방값이 없어도, TV에서 종부세가 올라서 문제라고 하면 정말 그게 큰 문제처럼 느껴져요. 재개발 붐이 일고 아파트 값이 쭉쭉 올라간다는 뉴스를 보면 나도 덩달아 뭔가 큰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곧 저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구요.

노예가 주인과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면 자기가 마치 주인과 같은 위치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요. 

화이트 타이거

그러다보면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고 바로 내 앞에 있는 문제는 현실이 아닌 것처럼,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나의 경험과는 아주 먼 곳에 있고, 내 인생과는 동떨어진 그들의 현실이 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현실에서는 100m를 20초에 뛰기도 힘들면서 마음만은 수퍼맨이고 스파이더맨이고, 제이슨 본이고 존 윅인 거지요.

내가 보고 있는 그들의 현실과는 달리

나는 지금 혜주처럼 눈물을 닦으며 꾸역 꾸역 버티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지영이처럼 그 답답하고 속이 타들어가는 사연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살 수도 있어요.

그리고 또 누군가는 태희처럼 꿈을 찾고 자유를 찾고 친구를 찾고 있을 수도 있구요.

그렇게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겠지요.

혜주의 아빠가 큰소리 지르며 집안 살림을 때려부수는 것도 현실이고
뭐하나 의지할 데 없고 부모도 없는 지영의 삶도 현실이구요.

노숙인 여성을 보고 태희가 자유롭다고 하든
아니면 지영이가 나도 저렇게 될까봐 무섭다고 하든
그것이 바로 내가 직접 느끼고 생각하는 살아있는 우리 자신일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