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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슬로브스키, <세가지 색-블루>를 보고

순돌이 아빠^.^ 2023. 6. 7. 11:08

정말 심장을 쿵! 하고 때리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어떤 내용의 영화냐고 묻는다면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은 한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어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요.

그리고 저는 거기까지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로 풀기에는 보지 않고는…

오랜만에 찾은 조용한 바닷가의 저녁 노을 보고 집으로 돌아 왔다고 하지요. 그리고 순돌이가 ‘아빠 오늘 뭐했어?’라고 묻는다면…저는 ‘음…바닷가에서 저녁 노을 봤어’라고 말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때 그 순간 제가 느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저리 주저리 말로 하는 순간 제 느낌이 뭔가 깨어지는 듯 할 테니까요.

누군가 제게 이 영화가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것 그저 직접 보라고, 조용한 곳에서 다른 불이든 핸드폰이 꺼놓고 혼자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예술

‘이런 것이야 말로 예술이야’라거나 ‘예술은 이래야 돼’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세계가 있고 각자가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 ‘예술이란 것이 이럴 수도 있구나’ ‘예술이란 것이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별 특별할 것 없는 장면 장면이 제게는 크고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줄리와 올리비에가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잠깐, 상반신 일부를 살짝 비추는 정도지요. 요즘의 표현 수위로 하자면 섹스신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제게는 정말 큰 충격(?) 같은 것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이 또한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탄생과도 같고, 껍질을 깨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 안의 떨림인 것도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함축하고 있는 듯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사고 현장에서 목걸이를 주어준 사람, 요양원에서 지내는 엄마, 남편이 사랑했던 사람…그리고 자신 또한 새로워지고 새롭게 의미로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채 허리를 펴지 못하는 허리로 빈명을 수거함에 넣으려고 애쓰는 할머니까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어떤 심정인지를 직접 알 수는 없습니다. 노랫말처럼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말, 그 몸짓, 그 표정, 그 눈빛, 그 목소리 등등을 통해 때로는 어렴풋이, 때로는 또렷하게 느낄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우리에게 타인의 마음 속으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연기를 통해, 그들의 음악을 통해, 그 길을 만드는 것일 테구요. 

시도 예술이고, 발레도 예술입니다.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이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설탕이 커피 속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이렇게 보여줄 수 있는 예술 분야는 영화뿐일 테니까요.

블루

제목이 <세가지 색-블루>입니다. 영화 제목에 블루라는 말이 들어가는 경우는 많습니다. 에단 호크가 나왔던  <본 투비 블루>, 케이트 블란쳇이 나왔던 <블루 재스민> 등등입니다.

블루는 인간 내면의 우울함이나 울적함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고 색깔이기도 합니다. 

<세가지 색 - 블루>도 마찬가입니다. 갑자기 남편과 아이를 잃은 상실, 혼란, 우울, 좌절, 고립, 외로움 등등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영화에서 줄리가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여러번 나옵니다. 푸른빛이 도는 곳이지요. 

그리고 몇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푸른빛은 점점 의미를 달리합니다. 우울의 블루가 아니라 푸른 하늘의 블루처럼 새로운 탄생의 의미를 띄게 되지요.

화재로 집이 불탈 때 내뿜는 붉은 색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닥불 피워놓고 옛 이야기를 나누는 붉은 색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수영장 물속으로 뛰어늘었다 다시 나오듯이 침잠의 블루가 탄생의 블루로 변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지요.

이곳에 선이야 악이냐는 없습니다.

누구는 푸른색 인간, 누구는 빨간색 인간, 누구는 노란색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이 인간도, 저 인간도 빨주노초파남보가 이리 저리 섞여 있을 뿐인 거지요.

줄리의 왼쪽 눈 위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고 조금씩 아물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줄리엣 비노쉬

영화에서 감독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배우의 역할 또한 중요할 겁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줄리엣 비노쉬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요.

잘 하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라 표현하는 사람이 다르면 그 색깔도 달라지겠지요.

여러가지 능력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줄리. 그야말로 푸른빛이 도는 줄리.

복잡하기도 하고 다채롭기도 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줄리엣 비노쉬의 모습이 내내 제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