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파시즘의 진화>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독일이여 일어나라
독일이여 일어나라
이 집회 구호는 어떤 정치가의 선전문구보다 더 강력했다.
이는 구원의 부르짖음이었다.
…
패전후 정체성이 흔들리고 혼란에 빠진 국가에서
그 구호는 새로운 새벽의 약속을 가져왔다.
하나의 상징과 한 사람 아래 모두가 단결했다.
…
국민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처럼 여겼다
수많은 국민은 자신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약속하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칠 준비가 돼 있었다.
법과 질서, 목적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영화 속 독일 사람들의 표정이나 소리, 행동이나 몸짓을 보면 더 강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히틀러라는 한 인간에게 저렇게까지 열광 하나 싶어 낯설기도 하고, 누군가/무언가를 구원/구원자로 여기고 그가 제시하는 길/방향을 따라 자신의 많은 것을 쏟아내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도 느껴집니다.
구원/구원자에 대한 열정은, 흔히 말하는 ‘사이비’만 그런게 아닙니다. 사이비가 아님을 주장하는 종교 집단의 경우도 구원을 약속하고, 구원자로 여겨지는 한 인간의 의지나 말에 따라 열성을 다하기도 하지요.
기독교, 이슬람, 힌두 등 다양한 종교 집단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런 집단이 자신들만의 신념과 조직을 갖추고,
제가 보기에 있지도 않은 그런 식의 구원/구원자를 내세우거나 추종하는 것은 개인적이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입니다.
사이비 [似而非]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
같은 사似와 아닐 비非, 정말 그럴듯해보이고, 그런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겠지요.
게다가 이런 집단이 자기 밖의 인간들이나 사회를 향해 주장을 펼치고 정치에 개입하고, 폭력이나 강제력을 행사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벌어집니다.
독일의 나치가 그렇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이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게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실재하는 문제이든 아니면 심리적으로만 그럴 뿐이든, 어쨌거나 그 문제를 풀고 싶어하고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고, 새롭고 평화롭고 즐거운 세상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간절하게 그런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거지요.
세상이란 건, 그들의 마음 속 세상이란 건 나 혼자 맞서기에는 너무 힘이 세고 거대한 상대입니다. 그것이 나를 억누르고 있고 압도하고 있는 거지요.
문제를 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을 알면 어떻게라도 해 볼텐데, 방법을 모르니 더욱 답답합니다.
이럴 때 찾는 것이 구원자이고 신이고 영웅이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인간입니다. 별 특별한 능력도 없어 보이구요. 게다가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로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특별special하고도 특별specific한 인물입니다. 그들의 믿음과 신념 속에는 그렇습니다.
남들이 보는 관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오히려 그 남들이 잘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 남들이 가짜 뉴스에 속고 있다고도 하지요.
그 구원자의 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정말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먼 미래에 이루어지길 바랬던 것이 때로는 지금 현재에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비슷한 심리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손을 잡고 소리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하고 행동에 나섭니다. 그러면 그동안 느꼈던 불안이나 두려움은 사라지고 확신을 얻게 되고 의미를 찾게 되고 희망 같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동지처럼 여겨지고, 맨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은 구원자이자 안내자이자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이들과 함께 행동하면 멋지고 행복한 새로운 세계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런 세계가 존재하는지, 도대체 그런 천국이나 보상이란 게 있을 수 있는지는 사례를 들거나 논리적으로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 그들의 열망 속에는 이미 그런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거나 말도 안되는 거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런 사례들이 이미 수없이 존재합니다.
논리나 증명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여러가지 증거가 모여져 있고, 그것들이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앞뒤가 잘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 너무 배가 고프면 그동안 좋아하지 않던 음식도 맛있게 느껴집니다. 너무 너무 목이 마르면 웅덩이에 있는 오염된 물도 너무 소중하게 여겨져 벌컥벌컥 마시게 됩니다.
‘니가 싫어하던 음식이잖아’, ‘야 그거 마시면 배탈 날거야’와 같은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나치나 탈리반처럼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도덕적이냐 아니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갈망과 열정은 많은 도덕적 망설임이나 법적 한계도 넘게 만듭니다.
사이비 집단이나 비사이비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이나 진리는 그들의 믿음이나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지 토론이나 실험, 논리나 증명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련 사람들한테 스탈린도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지요. 북한 사람들한테 김정은이 영도자도 아니고 위대한 인물도 아니라고 해봐야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루어진다.
제일 먼저 사용되면서 가장 흔한 방법은 부인denial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의 특별함에 대하여 비합리적인 신념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이 신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상해를 입거나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한다. 그들은 또한 삶에 대해 무모한 접근 방식을 발달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행동이나 강박적인 영웅적 행위로 죽음을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다루는 세 번째 방법은 궁극적인 구원자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궁극적인 구원자는(처음에는)부모이며, 그다음은(삶이 전개됨에 따라) 신이다.
...
이런 증상의 한 가지 예로 건강염려증적 집착의 발달을 들 수 있다....더러움, 세균, 그리고 질병을 두려워하는 강박적인 환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소멸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는다...몇몇은 자신의 젊음을 증명하기 위해 난잡한 성관계를 맺는다. - robert plutchik, <정서와 상담의 실제>, 학지사, 2010
영생이든 천국이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든 부유한 삶이나 아름다운 여성이든
갈망하는 사람들과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이들의 갈망에 대해 잘 아는 사람과 그런 마음을 이용하고 조직할 줄 아는 사람.
이들이 만들어내는 강한 결속력과 폭발하는 에너지.
갈망 [渴望] 간절하고 애타게 바람
목마를 갈渴, 바랄 망望
심리적으로보면
종교의 선지자나 정치의 지도자나
영적인 스승이나 진리를 알고 있는 자나
매한가지일 수 있습니다.
갈망하는 마음과
무리지어 행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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