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데이비드 버사미언이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에드워드 사이드와 인터뷰를 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제게 큰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그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는 제가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는데 큰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큰 도움을 받았고,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되겠네요.
처음 이 책을 읽은 건 출판사에서 추천의 글을 쓰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펜과 칼>을 읽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그의 생각으로부터 많은 것을 알게 됐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어느만큼 흐른 뒤 다시 읽으니 이번에는 그의 심정에 좀 더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심정에.
에드워드 사이는 1935년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고, 이스라엘이 건국 되면서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자신이 태어났던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그리고 자신이 살았던 그 집을 방문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당신의 생가를 방문하는 대목은 어조가 대단히 통렬합니다. 당신이 태어난 집이 현재 시온주의를 숭상하는 원리주의 기독교 단체 국제기독교대사의 분부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은 스위프트를 뺨칠 만큼 아이러니 한데요.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순간 분노와 우울이 나를 휩쓸었다. 한 미국인 여자가 빨랫감을 한아름 들고 나오더니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
그런데 여기 오니 팔레스타인의 다른 곳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집 안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 아이들이 들어가자고 옆에서 보챘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태어난 창문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집 밖에서 보이는 그곳을 가리키며 저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밖에서 쳐다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 84~85쪽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75만명 정도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가 살던 곳에서 쫓겨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이나 이웃 나라, 곧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등지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자기가 살던 곳을 방문 또는 바라보기라도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내쫓았으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미지는 아주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남았아야 정상(?)일 겁니다. 만약 중국이나 소련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당연히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았을 것이고, 그들의 범죄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했을 겁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을 예외로 두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남아공, 니카라과, 베트남, 소련, 천안문 사건에 팔레스타인도 있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팔레스타인도 있지.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이들과 달라.’ 이스라엘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에게 팔레스타인 문제의 책임이 있는 걸까요? - 36쪽
이 책에 담긴 인터뷰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런지, 인티파다와 오슬로협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관해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약간 갸우뚱 하시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슬로 협정이 뭔지, 이게 왜 문제인지, 아라파트와 라빈은 또 누군지 등등.
저는 우리가 오랫동안 국제 무대와 아랍 세계에서 벌인 투쟁으로 얻었던 것은 이번 협정으로 잃게 되었음을 밝히는 바입니다…협정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일부 지역에서 철군하고 몇몇 지역에 군대를 재배치한다는 말은 있습니다. - 105쪽
이스라엘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정착촌을 이루기 위해 팔레스타인 파트너가 필요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다른 아랍과의 관계, 특히 대외 이미지 면에서도 멋진 거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최근에 인티파다와 1993년 7월 레바논 침공 등으로 대외 이미지가 많이 나빠졌거든요. - 113
평화를 향한 커다란 용기라고 대대적으로 떠들었던 ‘오슬로 협정’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생각입니다. 아마 오슬로 협정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들은 뭔가 그동안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미국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을 가운데 두고 이스라엘 측 라빈과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측 아라파트가 악수하는 사진을 기억하시는 분은 더욱 그러실 겁니다.
에드워드 사이는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배가 강화될 것이고,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을 거라 했습니다. 그의 예측이 맞았을까요? 올해가 2023년이니,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결과를 보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예측이 대체로 맞는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빼앗아 건설하고 있는 정착촌(점령촌)은 계속 늘어나고 있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안전이나 안보는 보장되지 않고, 물이나 도로 등 사회 운영의 기본이 되는 요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제도 여전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협정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현실은 이스라엘 지배의 안정화 쪽으로 기울어 있는 거지요. 팔레스타인인의 평화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구요.
우리는 아라파트와 고위층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PLO의 모든 사람들이 서안 지구에 결코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 108
우리는 스스로를 재조직해서 우리의 대표 기구인 PLO에게 우리를 제대로 대표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선거를 치르지 않거나 PLO가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도록 선거를 늦추기로 라빈과 아라파트 사이에 비밀 협의가 있었다는 말이 이스라엘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 114쪽
팔레스타인 하면 PLO고, PLO 하면 아라파트가 떠오르는 세상에서 PLO와 아라파트의 무능과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 보다 더 좋은 협상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멍하니 놓쳐버린 그들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우리 자신이 가진 문제를 들춰내고 공객적으로 얘기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고 힘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용기 있는 발언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덜 나빠지거나 조금씩 나아질 수 있는 거겠지요.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해 목소리를 높혔던 사람들 가운데 에드워드 사이드는 다행히도 암살을 당하진 않았습니다. 수많은 팔레스타인 활동가나 지식인들이 총과 폭탄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말입니다.
<펜과 칼>이 참 좋은 점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그의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의 느낌은 전반적으로 얼굴을 평범해(?) 보이는데 눈빛만은 살아있다는 겁니다.
저는 지성의 비관을 먼저 말하고, 이어 지성의 비관을 바탕으로 의지의 낙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나쁘지만 난 상관 안 해, 그냥 앞으로 나아갈 거야,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쁜 상황을 지성을 통해 분석한 다음 그 분석을 바탕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생각해야 합니다. 낙관적인 믿음과 변화의 능력과 욕망으로 말입니다. - 121쪽
그의 말을 들어보면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게 좋은 거니 하는 게 아니라 비판할 것은 드러내놓고 비판합니다. 때로는 매섭도록. 그렇다고 거친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비판은 비판대로 하면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해방이란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자고 말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 같은 그의 글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펜과 칼>에 담긴 그의 말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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