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평화.함께 살기/삶.사랑.평화-책과 영화

프레이리 - 페다고지

순돌이 아빠^.^ 2009. 12. 5. 20:50

 

나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 주제를 지배라고 본다. 여기에는 그 대립물인 해방의 주제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내포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인류학적 성격을 우리 시대에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고통스런 주제다. 비인간적 억압의 제거를 전제로 하는 인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물로 환원되는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132쪽

 

지난 주말, 가정 폭력에 관한 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부부로 살아 왔던 두 사람 사이에 가슴에 맺혔던 것이 있었고, 정말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남성은 술을 먹은 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여성은 공포에 싸여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사건의 과정에 있지도 않았고, 이 분들과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남성이 상대 여성을 사물화 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서 사물화 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사물화는 사회적/물리적으로 남성이 지배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쉽게 가능해 지는 거겠지요.

 

다른 모든 지배-피지배 관계도 마찬가지겠지요. 예를 들어 테레비 드라마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착한 자본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본가가 자기 회사 노동자에게도 착할까요? 물론 자본가가 착하냐 아니냐를 묻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물음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숫자가 됩니다.

 

저 인간에게 월급을 얼마를 줘야 하고, 보험료를 안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쉽게 짜르려면 몇 개월만 고용을 해야 하고 등이지요. 노동자는 이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도구이고,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데 귀찮은 존재일 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명령과 복종일 뿐 진정한 대화나 관용을 불가능해집니다.

 

해방 투쟁의 모든 단계에서 피억압자는 행동을 전제로 하는 비판적이고 자유로운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피억압자를 해방 행동에 성찰적으로 참여시키지 않고서 해방을 이루려는 것은 피억압자를 마치 불타는 건물에서 구해낼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에 해당한다. - 83쪽

 

‘대화로써 지배-피지배 관계를 없애고 해방을 이룰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음을 바꿀 수도 있는 거지요. ‘지배-피지배 관계를 없애고 해방을 이루지 않고서 대화가 가능하겠느냐?’. 여성이 해방되지 않고 남성-여성 사이에 사랑이 가능하겠냐는 겁니다.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배-피지배 관계가 사라지고 모든 인간의 관계가 평등과 연대의 관계로 바뀌어야겠지요. 그리고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해방으로 나가는 과정 자체가 해방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화 이론에서는 모든 단계의 혁명 활동이 민중과의 친교를 필요로 한다. 게바라가 말했듯이 친교는 협동을 낳고, 협동은 지도부와 민중을 융합시킨다. 이 융합은 혁명 활동이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공감적이며, 사랑과 의사소통과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만 가능하며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 221쪽

 

해방된 뒤에, 권력을 잡고 난 뒤에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피억압자 스스로가 해방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방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운동에 과정에서부터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몇 가지 글

 

사회학자인 내 친구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최근에 농민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켜 라티푼디움을 장악한 사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전술적인 목적에서 지주를 인질로 잡았는데, 어느 누구도 감히 지주를 감시하겠다고 용기있게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주 앞에 있는 것조차 두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죄의식을 불러왔다. 사실상 그 주인은 농민들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 페다고지 81쪽

 

인 : 난 못해요, 엄마.
라지 : 왜 못 해?
흑인 : 내가 백인들에게 어떻게 총질을 해요?
리지 : 그래? 그네들을 괴롭힐 다른 방도가 없잖아, 안 그래?
흑인 : 상대는 백인들이라구요, 엄마.
리지 : 그래서? 그네들은 그네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돼지잡듯 도살해도 괜찮단 말이냐?
흑인 : 그래도, 저들은 백인이잖아요.
이 것이 열등감의 표현일까? 아니다. 비존재의 감정이다. 백인이 선이라면 흑인은 악이다. 손에 총을 쥐고 있는 백인들, 그들은 항상 옳다. 죄인은 항상 나이므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나는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다. -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가운데

 

사회민주당의 중앙집중주의는 평당원이 당의 지도적 중심부에 맹목적으로 명령하고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근거에 의하면 사회민주당의 운동이 이미 당조직으로 포섭된 계급 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와, 아직은 당조직으로 흡수되지 않은 비조직적 인민 대중부문을 엄격히 구별짓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레닌의 중앙집권주의의 근간이 되는 두 원리는 정확히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모든 당 기관의 당중앙부에 대한 맹목적 복종 - 세밀한 부분까지 - 당 중앙부만이 모든 것에 대해 사고하고, 결정하고, 지도력을 발휘해간다. 2. 사회혁명적 주변인물과 조직화 혁명단위 사이의 엄격한 구별. - 로자 룩셈부르크의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가운데

 

이제 우리는, 러시아의 사회 민주주의 당 내의 “새로운 경향”의 기본적인 오류란 자생성에 굴종하는 것, 그리고 대중의 자생성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자들에게 많은 의식성을 요구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계급적 정치 의식은 오직 외부에서, 즉 경제 투쟁의 외부에서,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라는 영역 밖에서 노동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우리가 지적인 노동자 및 지식인 출신의 정치 투쟁 지도자들이 양성되도록 돕지 않는 한, 대중은 결코 정치 투쟁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가운데

 

페다고지는 교육학 쪽으로 유명한 책이지만 교육이라는 것이 꼭 학교 교사와 학생 사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이 책 또한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