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 예전에 길에서 봤던 [엘레지]의 영화 포스터가 떠올랐습니다.'귀향'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줬던 페넬로페 크루즈가 포스터 속에서 편안하게 웃고 있었거든요.
선수답게
대학교수인 데이빗이 콘수엘라를 처음 만난 것은 강의실에서였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파티를 연 데이빗은 콘수엘라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합니다. 콘수엘라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둥, 너는 예술작품이라는 둥 누가 봐도 작업용 발언이라는 게 표시 나는 말들을 선수답게 잘 날립니다.
작업 가운데 하나로 데이빗은 콘수엘라에게 그림을 보여 주면서 그림 속 사람이 콘수엘라를 닮았다고 합니다. 데이빗이 보여준 그림은 고야의 ‘옷 입은 마야’와 ‘옷 벗은 마야’인데, 옷 벗은 마야를 보여 주는가 싶더니 곧 옷 입은 마야를 보여줍니다.
고야, [옷 벗은 마야]
고야, [옷 입은 마야]
자신이 원하는 것은 옷 벗은 콘수엘라이지만, 초반부터 너무 솔직하게 나가면 작업이 잘 안 걸릴 수 있으니 속마음을 살짝 감추는 거지요.
집이 넓은데도 굳이 비좁은 계단에 앉아 콘수엘라와 대화를 나눕니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길을 열어주느라 데이빗은 콘수엘라 쪽으로 몸을 붙입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고, 누군가를 유혹하고 싶어서 서로가 맞닿을 수 있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본 경험을 갖고 계신 분들 많으시죠? 저를 포함해서. ^^
데이빗은 선수답게 작업을 이어 갑니다. 무조건 몸부터 들이미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데이빗은 고수답게 피아노를 치고 사진과 그림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요. 상대를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에게 끌려오도록 미끼를 던지는 겁니다. 대~~~단한 내공의 작업 걸기 선수 나셨습니다, 그죠?
지금 이 순간의 당신
강의 도중 데이빗은 ‘예술 작품은 여러분에게 지금의 당신이 누군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라고 하죠. [엘레지]가 지금의 우리가 누군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듯이 말입니다. (제가 가진 영화 파일의 자막에는 ‘지금’이란 말이 빠져 있었습니다만)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자주 나오는 대사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기도 한 것이 ‘지금’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콘수엘라 :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어요...? 나와의 미래를?
데이빗 : 너와의 미래는 겁나
콘수엘라 : 겁난다구요?
데이빗 : 그래
콘수엘라 : 왜요?
데이빗 : 거야... 30년이나 차이나니까. 우리 둘 나이차 말야. 게다가 넌 앞날이 창창하잖아
그저 몇 번의 성관계로 끝날 줄 알았던 관계가 점점 깊어지고 길어집니다. 데이빗은 혼란과 갈등 속으로 빠집니다.
지금은 끝이 난 자신의 결혼을 인생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데이빗은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지고, 저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지요.
깊은 관계에 대한 두려움에 나이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져 데이빗은 콘수엘라가 좋으면서도 이리저리 망설입니다. 그런 데이빗에게 콘수엘라가 한마디 던집니다.
내가 어떻게 할 건지가 아니라 나랑 뭘 하고 싶은지 물었어요
여러분은 혹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으면서도 내가 무엇이 부족하고 모자란 지를 계속해서 되뇐 적은 없으신가요? 나의 성격, 나의 생각, 나의 직업, 나의 나이 등 내가 그 사람에게 뭐가 부족하고 내가 그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불행해질지에 대한 생각을 반복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정작 상대방은 그런 문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데이빗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과거에 대한 질투심까지 가득합니다. 콘수엘라가 과거에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어린애들도 자기 장난감을 독차지하려 하죠. 싫증이 나고, 새 장난감을 갖고 싶을 때 까지...
콘수엘라는 지금 데이빗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느냐를 묻는 반면 데이빗은 과거와 미래의 콘수엘라에 대한 물음을 반복합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물음을 반복하면 할수록 콘수엘라의 마음은 데이빗에게서 멀어지는데도 그 물음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얽매고 있는 거지요.
데이빗은 대학교수에다 책의 저자이기도 하고 매주 1번씩 방송에서 문학에 대해 얘기 하는 잘나가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잘나가는 데이빗이지만 속으로 보면 열등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리고 데이빗은 콘수엘라가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을 떠날 거라 생각합니다.
난 알았습니다 시간문제일 뿐... 언제든 젊은 녀석이 그녀를 발견하고, 뺏어갈 거라는 걸
열등감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갖게 되는 생각입니다. 데이빗은 있지도 않은 인물에 대해 열등감을 가집니다. 열등감은 소유욕에서 나옵니다. 내가 콘수엘라를 가지려고 하지 않으면 젊은 놈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단 한번도, 내 그것이 그리웠다곤 안 할 겁니다
남성인 데이빗의 열등감은 성적 능력과도 관련 있습니다. 다른 남성과 콘수엘라가 성관계를 갖는 상상을 하며 콘수엘라가 하지도 않은 생각에 자신이 빠져 드는 거죠. 있지도 않은 다른 남성의 젊고 힘 있는 성기를 상상하며 살아 존재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겁니다.
남자는 사랑을 나누며, 그간 자신을 굴복시킨, 모든 것에 복수를 합니다.
남성에게 성은 단순히 성욕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00을 따먹었어' '그 여자 다리 한 번 걸어 넘기고 니 여자로 만들어'와 같은 말이 가능하게 된 것은 성관계를 성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뿐만 아니라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수단으로도 보는 거지요.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여성은 '나의 여자'가 아닌 '그의 여자'가 되는 겁니다.
전쟁 시기 집단 강간이 벌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강간이 적을 향한 복수와 명예 훼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편 남성의 소유인 여성을 통해 적을 괴롭히겠다는 거지요.
데이빗이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혹시나’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괜히 한 사람에게 깊이 빠졌다가 상처 받고,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런 고통의 순간이 오기 전에 먼저 관계를 끝내는 거지요.
이런 불안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과거에 부모로부터든 애인으로부터든 그렇게 버림 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이 지금 느끼는 불안감의 뿌리인 거지요.
데이빗은 독립하고 싶었고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가 찾은 독립과 자유는 모래사장 위에 나무젓가락을 꽂아 놓은 셈이었습니다. 반듯하게 자신을 세웠다고 하지만 한 번의 파도로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나무젓가락인 거지요. 20년 동안 성적 관계를 유지해 왔던 친구 캐롤린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던집니다.
우린 평생을 십대처럼 행동해왔어, 인생을 허비하며... 뭘 쫓았던 거지?
캐롤린은 옷 잘 차려 입고 미국 전역을 날아다니며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성공한 여성이지요. 캐롤린은 인터넷을 통해 일 년에 몇 번 데이트 할 사람을 찾아 늘 같은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만남이란 부담 없고 가벼워서 좋기는 하지만 언제나 허전합니다.
헤어진 지 2년 만에 콘수엘라가 유방암을 안고 데이빗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가슴이 없어도 날 사랑할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고, 다시 사랑하고 싶지만 과거 데이빗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거지요. 하지만 헤어져 있는 동안 데이빗은 달라졌습니다. 유방 수술을 앞둔 콘수엘라의 벗은 몸을 사진에 담는 데이빗의 눈빛은 과거 데이빗의 눈빛이 아닙니다.
작업을 걸기 위해 콘수엘라를 예술 작품이라고 하던 것과 달리 이제는 고야의 그림을 보듯, 성적 대상이 아닌 살아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콘수엘라를 느낄 수 있게 된 거지요.
오늘 읽은 소설을 10년 뒤에 다시 읽으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바라보는 대상은 변하지 않았는데 바라보는 내가 바뀜으로써 대상이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거지요.
욕망으로 가득한 눈빛을 거두면 상대가 더 깊고 큰 의미로 다가올 겁니다. 주체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를 이끌기도 하는 거니까요.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콘수엘라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애인을 소개하고 싶어 하지만 데이빗은 끝내 망설이며 나서지 못합니다. 서른 살이나 많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웠던 겁니다. 그런 데이빗에게 콘수엘라가 던지는 한 마디가 [엘레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입니다.
왜 내게 이러는 거에요?
영화 속에 계속 나오는 말이 ‘나이’입니다. 한국 사회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화 가운데 하나도 나이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1972년 생인데, 72년에 태어난 사람이 75년에 태어난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고, 69년에 태어난 사람보다 더 모자랄 것도 없습니다. 하늘 아래 햇빛 받으며 살기는 노인이나 어린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나이 먹는다고 철든다는 보장 없고, 나이가 적다고 어리석으라는 법 없습니다. 서른 살 적은 콘수엘라가 서른 살 많은 데이빗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한국에서 나이는 인간을 위아래로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나누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어린놈이 뭘 알아?’ ‘에이 이 나이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식이죠.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노인들이 사랑에 빠지고 성관계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더럽다’, ‘추잡하다’ 식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도대체 다 늙어 빠진 노인들이 무슨 사랑이고, 성관계냐는 거지요.
나이는 내가 태어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말할 뿐, 나이 들었다고 해서 개나리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얼굴에 주름이지고 뱃살이 늘고 기운이 떨어진다고 해서 느끼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다.
말 못하는 갓난 애기도 누가 자기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지를 느끼고 마음에 새깁니다. [엘레지] 속 조지는 곧 죽어 가면서도 다른 이에게 입을 맞춥니다. 설사 몸을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마음은 살아 있는 거지요.
영화 맨 끝에 암 수술을 받고 침대에 누워 있는 콘수엘라가 ‘당신이 그리울 거에요I will miss you’라며 미래 시제로 말을 합니다. 그러자 데이빗이 제 몸을 콘수엘라 곁에 누이며 ‘나 여기 있어I'm here'라며 현재 시제로 말합니다. 자막에는 ‘나 여기 있어’라고 나왔는데, ‘나 지금 여기 있어’라고 하는 게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얘기 하나가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바닷가에서 작은 배를 등지고 잠을 자고 있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젊은이 : 할아버지 왜 고기 잡으러 안 나가세요?
할아버지 : 고기 잡아서 뭐하려고?
젊은이 : 돈 벌어야죠
할아버지 : 돈 벌어서 뭐하게?
젊은이 : 젊었을 때 돈을 벌어야 늙어서 편하게 바람도 쐬고 휴식도 즐기고 그러죠
할아버지 : 지금 내가 그러고 있잖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미래는 현재로부터 이어진 시간입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다른 이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느냐가 미래의 내 모습을 결정하게 됩니다.
미래 때문에 현재를 버린다면, 꿈속의 미래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평화.함께 살기 > 삶.사랑.평화-책과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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