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팔레스타인 갔던 이야기를 늦게나마 쓰기도 하고 고치고도 있는 글)
팔레스타인, 내 가슴에 물든
47_이별 이별 이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머문 데이르 알 고쏜과 이별을 하고 라말라로 왔습니다. 지난 며칠은 특별한 계획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그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하며 이별을 준비하는 것 뿐이었으니깐요.
오랜 연인처럼
며칠 전 새벽에 잠에서 깨어 보니 와엘이 아직 안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 화장실 갔다 와서 다시 잘까 하다 와엘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니 와엘의 영어와 저의 아랍어가 꽤 많이 늘어서 점점 대화가 깊어집니다.
그동안 와엘이 제게 묻고 또 물었던 것은 ‘팔레스타인에 또 올 거에요?’ ‘언제 올 거에요?’입니다. 한 번은 제가 그냥 농담 삼아 ‘오가는 비행기 값이 많이 드니깐 돈 생기면 올게요’하니깐 와엘이 ‘내가 돈 벌어 보내 줄 테니깐 와요’라고 했습니다.
길에 핀 하얀 꽃
친구들과 놀다가도 저희가 한국 가는 얘기가 나오면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집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무거워지는 분위기 때문에 우리가 되레 분위기 수습하려고 웃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정말 곧 떠날 날이 다가 왔습니다.
새벽에 두 남자가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제가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왜 갑자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흐무드의 세 여동생 마라, 아이야, 저밀라 얘기를 하다가 마음이 아파 또 눈물. 와엘도 덩달아 눈물.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와엘이 갑자기 툴카렘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창밖엔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와엘 병원 간다고, 외상값 받으러 간다고, 은행 간다고,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간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길인데 어쩜 이것이 와엘과 이 길을 오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새벽부터 쏘주라도 한 잔 하겠지만 우리는 그저 빵과 먹을거리를 사서 농장으로 갔습니다. 제가 머물기를 좋아했고 잠도 자고 바람도 쐬던 곳이지요. 라마단 끝나고는 이곳에서 함께 모여 칠면조와 닭도 잡아 먹었구요.
우리들의 추억이 묻어 있는 농장에서 와엘과 함께 아침을 맞았습니다. 이별을 앞둔 연인 마냥...
다시 세바스티아
떠나기 전에 그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 마흐무드 가족들에게 뭔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리저리 의논하다 함께 세바스티아로 가기로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세바스타아는 유명한 곳이고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거든요. 와엘의 차와 함께 쎄르비스를 한 대 대절해서 지난 일요일 세바스티아로 갔습니다.
세바스티아에서 친구들과
YDA 사무실에서 회원들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저희 때문에 두 마을 YDA 회원들이 만나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로마 유적을 둘러보는데 위즈단과 위즈단 동생 마라가 미니가 이제 우리보다 더 잘 아니깐 저보고 안내를 하라고 해서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몇몇 사람은 이슬람 사원에 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합니다. 제가 얼른 뛰어가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사서 아이들에게 줬습니다. 무엇보다 이날은 마흐무드의 세 여동생 마라, 아이야, 저밀라에게 한국에서 왔던 사람들과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날이거든요.
머문 시간과 오간 시간이 거의 비슷한 여행을 마치고 위즈단과 니달과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밤길을 돌아오는데 아쉬움이라는 말이 길에 뿌려졌습니다.
안녕 잘 있어
오늘 아침, 드디어 모두와 이별을 할 시간입니다. 일찍 마흐무드 집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가기 전에 인사를 해야 하니깐요. 가기 전에 종이에다 제 이메일과 핸드폰 번호 그리고 주소를 적어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하라구요. 이 집 컴퓨터는 고장 나 있고 인터넷도 안 되고 핸드폰은 돈이 드니 편지라도 하라고 주소를 적은 거지요. 저밀라를 오라고 했고 슈룩에게 통역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종이와 함께 봉투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저밀라, 편지를 보내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깐 이걸 써.
꼭 편지가 아니어도 아이들이 뭔가 필요로 할 때 쓰라고 주고 싶어서 봉투에다 돈을 넣어 갔던 겁니다. 슈룩이 펄쩍 뜁니다. 돈은 안 된다구요. 제가 슈룩을 달래며 난 이제 간다,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다, 아이들이 뭔가 필요할 때 이 돈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슈룩은 저한테 봉투를 던지고 저는 다시 던지고 몇 번을 했더니 슈룩이 아빠가 화낼 거라고 합니다. 그러길 몇 번 할 수 없이 봉투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아이들과 이별을 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귀여운 꼬마와 카메라를 든 반다
다 울었습니다. 아이야는 이런 거 하기 싫다고 얼른 나가 버리더라구요. 마라를 꼬옥 껴안았습니다. 마라도 울고 저도 울었지요. 마라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문 밖을 나섭니다. 누군가와 이런 이별을 해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니 와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쓰던 한국에서 가져간 부채, 컵 등을 와엘에게 줬습니다. 와엘이 이걸 보면서 미니 생각할 거라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저도 울컥하더라구요. 우리를 데리러 택시가 왔습니다. 짐을 들고 택시를 타기 전 와엘과 껴안으며 서로 또 울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도 아무 말을 못하더라구요. 택시가 떠나는 순간 마흐무드가 손을 잡으며 웁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그렇게 데이르 알 고쏜을 떠나 라말라로 왔습니다. YDA 사무실에 들러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마음 써준 할라와 탈랄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지요. 가자지구에 있는 칼리드한테도 마지막 전화를 했습니다. 다음에는 꼭 만나자고 전화를 끊었는데 몇 시간 있다가 칼리드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더라구요. 이번에 못 만나서 아쉽고, 가자에 못 온 것에 대해 화내지 말고 다음에는 꼭 가자에 와라 등등의 말을 건넸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당구 치기
공놀이가 한창인 운동장
저녁에는 라말라 사는 칼리드를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제가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밤에는 꼭 칼리드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칼리드에게는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일자리도 유엔 관련된 곳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한국인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사무실이 예루살렘에 있어서 예루살렘을 오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한국 MBC에서 촬영을 왔을 때 칼리드가 안내를 했었고, 그때도 예루살렘을 가기는 갔는데 이스라엘이 칼리드보고는 차 안에만 있으라고 했다더라구요.
이번 팔레스타인 방문 길에 처음 칼리드를 났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3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다시 왔다고 하니깐 칼리드가 한쪽 눈을 찡그리는 특유의 재미난 표정을 지으며 ‘그럼 다음에 또 3년이 지나야 오겠네?’해서 제가 손을 흔들며 ‘아니야 아니야’ 했었거든요. 칼리드와 작별 인사를 하며 칼리드가 좋아하는 쏘주를 다음번엔 꼭 가져 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가져 오라는 쏘주는 안 가져 오고 맨날 인삼차를 가져 온다고 불만인 칼리드거든요. 여러분이 혹시 저보다 빨리 팔레스타인에 오시게 되면 제가 드릴 테니깐 칼리드한테 쏘주 좀 전해 주실래요?
팔레스타인에서의 마지막 날 밤입니다. 지금 제 가방 안에는 친구들이 준 온갖 선물들이 가득합니다. 편지, 인형, 볼펜, 수첩, 향수, 나무 조각 등등 말입니다. 저는 별로 해 준 것이 없는데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선물을 준비해서 안겨 주더라구요. 사실 아직 떠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필라펠이나 레벤도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깐요. 보고 싶은 사람들도 전화를 하면 언제든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구요.
전화... 목소리... 길도 사람도 끊어지듯 전파도 끊어지는 예루살렘 가기 전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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