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순수 실천 이성의 동기들에 대하여
합법칙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법칙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닌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그 행위가 문자적으로는 도덕적으로 선하나, 그러나 정신의 면에서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 152
우리가 선험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것은, 도덕법칙은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우리의 모든 경향성을 방해함으로써 고통이라고 불리 수 있는 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 153
모든 경향성들은 함께-경향성들도 웬만한 정도의 체계로 포괄될 수 있고, 그때 이 경향성들의 충족이 자기 행복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이기심(獨我主義)를 형성한다. 이 이기심은 자기 사랑, 곧 모든 것을 능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호의(自愛)의 마음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흡족(自滿)의 마음이다. 전자를 특별히 사애, 후자를 자만이라 일컫는다. 순수 실천이성은 사애를 순전히 단절시킨다. 자연적으로, 도덕법칙에 앞서 우리 안에서 활발히 작동하는 그런 사애를 오직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조건에 국한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때 그것을 이성적 자기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순수 실천 이성은 자만은 숫제 타도한다. 윤리 법칙과의 합치 이전에 생긴 모든 자존심의 요구들은 허망한 것이고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 153
그런데 우리는 감성적 존재자들인 우리의 자연본성이 다음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즉 제일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욕구 능력의 질료-희망의 대상이든 공포의 대상이든, 어쨌든 경향성의 대상들-이고, 정념적으로 규정받을 수 있는 우리 자아는,-이런 자아는 그 준칙들로 말미암아 보편적 법칙 수립에 전혀 적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마치 우리의 전 자아를 형성하는 양-자기 요구들을 앞장세우고 그리고 제일의 근원적인 것으로 관철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 자연 본성의 성질이다. - 154
감정에 대한 부정적 작용결과(즉 불편함)는 감정에 대한 모든 영향이나 감정 일반과 마찬가지로 정념적이다. - 155
도덕법칙은 실천적인 순수 이성을 매개로 한 행위의 형식적 규정 근거이고, 또한 선․악이라는 이름 아래의 행위 대상들의 질료적인, 그러나 단지 객관적인 규정 근거임과 함께, 또한 이 행위를 위한 주관적 규정 근거, 다시 말해 동기이기도 하다. - 156
모든 감정은 감성적인 것인데, 반면에 윤리적 마음씨의 동기는 모든 감성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 156
법칙에 대한 존경은 윤리를 위한 동기가 아니라, 오히려 윤리 자체이며, 주관적으로 동기로 간주되는 것이다. 순수 실천이성은 그와 맞서는 자기 사랑의 모든 요구를 물리침으로써 이제 홀로 영향력을 갖는 법칙에 권위를 부여하니 말이다. - 156
존경은 항상 오직 인격들을 향해 있지, 결코 물건들을 향해 있지 않다. - 157
폰트넬은 말하고 있다: “지체 높은 사람 앞에서 나는 몸을 굽히나, 내 정신은 굽히지 않노라”고. 나는 여기에 덧붙여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의식하는 것보다도 높은 정도의 방정한 품성을 그에게서 감지하는 지체 낮은 보통 시민 앞에서 내 정신은 굽힌다. 내가 하고 싶어 하든 말든,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내 우월한 지위를 흘려보지 않도록 내 머리를 제아무리 높이 쳐든다 해도 말이다.” - 158
한 활동의 방해물을 줄이는 일은 무엇이나 이 활동 자체를 촉진시키는 일 - 161
일체의 규정 근거에서 경향성을 배제하는, 객관적으로 실천적인 행위를 의무라 하며 - 163
의무에 맞게 행위했다는 의식과 의무로부터, 다시 말해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인해 행위했다는 의식 사이의 구별 - 163
전체 창조물에 있어서 사람들이 의욕하고,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한낱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오로지 인간만은,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목적 그 자체이다. 인간은 곧 그의 자유의 자율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이다. - 172
순수 실천이성의 진정한 동기는 이러한 성질을 갖는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순수한 도덕법칙 자신이다. - 173
순수 이론 이성의 분석학은 지성에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의 인식을 다루는 것이고, 그러므로 직관에서, 그러니까(이 직관은 항상 감성적이므로) 감성에서 출발해서, 이로부터 비로소(이 직관의 대상들의) 개념들로 전진해야만 했고, 이 두 가지를 앞세운 연후에야 원칙들로써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실천이성은 대상들을, 그것들을 인식하기 위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능력을, (대상들의 인식에 맞게) 저 대상들을 실현하기 위해, 다룬다. 다시 말해 의지를 다룬다. - 174, 175
곧 그것은 대전제(도덕원리)의 보편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소전에서 가능한(선․악의) 행위들을 저 대전에 아래에 포섭시킴을 거쳐, 결론, 곧 주관적인 의지 규정(실천적으로 가능한 선과 이에 기초한 준칙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 176
이러한 비교들은 당연히, 어쩌면 언젠가는 전체 순수 이성 능력의(즉 이론적 및 실천적 이성 능력의) 통일의 통찰에 이르고, 한 원리로부터 모든 것을 도출할 수 있다.-이것이야말로 자기 인식들의 완벽한 체계적 통일에서만 온전한 만족을 얻는 인간 이성의 불가피한 요구이다-는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 176
무릇 행복론과 윤리론을 구별함은, 즉 전자에서는 경험적 원리들이 전체 토대를 이루는 반면에, 후자에서는 그런 것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음을 구별함은 순수 실천 이성 분석학의 첫째의, 그것에 부과된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 178
행복의 원리와 윤리를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그렇다고 곧 양자를 대립시키는 일은 아니다. 순수 실천이성은 행복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무가 문제가 될 때는 그런 것을 전혀 고려치 않으려 하는 것이다. - 179
만약 우리의 의지 자유가 다름 아니라 후자 같은 것(초월적인, 다시 말해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가령 심리적인 비교적인 자유)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고기 굽는 자전 기구의 자유보다 나을 게 없을 터이다. 이런 기구도 한번 태엽만 감아주면 스스로 자기 운동을 한다. - 184, 185
이런 사태와 완전히 합치하는 것은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우리 안의 저 놀라운 능력의 판결들이다. - 186
우리의 예지적 실존의 법칙(즉 도덕법칙)이 문제가 될 때, 이성은 시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건이 나의 행실에 속하느냐 않느냐 만을 물어, 속할 경우에는 그 사건이 지금 일어난 것이든 지난날에 일어난 것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동일한 후회감을 이 사건에 도덕적으로 결합시키니 말이다. - 187
한 학문이 발전하려면, 모든 난점들을 들춰내고, 심지어는 아직 남몰래 숨겨져 있는 난점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난점들은 어느 것이나 하나의 구제책을 일깨우고, 구제책은 발견되기만 하면 학문의 성장에-외연에서든 내포에서든- 반드시 도움을 주고, 그러므로 그로 인해 장애점들조차도 학문의 철저성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니 말이다. 이에 반해, 난점들을 고의로 숨기거나 한낱 진통제로써 고쳐놓으면, 그것들은 조만간 불치의 병을 일으키고, 이 병은 그 학문을 철저한 회의주의에 빠뜨려 궤멸시킨다. - 192
수학적 범주들...역학적 범주들...첫번째 부류의 (즉 크기와 질의) 범주들은 항상 동종적인 것의 종합을 포함한다...두 번째 부류의 범주들(즉 사물의 인과성과 필연성의 범주들)은 이 같은 (종합에서의 조건 지어진 것과 조건의) 동종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직관 중의 잡다로부터 합성되는 대로의 직관이 아니라, 어떻게 직관에 대응하는 조건 지어진 대상의 실존이 조건의 실존에 (지성 안에서 이와 연결된 것으로서) 덧붙여지는가가 표상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 194
감성 세계의 원인 결과 계열 중에 있는 조건 지어진 것에 이르는 인과성의 종합에서 더 이상 감성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지 않은 원인성을 생각하는, 얼핏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방식들이 실제로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 194
그것은 이미 다른 이들에 의해서도 인식되고 칭송된 준칙, 즉 모든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정확성과 공명함을 다하여 무엇에 방해받음 없이 자기 길을 계속 갈 것이며, 그 분야 밖에서 어쩌면 부딪치게 될지도 모르는 바를 개의할 것 없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한, 참되고 완벽하게 그 연구를 완수하라는 준칙을 확고하게 해 준다...만약 저술가들이 보다 더 큰 공명정대함으로써 저작에 임하려는 결심만 할 수 있다면, 많은 착오와 많은 헛수고를-이것은 환상 위에서 세워진 것이니까-덜게 될 것이다.- 197
제2권
순수 실천 이성의 변증학
제1장
순수 실천 이성 일반의 변증학에 대하여
순수 실천이성으로서 이성은 (경향성과 자연적 필요에 기인하는) 실천적으로-조건지어진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조건자를 찾는바, 그것도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설령 (도덕법칙이) 주었다 할지라도, 순수 실천이성의 대상의 무조건적 총체를 최고선의 이름 아래서 찾는다.
이 이념을 실천적으로, 다시 말해 우리의 이성적 태도의 준칙을 위해 충분하게 규정하는 것은 지혜론이다. 그리고 학문으로서 이 지혜론은 옛 사람들이 낱말을 이해했던 바로 그 의미에서의 철학이다. 철학은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기에 최고선을 세울 개념에 대한 가르침이자, 그를 통해 최고선이 얻어질 수 있는 대토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 200
철학은 지혜 자체와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이상일 터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이성 안에서만 표상되는 것이고, 반면에 주관적으로는 인격에 있어서 단지 부단한 노력의 목표일 따름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보편적 선에 기울이는 확실한 관심에 있어서) 철학은 틀림없는 효과를 자기 인격에서 본보기로 제시할 수 있는-옛 사람들도 저 명예로운 이름을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요구했다-사람만이 철학자라는 외람된 이름 아래서 저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일컬을 자격이 있다. - 200, 201
도덕법칙만이 저 최고선과 그것의 영향 내지 촉진을 객관으로 삼게 하는 근거로 여겨져야 하는 것 - 201
제2장
최고선의 개념 규정에서 순수 이성의 변증학에 대하여
최상선은 자신 위에 더 이상의 조건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항상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는 쾌적한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덕법칙에 알맞은 처신을 조건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 204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으로 인도하는 자기의 준칙을 의식함, 그것을 덕이라고 말했고, 반면에 스토아학파는 자기의 덕을 의심함이 행복이라 말했다. - 204
두 명제들 중 첫째의 것, 즉 행복을 얻으려는 노력이 덕 있는 마음씨의 근거를 만들어낸다는 명제는 단적으로 거짓이다. 그러나 둘째의 것, 즉 덕 있는 마음씨는 필연적으로 행복을 만들어낸다는 명제는 단적으로 거짓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감성 세계에서의 원인성의 형식으로 보아지는 한에서, 그러니까 내가 감성 세계에서의 현존을 이성적 존재자의 유일한 실존 방식으로 받아들일 때만, 그러므로 오직 조건적으로만 거짓이다. - 208
곧 행위들이 한탄(유쾌한 감정을 좇아) 의무에 맞게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발생하는 일-이것이야말로 모든 도덕적 교양의 참 목적이어야 하는바-에 이를 수 있다. - 212
경향성이 제아무리 아름답게 상상될지라도, 경향성들의 충족에 의거하고 있는 감성적 만족...은 우리가 만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는 결코 부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경향성들은 전변하며, 사람들이 그것들에 보내는 호의와 함께 자라고, 사람들이 채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허를 언제나 남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향성들은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고, 그가 비록 그것들을 떼어버릴 수는 없다 해도, 그것들은 그로 하여금 그것들에서 벗어나 있으려는 소망을 갖도록 강요한다. - 212
행복은 단지 도덕적으로 조건 지어진,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윤리성의 결과이다. 이 종속에서만 최고선은 그것을 필연적으로 가능하다고 표상할 수밖에 없는 순수 실천이성의 전 객관이다. 왜냐하면, 최고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라는 것이 순수 실천이성의 지시명령이기 때문이다. - 214
이성에 의해 결합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것 사이에서 우위란 하나가 나머지 것들과의 결합에서 첫 번째 규정 근거가 되는 우선성을 뜻한다. 좀 더 좁은, 실천적 의미에서 우위란 (다른 어떤 것의 뒤에 놓일 수 없는) 하나의 관심에 다른 것들의 관심이 종속하는 한에서, 그 하나의 관심의 우선성을 의미한다. - 214, 215
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관심은 최고의 선험적 원리들에까지 이르는 객관의 인식에 있고, 실천적 사용의 관심은 궁극적인 완전한 목적과 관련하여 의지를 규정하는 데에 있다. - 215
순수 사변 이성과 순수 실천 이성이 한 인식으로 결합함에 있어서, 곧 이 결합이 대략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이성 자신에 기초한, 그러니까 필연적인 것이라 한다면, 실천이성이 우위를 갖는다...우리는 순수 실천이성에 대해 사변 이성에 종속하고 그래서 질서가 거꾸로 될 것을 전혀 요구할 수가 없다. 모든 관심은 궁극적으로는 실천적인 것이고, 사변 이성의 관심조차도 단지 조건적인 것으로 실천적 사용에서만 완벽한 것이니 말이다. - 217
이 세계에서 최고선의 실현은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의지의 필연적 객관이다. 그러나 이 의지에서 마음씨의 도덕법칙과의 온전한 맞은 최고선의 최상 조건이다...그러나 의지의 도덕법칙과의 온전한 맞음은 신성성, 즉 감성 세계의 어떠한 이성적 존재자도 그의 현존의 어떤 시점에서도 이를 수 없는 완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맞음은 실천상 필연적인 것으로 요구되므로, 그것은 온전한 맞음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전진 중에서만 만나질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실천적 전진을 우리 의지의 실재적 객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 실천이성의 원리상 필연적인 일이다. - 218
그러나 이런 무한한 전진은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의 무한히 지속하는 실존과 인격성-이것을 사람들은 영혼의 불사성이라고 부르거니와-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실천적으로 오직 영혼의 불사성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 - 218
나는 요청이라는 말로써 하나의 이론적인 명제, 그러나 그것이 선험적인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실천 법칙과 불가분리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한에서, 그 자체로는 증명될 수 없는 명제를 뜻한다. - 218
앞서의 분석에서 도덕법칙은 감성적 동기들의 전혀 아무런 참여 없이 순전히 순수 이성에 의해 지정되는 실천적 과제, 곧 최고선의 첫째의 가장 고귀한 부분인 윤리성의 필연적 완벽성이라는 실천적 과제에 이르렀고, 이때 이 과제는 오로지 영원에서만 온전히 해결될 수 있으므로, 불사성의 요청에 이르렀다. 바로 이 도덕법칙은 또한 최고선의 둘째 요소, 곧 저 윤리성에 알맞은 행복의 가능성에, 앞서와 마찬가지로 사욕없이 순전히 무당파적인 이성에 의해서, 곧 이 결과에 일치하는 원인의 현존이라는 전제에 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순수 이성의 도덕법칙의 수립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우리 의지의 객관인)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신의 실존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 220
최고선을 위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인 한에서, 자연의 최상 원인은 지성과 의지에 의해 자연의 원인(따라서 창시자)인 존재자, 다시 말해 신이다. 따라서 최고의 파생적 선(즉 최선의 세계)의 가능성의 요청은 동시에 최고의 근원적 선의 현실성, 곧 신의 실존의 요청이다. - 221
다만 이를 상정함은 이론이성과 관련해서는 설명 근거로 보아 가설이라 일컬을 수 있겠으나, 도덕법칙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되는 객관(즉 최고선), 그러니깐 실천적 의도에서의 요구에 대한 이해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신앙, 그것도 순수한 이성 신앙이라 일컬을 수 있다. - 222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그들의 최상의 실천 원리, 곧 덕을 최고선의 조건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옳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덕의 순수한 법칙에 요구되는 덕의 정도를 이승 생활에서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현자의 이름 아래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그의 자연본성의 모든 제한을 넘어 높이 확대하여 모든 인간지에 모순되는 어떤 것을 상정 -223
도덕법칙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런 행복도 약속하지 않는다. - 225
모든 것은 사욕 없는 순전히 의무에만 기초한다. 공포나 기대가 동기로 기초에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도덕법칙은 세계에서 최고의 가능한 선을 나의 모든 처신의 최종 대상으로 삼을 것을 지시명령한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나의 의지를 성스럽고 선량한 세계 창시자의 의지에 합치시킴으로써밖에는 이 최고선의 실현을 기대할 수 없다. 최대의 행복이 (피조물에 있어서 가능한) 최대한의 윤리적 완전성과 가장 정확한 비례로 결합되어 있다고 표상되는 전체 개념으로서의 최고선의 개념 안에는 내 자신의 행복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최고선의 촉진을 지시하게 되는 의지의 규정 근거는 행복이 아니라 도덕법칙이다. - 226, 227
그렇기 때문에 또한 도덕은 본래,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관한 교설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는 행복을 누릴 만한 품격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설이다. - 227
어떤 사람이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소유할 품격이 있는 것은 그가 이것을 소유하는 것이 최고선과 부합할 때이다. 이제 사람들은 품격 있음은 모두 윤리적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 227
우리가 세계 창조에 있어서 신의 최종 목적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세계에서의 이성적 존재자들의 행복이 아니라 최고선을 들 수밖에 없는바 - 228
지혜란 이론적으로 보면 최고선에 대한 인식이요, 실천적으로는 의지의 최고선과의 알맞음을 의미 - 228
인간은 도덕법칙의 주체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의 주체이며, 이 주체를 위하여 그리고 이 주체와 일치해서만 도대체 무엇인가가 신성하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도덕법칙이 자유의지인 인간 의지의 자율에 기초해 있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반드시 그가 복종해야만 할 것에 동시에 일치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229
이것들은 불사성, 적극적으로 (예지의 세계에 속하는 한에서의 한 존재자의 원인성으로) 보아진 자유, 신의 현존의 요청들이다. 첫째 요청은 도덕법칙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위해 알맞은 시간의 길이라는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조건에서 나온다. 둘째 요청은 감성 세계로부터의 독립성과 예지 세계의 법칙에 따라 자기의 의지를 규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 자유의 필연적 전제에서 나온다. 셋째 요청은 최고의 독립적인 선,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의 전제 아래 최고선이 있기 위한 그러한 예지 세계를 위한 조건의 필연성에서 나온다. - 230
사변 이성에게는 초험적이었던 것이 실천이성에 있어서는 내재적인가?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다만 실천적 의도에서만 그러하다. - 231
위에서 말한 사변 이성의 세 이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인식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불가능한 것도 아닌 (초험적) 사상들이다. - 233
이 이성의 순수한 실천 능력에서는 저 이념들은 내재적이고 구성적이다. 그것들은 순수 실천이성의 필연적 객관(즉 최고선)을 실현시키는 근거들이니 말이다. - 234
신이라는 개념이 물리학에 (그러니까 또한, 일반적인 의미에서 오직 이 물리학)의 선험적인 순수 원리들을 내용으로 갖는 것인 형이상학에) 속하는 개념이냐, 아니면 도덕에 속하는 개념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자연의 구조들이나 그 변화를 설명함에 있어서 누가 만물의 창시자라는 신에서 그의 출구를 취하면, 그것은 적어도 물리적 설명은 아니고, 도대체가 그로서는 철학을 가지고서는 더 할 게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그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그 자신 이해하지도 못하는 무엇인가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 238
지성 안에 있는 이 개념에 지성 밖에 있는 한 대상이 대응해 놓이는 것 - 239
도덕법칙은 순수 실천이성의 대상인 최고선 개념을 통해 최고 존재자로서의 근원 존재자 개념을 규정한다. - 240
신 개념은 근원적으로 물리학에, 다시 말해 사변 이성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도덕에 속하는 개념이다. - 240
지혜로 가는 길은, 만약 그 길이 안전하고 통행이 불가능하다거나 오도하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 인간으로서는 불가피하게 학문을 통하여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학문이 저 목표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는 오로지 학문을 완성한 후에야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242
제2편
순수 실천 이성의 방법론
순수 실천 이성의 방법론은 어떻게 우리가 순수 실천이성의 원칙들에게 인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입구를 만들어줄 수 있는가, 즉 인간의 마음의 준칙들에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실천적인 이성을 주관적으로도 실천적이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방식을 뜻한다. - 256
순수한 도덕적 동인만이 성품(즉 불변적 준칙에 따르는 실천적으로 일관된 사유방식)을 기초 짓는 유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존엄함을 느끼도록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게 그 자신도 기대하지 못했던 힘을 주어, 감각적 예속성이 지배적이 되려 하는 한에서, 일체의 감각적 예속성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고, 그의 예지적 본성의 독립성과 그가 그에 헌신토록 정해진 것으로 보는 영혼의 위대함에서 그가 바치는 희생에 대한 풍족한 배상을 발견하도록 한다. - 256
단지 내가 바라는 바는 많은 감상적인 그들이 마구 써대는 이른바 고결한(초과공적적인) 행위들을 가지고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모든 것을 순전히 의무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눈으로 그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는 의식에서 부여할 수 있는 가치에 맡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허한 소망과 오를 수 없는 완전성에 대한 동경으로 결말이 나는 것은 순전히 소설적인 영웅들만을 낳는바, 이런 영웅들은 초절적인 위대함에 대한 그들의 감정을 무척 자랑하면서 그 대신에 그들 영웅들에게는 단지 무의미한 사소한 일로 보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책무의 이행은 면하려들기 때문이다. - 259
원칙들은 반드시 개념들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 밖의 모든 토대 위에서는 단지 변덕들이 성립할 수 있을 따름이다. - 263
제일의 현안 문제는 도덕법칙에 따르는 판정을 모든 우리 자신의 행위와 타인의 자유로운 행위들의 관찰에 자연스럽게 수반하는 일로 만들어, 말하자면 습관화하여, 그 판정을 예리하게 하는 일이다. - 265, 266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점은, 과연 행위가 또한 (주관적으로) 도덕법칙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러므로 과연 행위가 행실로서 윤리적 정당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준칙의 면에서 마음씨로서 윤리적 가치도 갖는가 하는 물음이다. - 266
이제 두 번째 훈련이 그 업무에 들어간다. 실례들로서 도덕적 마음씨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의지의 순수성을 알아차리게 하는 일 말이다. - 267
이에 의해 학생은 자기의 자유의 의식에 대한 주의를 얻게 되고, 이 단념이 처음에는 고통의 감각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저 학생을 진짜 필요요구들의 강제로부터도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그에게 동시에 잡다한 불만족-이 모든 필요요구들이 그를 이에 끌어넣은 것이지만-으로부터의 해방을 알려주고, 그래서 마음은 다른 원천들로부터 만족의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 268
내적 자유는 경향성의 광포한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어, 어떠한 경향성도, 가장 애호받는 경향성조차도, 우리가 이제 그것을 위해 우리 이성을 사용해야만 하는 결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한다. - 268
이제 의무의 법칙은 그것의 준수가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적극적 가치에 의해 우리의 자유에 대한 의식 중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존경을 통해 더 쉬운 입구를 발견한다. 이 자신에 대한 존경에, 만약 그것이 충분히 기초 지어져 있다면, 인간에게 내적인 자기 검사에서 자기 자신의 눈에 자기가 하찮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겁나는 것이 없을 때, 이제 모든 선한 윤리적인 마음씨가 접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결하지 못한 타락하게 하는 충동들의 침입을 마음에서 막아내는 가장 좋은, 아니 유일한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 268
맺음말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이 양자를 나는 어둠 속에 감춰져 있거나 초절적인 것 속에 있는 것으로 내 시야 밖에서 찾고 한낱 추측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것들을 눈앞에서 보고, 그것들을 나의 실존 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전자는 내가 외적 감성 세계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내가 서 있는 그 연결점을 무한 광대하게 세계들 위의 세계들로, 천체들 중의 천체들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주기적인 운동의 한없는 시간 속에서 그 시작과 지속을 확장한다. 후자는 나의 볼 수 없는 자아, 나의 인격성에서 시작해서, 참된 무한성을 갖는, 그러나 지성에게만 알려지는 세계 속에 나를 표상한다. 이 세계와의 (그에 의해서 그러나 또한 동시에 저 볼 수 있는 모든 세계들과의) 나의 연결을 나는 앞서의 세계에서처럼 그렇게 한낱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필연적은 것으로 인식한다. 무수한 세계 집합의 첫째 광경은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을 없애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그것으로 그가 된 질료를, (어떻게 그리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은 후에는, 다시금(우주 안의 한낱 점인) 유성에게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광경은 지적 존재자로서의 나의 가치를 나의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법칙은 동물성으로부터, 더 나아가 전 감성 세계로부터 독립해 있는 생을 나에게 개시한다. 적어도 이것이 도덕법칙에 의해 이승의 생의 조건들과 한계에 제한받지 않고, 무한히 나아가는, 나의 현존의 합목적적 규정(사명)으로부터 추정되는 만큼은 말이다. - 271, 273
그러나 늦기는 했지만, 이성이 내딛고자 기획한 모든 발걸음들을 무리 충분히 숙려하고, 그 발걸음들로 하여금 다른 아니라 미리 충분히 숙고된 방법의 궤도 안에서 그 행로를 걷게 하는 준칙들이 보급된 후에는, 세계 건축물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얻었고, 이와 더불어 동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큰 다행스런 결과를 얻었다. 돌의 낙하, 투석기의 운동은 그 요소들과 거기에서 표출되는 힘들로 분해되고 수학적으로 작업되고 나면, 마침내 세계 구조에 대한 명료하고도 전 미래에서도 불변적인 통찰을 가져왔고, 그리고 이 통찰은 고찰이 전진해감에 따라 항상 오로지 확장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뿐, 결코 퇴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273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이것은 한편으로는 아직 조야한, 훈련되지 못한 판정의 착오를 막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훨씬 더 필요하거니와) 천재의 범람을 막을 수 있다. 천재의 범람에 의해서는 연금술의 도사들에 의해서 흔히 일어나는 바처럼, 아무런 방법적인 탐구나 자연에 대한 지식도 없이 몽상적인 보무들이 약속되고, 진짜 보물들은 내던져져 버린다. 한마디로 말해, (비판적으로 추구되고 방법적으로 이끌어지는) 학문이 지혜론에 이르는 좁은문이다. -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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