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 - [일반언어학강의] 제1부 일반 원리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김현권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언어 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사물과 명칭이 아니라 개념과 청각 영상입니다. 이 청각 영상은 순수한 물리적 사물인 질료적 음성이 아니라 음성의 심리적 각인, 즉 우리 감각이 나타내 주는 음성에 대한 표상입니다. - 134, 135

언어 기호는 양면을 지닌 심리적 실체로서 다음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두 요소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라틴어 단어 arbor의 뜻을 찾거나 라틴어로 ‘나무’라는 개념을 지칭하는 단어를 찾으려 할 때는, 이 라틴어가 인정하는 결합체만이 이 실체에 부합한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 135, 136

우리는 개념과 청각 영상의 결합체를 기호(signe)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현행의 용법에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청각 영상, 예컨대 단어(arbor 등)만을 가리킵니다. arbor를 기호로 부르는 것은, 단지 이것이 ‘나무’라는 개념을 지니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기호의 감각적 부분이라는 관념이 기호 전체에 대한 관념을 함축한다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 137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기호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개념과 청각 영상은 각각 기의signifié와 기표signifiant로 대체할 것을 제안합니다. 후자의 두 용어는 때로는 양자를 구분하고, 때로는 전체 기호와 이 둘을 구별하는 대립을 표시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 137

기표를 기의와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연합된 결과로서 전체를 의미하는 까닭에 언어 기호는 자의적이라고 훨씬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soeur'라는 관념은 기표로 사용되는 s-ö-r라는 일련의 음성과는 아무런 내적 관계도 맺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관념은 다른 어떤 음성 연쇄로도 잘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언어들 사이의 차이점과 서로 다른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boeuf'라는 기의는 프랑스 국경의 이쪽에서는 기표로 b-ö-f를 갖는 반면, 국경의 저쪽 독일에서는 o-k-s(Ochs)를 기표로 갖습니다. - 138

사실상 어느 한 사회에 수용된 전체 표현 수단은 원칙적으로 집단적 습관, 다시 말해서 규약(또는 관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예컨대 어떠한 자연스런 표현을 흔히 갖춘 예절 기호(머리가 땅에 닿도록 무릎을 꿇으며 황제에게 아홉 번 큰절을 하는 중국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도 역시 규칙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예절 기호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이 규칙이지 예절 기호에 내재하는 가치는 아닙니다. - 139

언어 기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기표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학자들은 상징(symbol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상징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즉, 그것은 내용이 비어 있지 않고, 기표와 기의 사이에 맺어진 자연적 관계의 흔적이 있습니다. 정의正義의 상징인 저울을 아무 것으로, 예컨대 마차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140

자의적이라는 단어도 또한 주의를 요합니다. 이 단어는 기표가 화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면 안 됩니다(뒤에 가서, 한 언어 집단 내에 일단 확립된 기호를 바꿀 수 있는 힘이 개인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표가 무연적(無緣的,immotivé)이라는 것, 즉 기의에 대해 자의적이라는 것, 현실에서 기의와는 아무런 자연적 연관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 140

기표는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과 관련해서 자유로이 선택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와 관련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입니다. 사회 집단의 견해는 참조되지 않으며, 따라서 언어에 의해 선택된 기표는 다른 기표로 대체될 수 없을 것입니다. - 145

개인이 혹시 원한다고 해도 이미 선택된 기호는 어떤 식으로든지 변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중 집단도 한 단어에조차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중 집단은 현존하는 언어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 145

언어하의 진정하고도 유일한 연구 대상은 이미 형성된 개별어의 정상적이고 정규적인 생태(生態) 자체입니다. - 146, 147

언어를 체계를 이룹니다. 뒤에 가서 살펴보겠지만, 언어가 이러한 측면에서 완전히 자의적이 아니라 상대적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이는 또한 대중 집단이 언어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능력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언어 체계는 복잡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 149, 150

언어는 각 개인이 언제나 참여하며, 이러한 이유로 모든 사람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이 주요한 사실은 언어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 150

기호의 불변성과 가변성 - 152

기호의 변질 요인이 무엇이건, 이들이 개별적으로 작용하건 결합해서 작용하건 이 요인은 언제나 기의와 기표의 관계를 전이하기에 이릅니다. - 153

인공 언어가 자기 사명을 수행하면서 만인의 소유가 되는 순간 통제력은 빠져나갑니다. 에스페란토는 이 부류에 속하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공하더라도 이 숙명적인 변질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에스페란토는 최초의 시기가 지나면 거의 틀림없이 자신의 기호학적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언어는 깊은 숙고를 거쳐 고안된 창조 때의 법칙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법칙에 의해 전승될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과거 상태로 다시 회귀할 수 없을 것입니다. - 156

이제부터 언어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것은 시간과 사회적 요인이 언어에 영향력을 행사해 효과를 발휘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언어에서 자유를 박탈하는 언어 지송성의 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언어 지속성에는 필연적으로 변질, 즉 다소 많은 관계의 이전이 내포됩니다. - 160

모든 과학은 이들이 다루는 대상이 위치하는 축을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적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분야에서 다음 그림처럼 두 축을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즉 1. 동시성의 축(AB). 이것은 공존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련하며, 따라서 시간 개입이 완전히 배제됩니다. 그리고 2. 계기성의 축(CD). 이 축에서는 한 번에 단 한 가지 사실만을 고찰하지만, 앞의 AB축의 모든 사실들이 그 변화 요소와 함께 위치합니다. - 162, 163

언어를 어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시키는 현상을 별도로 고찰해야만 합니다. 진화évolution와 진화언어학linguistique évolutive이라는 용어가 좀 더 정확하므로 이들을 자주 사용할 것입니다. 언어 상태état의 과학 또는 정태언어학linguistique statique이라는 용어를 앞의 용어와 대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일한 대상을 다루지만 서로 다른 두 질서에 속하는 현상의 대립과 교차를 좀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는 공시언어학linguistique synchronique과 통시언어학linguistique diachronique이란 표현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언어 과학의 정태 국면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공시적인 것이고, 진화와 관련되는 모든 것은 통시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시태synchronie와 통시태diachronic는 각각 언어의 어느 한 상태와 진화의 어느 한 국면을 지칭할 것입니다. - 165

언어 사실을 연구할 때 가장 놀라운 것은 시간상에 위치한 언어 사실의 연속성이 화자에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화자는 언어의 어느 한 상태에 위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언어 상태를 이해하려는 언어학자는 이 언어 상태를 산출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통시태를 무시해야 합니다, 언어학자는 과거를 제거해야만 화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166

여기서 아주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또 다른 실례가 있습니다. 고대 고지 독일어에서 gast(손님)의 복수는 gasti였고, hant(손)의 복수는 hanti였습니다. 그 후 -irk 모음 변이를 일으켜 그 결과 앞 음절에서 a가 e로 변화했습니다. gasti→gesti, hanti→henti. 그다음에는 -irk 음색을 상실해서 gesti→geste가 되었지요. 그 결과, 오늘날 [단수] Gast:[복수]Gäste, Hand:Hände가 되었으며, 한 부류의 단어들 전체의 단수와 복수에 이와 똑같은 차이가 생겨났습니다. - 170

언어는 체계로서 이 체계의 모든 부분은 공시적 연대 내에서 고찰될 수 있고, 또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어 변화는 결코 언어 체계의 전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체계의 요소들 중 어느 한 요소에서 일어나므로 이 체계 밖에서만 연구될 수 있습니다. 분명 개개의 언어 변질은 언어 체계에 반향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최초로 변화된 언어 사실은 단지 한 점(點)에만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이 최초의 언어 사실은, 여기에서 발생되어 전체에 미치는 결과와는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습니다. 계기 사항과 공존 사항 사이의 차이, 부분적 사실과 체계와 연관된 사실 사이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서 이 두 종류의 언어 사실을 단일 과학의 소재로 삼을 수 없습니다. - 177

공시와 통시의 자율성과 상호의존성 - 178

또한 마찬가지로 식물의 줄기를 가로로 자르면, 그 단면에 나타나는 조금 복잡한 모양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는 세로로 난 섬유의 투영도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횡단면에 대해 종단면을 만들어 보면, 수직으로 배열된 섬유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이 두 전망 가운데 한 전망은 다른 전망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즉 수직 종단면은 식물을 형성하는 섬유 자체를 보여 주며, 수평 횡단면은 특정 평면상에 나타나는 섬유의 구성 조직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와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후자의 횡단 조직은 수직의 종단면에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섬유들 사이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 178, 179


a) 체스의 각 수는 단지 말 하나만 이동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언어에서도 변화는 단지 고립된 개별 요소에만 일어납니다.
b) 그렇지만 체스의 각 수는 체계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체스 놀이꾼은 체계 전체에 미친 영향이 초래하는 결과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로 생겨나는 가치 변화는 경우에 따라 전혀 없을 수도 있고, 매우 심각할 수도 있고, 그 중간 정도로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수는 체스 놀이 전체를 뒤집어 놓아서 그 순간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어도 이와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c) 말의 이동은 선행 균형 상태와 후행 균형 상태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별개 현상입니다. 말이 이동함으로써 일어난 변화는 이 두 상태의 어느 상태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오로지 현재 상태만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발화 집단의 대중에게는 공시적 국면이 진정하고도 유일한 실체...만약 언어학자가 통시적 전망에 위치하면, 그가 지각하는 것은 이미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변경시키는 일련의 사건 - 183

공시태에서 법칙을 말할 때 그것은 배열이나 규칙의 원리라는 의미 - 189

이와 반대로 통시태는 역동적 요인을 가정하며, 이 요인에 의해 결과가 생겨나고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강제성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아서, 언어 법칙이라는 개념을 언어 진화 현상에 적용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언어 사실들 전체가 동일 법칙을 따를 때만 법칙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몇몇 상반되는 겉모습도 있지만 통시적 사건은 항상 우연적임, 특수한 성질을 지닙니다. - 189

프랑스어 dépit가 과거에 ‘경멸’을 의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가 오늘날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원과 공시적 가치는 별개의 두 사상입니다. - 195

왜냐하면 모든 언어 혁신의 역사에서 항상 별개의 두 순간을 보기 때문입니다. 즉 1. 언어 혁신이 개인들에게 나타나는 순간과 2. 이 언어 혁신이 외견상 동일하지만 집단이 채택해 언어의 사실이 되는 순간 - 200, 201

공시언어학은 동일 집단 의식이 인지하는 바대로 공존하면서 체계를 이루는 언어 사항들을 연결하는 논리적이고 심리적인 관계를 다룰 것입니다.
통시언어학은 이와 반대로 동일 집단 의식이 인지하지 못하며, 따라서 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서로 대치되는 계기적 언어 사항들을 연결하는 관계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