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에 성균관과 향교와 같은 관학의 기능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배타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선초 성균관의 시대적 기능은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려 구귀족의 온상인 좌주문생제를 혁파하고 새로운 학제와 과거제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이 때 성균관은 불교와 사학에 바탕을 둔 구귀족세력과의 투쟁과정에서 신진유학자들의 주자학 연구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선초의 성균관은 신흥지주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다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소수 국가지배집단의 이해를 관철하는데 더욱 중점을 두었다. 공신, 훈신 자제들에게 각종 과거교육 특전이 부여됨으로써 성균관은 그들의 입신출세 도구로 이용되었다. 또한 선초의 성균관 시설 정비가 학사관리보다는 文廟制, 泮宮制 정비에 치중되었던 것은, 그 설립의 주요 이유가 국가 이데올로기의 절대화와 신성화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문묘의 배향은 성리학적 도통연원에 충실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국가권력이 공증해 주는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물화 현상의 한 전형을 드러내는 것이다.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가운데
지배기구로써의 성균관
이기의 <송와잡설>에 이르기를 “조선 초기에 함경도는 야인(野人)과 접해 있었으므로 크고 작은 수령이 모두 무관으로 뽑혀가는 것이 관례였으며, 게다가 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꺼릴 것이 없이 오로지 형벌을 혹독히 내리고 세금을 가혹하게 받아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 간혹 문관을 보내지만 수령으로서 물망에 오르는 자 또한 매우 드물었으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낮도적이라 일렀다. 어떤 함경도 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는데, 성균관 앞길에 이르러 동행에게 ‘이곳은 어떤 관청인가?’하고 물었더니, 그 동행이 ‘이곳은 조정에서 낮도둑들을 모아 기르는 모판(못자리)이다’라고 대답했다.
- 정약용, <목민심서> 가운데
성균관에서 공부랍시고 하고 나서 관료가 되면 인민들 수탈하기가 바쁘니 도둑들 기르는 모판이라 해도 모자랄 것이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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