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불교의 농민 수탈과 투쟁

순돌이 아빠^.^ 2013. 5. 19. 08:17

이러한 사원들은 어느 것이나 토지와 노비를 국가 또는 개인으로부터 기진(寄進)을 받아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로도 이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점도 양반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원의 고리대는 신라 이래 공공연한 것이었고, 특히 국가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었을 때의 ‘겸병’은 그 어떤 양반에게도 못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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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사원은 자기의 농장을 주로 자기의 노비나 토지 없는 양인을 예속시켜 경작케 하였다. 그러나 봉건중앙집권이 문란되고 약화되었던 특히 14세기 이후와 같은 시기에는 국가의 ‘공민’인 양인들을 소위 ‘억량’하여 자기의 노비로 만들고 그들의 토지를 탈취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겸경행위를 대농장주인 양반들에 못지 않게 감행하였다. 또한 양반 내부의 토지와 노비를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원들끼리도 싸움질은 더욱 격심하여졌다.

사원들끼리 싸움질한다는 것은 고려 태조의 [훈요] 제1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각 교파는 교파끼리 교파들 안에서는 대소의 사원들 사이의 알력과 분쟁은 결코 양반들 내부보다 못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고급승려는 왕실과 아주 친근한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정권쟁탈전에도 비상한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중의 우두머리는 왕사王師․국사(國師)로 책봉을 받아 ‘속권俗權’인 왕권의 비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속사俗事’인 정사政事에도 간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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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원들은 그 농장 내에서 직접 농민에게 대립하는 지주였을뿐만 아니라, 또한 노비와 기타 농민을 착취하는 자들 위에 걸터앉아서 또한 간접적으로도 농민에게 대립하여 그들을 착취하는 자로도 되었다. 이 시기의 사원들은 국가의 ‘공전’ ‘공민’을 겸병하여 자기의 ‘사전’ ‘사민’으로 함으로써 국가 중앙집권의 물질적 기초를 허울었을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주들의 위에 군림하는 국가가 차지하는 몫까지 가로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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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사원들이 특히 지방사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있었던 사실 여부에 대하여도 [고려사]와 기타의 문헌들은 비교적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12세기 후반기 이후 농민들이 영웅적으로 착취자를 반대하여 나섰던 시기에, 또 농민들이 그 습격목표의 하나를 사원에 두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사원의 무장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12세기에 고려의 불교사원은 이의방도 항거하였으며, 최충헌도 무력으로 도전하지 아니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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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교사원은 이와같이 그 자체가 양반과 다름없이, 봉건지주이며 대농자주로서 중앙집권이 약화되었던 시기에는 봉건영주와 같은 성격까지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원들은 동시에 또한 노예소유자적 성격도 양반들에 못지 않게 갖추고 있었다. 조선조 태종 5년(1405) 사원에 대한 정리, 재산에 대한 몰수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을 시기에 국가에서는 ‘중 백명 있는 곳에는 20명, 50명이 있는 곳에는 10명, 10명 이하 있는 곳에는 2명씩’ ‘역사노자役使奴子’를 배정하였다. 이 ‘역사노자’는 중들의 밥짓기, 불때기, 심부름 등에 ‘역사’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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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의 역사노자(고려시대에는 役使婢子도 있었음) 이들을 생산적 노예로도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이들의 상전인 사원은 노예주이며 통례로 양반의 집 살림보다 절간은 훨씬 대규모한 것이었던 만큼 그의 노예주로서의 형편도 양반들보다 오히려 훨씬 컸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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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원은 조선조시대에도 봉건국가로부터 소유토지에 대한 면세뿐만 아니라 다른 특권들도 받는 봉건지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근농민에 대한 그악한 고리대금업자였던 점은 신라․고려 이래의 변함없는 전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심청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소박한 농민에 대한 비열한 ‘기진’의 강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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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원은...세속적 역할도 적지 아니하였다...산성을 수호하였다는 사실로써 사원이 외적을 방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곧 바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외적보다도 주로 ‘내적’을 ‘막’는 데 그 사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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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봉건시대의 사회적 형편과 절간이 자리잡은 고장을 연관시켜 고찰하여 보자. 유명한 산간과 ‘산성’이 자리잡은 고장은 바로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하는 ‘내적’의 소굴이기도 하였던 것을 반드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봉건시대에 있어서 억압과 착취를 반대하는 우리 인민들, 특히 농민들의 방항의 첫걸음은 유리流離였고 유리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게 산 속으로 들어갔으며 소위 ‘화적火賊’으로 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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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군진압이라는 경찰적 역할을 항시적으로 수행한 것이 바로 심산유곡의 불교사원들이었다. 임꺽정의 부대가 구월산에서 ‘관군’과 싸울 때에 이 산의 사찰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 것인가 하는 것은 예증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짐작할 만하다.

- 김석형,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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