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에 정승 정언신이 조정에서 곤장을 맞고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그의 아들 정율이 단식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 때는 연루가 파급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집안사람들이 장사지내는 것조차 감히 예에 따라 하지 못하였다.
백사 이항복이 당시에 문사랑으로 있었는데, 그의 원통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을 덮을 적에 몰래 만시晩時 한 수를 지어 관속에 넣었다. 집안사람들도 그것을 몰랐다. 그의 아들이 장성하여 천장遷葬을 할 때 관을 열어보니, 3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만시를 쓴 종이와 글씨가 그대로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입이 있어도 감히 말을 못하고,
눈물이 있어도 감히 울지 못하네.
베개를 어루만져도 남이 볼까 두렵고,
소리를 못 내고 몰래 눈물만 삼키네.
그 누가 통쾌한 칼을 휘둘러,
굽이굽이 맺힌 한을 통렬히 잘라줄까?
이 말을 듣는 자치고, 코끝이 시큰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
기축옥사에 관해 이성무의 <조선왕조사>를 보면...
갑신년 이후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벼슬자리에 서지 못한 울분에 쌓여 있던 서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기화로 다시 한 번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시 서인의 실세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이 사건의 조사관이 되면서부터 역옥은 더욱 가혹하게 다스려졌다. 그는 역모와 직접적 관련이 없어도 정여립과의 친분 관계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많은 동인의 유력 인사들을 연루시켜 처벌했다. 이발과 이길 형제, 백유야,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김빙 등이 그렇게 처벌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거의 억지에 가까웠다.
김빙은 정려비의 시체를 찢을 때 바람이 차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닦다가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죽었다. 또 <배절의론>을 지은 정개청은 주자가 논한 것을 읽고 동한 시대의
절의의 폐를 밝혔을 뿐인데도 그것이 군주에 대한 절의를 경시한 것으로 몰려 죽었다.
...
사실의 진위도 살펴보지 않고 앞질러 탄핵부터 했던 옥사는 한번 지목당하면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고 감히 그 원통함을 밝힐 수가
없었다. 결국 서인은 정여립의 모역을 기화로 정계에서 동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철은 평소 사감이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했다. 이 사건으로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축옥사는 그야말로 또
하나의 사화였다.
무슨 일을 했거나 아니거나 공격하는 쪽에서 죄목을 걸면 아무나 걸려서 죽임 당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마음대로 장례를 지낼 수 없었지요. 그만큼 권력이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이항복이 죽음을 슬퍼하며 시를 썼는데, 혹시나 누가 볼까봐 몰래 관 속에 넣었나 봅니다.바람이 차서 눈물이 나온 것도 슬퍼하는 것이라고 몰려 죽였다지요.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정말 슬퍼했다고 해도, 슬퍼했다는 게 죽을 죄가 되다니요.
얼마나 권력이 무서웠으면 '입이 있어도 감히 말을 못하고, 눈물이 있어도 감히 울지 못하네.'라고 했겠습니까.
권력이라는 것이 있는 사회도 있고, 권력이라는 것이 없는 사회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친구들 계모임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국가야 마음 내키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감옥에 넣기도 할 수 있지만, 계모임 회장이 계원들을 죽이거나 두들겨 팰 수는 없겠지요. 국가는 국민에게 세금내라고 명령을 할 수 있지만, 계모임 회장이 친구들에 회비 내라고 명령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저 권유할 뿐이지요.
권력의 크기도 저마다 달라서 한국의 자본가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밉다고 해고할 수는 있지만 그를 죽일 수는 없는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요. 반면에 조선의 왕들처럼 사람 하나 죽이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정도의 권력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권력 있는 사회를 권력 없는 사회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당장에 권력 없는 사회로 바꿀 수 없다면
있는 권력의 양을 줄여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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