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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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의로운 사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죄인에게 다가선다는 뜻이다. 예수가 건강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병자에게 다가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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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결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아니다...그저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먹고 마셨다.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고 아픔을 나누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겐 아주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설교하려 덤비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선 듣자.
용산역 근처 이른바 집창촌 골목에서 벌어진 일화다. 어느 성직자가 전단을 들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회개하시오”하고 외쳤다. 화난 여성들이 그의 멱살을 붙잡고 대들었다.
“지금 누가 먼저 회개해야 하느냐? 내 몸 팔아 남자들 욕망을 달래주는 우리냐, 신도 돈을 잘도 뜯어내는 너희 성직자냐?”
매매춘 여성 몇 분이 세례받고 싶어 어느 성당 교리반에 처음 참석한 적이 있다. 사목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 성당 분위기를 버리게 생겼으니, 제발 조용히 나가주시고 다신 오지 마세요”
하느님 앞에 누가 진짜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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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겉보기에 그리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바리사이보다 더 기도하지도, 요한보다 더 단식하지도, 부자들처럼 십일조를 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종교적으로 그리 경건하게 보이지 않는 평범한 신자였다. 그러나 신앙은 겉모양보다 본심이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본심을 가늠할 수 있다. 교회에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이른바 발바닥 신자와 손이 발이 되도록 밤낮 열심히 비는 손바닥 신자가 많다. 그분들이 자기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새벽기도 오가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배달하는 사람은 엘리베이터 사용금지라는 공고문이 나붙었다는 어느 아파트가 떠오른다.
주의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소서”라는 구절은 특히 일용직 날품팔이를 위한 기도다. 오늘 먹을 식량조차 자신할 수 없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위한 위로의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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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과 먹고 마신 예수는 유대교 정결 예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종교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 유대교 규칙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유대 권력자들이 예수를 적대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종교 규칙을 비판하는 것이 되고 결국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종교 비판은 단순히 종교 내부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력 비판과 연관되는 복잡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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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이적에서 예수는 백성의 굶주림 문제를 우선 고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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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가 빵 이적 이야기를 두 번이나 독립 단락에서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난한 사람의 굶주림 문제를 강조하고 가난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를 꾸짖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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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된 일인지 설교에서 가난이란 주제는 교회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어쩌다 가난을 언급할 때면 그 영성적 가치를 강조할 뿐 가난한 사람이라는 주제를 외면하고 만다. 가난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제외하는 기막힌 언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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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이사야] 29, 13)
제자들이 가진 빵 몇 개조차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예수는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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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먹을 것이 없었다’가 자본주의 주제라면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주제다.
- 김근수, <슬픈 예수> 가운데
최근 서울 은마아파트 각 동 입구마다 '배달사원의 승강기 이용을 금지한다'는 경고문이 나붙었다. 배달원들은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
배달"해야 하며 "개선되지 않을 시 이에 상응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승강기 고장과 전력 낭비, 입주민들이
승강기 사용에 불편을 겪기 때문에 제한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승강기 유지비와 전기료가 아까워서라는데, 배달원들이 아파트에 놀러가기라도 하는가. 주민들을 위해서 배달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당신이 코고는 사이에 신문이 문 앞에 놓일 수 있고, 당신이 눈꼽도 떼지 않는 채 그 맛있는 음식을 거실에서 받아먹을 수 있단 말인가. 승강기 고장이 우려되고 전기료 낭비가 가슴 아프다면 정말 '놀러가는 사람'인 방문객부터 사용을 금해야 옳다. 은마아파트측의 항변은 이렇다. "배달원들이 엘리베이터를 쓰기 때문에 새벽에 교회에 가거나 출근하는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것이다. '불편'을 호소했다는 걸로 보아, 그 14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승강기를 짜증스레 기다리기보다 걸어 내려갔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배달원들에게 승강기를 타지 말라고 한다. 무거운 음식 박스와 신문더미를 든 채 아파트를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은마아파트 49층 재개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더 기가 막힌 건 "새벽에 교회에 가는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이야기였다. 새벽기도에 참석할 만큼 신실한 교인들은 교회에 앉아 무슨 기도를 하고 무슨 은혜를 받았을까. 예수라면 엘리베이터를 배달원에게 내 주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셨을 것이다. "네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공감의 원칙은 예수가 말씀하신 이 황금률에도 들어 있다. 예수는 물론, 침팬지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침팬지는 공감의 능력을 발휘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은마아파트만이 아니다. 다른 아파트에서도 비슷한 경고문이 발견된 적이 있으며, 여러 지역의 입주민들이 승강기에 탄 배달원들에게 눈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오마이뉴스, '침팬지도 비웃을 '은마아파트 경고문' 가운데 http://bit.ly/Pcv5L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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