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후이·쑤원, <전원시와 광시곡-농민학에서 본 중국의 역사와 현실사회 비판>, 이산, 2000
서론 : 농민, 농민학과 농민사회의 현대와
중국의 종법시대에 나온 ‘사(私)’ 개념과 영어 private의 함의 사이에는 항상 간과되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private는 라틴어 privatim에서 파생 되었고 이 어근의 의미는 독특한, 별도의, 개체, 개성 등이며 그 바뀐 뜻은 독립적인, 비(非)관변의, 비권세적인, 민간의, 평민적인 등등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 종법문화 속의 ‘私’는 사욕을 강조하고 서양 고전문화의 privatim은 개체와 권리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가령 ‘사법’(私法)이라는 개념은 중국인이 듣기에는 종종 사법설정, 또는 제멋대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따위를 연상시키지만, 서양에서는 사법이 민법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이여, 통치-복종관계를 배제한 평등한 권리주체간의 관계규범을 가리킨다. - 37
1장 여산의 진면목 : 봉건사회란 무엇인가
‘농’은 주로 직업개념이다. ‘農’자의 아랫부분 ‘辰’은 옛날에 조개껍질로 만든 농기구를 가리켰고 ‘농’자의 뜻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윗부분 ‘曲’은 옛날에 ‘奴’라 발음했고 임을 나타내는 부분이다...曲에는 奴의 뜻...도 있었다. 그리하여 ‘농’은 신분이 낮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민’은 주로 신분개념이다...비천한 하인을 가리켰다.
...
이런 신분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농민’을 포함한 ‘4民’은 애초에 아마도 네 개의 카스트였을 것이다. “농민의 자식은 영원히 농민”(農之子恒爲農)이라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절대다수의 ‘민’은 농업에 종사했고, 따라서 ‘민’은 많은 경우 직업개념도 지니게 되었는데, 가령 “농사짓는 자는 민이다”(農者民)라고 한 경우가 그렇다. ‘농’과 ‘민’의 뜻이 서로 가까워진 것이다. 그래서 옛 글자에 관한 책인 [육서략]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民字는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힘써 (무엇인가를) 만드는 형상을 닮았다.”
...
[한서] <류상전>은 ‘민이 어리석으니 어떻게 타일러서 근면하게 할 것인가“라고 한 대목
...
그들은 ‘밭’에서 ‘바쁘게’ “머리를 숙여 힘써 일하”니 상등인에 의해 “어리석고 무지하며” “어리석고 무식한” 천한 자로 간주된 것이다. - 42~43
farm은 프랑스 고어 ferme에서 유래되었고 이 용어가 원래 ‘소작하다’(租佃)는 뜻이었다(이에 상응하는 farmereh fermier, 곧 소작인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토지소작과 농업의 관계는 서양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그 유래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peasant란 용어는 신분등급의 뜻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어서 보통 lord(주인, 이 용어도 옛날에 주로 신분을 나타냈고 토지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다만 근래에 와서 사람들이 lord 앞에 land를 덧붙여 landlord, 곧 지주라는 단어를 만들었다)와 대응하여 쓰인다. 역사상 peasant는 프랑스어 paysant의 영어화된 표기이고 paysant은 라틴어 pagus에서 파생되었다. pagus는 “이교도, 미개인 타락한 자”를 뜻하므로 심한 폄하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어 paysant 역시 비천한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호칭이다.
...
영어의 peasant는 18세기에 명사로 쓰일 경우 “한 마리의 가축과 한 명의 무식쟁이”를 의미했고, 동사로 쓰일 경우(이 용법은 근대에 이미 없어졌다) “예속되어 노예가 되다”를 의미했다. 그 밖에 적지 않은 유럽어 중의 ‘농민’도 일종의 직업을 뜻하기보다는 낮고 천한 신분과 출신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가령 초기 러시아어의 ‘농민’은 ‘구린내를 풍기다’는 뜻의 동사 ‘스메르드’에서 변형되어 형성되었고, 폴란드어의 ‘농민’(cham)은 원래 신화 속에서 귀족과 뿌리가 다른 야만인을 가리켰으며, ‘상스러운 사람과 잡종’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
농민의 개념은 그 주요한 의미 면에서 볼 때 공업, 상업, 목축, 어업과 병렬되는 일종의 직업도 아니고 업주業主, 고용주 또는 수매상收買商과 대칭되는 순수한 경제행위의 또 다른 한쪽(소작인, 피고용인, 또는 재화의 공급자)도 아니며 대농장 따위와 대칭되는 일종의 경영형식(가족경영 따위)도 아니다. 농민은 우선 일종의 비천한 사회적 지위이며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밑바닥 신분이어서 설사 어느 한 농민이 경영형식을 바꾸고 경제행위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바꾸거나 직업을 아예 바꿨더라도 그가 여전히 이같은 밑바닥 신분을 바꾸지 못했으면 그는 여전히 peasant인 것이며, 사회가 그를 향해 “어이, 넌 시골뜨기야!”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 45~46
봉건사회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주가 토지를 점유하고 소작방식(노역 소작방식 포함)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사회가 곧 봉건사회라고 생각한다.
...
사실 영주제를 시행한 서양에서 봉건주조차도 토지지배권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기 매우 어렵고(그렇지 않다면 인클로저 운동이 필요없었을 것이다)...그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권리는 주로 노동자의 인신에 대한 지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고 해야 옳다. - 49
종법사회에서 우리는 집단무의식 지배하의 ‘민주’, 비이성적 ‘자유’, 종법식 ‘평등’, 인성의 외피를 걸친 중세적 인정人情, 박애의 깃발을 내건 온정주의적 종법유대, 인신예속 위에서 강조되는 기율, 정전제井田制식 ‘사회주의’, 눈에 핏발을 세우고 서로를 원망하는 ‘계급투쟁’, 분서갱유식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등을 볼 수 있다. - 51
2장 관중 농민사회 분석
당시의 관중은 대량의 토지·재산을 가진 권귀들의 천하였고, 소농에게 남겨진 공간은 얼마 안 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그 당시 관중에 소작제가 매우 발달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관중의 이들 장원의 주인은 모두 서민지주가 아니라 권세와 지위를 가진 자 권귀權貴였으며 그들은 재산으로써가 아니라 권세로써 사람을 부렸기 때문에 계약적 성격의 소작제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당시의 관중 농민은 대부분 소작농佃農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농노였던 것이다. 그들은 속박을 받는 동시에 ‘보호’도 받았다. 창안長安의 권귀들은 세상의 모든 재산을 빼앗다시피 했으니, 자연히 자신의 예속민에게 주인의 정을 조금 베풀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관중 농민은 다른 지역 농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었다. 당唐 말 황차오가 창안을 점령한 후 관중 농민은 이 ‘계급적 형제’에게 호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인 쪽에 서서 주인을 지키는 군대가 됨으로써 농민군을 인적·물적으로 고립시킨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전국을 유랑하던 황차오의 대군은 마침내 식량을 구하지 못해 붕괴되었다. - 71, 72
톄루 구는 관중의 대부분 지구와 마찬가지로 대토지소유제가 발달하지 않았다...1930~1940년대 이곳은 톄루 왕 한궈장 통치하에 완전히 중세적 암흑 속에 놓여 있었다.
한궈장은 톄루 구 셰한 촌 사람인데 원래는 땅이 7무밖에 안되는 빈농이었다. 1935년부터 그는 토비土匪와 결탁하여 점차 토호가 되었다.
...
족권·정권·재권財權이 일체화된 피비린내나는 10년 통치를 자행...그들은 포대와 사설 감옥을 만들고 단(경비단, 보안단 등)이나 토비의 무력을 빌려 강간, 협박, 사기, 약탈, 박해, 아편판매 등 안하는 짓이 없었다.
...
그들은 대토지 사유자가 되는 데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권세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에서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
그들은 ‘공가公家’의 신분으로 현지의 토지세 징수와 모든 지방재정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고 5패7웅 따위의 앞잡이를 통해 인민에게 양곡과 돈을 할당시키고, 사기와 협박을 자행하고, ‘선물’과 무상노역을 강요했다. 그 밖에 공금을 착복하고 무장한 채 아편을 판매하며, 보잘 것 없는 몇십 무의 사유토지에서는 도저히 뽑아 낼 수 없는 거액의 재부를 수탈했다.
...
그는 포대가 설치된 구중궁궐에 거주하면서 음란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권세와 위풍이 이와 같은데 그가 어찌 노심초사하는 일개 경영지주에 만족할 수 있는가?
...
옛 관중에서 톄루와 같은 상황은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시푸에서 퉁同·화華에 이르기까지 전체 관중은 토지개혁 때 모두 토지분배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 반면 악질토호 반대투쟁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농민은 토지분배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분배할 토지가 얼마 안되었기 때문이다) 악질토호에 대해서는 뼈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
악질토호는 주로 재산소유 관계를 기초로 한 계급개념이 아니고 인신예속관계, 곧 통치-복종 관계를 기초로 한 등급개념이다.
...
악질토호는 ‘흑도’ 권세자(실제로 흑·백 결합이 대부분이다)인데 ‘백도’에 상응하는 권세자는 권세 있고 요직을 차지한 관리와 향장·보장이며, 그 밖에 내놀만한 이름은 없지만 권세 있는 자나 무력을 가진 자를 등에 없고 향리鄕里를 제멋대로 주무르는 본바닥 건달...도 있는데 모두가 관중 농민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기는 마찬가지이다. 펑샹 현의 조사는 국민당과 향보인권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가 가장 심해 농민에 대한 지주의 경제적 착취를 능가했으며 “국민당과 향보인원에 대한 대중의 원한은 지주계급에 대한 대중의 원한을 능가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펑샹 현 천춘 구 농민이 고통을 호소한 진정서 63건의 원인별 분포는 정치적 억압(권세를 등에 업고 행한 능욕, 구타와 욕설, 강점 등)이 36건, 향보인원의 억압과 수탈이 23건인데 비해 지주의 경제적 착취는 단 4건이었다. 치산 현 저우위안 구 농민이 진정한 213건의 고통사례 원인은 국민당의 착취가 121건, 고리대의 착취가 45건, 지주·부농의 정치적 억압이 9건이었으나 지주의 경제적 수탈은 38건에 불과했다.
...
여기에 관중 봉건관계 유형의 주요 특징이 분명히 언급되었다. 곧 유산자(생산수단을 가진 자, 주로 토지를 가진 자)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은 모호하고, 유권자(신분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가진 자)와 무권자의 대립이 돌출되어 있다. 지주와 소작농의 충돌은 거의 없으며 고용주와 고농의 충돌도 격렬하지 않지만 관(세력가)과 평민의 충돌은 아주 격렬하다. 생산수단의 소유제(특히 토지소유제)에 기초한 계급분화는 모호하고 인신예속관계(통치-복종관계)에 기초한 등급분화는 선명하다. - 82~85
관중에서 흑도의 권세나 백도의 권세를 갖지 않고서는 지주가 절대 될 수 없다. 민국시대 관중지역 부세는 본래보다 더욱 무겁게 부과되었는데 각종 부세는 “모두 토지 무수를 기준으로 징수되었다.”
...
이와 같은 조건 아래서 지주가 되려면 권세에 의지해 마땅히 부담해야 할 부세를 회피하고 그것을 권세 없는 평민에게 전가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작료가 지세와 똑같아서 순소작료율이 0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관중의 지주는 거의가 지방의 권세 있는 인물이었다. 현 이상의 관료·군·경·특수·민간수령, 구·향·진·보의 두목, 토지세와 각종 세무 및 병역업무 담당직원, 토비수령·악질토호·족장, 일관도 등 종교비밀결사의 수령 등이 바로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중 절대 다수는 먼저 권세를 얻고 나서 나중에 토지를 장만했으며 극소수만이 먼저 지주가 된 후에 권세를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일 권세없는 일개 평민이 지주가 될 경우 설령 중세(重稅)의 압력에 의해 쓰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5패7웅의 유린대상이 될 게 뻔하므로 자신의 재산을 오래 유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
나는 허양·웨이난 2개 현 토지개혁과정에서 남겨진 ‘지주 성분 단행자료’ 당안에 근거하여 통계를 냈는데 허양 현이 남긴 자료의 197호 지주 중 124호는 군정관리(軍政官吏) 및 향·보 등 기층의 권세인물이고 38호는 상업·아편판매·고리대금업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21호는 토비·토호·비밀종교 결사의 수령·공당(公堂)과 묘산 등 공동재산의 관리장니 반면 ‘농업에 종사해서’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자, 곧 고공·소작농을 착취하여 저축하고 산업을 일으킨 자는 단지 9호뿐이었다. - 88, 89
관중에서 지주는 대부분 반드시 권세를 가진 자이지만 권세자가 반드시 지주가 될 필요는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본래 사법(私法)관계에서 권리(소유권을 포함하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독립된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명확한 사법관계와 사유재산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통치-복종 관계를 벗어난 진정한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 90
3장 관중 모델의 사회역사적 기원과 종법농민 연구에서의 이성의 재건
국가-사실상 최상위의 종법공동체
4장 속박과 보호의 협주곡 : 봉건관계의 세 요소
봉건 자연경제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노동력과 생산물의 사회적 유동이 거의 없거나 적은 것이라기보다는 상품유통이 없거나 적은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이런 경제는 자급자족 경제가 아니라 부자유 경제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수용할 수 있는 노동력과 생산물의 유동량을 상당히 크겠지만, 시장경로를 거치지 않아서 자유로운 인간의 등가교환방식으로 진행될 수 없으며, 단지 인신예속의 기초 위에서 경제외적 강제방식에 의해 진행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에 인간의 개성이 고도로 발달하지 못하여 인간은 자연의 개체로서 다만 ‘협애한 인간군집의 부속물’ 형식으로서만 존재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
고대 이집트의 경제는 전형적인 국유 명령경제이며, 엄밀하게 마래 이집트의 소농은 겨코 자급자족적이지도 대외독립적이지도 못했다. 이와 반대로 국가가 경제외적 강제의 의해 생산과 분배과정을 조직하여 노동력과 생산물을 대규모로 조달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는 화폐와 상인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거대한 건축과 수리(水利)사업 그리고 발달된 사회분업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
이런 류의 경제에는 자유로운 개성은 없고 인신예속만 있으며, 자유인 연합체는 없고 종법공동체만 있으며, 진정한 계획 메커니즘은 없고 ‘천연수장’의 명령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142, 143
인간의 개체성 역시 자연인의 종법관계라는 탯줄을 잘라 내지 못하면 형성될 수 없다. 인신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복종관계도 이런 종법연계의 기초 위에서 복제되어 나온다. 따라서 이때의 인간은 개체로서가 아니라 ‘협애한 인간군집의 부속물’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중세적 연합’, 곧 개성의 부정을 특징으로 하는 종법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는 집단표상 또는 집단무의식이 개인을 지배하고, 정치적으로는 공법(公法)관계가 사법(私法)관계를, 권력이 권리를 간섭하며, 경제적으로는 가지각색의 공동체가 사유재산을 속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 146
봉건법률은 ‘천연수장’의 사욕을 옹호하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바로 사법적 의미에서 사유권을 부정하고 공법적 의미에서, 곧 통치-복종 관계의 기초 위에서 재산을 처리함으로써 실현된 것이다. 봉건법률은 재산관계의 존재 자체를 절대 허락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초 위에서 재산관계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는 법칙의 지배를 받아 천연수장의 사욕을 만족시키도록 했다.
...
물질의 유대가 아닌 인신의 유대로 유지되는 봉건공동체에는 사실상 등급권력으로서의 가부장·종주권(宗主權)·통치권 등 특권만이 존재할 뿐이고 개인 권리로서의 소유권은 없다. 여기서 모든 민간영역은 정치적 성격을 띠거나 모두 정치영역이다. - 148
구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에 따라 1970년대 이래 일군의 소련학자들은 스탈린의 봉건사회관이 토지소유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폐단을 지적하고 ‘경제외적 강제사회’ 개념을 제기했다. 그들은 봉건사회의 기초는 스탈린의 견해를 뒤집어 봉건사회의 기초는 대토지소유제가 아니라 바로 경제외적 강제라도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봉건사회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원칙이지 경제원칙이 아니다. 봉건주는 정치적으로 통치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강권을 사용해 농민을 자기에게 예속시키고 착취할 수 있는 것이다. - 154
봉건사회 속의 개인이 공동체에 예속되는 이유는 한편으로 경제외적 강제를 비롯한 공동체의 속박 때문이다. 가령 러시아 농민은 분여지를 방기할 수 없고 촌공동체에서 탈퇴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경작활동도 촌공동체의 통일적 안배를 위반해서는 안되었다. 중국의 균전농민도 토지를 이탈해 자유로이 이사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천연수장’의 보호를 포함한 공동체의 보호 때문이다. 종법공동체의 부권(父權)의 일면을 제외하면 궁극적으로 온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비록 각 등급간에 이렇다 할 평등이 없었지만(이것은 바로 종법관계를 옹호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각 등급 내부의 계급분화에 대해서 오히려 엄격한 억제작용을 했다. 종법공동체는 촌공동체 민주주의를 종법전제(宗法專制)와 결합시키고, 촌공동체 평균을 종법착취와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농민에게 경쟁·분화·위험, 동요로부터 보호해 주고 안전·평안·자앨에 대한 믿음 따위를 가져다 주었다. 종법공동체의 기능이 탐욕스런 사유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지만 않는다면 농민은 모두 일정 정도의 보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실제로 러시아 농촌공동체와 중국 균전제하의 농민은 분여지를 받을 수 있었다.
...
유럽 중세 초기의 농노제는 로마법의 자유계약 원칙 아래서 자유인이 ‘자원’하여 보호를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19세기 전반 라인 지역에서 농노제가 폐지(동시에 촌공동체도 폐지)될 때 수많은 지역의 농민들이 다투어 청원하여 계속 예속상태에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와서 그들을 보호해 주겠는가? 러시아 농민은 스톨리핀 개혁을 반대하며 촌공동체제도의 회복을 요구했다. 중국에서 인신예속관계가 가장 공고했던 위진 남북조시대에는 부곡(部曲), 전객(佃客)이 주인에 반대하거나 종주(宗主)가 감독·보호하는 대가족 공동체에 반대하는 대규모 투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주·대족(大族) 수령이 그 예속자를 이끌고 이런 예속을 제한하려 하는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일련의 봉기가 발생했다. - 156, 158
그들을 토지에 속박시킨 것은 바로 자연경제 자체이다. 광범위한 교류와 매스컴, 물질과 에너지의 사회적 교환 등이 없는 관계로 인간의 사회성이 발달하지 못한 채 지방의 농민은 사실상 토지의 부속물일 수밖에 없다. 노동력 시장이 없고, 장사할 여지도 조건도 수완도 없으며, 경쟁에 뛰어들 물질적·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농민이 토지를 떠나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 159, 160
종법농민이 추구하는 가치로서 봉건주의의 좋은 면과 그들이 반대하는 봉건주의의 나쁜 면은 정확하게 상호 인과관계를 이루며 조화·통일되어 있다. 그들이 보호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속박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떤 외부의 보호에도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
그들은 속박과 보호를 동시에 박차고 나오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자유도 획득할 수 없다. - 161
우리는 착취를 “사회의 일부 사람이나 집단이 그들의 생산수단에 대한 독점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일부 사람이나 집단의 잉여노동, 심지어 일부 필요노동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생산수단 소유권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의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을 착취한다”고 말한다. - 166
어떤 경우에도 “봉건제도는 다수의 사람이 일부 극소수 권세자에게 가혹하게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등급을 종법공동체 속에서 불평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군(群)으로 정의한다. 그 중의 일부 사람은 권세에 의지하여 다른 일부 사람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그 노동력과 생산물을 무상으로 점유할 수 있다. 분명히 계급은 재산관계, 주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에 근거하여 구분하는 것이고 등급은 인신예속관계와 권리의 불평등에 근거하여 구분하는 것이어서 양자는 각각 두 가지 사회유형에서의 이익집단의 조합방식을 대표한다. 등급에서 계급으로 가는 과정은 바로 봉건사회가 근대사회로 대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봉건사회의 가장 심각한 불평등은 권리의 불평등이며 재산의 불평등은 주로 그로 인해 파생된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질의 연계가 아니라 인신의 연계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관계를 기초로 한 분배는 “개인 사이의 통치와 복종관계(자연발생적 또는 정치성을 띤)를 기초로 한 분배와 서로 대립한다.
...
만일 자본주의가 자본에 따라 분배되고 사회주의가 노동에 따라 분배된다고 한다면, 봉건주의는 바로 권세에 따라 분배되고 신분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다.
...
종세 공동체의 등급 점유관계하에서 봉건주(영주)의 토지는 충성을 조건으로 상급 영주로부터 수봉(受封)된 것이며 그는 똑같은 조건으로 그것을 자신의 ‘봉신’-농민(농노)에게 넘겨 주었다.
- 167
중국의 상황은 서유럽과 다르지만 봉건 잉여생산물은 마찬가지로 인신조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당말 이전 농민이 국가에 부담해야 할 각종 의무, 예컨대 조용조(租庸調), 호조(戶調) 등은 기본적으로 “정신(丁身)을 기준으로 한 것” 다시 말하면 국가가 통치권을 사용해 농민의 인신복종 속에서 착취해 낸 것이다. 그러나 농민이 개별 봉건주에게 부담하는 의무도 결코 전자가 후자의 사유토지를 경작한다는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서진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300년 동안 중국은 항상 전란으로 형성된 유민풍조流民風潮에 휩싸여 있었는데 봉건주는 그들의 방대한 예속민 무리...를 이끌고 일족 전체가 이주했으나 인신예속관계와 이에 상응하는 봉건의무는 그들이 원래의 토지를 상실했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으며 일단 새로운 지방에 도착하면 곧바로 “종주宗主의 감독과 보호 아래” “방어용 성벽을 쌓고, 울타리용 나무를 심고, 감자가 행한 일의 공적을 평가하며, 자丈尺의 길이를 헤아리고,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균등하게 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통하게 했다.”
...
중국의 봉건 토지 재산은 결코 진정한 재산이 아니라 등급권력의 물화物化일 뿐이며 이른바 ‘지조’도 재산에서 얻는 수익이 아니고 잉여생산물이 권세에 따라 분배되는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 169, 170
6장 자유봉건주의론에 대한 질의 : 중국 봉건사회의 특질문제
지주계급의 개인사유제가 지배적 지위를 점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봉건국가는 오히려 세계 봉건역사상 개인재산을 부정하는 가장 명확한 법률규정을 갖고 있다. 이른바 부모가 생존해 있으면 그 자녀는 “감히 그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는 유가도덕 규범이 조위曹魏시기 “예를 법에 포함시키는” 법률개혁에서 정식으로 법전에 수록되었으며 그 후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 있는데 자손이 별도의 자기 재산을 따로 등기하면 3년의 징역형에 처한”는 류의 조문이 대대로 전승되는 법률규범으로 되었다.
...
이로써 봉건시대 중국은 단지 가족의 재산만 승인할 뿐 개인의 재산은 승인하지 않았으며 소유권은 단지 가장권의 부속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정의 상위에 있는 족권族權의 재산에 대한 간섭도 매우 강해서, 백실百室이 호를 합쳐 1천 명의 인정(人丁)이 함께 등기하고 여러 세대가 한 집에 거주하며 함께 밥을 지어 같이 먹는 대가족공동체 및 사창(社倉), 족전(族田) 등 종족재산 외에 개체 가정의 재산에 대해서도 갖가지 간섭을 했다. 가령 토지 매매에서의 친족·이웃 우선권, 유산은 종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원칙, 나아가 상속·분가·겸조(兼祧)는 “반드시 족 전체의 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따위가 그러한 예이다.
...
중국 봉건사회는 가-국 일체의 종법공동체이며 ‘국’은 ‘가’의 확장이고 ‘충’은 ‘효’의 연장이고 ‘군(君)’은 ‘부(父)’의 확대이다. 군권-족권-부권의 동일형태 구조가 전국을 하나의 방대한 종법공동체로 만들었다. 황제는 가부장의 신분으로 한전, 왕전, 점전, 균전, 둔전, 공전 등의 방식을 통해 나아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재산관계에 간섭했다. 당말 이전에 전국의 토지는 이론상 모두 점전제, 균전제하의 국가가 수여한 분여지였다.
...
명대 상품경제가 가장 발달한 타이후 유역 농촌의 경우 주위원장의 “각 호족(豪族)과 부민(富民)의 토지를 관용으로 등기한다”는 정책이 시행된 이후 쑤저우 부는 거의 전체가 관전화되어 민전은 1/15에 불과했다. 국가권력은 토지 외에 호구, 도시상공업, 광업, 외국무역에 대해서도 아주 엄하게 통제 - 197~199
명말 허난의 일부 지역에서는 1무 토지의 지조가 3전인데 관세官稅는 5전이고 그 위에 관료·아전·서리의 손을 거치면서 탐오(貪汚)가 덧붙여져서 무려 1량 이상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를 받은 자가 토지와 적이 되고”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이 토지소유를 화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권세 없는 평민의 입장에서 보면 토지의 가치는 0에 가깝거나 심지어 마이너스 가치밖에 없어서 “땅값은 무당 1~2전에 불과할 만큼 싸고 남에게 주어도 받지 않는 자가 절반 이상이나 될 정도로 가치가 없었으니” “땅을 남에게 넘겨 주고 싶어도 줄 방법이 없을” 지경이었다. - 200
봉건시대의 부자유 또는 인신예속의 핵심적인 본질은 한 집단의 다른 집단에 대한 강제가 아니라 개인이 공동체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전통사회관계 속의 인신예속-전농이 지주에게 예속되는 것은 단지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은 대단히 강고한 종법공동체라는 독특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
전자본주의 시대의 어떤 공동체도 모두 인간의 사회성이 발달하지 못한 ‘자연인’간의 천연적 유대의 사회유지 작용을 특징으로 한다. 서양인이 당시 사람들간의 관계의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는, 우리가 ‘종법’이라고 번역하는 patriarchal...은 아버지의, 부권적, 가부장제적, 족장적이란 뜻이다. 이 개념과 서양 전통에서 일컬어지는 주교, 귀족, 종주(宗主), 은주(恩 主), 사부(師傅), 보호제, 보호인 등의 개념은 모두 라틴어 pater에서 파생된 것이며 원칙상 모두 자연인 혈연공동체의 부권-온정 유대가 문명시대에 이르러 소외된 형식이다. - 210~211
가족·종족제도는 비록 성쇠의 변화와 형식의 변화를 보였지만 종래 소멸되지 않았으며 가국일체, 예법합일禮法合一, 공사불분公私不分, 부권지상父權至上의 체제는 봉건화 이후에 날이 갈수록 완벽해졌다. “토지에는 관과 민의 구분이 있다”는 관념은 “하늘 아래 왕토가 아닌 것이 없다”거나 “토지는 왕이 소유하는 것이고 경작은 농민이 하는 일이다”는 관념과 오랫동안 병존했다. - 214
이런 공동체 속에서는 자연인의 종법유대와 고립인의 협애한 의식이 매우 강고하며 인간의 사회화와 개체화가 특별히 곤란하다. 따라서 인간의 예속관계도 매우 강력하다. - 215
실제로 경제외적 강제에 대해 말하면 지주-전호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관찰해 볼 때 가혹함의 정도는 서유럽이나 동유럽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이른바 ‘겸병억제’란 사실상 바로 종법공동체가 경제외적 강제방식으로 민간이 분화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역대 통치자의 호구에 대한 통제는 이처럼 가혹했고 인민의 이주, 직업선택, 분가, 경영활동, 풍속습관 등 모든 것이 엄하게 속박당했으며 호구가 없는 사람은 중국에서 줄곧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역대 ‘백성의 보모’들의 괄호, 호적검사, 토단, 입산금지, 바다출입금지, 광산채굴금지, 유민퇴치, 대대적인 용모검열, 일제검문에 의한 용의자 색출, 대군점호 등은 그들 자신을 위해 아주 넓고 큰 그물을 설치한 것이다. 명대 주위안장의 대군점호는 반원反元전쟁에 종사한 방대한 무력을 호적경찰로 충당하여 호구검사를 단행한 것인데 호구가 서로 부합하면 ‘좋은 백성’으로 삼고 부합하지 않으면 잡아다가 군대를 만들어 군둔구軍屯區로 보내 군사관리의 지배를 받는 농노로 충당했다. 명대 군, 민, 조, 장 등 네 종류의 호적은 사실상 카스트화된 것이며 유럽 농노제보다 훨씬 경직된 인민속박이었다.
...
중국에서는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자유로운 구석이 없었다...‘백도’상의 인민예속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흑도’상의 인신예속을 빠져 들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215, 216
7장 농민이의 세 번과 농민의 방데
봉건사회에서의 농민의 위치
중국 봉건시대의 농민전쟁은 미시적으로 볼 때, 천지를 뒤흔들고 귀신을 울리는 장면을 수없이 연출했으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이것은 오히려 상당 부분 가족과 국가가 일체화된 종법공동체의 일종의 자기조절 매커니즘에 지나지 않는다. 농민전쟁이 발생한 것은 종법공동체의 구조가 붕괴했기 때문이 아니라 종법공동체의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탐욕스런 사유자가 종법공동체를 파괴하고 계급분화가 등급의 보루를 와해시켰다기보다 국가가 보호기능을 상실한 데 있었다. 따라서 농민은 민간의 보호자에게 의지하여 그를 받들어 종법국가를 재건함으로써 공동체 기능을 회복할 수밖에 없다. - 228
봉건사회의 역사는 사유제가 농민전쟁으로 타격을 받아 나날이 쇠락하는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사유제가 끊임없이 종법공동체의 속박 및 천연수장의 경제외적 권력의 간섭과 싸워 이겨서 날로 흥성하는 역사 - 236
봉건적인 종법농민은 분명히 심각한 보수성과 낙후성의 일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
종법농민이 보수적인 이유는 그들이 사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종법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순수한 자유로운 사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연수장의 속박을 포함한 공동체의 속박을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측면, 곧 사유성의 측면을 갖고 있는 한편 여전히 공동체의 보호와 천연수장의 보호를 얻고자 하는 측면, 곧 종법성의 측면을 갖고 있다.
...
유감스럽게도 종법농민이 가장 공손히 예배 드린 대상은 대개...종족의 조상, 좋은 황제나 그의 대리자인 청렴결백한 관리였고, 위대한 구세주였고, 종법공동체의 신비로운 권위와 천연수장의 매력이었으며, 농촌공동체의 전통 관습과 미르 정신이었다.
...
그들이 미발달된 개성은 그들로 하여금 천성적으로 외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성격을 갖게 했다.
...
농민은 사유자이자 노동자로서 자유로운 개성을 발전시키고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재산사유자 또는 자유로운 노동력 판매자가 되려는 요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종법공동체의 성원으로서 그들은 의존성과 반민주성도 갖고 있다. “노역(奴役)을 달게 받아들이는 현상은 중세 내내 발생했고...프로이센은 1806년과 180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종속관계를 폐지하는 동시에 자비로운 영주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노쇠한 예속농민을 돌보는 의무도 없애 버렸다. 당시 농민은 국왕에게 그들이 계속해서 노역을 제공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불행을 당했을 때 누가 그들을 돌보겠는가?” 러시아 농민도 “모든 토지를 차르에게 귀속시킬지언정 지주에게 귀속시켜서는 안된다”는 농촌공동체 관념 속에서, 곧 종법적 시각에서 서양민주주의를 멸시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구성된 서양의 정부는 오직 부자만 당선되어 빈자에 대한 부자의 통치를 조성하기 때문에 옳지 않으며, 오히려 차르 한 사람이 공동체의 대표로서 빈자와 부자 위에 높이 올라앉아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240~244
종속농민...그들은 항상 구체적인 주인에 대해서는 증오를 보이나 종법관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쁜 황제, 나쁜 관리, 나쁜 주인에 대해서는 바낻하지만 좋은 황제, 좋은 관리, 좋은 주인에 대해서는 옹호한다.
...
청말의 상군(湘軍)은 구질서를 옹호하는 반동세력지만, 쩡꿔판은은 상군을 만들 때 도리어 특별히 그런 종법 의존관계를 가진 “손발이 닳도록 일하는” “아주 궁벽한 곳의 가난한 백성”을 모집해야지, 먹고 살 만한 집안의 자식을 뽑아서는 안되며 시정市井의 무리는 더욱 안된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종속농민의 종법 보수성을 이용하는 측면에서 쩡궈판은 분명히 노련했다. 그가 보기에 가난하면서 독립된 개성을 결여하고 있는 농민은 부유하지만 분수를 지키지 않는 농민에 비하여 훨씬 부리기가 쉬웠다. - 247, 248
8장 다루기 힘든 계급과 그 심리 : 종법농민 문화의 사회통합
정확하게 말하면 다루기 힘든 것은 결코 농민이 아니라 농민사회의 모종의 심리상태이다. 종법식의의 전통심리, 정신적 자질과 사유, 행위습관 따위를 종법농민문화라 한다면 농민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정말로 다루기 힘든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 256
중국인 도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실용을 중시하며 중국은 어진 사람을 중시하나 서양은 능력 있는 사람을 중시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떠한가?
...
유사 이래 중국의 권력자 가운데 품행이 문제가 되어 타도된 사람이 있는가?
...
비교해 보면, 중국인 ‘위쪽上邊’ 담장의 가시나무가 추한 것에 대해 오히려 무감각했다. 전통적으로 중국 정치계가 도대체 현자의 천하인가 아니면 능력 있는 자(권술가)의 천하인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자연경제의 농업사회(중국 또는 서방의 중세를 막론하고)의 도덕은 종법공동체가 그 부속물인 사회성원을 속박-보호하는 유대이다. 공리관은 공동체의 안정에 ‘공’功이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 이와 반대로 사회화 상품경제 조건하에서의 도덕은 독립된 권리 주체 사이의 사회계약이며 공리는 이런 주체 사이의 평등한 경쟁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종법사회에서 개인 주로 공동체의 속박을 받아 “예가 아니면 보지도 못하지”만 공동체의 대표자인 대가장은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는 공동체의 화신이자 도덕의 화신이어서 그에게는 어떤 외재적 도덕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 262
합리적 정신 또는 논리적 추상정신은 인간의 자유개성이 성숙한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전히 협애한 인간군집의 부속물일 때 그의 사유는 상호침투 원칙하의 집단표상 또는 집단무의식의 부소물일 뿐이다. 그가 공동체의 천연적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개체가 되고 나아가 주체가 되어 진정으로 자신의 이지理智로서 객체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추상적인 논리구조를 혼란스럽고 비경험적인 집단표상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자유개성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결국 생산과 사회교류의 발전으로 형성된 풍부한 사회적 연계의 산물 - 264
봉건문화는 본질상 일종의 종법공동체 문화이며 그 핵심은 이른바 공동체 심리이다.
...
구체적인 개인에 대해 말하면 이런 심리는 공동체가 자신을 보호하여 자연인인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켜 주기를 희망한다. 따라서 “집에서는 부모에 의존하고 밖에서는 친구에 의존하며” 사회에서 각종 복잡한 인간관계망에 의존하여 자신이 공동체 내에서 안전한 위치를 확정하는 것을 좌표로 삼는다. 전체 사회에 대해 말하면 이런 심리는 공동체가 모든 개인의 주체적 정신을 속박하여 그것이 종법식의 고정된 틀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게 해줄 것을 촉구한다. 이런 문화에 대해서 말하면 인간의 개체화와 사회와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모든 것은 무가치하거나 가치에 어긋나는 것일 뿐이다. - 268
농민은 억압과 착취에 저항할 때 종종 공동체의 보호에 본능적으로 의지하여 공동체의 전통으로 착취자의 탐욕을 속박하려고 하며, 봉건주도 억압과 착취를 할 때 공동체에 의존하여 농민을 속박해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전통으로 자신의 천연수장의 지위를 보호하려고 시도한다.
...
왜 프랑스 대혁명 중에 왕당파와 방데 농민은 일치하여 종법공동체의 입장에 서서 ‘탐욕스런 사유자’-부르주아 계급-를 반대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종법 농민문화는 본질적으로 지주문화와 마찬가지로 봉건문화, 곧 자연경제와 종법 공동체의 가치-기능체계를 대표하고 상품경제 및 자유개성과 대립되는 문화에 속한다는 점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 269
중세 신학목적론 문화가 유행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힘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도 아니고 로마 교황의 밀라노 칙령과 니케아 종교회의도 아니며, 고대사회가 몰락한 후에 사람들이(실제로는 농민들이) 자유를 혐오하고 ‘보호를 찾는 심리’였다. 유가가 중국 봉건시대에 백가와 싸워 이겨서, 고대에 유행한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도가와 강자(强者)로 장자(長者)를 대신하는 법가를 누르고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온정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종법농민의 심리에 더 잘 부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70
중국 농민은 농장주의 신분으로 봉건속박을 깨뜨리고 상품경제의 발전을 요구한 것이 결코 아니라 “궁하니까 변화를 꾀하고”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아 반기를 든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자본주의 속에 녹아 들어가는 과정에서 파시즘적인 현상을 낳을 수 있으며, 사회주의 속에 녹아 들어가는 과정에서 ‘스탈린 현상’과 ‘마오쩌뚱 현상’을 낳고, 이슬람교의 보수파가 이끄는 반현대화운동에 섞여 들어가 ‘호메이니 현상’을 낳게 된다. - 272
중국의 많은 시민은 농민보다 개성이 없고 더 의존적인 인격을 지녔으며, ‘조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농민은 언제 씨 뿌리고 언제 수확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지만 중국의 도시는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서’가 없으면 거의 움직일 수 없다. - 273
종법공동체에서 보호는 속박과 대립·통일되어 있어서 보호자는 동시에 속박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법농민은 스스로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고, 높은 곳에 앉아 공동체에 비와 햇빛을 내려주는 천연수장이 그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 279
9장 구체적 농민과 추상적 농민의 이중적 가치체계
자본주의 초기에 탐욕스런 사유자가 비자본주의적 수단(흑인노예, 해적행위, 식민정복, 폭력적인 토지 점거, 유혈입법 등)을 이용하여 자본주의 원시축적을 진행할 때 보인 야만스럽고 자인한 행태들 때문에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종법시대의 화목을 그리워하고 농민의 도덕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보편적으로 갖게 되었으며, 가치관에 있어서 극단적인 사욕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특징이지 자연의 개체인 종법농민은 집단이익을 개인이익보다 우선시한다고 생각했다.
...
전 미국 경제학회 회장 J. 슘페터는 1940년대에 “전자본주의 시대의 탐욕은 사실상 자본주의 시대의 사람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농노 또는 기사와 영주 모두가 완전히 야성적인 정력으로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유지했다”고 지적했다.
...
식견이 짧고 편협한 농민의 이기심은 바로 자연경제의 종법공동체가 폐쇄·고립적이고 사회적 연계가 부족해 인간의 사회성을 성숙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인으로서의 동물적 개인주의 본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
사람의 의존관계를 보호·유지하기 위하여 추상적인 농민 공동체가 만들어낸 사욕 억제 가치관은 자연의 개체인 구체적 농민이 눈앞의 사소한 이익만을 중시하는 사욕중시 가치관과 함께 종법농민사회 가치취향의 이중성을 만들었다.
...
구체적 농민은 ‘사욕 중시’ 가치관에서 출발하여 가능하면 종법공동체의 보호를 많이 받길 바라지만, 자신의 사욕이 종법공동체의 속박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 283~285
종법농민이 귀족·황제 등 기존 천연수장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반기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나서서 종법농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그들의 추대를 받아 그들을 지도하여 기존 천연수장의 통치를 파괴하고 농민공동체의 이익에 위협이 되는 탐욕스런 사유자를 제거해 버린다. 이런 사람이 우리가 말하는 농민 영수이다.
...
농민 영수일수록 농민을 더 가혹하게 속박하는 농민 영수의 반농민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
극빈농가 출신으로 농민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 정권을 탈취한 주위안장은 농민 본연의 모습을 적잖게 간직한 황제였다.
...
온갖 방법으로 “부자를 억압하고” 심지어 토지는 “각기 정남(丁男) 수에 따라 경작하며”...“만일 겸병의 무리가 토지를 많이 점유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 빈민에게 소작시키면 그를 벌한다”고 선언했다.
...
강자를 제거하고 약자를 돕고, 빈자를 돕고 부자를 억압하는 이런 황제는 농민을 가장 가혹하게 속박하는 극단적인 전제 폭군이었다. 그는 대군점호·이갑제 등을 이용하여 농민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전례 없는 많은 수의 농민을 강제로 둔전체계에 편입시켜 역사상 가장 방대한 국가 군사농노제를 만들었다...그는 관리를 처형한 것 못지않게 엄한 법으로 말을 듣지 않는 백성을 죽였다.
...
사실상 황제를 칭하기 전이든 뒤든 주위안장(그 밖의 종법농민 운동 중의 인물도 마찬가지다)은 농민 영수와 봉건수장이란 두 가지 임무를 한 몸에 맡고 있었고, ‘파괴’라는 점에서 농민 영수였지만 ‘건설’이란 점에서 그는 천연수장이었다. - 287, 289
농민 영수가 농민을 배반한 가장 극단적인 예로 장셴중 장수충(張獻忠)의 쓰촨(四川) 살육보다 더한 것은 없다. 명대 300만 인구가 살고 있던 쓰촨은 청초에 안정된 후 뜻밖에도 1만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했던 지역이 천리 황야로 변하여 도시는 초목으로 뒤덮이고 범과 표범이 사람보다 많았다.
...
쓰촨 성 광한에는 현재까지 이와 같은 장셴중의 성유聖諭비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 비문에는 “하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건만 사람은 하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구나. 귀신은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하여 헤아려라”라고 되어 있다.
...
스스로 ‘하늘’에 머물고 있던 장셴중의 ‘사람’에 대한 원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장셴중이 ‘사람’을 적으로 삼는 살육정책 실행의 심리상태를 표현했다.
‘하늘’(天)이란 무엇인가? 그 신비주의 색채를 벗겨 내면 하늘은 중국 종법 농민 집단의 추상적 가치추구의 체현자이다.
...
“하늘에 응하고 사람을 따라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다스린다”, “하늘에 응하고 사람을 따라 세상의 임금이 되어 다스린다” 등등은 모두가 그 합법성이 민의와 인심에 순응한 데서 나왔고 인민을 대표하여 정치를 행한다는 것은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 ‘받들어진’ ‘인민’이란 분리될 수 없는 추상적인 전체이며, 개개의 구체적인 ‘인’ 또는 ‘민’은 모두 이 추상적 전체에 부속되어 그것의 보호를 받고 속박도 받으므로 인민의 구체적인 가치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추상적 ‘인민’이 부여한 권한을 획득한 ‘나’는 개개의 구체적인 ‘인’과 ‘민’에 대해 생살여탈권을 갖게 된다고 한다.
...
장셴중은 바로 “내가 하늘의 진리를 행하고” “만물을 사람에게 베푸는” 지도자였다. 그는 1644년에 “하늘을 대신해서 도를 행하여 천하를 맑게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쓰촨에 진군하여 그곳의 ‘신사, 부호, 대상인’을 일소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탐욕스런 사유자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했으나 동시에 심한 군사적인 속박을 가했다.
...
“보갑을 엄밀히 하고 문의 출입통제를 엄격히 했으며”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고 술도 마실 수 없고 해가 지면 곧바로 “문을 닫고 자야지 초롱불을 매달 수 없었으며” 사사로이 금은을 감출 수 없고 개를 기를 수 없었따.
....
하늘이 사람을 보호하면, 사람은 마땅히 모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그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극도로 강한 보호는 극도로 강한 속박을 수반한다.
...
장셴중이 보기에 자신은 위대한 구세주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하고 사람에게 보호를 내리는데 오히려 사람은 은혜를 잊고 배반하여 자신의 속박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 이것이 “하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건만 사람은 하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장셴중은 “쓰촨 인민은 천명을 알지 못하여 하늘로부터 버림받았고” “지금 나를 천자로 보내 이런 백성을 소멸하게 함으로써 하늘을 거역한 죄를 징벌하도록 했다”고 결론을 내려 사태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갔다. - 290~294
추상적 농민의 가치는 복종을 기초로 하며, 천연수장에 복종하든 공의에 복종하든 개인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개인의 이성이 집단표상 속에 속박되는 상황에서 총의에 대한 복종은 실제로는 집단무의식에 대한 복종이며 ‘여태껏 그래 왔다’는 전통에 대한 복종이고 무의식집단에 가치추구를 부여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다. 따라서 종법농민 공동체에서 총의의 통치는 천연수장의 통치와 모순되지 않는다.
...
러시아 종법농민 전통의 ‘농촌공동체 민주’는 바로 이런 민주의 전형적인 예이다.
...
촌공동체 안에는 지고무상의 수령이 없고, 상설기관·직원·의장·회계도 없으며 단지 선거로 구성된 임기가 아주 짧은(몇 개월) 대표가 있어 촌회의 소집 책임을 맡았을 뿐이다...촌공동체의 토지재분배, 토지구획, 농사일정, 목동...의 고용에서부터 우물, 도로 보수, 세금과 성당의 유지 비용의 분담, 노약자와 병자 및 장애인을 위한 공동 부조 등 일체 사무는 매월 2~3차례 소집되는 회의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했다.
...
언뜻 보기에 이런 공동체는 더없이 총의에 부합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총의를 구성하는 각 개인은 종법식의 폐쇄된 조건하에서 독립인격이 없고, 농촌 공동체를 자유로이 탈퇴하여 분산거주할 수 없으며, 경작방식과 농사일정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더구나 총의로 결정되기만 하면 촌공동체는 특정 구성원에 대해 분여지의 몰수에서 구금과 체형까지 가할 수 있다. 여기서 총의는 의지의 주체를 초월하여 그들의 지배자로 소외되어 개인을 총의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독립된 가치를 상실케 함으로써 공동체 내에 진정한 개인 의지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의존자로서 독립의지를 상실한 민이 어떻게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런 상황 하에서 ‘촌공동체 민주’는 카리스마적인 영수가 자신의 매력을 이용하여 무의식집단을 조종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대다수 농민의 분산과 권리 관념의 결여로 말미암아 전통의 촌회의는 이름만 촌민대회일 뿐 실제로는 종법식 대가정의 가장이 참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대개 힘있는 몇몇 장로일 뿐이었다.
...
이런 종법식 민주에서는 농민이 촌공동체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촌공동체가 농민의 주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촌공동체를 대표하고 보호하는 천연수장 또는 카리스마적인 수령이 농민의 주인이다. - 297 ~ 299
인간이 여전히 공동체의 부속물일 뿐 주체의식을 가진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면 이른바 총의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의 의지로서 인간을 더 소외시키고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더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총의를 기반으로 생겨난 무제한적인 권력은 다수의 이름으로서 멋대로 소수의 인권과 인격을 박탈하는 동시에 다수를 의지가 있는 개체로서 존재할 수 없게 만들어 마침내 다수결을 허구적인 것, 천연수장에게 이용될 수 있는 군중성 히스테리로 변질시켰다. - 300
10장 인성의 위축과 인정의 팽창 : 농민문화의 윤리관 분석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일부 책에는 아주 간단하게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라고 쓰여 있다.
...
중세의 “사람을 사랑하라”는 주장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종법공동체가 각 개인을 위해 설정해 놓은 신분과 이들 신분 사이의 기존관계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관계에서 신하와 아들은 당연히 임금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며, 임금과 아버지는 신하와 아들을 자비롭게 사랑해야 하지만, 이는 “임금이 신의 죽음을 요구하면 죽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필요로 하면 죽지 않을 수 없는 것”과 일치한다.
...
중세는 인간의 자유개성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랑’을 통해... 이런 개성을 속박하고, 종법공동체의 ‘보호’유대를 이용하여 개인을 소규모 집단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려 했다. 종법시대의 인치仁治는 예치禮治, 곧 등급신분제를 그 본질로 삼는데, 이른바 ‘인자애인’의 인仁은 글자 형태상 독립된 인간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종법관계로서, 곧 속박-보호가 대립·통일된 의존관계이다. 인치의 온정과 예치...의 엄격함은 사랑과 두려움의 결합을 가져왔다.
...
‘사랑과 두려움’의 윤리가 바로 인정이다. 인정은 부자간의 장유(長幼)의 정으로부터 군신간의 정, 은혜를 베푸는 주인과 피호자간의 정, 좌주와 문생간의 정, 교주와 신도간의 정, 지도자와 추종자간의 정으로까지 확장되고 형제간의 수족(手足)의 정으로부터 고향·본가·길드·파벌·동갑나기의 정에까지 미친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인정문화의 아주 넓은 그물망에서 인성, 곧 자유개성은 정말로 천지간에 도망할 곳이 없었다. 이런 문화는 인간답지 못한(곧 개성이 없는) 인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애정을 베풀고 인정이 충만했지만, 일단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시도하면 이런 문화의 잔혹하고 무정하며 어떤 인성도 없는 일면이 곧바로 표출된다. 서양 중세의 종교재판소, 중국의 족규·종법(族規. 宗法)과 국가의 형률이 자유개성을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
중국의 봉건문화...세속적이고 인정미가 강하며 개인의 인격에 대한 간섭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는” 외진 지역일수록 시장경제의 발전 정도는 대단히 낮지만, ‘사랑과 두려움’의 통속화와 야만화는 놀라울 정도며, 결국 이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 304~308
어떤 소식에 대해 말하자면 향촌 마을은 오히려 아주 놀라울 정도의 전파가 빠르고 소식에 대한 아주 높은 개방성과 공유성을 가지고 있다.
...
개인 인격에 기초한 프라이버시에 대한 보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소식이 향촌사회에서는 종종 신속하게 전파된다. “장씨네는 이렇고, 이씨네는 저렇다” “좋은 일은 문밖에도 안 나가지만, 나쁜 일은 천리밖까지 전해진다” 따위의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파는 종종 소식의 확대나 왜곡기능을 갖고 있다. “세 사람만 우겨 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
...
현대사회에서는 한 직원이 자기와 업무상 빈번하게 왕래한 동료 여직원의 나이가 몇 살인지를 오랫동안 모를 수도 있지만 전통 향촌에서는 신혼부부가 신방에서 속삭이는 말도 하룻밤 사이에 마을 전체에 퍼질 수 있다.
...
전통향촌의 도덕질서는 상당 부분 뒤에서 쑥덕거리는 뒷공론에 의하여 유지 - 322~324
역대 통치자는 말로는 뭐라고 하든 실제로는 ‘법, 술, 세’를 ‘사유팔던四維八德’보다 훨씬 더 중시했다. 그리고 법가전통은 극단적으로 반종족적이어서 전제국가 본위로 가족 본위를 소멸시켜 군주의 최고 권력 통치가 어떤 중개도 거치지 않고 모든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려고 한다. 그것은 황제권력으로 백성의 개인 권리를 철저히 박탈하고 가족과 촌공동체 또는 영주가 권리를 보존하여 황제와 백성 사이에 떨어져 있는 자치마을이 형성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법가는 황제권 아래에서 완전히 군주의 명령을 받는 이권吏權만을 인정하고, 족권·종주권과 촌공동체권 등은 인정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공민의 개인권리를 소멸하려 할 뿐만 아니라 소공동체의 권리도 소멸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국 일체는 단지 황제 한 가족의 경우에만 진실이며, 그것은 단지 황제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가천하家天下를 의미할 뿐, 또 다른 세습계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
종족조직에 대한 전제국가의 지지는 신민의 개체권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지 족권을 확장하려고 한 것은 아니며, 종족 자치를 지지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종족문화에 대한 조정의 찬양은 시민의 개성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지 종족집단의 정체성을 배양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
명초에 “푸장의 정씨는 9세대가 동거했는데 명 태조는 항상 그것을 칭찬했다. 황후가 곁에서 지적하기를, 이런 무리가 반란을 꾀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씁니까라고 말하자 황제는 두려워서 그 가장을 불러들여 죽였다.”- 331, 332
11장 비이성 : 농민의 사유방식 분석
내가 보기에 문제의 관건은 농민이 무엇-공리인가 또는 도덕인가-을 추구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사유 매커니즘으로 그것을 인식하고 추구했는가에 있다.
...
나는 인민공사시대 광시 농촌에서 이런 현상을 목격했는데, 농민은 실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신기술에 대해 항상 시험해 보길 좋아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농민은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에서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하면 곧바로 농민은 자기는 ‘그럴 팔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재시도를 거부하며, 객관적으로 실험과정을 분석하여 논리에 합당한 실패원인을 찾아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논리와 실증의 각도에서 보면 분명히 성립될 수 없는 일에 대해 농민은 오히려 조상과 신령의 보호라는 모종의 주관적 정서를 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계속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면서 실패 원인을 ‘경건한 정성’의 부족 탓으로 돌린다. 이런 시험의 목적은 객체의 속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상당한 정도로 주체의 운명과 정성을 검증하는 데 있다. 따라서 경험을 중시하는 농민 집단에서 미신이 동시에 성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농민집단에서 주체의 개체화는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인식활동은 상당한 정도로 공동체의 정서에 기초하고 있다. 가치판단, 곧 “그래야 하는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판단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실판단, 곧 “이다, 아니다”라는 판단도 공동체의 제약을 받아야 했다. 농민의 심리과정 속의 집단적이고 감정적인 성질은 상당히 두드러져서, 협소하고 분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종법집단에서는 집단표상이 개인의 정신보다 강했으며
...
수많은 상황 아래서 집단표상과 그 상호 연관의 힘은 이처럼 커서, 감지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증거도 그것과 대항할 수 없으며 현상 사이의 아주 비정상적인 상호관련성은 흔들릴 수 없는 신념이 된다. 이런 상황 아래서는 감정과 격정의 요소는 진정한 사유가 어떤 우세도 점하지 못하게 하며, 따라서 인간의 사유 속에 적나라한 사실과 실재의 객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이런 사유에서는 객체의 속성이 집단표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표상이 객체의 속성을 결정한다.
...
집단표상은 상호침투로 추상을 배제하고 감정으로 논리를 배척하고 심상으로 개념을 배척했기 때문에, 종법농민의 사유방식은 개념에 근거하여 감지한 재료를 정리하고 논리적 순서에 따라 해석하는 능력을 결여했다. 그들은 흔히 모순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논리적 오류를 발견하고 경험을 통하여 오류를 교정하거나 거짓을 증명하여 사유를 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추동력을 상실했다. 중국 후한 말 농민들 사이에는 상서로운 물과 주문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태평도가 유행했다.
...
집단표상 또는 집단무의식도 어느 개인-일반적으로 공동체의 대표자인 천연수장-에 대한 맹목적·초논리적·초경험적인 숭배를 야기함으로써 경험이 우상파괴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유에서는 천자는 현명하다는 신앙과 도처에 이재민이 가득한 현실 사이에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고, 현실의 고난은 간사한 소인이 천자의 총명을 가린 결과로 간주되었다.
...
개인의 공동체에 대한 의존이 공동체 성원의 천연수장에 대한 의존의 전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이지理智의 집단표상에의 종속도 대중이지가 천연수장의 의지意志에 종속되는 기초이다. 후자는 종법농민 비이성의 세 번째 측면, 곧 상부에 절대 복종한다는 사유방식을 구성하는데 이때 이른바 ‘상부’는 당연히 당국만이 아니라 대형, 장자掌家, 채주, 단주와 농민 영수 등을 포괄한다. - 349, 355
신비주의 비이성은 표상 속의 임의 관련을 통하여 “모든 좋은 것은 카리스마 영수의 공이고, 모든 나쁜 것은 마귀의 화신 탓으로 돌리는” 사유양식을 형성했고, 그로 인해 권위숭배의 심리적 매커니즘을 형성했다.
...
예컨대 1476년 독일의 예언자적 선동가 한스는 성모의 이름으로 “이후 다시는 황제·제후·교황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선언하고, 자칭 성모가 보낸 사자라고 주장하며 3만여 농민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 360, 361
농민국가에서 이성의 해방은 결국 민주혁명이라는 거시적인 진행과정의 일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민주도 이성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의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분히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고, 마음 속에 내재하는 심리과정이 자신의 개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해야만 외재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그 개성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반드시 개인의 의지가 집단표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추상력과 논리분석 능력에 기초한 주체의 개체화를 전제로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집단표상이 지배하는 상황에서의 민주는 단지 군중성 히스테리의 일종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바로 전제주의와 상호 보완한다. - 370
12장 농민의 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개성이 성숙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공동체를 유지하는 ‘자상한 가장’과 ‘효자 현손’은 모두 몰락했고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
공동체의 속박-보호, 부권-온정은 둘이면서 하나가 되어 상호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를 상실하면 다른 하나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길을 통과하든지, 투쟁하는 쌍방에 대해 말하자면 최종적인 결과는 논리적으로 볼 때 모두 보호를 상실하는 동시에 속박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유를 얻게 된다. - 411~413
대중이 일체의 종법환상을 방기하도록 하여 속박을 벗어나는 동시에 보호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천연수장을 타도한 뒤에 또다시 온정이 넘실대는 종법공동체를 건설하는 난국에 빠질 것이다. - 423
결론 : 전원시에서 광시곡으로
자유인 연합체를 건설하려면 먼저 발달된 개성을 갖춘 노동자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종법공동체의 질곡을 철저히 파괴하고, 민주혁명을 철저히 완성해야만 가능하다. - 429
'지배.착취.폭력 > 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헬무트 쉬나이더 외, <노동의 역사-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산업사회까지> (0) | 2014.10.04 |
---|---|
메리크리스마스 (0) | 2014.08.30 |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Ⅴ-중화제국의 동요> (0) | 2014.05.22 |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Ⅳ-제국질서의 완성> (0) | 2014.05.20 |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Ⅲ-사대부사회와 몽고제국> (0) | 2014.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