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은 산소 공급이나 뇌의 활동에 달린 일이 아니고, 같이 목욕하고 사랑을 나눈 후 그녀를 껴안고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런 언어로 대화할 사람이 있느냐 하는 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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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 그녀는 친구나 가족이 채워주지 못하는 갈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나 노랫말에 심취했을 때는 일시적인 위안을 얻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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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대형 판유리창 밖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두 사람을 보느라 정신없었다. 키 큰 남자는 두꺼운 모직코트를 벌려서 애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고, 둘은 아늑하게 하나가 되어 거리에 휘몰아치는 매운 바람에 맞섰다. 남자가 목을 굽혀 여자의 목덜미에 키스하자, 여자는 다정하게 남자의 짧은 검은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앨리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추운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 자신을 코트 자락으로 감싸고 목덜미에 키스해주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갈망해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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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언젠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날이 오기를 갈망했다. 누구가 그녀의 작은 부분들을 제대로 봐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달에 가거나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그녀의 삶이 특별한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 누군가 “당신이.....하면 정말 좋아” 하고 말해주면 외로움이 사라지고 그녀도 같은 반응을 보이련만
-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가운데
한번은 식료품점 앞에서 진열대 위의 달걀을 하나 훔쳤다...는 가게 주인이 여자인 곳에서 훔치지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내 엄마도 틀림없이 여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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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잘 끌 수 있도록 그녀가 내 뺨을 한 대 올려 붙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곁에 쭈그리고 앉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지 했다.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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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는 벌로 나를 한 대 갈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진열대로 가더니 달걀을 하나 더 집어서 내게 주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한순간 나는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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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오전 내내 그 가게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며 서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따금 그 맘씨 좋은 주인 여자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가운데
<국화꽃향기>도 그렇고 <8월의 크리스마스>도 그렇고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뭐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오니까요
이것이 특별한 이유는 현실에서는 우리가
기다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잘 없기 때문이겠지요
현실에 잘 없는 줄 알면서도
남자거나 여자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모두들 꿈꾸는 것 또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 꿈을 스스로 인정하든
아니면 '나는 그 따위에 관심 없어'라고 부정하든 말입니다
또한 그것이 오직 정신적인 사랑이든
아니면 앨리스가 꿈꾸듯 육체적인 것도 포함되든 말입니다
리스트, <사랑의 꿈>
그런데 여기서 문제 하나는 앨리스가 겪었던 것과 같습니다
영화는 영화일뿐이라는 거지요
<국화꽃향기>처럼
어느 여성이 박해일 같은 남자를 만나기를 아무리 꿈꿔도
어느 남성이 장진영 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아무리 꿈꿔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확률은 아주 낮다는 겁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슬픈 이야기.
모든 조건을 열어 놔도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한석규 같은 설레임이 찾아오기 힘든데
나이가 적으면 나이가 적어서 안 된다
나이가 많으면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
공부해야 되니 안 된다
돈이 없으니 안 된다
결혼 했으니 안 된다
애들 키워야 되는 데 안 된다 등등
온갖 이유를 들어서 사랑을 찾지 못하게 하지요
가뜩이나 하기 힘든 사랑을 온갖 이유를 들어 하지 못하게 막는 겁니다.
그렇게 틀어 막지 않아도
우리 마음이 이미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다가가기 어렵도록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테이션 게임> 보셨어요? 주인공 앨런이 온갖 고생을 해서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면 뭐합니까? 결국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지요.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약물 투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앨런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요. 크리스토퍼입니다. 병으로 죽은 크리스토퍼를 대신해서 자신이 만든 기계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기계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크리스토퍼를 부르며 우는 장면에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신을 아껴줬고 이해해 줬고 감싸 줬고 삶의 길을 밝혀 줬던 크리스토퍼를 앨런이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단지 크리스토퍼가 남자이기 때문에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남자가 왜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됩니까?
외롭고 힘겨운 삶에서 상대가 남자거나 여자거나 서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하해 줘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나이, 직업, 돈, 가문, 명예, 종교, 결혼, 장애 등등의 온갖 조건도 모자라 성별까지 내세우고 나면 정작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남게 되나요?
그런 온갖 조건 다 고려해서 사시는 분들은 즐겁고 행복한가요? 만약 당신이 행복하다면, 당신이 행복하듯 남들도 행복하면 안 되나요?
만약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도 행복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행복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도 행복하라고 응원해 주면 안 될까요?
이런 저런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오갈 수 있고, 서로의 삶을 아껴 줄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고 오히려 용기를 주면 안 될까요?
사랑이란 걸 제대로 느껴 보지 못하고 살아 와서 사랑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아요. 하지만 사랑이 주는 벅찬 마음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으니, 남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무작정 사랑을 부정하기 보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리다보면 당신도 사랑과 행복을 찾게 될지 모르잖아요. 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있다고 하니 속는 셈치고 한 번 믿어 보면 어때요? ^^
인간이 배고플 때 밥을 찾듯이 인간이 외로울 때 사랑을 찾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게다가 인간이 사랑을 느낄 때 가질 수 있는 행복과 설레임, 용기, 활력 등은 다른 것을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거잖아요.
온갖 조건들에 맞추느라 사랑 없이 사느니
온갖 조건들에 다 못 맞춰도 사랑을 느끼며 사는 삶이 더 낫지 않을까요
'니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데 나중에 니들도 결혼하고 애 놓고 살아봐, 사랑? 쳇! 그거 다 헛소리야. 꿈 깨시지...'라구요?
밥 먹다가 체해서 죽을까 걱정 돼서 밥 먹지 말아야 할까요? 자동차 매연에 숨막혀 죽을까봐 집 밖을 나서지 말아야 할까요?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정말 그러면 살 이유가 없으니까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왜 안되는 지 생각해 보고, 좀 더 나은 길을 찾아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는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삶의 의미를 찾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돌아보면 뻔한 영화 속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사랑에 대한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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