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러 해 전에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구자범이라는 지휘자가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음악이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있을 겁니다.
2.
예전에 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김명민은 어린 시절 아빠의 폭력에 시달립니다. 그런 김명민에게 삶의 길을 열어줬던 것이 베토벤의 음악이었습니다.
아빠의 폭력에 시달리던 저에게도 그런 음악과의 만남이 있었다면 제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3.
살다보면 마음이 답답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공부가 권력과 폭력, 전쟁...뭐 그런 것들이다 보니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에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는 것이 음악입니다. 비발디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살짝 상쾌해지는 것도 같고,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어딘가에 매어 있던 마음이 잠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이리저리 상처입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하나 둘 자리를 찾고 힘을 얻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부셔져 있던 집이 마법의 힘으로 다시 예쁘게 세워지듯이 말입니다.
4.
백건우가 일주일동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주를 듣는데 문득 김정은과 트럼프가 생각나더라구요.
인생을 왜 그렇게 사나 싶었습니다. 먹을 게 없는 것도 아니고 입을 게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귀한 밥 먹고 서로를 죽이겠다고 으르렁 대는지 모르겠습니다. 핵무기나 항공모함 없어도 인간은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핵무기와 항공모함과 미사일과 전투기가 넘쳐나는 세상은 인간의 흥분과 불안도 넘쳐납니다. 귀한 밥 먹고 애를 써 가며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짓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그들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자꾸 싸우고 싶고 죽이고 싶어지는 걸까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김정은과 트럼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이 연주회에 초대하고 싶어졌습니다.
무대와 연주자를 향해서만 조명을 밝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객석에 앉는 겁니다. 그러면 서로가 북한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구분을 할 수 없겠지요. 그래도 혹시나 서로를 바라보고 으르렁댈지 모르니 눈을 감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말을 하게 되면 또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아채고 으르렁댈지 모르니 입을 다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직 음악을 향해서만 귀와 마음을 여는 겁니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음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서로를 죽이고 싶던 분노와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을지도 모릅니다. ‘저 놈들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믿었던 마음에서도 조금은 벗어날지 모릅니다.
5.
아름다운 것들이, 예술이 우리를 불안과 흥분과 분노 속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지 모릅니다. 멍하니 앉아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무기력한 마음에서 벗어나도록 용기를 줄지도 모릅니다.
이것저것 다 때려 부수고 싶던 마음이
‘세상에는 참 아름다운 게 많구나’가 될 수도 있고
이 놈 저 놈 다 죽이고 싶던 마음이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한 번 들어보고 싶어’라고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 올라서고 힘으로 두들겨 패면서 자신을 겨우 겨우 버티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즐기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빛나게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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